후쿠오카 시 지하철역 근처에서 당시의 방벽이 발견돼 복원했다고 하네요.
눈 앞에 펼쳐진 인공 절벽, 하지만 연합군은 진군해야 했습니다. 여기까지 와 놓고 돌아간다는 건 말이 안 되고, 마냥 강남군을 기다릴 수도 없었으니까요.
6월 7일부터 연합군은 300척을 간몬 해협으로 보내 혼슈에서의 원군을 차단한 후, 하카타 만의 좌우에 있는 시카노지마 등에 상륙해 어떻게든 길을 뚫어보려 했습니다. 어떤 때는 승리했고, 어떤 때는 패배했죠.
"김방경ㆍ김주정ㆍ박구ㆍ박지량ㆍ형만호 등이 일본군과 힘껏 싸워 일본 군사의 머리 3백여 급을 베었다. 일본군이 돌진하여 오니 관군이 무너져 다구가 말을 타고 달아났는데, 왕만호가 다시 측면에서 공격하여 50여 급을 베니, 일본군이 마침내 불러가고 다구는 겨우 목숨을 구하게 되었다. 이튿날 다시 싸우다가 패전하였으며,"
자료 화면은 이글루스 뉴히스토리아님의 "몽골, 바다의 왕자를 노리다" 입니다.
http://nhistoria.egloos.com/1351624
계속되는 접전, 하지만 전술 레벨에서 이기든 지든, 전략 목표인 다자이후로 가지 못 하고 있었습니다. 1차 때의 대규모 접전을 절대 피하려던 것이 일본이었습니다. 거기다 하나 더 문제가 벌어지니, 전염병이 돌았던 것입니다. 고려사에는 전염병으로 죽은 이를 3천여 명으로 적고 있습니다.
이들이 죽은 시점이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7월 내일 겁니다. 동로군이 후퇴한 시점으로 치면 일주일 만에 이렇게 많은 인원이 병사한 것이죠. 그 병이 무엇일지는 모르겠지만, 이걸 단지 핑계로 볼 수만은 없긴 합니다.
음력이라서 계절 구분이 그리 확실하진 않지만 고려사에서는 1월을 춘, 4월을 하, 7월을 추 등으로 미리 적고 있습니다. 1차 침공은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벌어진 일, 반면 2차 침공은 늦여름에서 초가을, 여전히 더울 때였고, 일본은 습기로 가득 찬 상태였습니다. 초원 출신 몽고군은 당연했을 거고 고려군이라도 제대로 버텼을 지 모를 일이죠.
동로군은 병력을 거두어 잇키 섬으로 돌아갑니다. 이 시기를 13~18일 사이로 보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만에 3천명이 다 죽었을 것 같진 않으니, 이 때 배에는 병자들이 잔뜩 있었을 것입니다. 공격도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전열을 재정비하기도 해야 했고, 기존에 잇키 섬에서 강남군과 합류해야 할 시점이 6월 보름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강남군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죠.
"성상의 분부가 강남군과 동로군이 함께 6월 보름 전에 반드시 일기도에 모이라 하였는데, 지금 남쪽 군사는 제때에 오지 않고,, 우리 군사가 먼저 와서 여러 번 큰 전투를 치렀다. 배는 상하고 양식은 다 되었으니 어찌해야 하겠느냐"
이에 김방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철수한 것도 아니었고, 10일을 더 잇키에서 머물다가 다시 얘기가 나오게 되죠. 김방경은 이 때 나섭니다.
"성상의 명을 받들어 3개 월분의 식량을 가지고 왔는데, 지금 한 달분의 식량이 아직 있으니, 남군이 오기를 기다려 힘을 합쳐 공격한다면 반드시 섬오랑캐를 섬멸할 것이다"
이것으로 동로군의 철수 논의는 끝납니다. 이것 역시 다른 건들과 합쳐서 의심해 볼만 하긴 하지만, 김방경이 말이 철수를 막은 건 아니었겠지만 그가 철수를 반대했다는 것은 맞을 듯 합니다.
6월 말에 마침내 강남군과 연락이 닿은 듯 하며, 이후 양군은 합류합니다.
