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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26 19:01:49
Name
눈시BB
File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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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bject
[일반] 정유재란 - 완.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bgm은 신기전 ost입니다.
此讐若除 死則無憾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무엇을 더 하고 뺄 것도 없는 말이죠. 휴... 시작하겠습니다.
1. 노량해전의 의문점
내내 적었었지만 정유재란의 해전들은 다 실체가 임진왜란에 비해 불분명합니다. 가장 전개가 잘 드러나 있는 명량 해전도 난중일기 덕분에 가능한 것이었고, 다른 해전들은 난중잡록이나 각 지방의 남은 문서들에 의해서 겨우 확인이 가능할 정도죠. 절이도 해전도 진린이 수급을 훔쳐 간 게 아니라면 실록에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노량 해전으로 가면 진린은 아주 간단히 공을 보고해서 이덕형이 따로 조사를 해서 장계를 올려야 했습니다. 그나마도 적이 정확히 얼마였는지는 물론 아군이 정확히 얼마였는지조차도 추측을 해야 하는 상황이죠. 하나 하나 짚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아군의 병력
통설은 구국의 명장 이순신(최석남)에서부터 나온 80척설이 아닌가 싶네요. 임란 후 여러 기록에서 삼도의 선박이 80척이라는 기록들이 많은데 이를 통해 당시 조선 수군은 80+a였고 노량해전 후에 남은 것이 80척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거의 대부분의 책에서 이렇게 다루고 있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아예 병력이 안 나오겠죠 (...)
이걸 찾아서 돌아다니다가 워포그에서 한길님이라는 분이 재미있는 의견을 쓰셨는데, 이른바 "60척 참전설"입니다. 가장 큰 근거는, 4로 병진 당시 조선 수군의 병력을 7328명으로 집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에 이덕형이 "정확한 숫자"라고 인증하기까지 합니다. 그 외에도 7300여명이라느니 8000명까지 이르렀다느니 하죠.
문제는 이 병력으로는 80척을 만드는 게 불가능합니다. 배 한 척에 100명도 안 태우지 않는 이상은요. 하지만 이순신은 그럴 인물이 아니죠. 배 한 척에 120명 정도씩 태운다고 생각하면 7300명은 60척에 거의 딱 맞아 떨어집니다. (물론 여기에 포함됐을 비전투병력 생각하면 7300명은 60척을 구성하기도 힘들 수준입니다)
전후에 나대용은 상소를 올리는데 삼도 전선의 숫자가 60여척이었는데 병력이 없어서 숫자를 늘리지 못 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김경진님은 반론으로 노량 해전에 흥양, 낙안의 신규 전선이 투입되었다는 것과 저 병력은 고금도의 병력일 뿐 수군 전체의 병력이 아니라는 걸 드시는데 일단 저 두 분만큼 다른 사료들을 찾지 못 하는 저로서는 60척설이 왠지 끌리네요. 신규전함을 내보내고 진린, 등자룡에게 판옥선을 빌려줬다는 것을 생각하면 판옥선은 나름 여유가 있었다고 봐야 될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병력이었죠.
노량 해전 참전 조선 수군 병력은 60척 전후가 아니었을까 잠시 결론지어 봅니다.
2) 일본의 병력
200척, 300척, 500척, 정말 백 단위로 변화가 크죠. 뭐 늘 하던 것처럼 전투선과 비전투선, 각 다이묘들을 구별해서 생각한다면 그나마 말이 될 듯 합니다.
노량 해전에 참전한 일본군 장수들 중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시마즈 요시히로겠죠. 거기에 남해에 주둔했던 소 요시토시, 다치바나 무네시게, 부산에 주둔했던 데라자와 마사나리, 다카하시 무네마스 등의 연합함대였습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사천성을 아예 포기하고 각종 물자와 부상자 등을 따로 거제도로 보낸 후 전투 병력만 이끌고 온 것이었습니다. 나머지도 마찬가지였겠죠. 이들의 목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구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400척, 500척 넘게 넘어가다보면 이해가 안 되는 게 있죠. 진린이 한 말만 빼면 공통된 전과는 이백 척 격침, 오십 척 도주거든요. 나머지 이백 척이 넘는 배는 어디로 증발한 것일까요?
이런 점에서 처음에 출동한 병력은 모두 500척이 맞고, 이들 중 직접 전투에 참전한 배가 2~300척이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이들이 모두 시마즈 요시히로의 소속으로 300 / 200으로 나뉜 것이거나 처음에 해협에 진입한 이후 나머지 배들은 전투용으로 개조가 안 되서 그저 시위용으로 끌고 온 것, 혹은 해협이 좁아서 들어가지 못 한 상황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탈출 소식을 듣고 그냥 빠져 나온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들은 모두 육군 무장으로 해전을 겪어 보지 못 했으며, 요시히로를 제외하면 보유 함선 수도 적었습니다. 역시 육군 무장인 요시히로가 정면으로 달려든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죠.
노량 방면으로 집결한 것은 총 500척이고, 그 중 실질 전투가 가능한가의 여부 혹은 지형적인 문제로 인해 실제 참전한 것은 2~300척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3) 명의 활약상
이 전투에서 명의 진린과 등자룡이 열심히 싸웠다는 기록이 많습니다. 특히 진린은 자기가 중앙에 서고 양쪽으로 등자룡과 이순신이 공격해 들어가다가 둘 다 전사했다는 아주 아름다운 활약을 자랑합니다만... 나중에 이덕형의 장계에서 진린이 끌려나갔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하죠.
사선과 호선은 단층으로 백 명이 탄다고 하지만 그 전투력에서 판옥선은 물론 역시 2층인 세키부네도 상대하기 어렵습니다. 격군의 수가 적어서 기동력이 떨어지고, 첨저선이라서 갯벌에 박히면 끝장이죠. 실제 이전 전투들에서도 그래 왔구요. 명 수군의 참전이 늦었던 것 자체가 항해 기능이 떨어져서 내륙의 운하를 이동해 와서 그렇다고 합니다. -_-;
때문에 이순신은 진린과 등자룡에게 판옥선 한 척씩을 맡깁니다. 마치 애한테 안전벨트 메 주는 느낌이었죠. 그리고 노량과는 직접 관련이 없는 죽도에 주둔시킵니다. 애초에 양쪽이 함께 공격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명군을 따로 빼 놓았을 리가 없죠.
뭐 그들의 존재가 전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긴 했습니다. 후술하도록 하죠.
2. 전투의 시작
철저하게 매복해서 적이 접근하는 것을 두고 보다가 한 순간에 기습... 이런 모 드라마의 시나리오와는 달리 노량 해전의 시작은 적의 조총 사격에 아군의 사수들이 줄줄이 쓰러지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은봉전서에서의 기록입니다.
아무리 조선 땅이라고 하나 노량 방면은 피점령지였고, 척후선 정도라면 몰라도 육지에 정탐인을 세워서 보고를 받기는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빨리 포착하는가에 달려 있죠. 이 과정에서 이미 긴 화포의 사거리를 이용한 전술은 무력화 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대에도 서로간의 교전 거리가 극히 짧아지는 야간전입니다. 수전 경험이 없는 요시히로에게 수전이 강요되었듯이, 해협을 막는다는 것 이외에는 이순신 역시 야간전을 강요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관음포에서 대기 후 적이 올 때쯤 요격을 위해 노량 해협으로 이동 중 조우. 이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전투는 일방적이었습니다. 조선 수군은 화포와 불화살 등으로 적을 미친듯이 무찔렀습니다. 근거리라는 것은 아군의 피해가 늘어나는만큼 조선군의 화력도 더 높아진다는 것을 뜻 했죠. 삽시간에 300척은 소규모 함대가 되어서 적은 노량해협을 빠져나가는 데 급급해야 했습니다. 이런 일본군을 조선 수군은 관음포로 밀어붙이죠. 당시 관음포는 포구 안쪽까지의 거리가 멀어서 바다로 수평선과 착각하기 쉬웠다고 합니다. 한 밤 중에 조선 수군에게 쫓기는 상황, 이들은 앞뒤 가릴 때가 아니었죠. 거기다 조선 수군 전체를 끌어들였으니 자기들의 임무도 끝난 상황이었죠. 하지만... 점차 밝아 오는 시야에 육지가 보입니다.