... 7월 27에요. -_-;
범문호와 아타하이가 이끄는 강남군이 출항한 걸로 추측되는 때는 6월 18일, 만나야 될 그 시각에 씻고 준비하고 있었죠. 3천 5백척이라는 대선단이었기에 이들이 금방 가지도 못 했습니다.
그들이 히라도에 도착한 때는 6월 25일, 그 중 6백 척은 히라도에 상륙시켜 점령했고, 나머지 2천 9백척은 큐슈 서북쪽의 섬들에 이리저리 정박합니다. 연락이 닿았으면 이 전후에 닿았을 것인데 그 합류 시점이 7월 27일이라는 건 -_-;
이런 거대 규모 해전은 고려나 원에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중국 역사에서도 이에 비견할 만한 게 있을지 궁금하네요. 거기다 범문호는 남송인, 원과 고려의 합동 작전도 꽤나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적이었던, 10만이나 되는 남송군과의 연합 작전이 쉬울 거라고 예상하긴 힘들죠.
서로간의 지훠권 문제도 걸렸습니다. 진주성 전투 때 김시민이 자기 상관이라는 이유로 유숭인의 패잔병을 받아들이지 않았듯이, 군대에서 지휘권을 누가 쥐느냐는 정말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건 서로의 밥그릇 싸움으로 넘어가기 쉽죠. 김방경까지 참가했을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홍다구와 흔도, 아타하이와 범문호 사이의 갈등은 깊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어떻게든 해결된 게 7월 말, 양력으로 8월 말이었습니다. 원해에 머문 건 7일 동안이긴 했지만 강남군이 돌아다녔던 그 길은 바로 태풍이 북상하는 바로 그 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장마나 태풍 등에 피해를 입지 않은 게 오히려 기적일 정도였죠.
차라리 강남군이나 동로군이 따로 있을 때 태풍에 당했으면 적어도 한 쪽은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을 겁니다. 강남군이 당했으면 그래도 우리 조상인 고려군은 별 피해 없이 돌아갈 수 있었을 거고, 동로군이 당했으면 조상님들겐 좀 죄송해도 10만이나 되는 강남군은 돌아갈 수 있었겠죠.
재앙은 정말 기적적인 타이밍에, 정말 신의 의도라고 볼 수밖에 없는 때에 왔습니다.
7월 27일에 합류한 4400척의 연합군은 다카시마 근처에 집결한 후 30일에 하카타 만으로 향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 큰 바람을 만나 만군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시체가 밀물과 썰물에 밀려 항구로 들어가니, 이 때문에 항구가 막혀 밟고 다니게 되었다." - 고려사절요
"7월 30일 밤부터 乾風이 크게 불었다. 윤 7월 1일, 적선이 모두 표탕(정처없이 떠돌아다님)해서 바다에 가라앉았다." - 팔번우동기
큐슈 서북쪽에 이어진 섬들을 기반으로 밀집해 있던 연합군에게 서북풍은 직격타였습니다. 현 양력으로 계산하면 8월 22일이라고 합니다. 태풍으로 봐도 무리는 없겠죠.
다음 날, 다카시마에 있던 이들은 깨치고 흩어진 선박들과, 해안으로 밀려온 시체와 나무조각들, 그리고 살려고 섬으로 들어오는 연합군을 만나게 됩니다. 1차 때도 2차 때도 연합군이 공격했던 다카시마의 후로가쓰라(한국의 당진과 한자가 같은 船 唐津입니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중국과 주로 교역한 항구는 이런 이름을 붙이나 봅니다.)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이런 패잔병을 살려두지 않았습니다. 살아 남은 것은 오직 남송인 뿐, 나머지 몽고, 고려, 여진, 거란인들은 지쳐서 내려오는 칼을 그저 받을 따름이었죠. 首除(쿠비노키), 연합군 패잔병의 목을 친 지명입니다. 그리고 나카가와라는 곳에는 이로 인해 피로 물든 칼을 씻었던 곳이라고 합니다.
"다카시마에 도착한 이적 수천인, 이 가운데 깨어진 7, 8척의 배를 수리하여 몽고, 고려인 약간이 타고 도주했다. 이를 본 소네 가케스케의 지휘로 수백 척이 다카시마로 몰려갔다. 배가 없어 도주하지 못 한 이국인 1000여 명이 항복을 구걸했지만 모두 붙들어 나카가와 하구에서 목을 쳤다." - 팔번우동기
"도원수 범문호는 히라도 근해에서 그의 배가 침몰했는데 표류한 지 하루 밤낮에 이르렀다. 다행히 파선의 선반에 매달려 목숨을 건져 잔존했던 배를 골라 거기에 옮겨 탔고, 휘하의 사졸 10여 만인을 밑에 버리고 귀국했다." - 원사 범문호전
"범문호가 도주한 후 잔존 사졸들은 장백호를 주수(대장)으로 장총관이라 부르고, 벌목하여 배를 건조, 그것을 타고 귀환하려고 했지만 7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모두 패사하고 잔존 2~3만 명은 포로로 연행되었다. 9일에 몽골인, 고려인, 한인은 모두 살해되고 당인(남송인)은 노예가 되었다. (이후 노예가 된 3인이 겨우 도망)" - 원사 일본전
고려인 중에 살아 돌아오지 못 한 이는 7000명, 전 연합군 14만 중에 돌아온 이는 다 합쳐도 3만여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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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 무사들의 항쟁을 중심으로 한 팔번우동기에서는 동로군과의 전투에서 1000명을 죽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개인의 작은 전투들이 주로 나와 있는 걸로 봐서는 그건 오버라고 보구요. 연합군의 후퇴에 대해 아예 일본군이 잇키 섬까지 추격했다고도 하는데 이 역시 아닌 걸로 보입니다. 섬에 상륙한 남송군도 워낙 많아서 이들이 맞서 싸워 일본군의 피해도 적진 않았던 모양입니다.
고려사 김방경전에는 김방경이 중국식으로 배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고 고려식으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를 고려군 생존자와 (수부 합쳐 2만 5천이 넘는데 그 중 잃은 건 7000) 합쳐서 생각해 보면 고려군이 많이 돌아오기는 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그 바다와 그 날씨에 몽고나 남송인들보다는 익숙했을 테니까요.
이와 결부시켜 하필 이 시기에 출발한 것에 대해 고려에서 일부러 한 거라는 음모론이 있는데, 딱히 아닌 것 같아요. 자기 앞바다인 삼별초 토벌 때도 폭풍에 한 번 피해를 입었었고, 이 2차 정벌은 잘 됐으면 수월했을 것이거든요. 고려로서는 성공하든 실패하든 자기의 부담은 계속됐고, 차라리 성공하는 게 나았을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실패를 바라기는 힘들었죠. 특히 김방경으로서는 무조건 적극적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거기다 -_- 그런 음모론은 결국 수만의 고려인들을 버리려 했다는 전제 아래에서 성립되는 거구요.
VIDEO
큐슈 서북쪽에서는 침몰한 여몽연합군의 배나 그 흔적이 많이 발견된다고 합니다. 최근에 발견된 배가 또 있었죠.
자............................. 정말 말도 안 되는 우연입니다.
일본에서는 이를 가지고 열심히 피해자 코스프레를 합니다. 고려의 사정이 어땠든 이런 침략에 동참했고, 2차 때는 주도했으니 그런 말을 들어도 할 말은 없습니다. 어쩄든 침략은 나쁜 거니까요.
하지만, 그럴 거면 그 이전에 있었던 고려의 사정에 대해서도 분명히 얘기해야 될 겁니다. 우리가 임진왜란을 통해 일본을 욕 하지만, 히데요시의 야망에 원인을 두지 왜놈들이 그냥 다 미쳐서 조선인들 다 죽이려고 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안 되니까요. 그리고 그런 전후사정을 다 얘기하는 상황에서 당시 고려를 단지 침략자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본질적으로 다 똑같다, 이런 말만큼 무책임한 말은 찾기 힘들 겁니다. 사람 수십수백명을 잔혹하게 연쇄살인한 것과 실수로 한 명을 때렸다가 죽이게 된 거는 분명히 다르거든요. 이게 통하는 건 "모두가 싸움을 멈추고 평화롭게 살아야 된다"는 것을 모두에게 똑같이 요구하는 평화주의자나 "어차피 사람은 다 죽어"라고 하는 허무주의자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똑같아 보이는 일이라도, 그 면면을 봐야 된다는 것이죠.