이를 볼 때 일본군은 피해가 커지면서도 악착같이 전진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둘 중에 하나겠죠. 확실하게 왜교성으로 구원을 가야 해서 갔거나, 이미 노량 해협이 막혔기에 남쪽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거나요. 이 시점에서 시마즈의 주력 함대 이외의 함대(200여척?)는 노량 해협을 돌파하지 못 했거나, 조선 수군이 무서워서 해협을 건너지 못 했지 않았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일부러 이순신이 달려드는 적들만 일부러 관음포로 몰았을 수도 있죠.
다른 다이묘들의 소수 병력은 이 때 남해도에 내려 도주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시마즈 요시히로의 주력 병력은 이렇게 철저히 얻어맞고도 다른 선택을 하죠. 왠지 2년 후에 그가 보여 준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3. 돌파구를 찾아라
노량해전에 대한 서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조명연합군이 적을 쳐부수며 관음포로 몰았고, 적이 바깥으로 나오다가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것, 다른 것으로는 적이 이순신의 배를 포위하자 진린이 구원했고, 반대로 적이 진린을 포위하고 등자룡을 전사시키자 이순신이 와서 구원했다가 이번엔 다시 이순신이 포위당해서 전사했다는 것이죠. 대체적으로 관음포에 대한 서술이 없지 않은 이상 전사한 시점은 적을 관음포로 몰아붙인 이후입니다.
여기서 의문이 되는 것이 바로 명군의 움직임입니다. 많은 사료의 서술대로 명군이 적극적으로 공격했다면 명 전선의 특성상, 그리고 등자룡이 전사하고 진린이 위험에 빠지는 상황 상 명군에서도 많은 피해가 났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기록에서 보이는 명군의 피해는 이게 다죠. 그렇다면 관음포에 적을 몰아붙인 상황에서 소수로 다가와서 전공 줍기 식으로 참전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니면 원래 있던 장소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거나요. 애초에 고니시를 놓아주기로 해 놓고 이순신의 강요에 끌려 온 상황에서 열심히 싸웠다는 것부터가 이해가 되지 않은 상황입니다.
어느 쪽이었든 공통적으로 등자룡의 배에서 불이 났다는 것은 동일합니다. 오발 혹은 실화로 알려져 있는데, 이게 추워서 불 붙였다가 번진 거라는 말도 있습니다. -_-; 이로 인한 혼란 속을 적이 파고 들었다는 거죠. 여기에 이어 진린의 배까지 위험에 처합니다. 그런데도 명군의 추가 피해는 없었습니다. 어느 쪽이었든 적이 명의 수뇌부만을 집중 공격했다고 볼 수 있죠. 결국 판옥선을 받은 그리고 그 곳이 일본군의 돌파구였습니다. 대번에 무너진 명군을 지원하기 위해 조선 수군은 전열을 무너뜨려야 했습니다. 이순신은 급히 적선에 직접 돌격하며 진린을 구합니다.
이런 전개 과정에서 명군이 있었다는 죽도가 어딘지에 대한 의문이 듭니다. 기록들에 나타나는 죽도의 위치는 노량에서 서북쪽, 전장이랑은 별 관련이 없는 곳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둔 이유가 "퇴로 차단"이었죠. 조선 수군이 뚫려서 적이 왜교성으로 가는 상황이라면 모르겠는데 적이 퇴각하는 과정에서는 별 의미 없는 곳입니다. 그 때문인지 남해도의 남서쪽 섬을 죽도로 보는 경우도 있는 모양이더군요. 이렇다면 남해도의 서쪽을 돌아 퇴각하는 적의 퇴로를 차단할 만한 장소는 되죠. 다만 어느 쪽이든 주 전장인 관음포와는 멀죠. 진린과 등자룡은 이 때 나름 전장에 투입되었던 모양입니다. 이 때 당시의 그림이 남아 있는데 명군이 용감하게 바다에 빠진 일본군을 열심히 창으로 찌르고 있다고 하는군요. -_-; 김경진님은 죽도의 위치를 서북쪽으로 잡고, 등자룡의 배에 불이 나자 고바야 몇 척을 보내서 혼란에 빠뜨렸다고 서술하실 듯 합니다. 300척에 달하는 명군이 고바야 몇 척에 흩어지고 부총병이 죽고 총병이 위험에 빠지는 어이 없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입니다만 전 여기까지 이르지는 못 하겠네요.