분명 지금 한국의 민족주의나 교과서 등에서는 한국은 당하기만 했다는 피해주의적인 인식이 짙게 깔려 있긴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으로 한국도 일본처럼 남 침략하는 건 마찬가지였다느니, 일본도 한국처럼 피해자였다느니 하는 인식은 곤란하죠. 일본이 벌인 건 한국이 한 것보다 훨씬 컸고, 훨씬 길었으며, 더 가까운 과거입니다. 자기가 저지른 2차 세계대전에 대한 피해자인 척 하는 것도 그대로구요. 전 솔직히 원자폭탄 건도 그렇게 불쌍하게만 보지 못 하겠습니다. 원폭 투하가 없었을 경우 일본의 계획(당시 일본 인구 7천만, 헌데 그들은 1억 총옥쇄를 외쳤습니다. 나머지 3000만은 어디일까요? 당시 식민지 조선 인구가 2000만쯤 됐죠)과 미국의 계획을 보면 핵이 없었을 경우 얼마나 더 많은 한국인들이 당했을지 모르겠거든요. 거기다 지금 한국인 피해자, 그것도 원폭에 희생된 한국인 피해자들에 대한 그들의 대우는요?
본질적으로 똑같다 해도 남을 공격했다고 다 똑같은 게 아니고, 본질적으로 똑같이 침략 당했다 해도 다 똑같은 게 아니죠.
이렇게 절묘한 시점에 엄청난 피해를 준 신의 바람, 한일이라는 감정을 빼고 보면 이는 침략자는 망한다는 권선징악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써도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후에 일본은 자기들의 침략 전쟁에 이 단어를 이용합니다. 아이러니죠. 그리고 양 쪽 다 별로 궁금해 하진 않는데, 이 정도의 태풍에 큐슈 등 일본 본토의 피해에 대해서는 얘기가 없죠. 나라를 지키긴 했지만 이에 대한 피해도 정말 컸을 텐데 말입니다.
... 에 이런 얘기야 뭐 태평양 전쟁 얘기하면서 신나게 얘기할 것이고...
그렇다고 일본에서 이런 시각만 있는 건 아닙니다. 고려의 대몽항쟁과 삼별초를 통해 일본이 시간을 벌었고 결과적으로 일본을 지켜줬다는 걸 인정하는 시각도 있으니까요. 거기다 몽고 지배 하의 고려에 대해 동정적인 시각도 있습니다. 의외지만, 일본 내 좌파의 경우 이런 경우가 꽤 많았죠. 반역의 를르슈의 경우 제국주의 논쟁에 휘말린 적이 있지만, 정작 작가들이 참고로 한 배경은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의 미군정 하의 일본이었습니다.
해방 후, 일본의 한 작가는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을 다룬 소설을 냅니다. 재밌는 건 이건 당시 일본 입장이 아니라 충렬왕과 김방경을 주인공으로 한 고려 백성들의 고난을 그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서도 김방경 위인전 등을 쓸 때 이를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는 미 군정하의 일본 상황에 빗대기는 했지만 그건 일본인이니까 이해해도 될 범위라 생각합니다.
이 책의 제목은 "검푸른 해협"입니다.
한국에서는 원 간섭기의 고생했던 시기로, 일본에서는 세계 최강 몽고 제국에 맞선 위대한 항쟁과 신의 도움으로 묘사하지만, 한일 관계사라는 면에서 보면 또 다른 결론을 얻게 될 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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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은 그 후의 원과 고려의 관계, 원 간섭기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다루면서 마무리 짓겠습니다.
사실 이번 이야기에서 내린 결론은 꽤나 위험합니다. 그게 갑자기 근대사 글을 쓰고 싶어진 이유겠습니다만... 다음 편에서 마무리 지으며 얘기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