명군이 어느 정도로 적극적이었든간에 이미 부총 하나가 전사하고 총병이 위험에 빠졌다는 것은 좌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정 같은 걸 무시하더라도 진린은 분명히 주장으로 이순신이 지켜야 했습니다. 거기다 진린은 다른 명장들과는 다르게 자기 말을 들어 준 장수였죠. 절대 잃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악수였죠.
겨우 진린을 구했지만 이번엔 이순신의 상선이 포위 돼 버립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선조만 빼면 조선인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을 결과를 만들었죠.
4. 양측의 피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본군의 피해는 200척 분멸, 50~100척 도주입니다. 맨 처음에 적었듯 적이 총 500척이었다면 여기서 200척이 비죠. 기타지마 만지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략] 에서는 일본군의 퇴각로를 노량해협을 통해 다시 돌아가는 걸로 잡고 있더군요. 한국 기록을 많이 참고한 상황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건 아닐테고 그렇게 퇴각했다는 증거가 있어서 그랬겠죠. 아마 이들이 전장엔 도착했지만 전투에 참가하지는 않은 배들일 것입니다. 만약 전투에 참가한 배들이 이렇게 퇴각했다면 애초에 관음포로 안 도망치고 노량으로 돌아갔겠죠. 맨 처음에 전투 참가 300 / 미 참가 200을 제기한 이유입니다. 이들은 엄청난 피해를 입은 대신 고니시의 퇴각을 결국 성공시킵니다. 조선군의 피해 상황과 전투 시작 후 관음포 쪽으로 퇴각하려고 한 것을 보면 이들은 조선 수군 전멸보다는 시간을 끌거나 그저 돌파하는 쪽으로 방침을 잡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 수군의 피해는 생각보다 심각했습니다. 이덕형의 보고에 이미 가리포 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덕장 등 장수 10여명이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고 했습니다. 상선에서는 송희립이 적탄을 맞고 기절했고, 그 다음이야 뭐... 해남 현감 류형은 적탄을 여섯 발이나 맞고도 끝까지 용전했다고 하죠. 여기에 워포그의 한길님이 전라우수사들의 명단을 연구하셨는데, 안위가 이 때 중상을 입어 다음 달 초에 우수사에서 물러났다고 합니다. 이외에 군관, 사부 등의 전사가 30여명이 된다고 합니다. 전사자가 이 정도니 부상자는 몇 배나 되겠죠.
문제는 지휘관급의 전사자가 너무 많다는 거죠. 수군의 중심인 통제사부터 전라우수사, 거기에 가리포 첨사 이영남은 중군으로 추측됩니다. 충청 수사 오응태는 참전하지 않았다고 했으니 이 상황에서 남는 상급 지휘관은 단 한 명, 경상우수사 이순신이죠. 저 10명이 각기 다른 배에 탔다고 치면 60척으로 칠 경우 전체의 1/6이, 80척으로 쳐도 1/8이 전사한 것이고, 부상자까지 따지면 지휘체계 자체가 붕괴될 수준이었다고 봐도 되겠죠. 이 때문인지 조선군 전체의 피해가 270명이라고 하는 글을 봤는데, 출처를 모르겠네요 ㅡ_ㅡ.
일방적으로 진행됐던 해전이었다고 해도 이 정도면 엄청난 혈전이었다고 봐도 될 것입니다. 재건됐다 하나 300척은 너무 많았고, 시마즈 본군을 상대하는 병력 외에도 노량 해협을 막을 병력에 남해도 남쪽으로 돌아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 따로 병력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실질 전투 병력은 더 줄어들죠. 이 때 경상우수사 이순신의 공이 열 척이었다고 합니다. 많은 공을 세운 만큼, 많은 상대와 싸웠다는 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야간전이어서 화포를 쓰기 어려웠다는 것도 큰 이유일 것입니다. 사료들에 보면 화포 대신 불 붙은 섶을 던졌다느니 (칼의 노래 보면 잔뜩 만들어서 던지고 불화살 쏘죠) 화포 대신 불뭉치를 던졌다느니 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화포를 안 쓴 건 아니겠지만 적의 조총 사격에 언제 맞아도 이상하지 않은 철저한 근접전이었던 거죠.
이에 더해서 시마즈군이 철저하게 아군 지휘관을 노렸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다 노부나가 등에게 가려져 있지만 시마즈 가문은 조총에 능숙한 가문이었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보여 준 전법 스테가마리는 소수의 병력이 적장을 저격 후 돌격해서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본진이 탈출하는 전법이었죠. 왠지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군요. 순천의 고니시가 당할 경우 바로 사천의 시마즈가 타겟이 되었을 거라는 걸 생각하면 시마즈 요시히로가 상당히 준비를 해 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에 비해 명군의 피해는 너무나도 가벼워서 등자룡이 탄 함평 전선 전멸 (여기에 탄 조선군 14명도 전사했다고 합니다), 중군 도명재 전사, 진린 잠시 위험에 빠지고 그 아들 진구경이 그에 맞서 싸웠다는 것 수준입니다. 조선 수군에서 피해가 저 정도로 났는데 판옥선 두 척에 나머지는 왜선보다 오히려 작은 사선과 호선을 탄 명군의 피해가 저렇게 적다는 것은 이들이 그만큼 소극적이었다는 얘기가 되겠죠. 위에서 썼듯 등자룡과 진린이 괜히 전투 끝나 가니 수급이나 좀 챙길까 접근하다가 일본군이 그 방향으로 돌파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조선 수군의 전사자는 모두 적탄에 맞은 것으로 갑판전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 기록에는 겨우 배 위로 올라가니 조선군은 갑판에서 모두 철수해 밑으로 내려갔고, 다른 배에서 화살을 쏴서 배 위로 올라온 일본군이 모두 전멸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단병접전에 강한 적에 대비한 최고의 전술을 세운 거죠. 하지만 등자룡과 진린은 모두 적이 갑판까지 올라오는 위기를 당했고, 한 쪽은 전멸, 한 쪽은 이순신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명군은 총대장이 위기를 당하는데 제대로 돕지 못 했고, 주변 조선군과의 연계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죠. 결국 싸우기도 바쁜 이순신이 직접 도와야 했습니다.
다만 이순신이 위기에 처하자 진린이 도우러 간 건 그 후의 모습을 보면 사실일 것 같긴 합니다. -_-; 고마워할 필요는 없을 듯 하네요.
5. 자살설?
이런 전개를 보면 자살설은 말도 안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살설의 요지 중 하나는 "총대장이 그렇게 위험한 상황에 빠졌을까?"라는 것이죠. 그런데 이순신은 애초에 안전한 위치에 있지 않았고 매 전투마다 상선에서는 꼬박꼬박 부상자 및 전사자가 나왔습니다. 상선의 앞에는 중군선 한 척 뿐이었고, 이 중군장 이영남은 전사했습니다. 60척이든 80척이든 300척에 달하는 적을 상대하는 것은 힘들었고, 여기에 명군마저 도와야 되는 상황이었죠.
애초에 언제 전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앞에서 싸운 상황, 거기에 적의 공격이 특히 거셌던 노량 해전의 모습, 명군을 돕다가 포위돼 버린 것, 이것이 노량 해전에서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전투 전에 했던 기도,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다"는 것은 자살을 암시하는 복선이 아닌, 그만큼 엄청난 혈전이 벌어질 것이라는 예상이었던 것이죠. 그리고 이순신은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당당히 나아갔던 것입니다.
자살설의 또 다른 요지 중 하나인 "노량 해전이 마지막 전투이니까"도 결과론적인 해석일 뿐입니다. 전투 중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도망친 것을 이순신이 알 수는 없었겠죠. 거기다 가토 기요마사 등 동쪽에 있던 적들이 조선을 떠났다는 것도 알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천에서 오는 적들은 어디까지나 없애야 할 적들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이들을 쳐부수고 다시 순천 왜성을 쳐야 됐고, 이들이 도망갔다면 쫓아야 했죠. 실제 진린은 전투 후 남해도를 수색합니다. 고니시와 시마즈는 거제도에서 합류한 후 사이 좋게 21일에 떠납니다. 이순신이 살아 있었다면 곧바로 거제도로 가서 이들을 쳤겠죠.
노량 해전이 마지막 전투라서 이순신이 자살하려 한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전사했기에 노량 해전이 마지막 전투가 된 것입니다.
6. 이순신, 전사
실록에는 손(이)문욱, 은봉전서에서는 송희립, 난중잡록에는 아들 이회, 연려실기술에서는 이회 혹은 이완... 이순신 전사 후 그 사실을 숨기고 독전했다고 하는 이들입니다. 이 중 손문욱은 나중에 거짓이었다고 까이죠.
이렇게 뒷수습을 했다는 사람들이 다른 것은 그 때가 얼마나 혼란 상황이었는지를 말 해 줄 것입니다. 거기다 저렇게 전사 소식을 숨겼다는 바로 그 연려실기술에 류형이 "대장이 어디 계시냐"고 하니 "이미 탄환을 맞고 죽었다"는 말을 들었고, 통곡하면서 더욱 급하게 싸움을 독려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사한 장수들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전사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해서 공격, 전사했다는 게 많다고 합니다. 뭔가 유언이 무색해지는 기록들이죠. -_-; 그냥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을까요.
전투가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것은 그의 조카 이분이 지은 행록에는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판본이 여러 개가 있는데 1643년판에는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는군요. 물론 다른 기록들에도 등장하지 않고, 단 하나 류성룡의 징비록에 등장할 뿐입니다. 의심해 봐야 될 일이죠.
전사 후의 기록이 엇갈리는 점, 중군장, 전라우수사, 통제사가 모두 적탄에 맞은 상황, 명군 때문에 전열이 흐트러진 상태 등을 볼 때 이순신 전사 후 조선 수군은 크게 혼란에 빠진 듯 합니다. 전사 소식이 알려졌다면 류형이 했듯 그 분노로 더 열심히 싸울 수는 있었겠습니다만 지휘체계가 흐트러진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전투는 힘들었겠죠. 어쩌면 시마즈군이 50척"이나" 살아 돌아간 건 그것 때문이었을지도요.
7. 전투가 끝난 후
전투 후에 진린은 급히 경상우수사 이순신을 통제사 대리로 세운 후 남해도의 적들을 수색합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말과 군량을 노획하죠. 다시 적을 쫓아 간 모양입니다만 21일에 고니시와 시마즈는 조선을 뜬 상황이었습니다. 텅 빈 왜성으로 사로의 병력들이 입성하고, 그들은 거기서 대승을 거뒀다느니 하면서 전공을 자랑합니다. 진린도 "내가 선봉에 좌우에 이순신과 등자룡이 돌격했는데 둘 다 전사했다"느니 하면서 모든 공을 자기에게로 돌리죠. 이 때 전공은 150척 포획, 200척 격침, 수급 500급 이상이었습니다. 어디서는 900급 이상도 보이네요. 선조는 당연히 이들을 축하하면서 해전에 참가한 장수들의 거처에 들려서 크게 사례합니다. 이쯤 되면 너무도 당연해서 화도 안 나네요.
하지만 진린은 이순신에 대한 마음을 잊지는 않아서 조선 수군이 잘 싸웠다고 하며 이순신의 충성은 더 말 할 필요도 없다고 강조하죠. 연려실기술에서는 진린이 전사 소식을 듣고 세 번이나 놀라 엎어졌고 "함께 일할 이가 없구나"고 탄식했다고 하며, 명군조차도 고기를 물리고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남쪽의 백성들은 골목을 메우고 곡 하였고, 시장에 간 자는 술 자리를 파했다고 하죠. 상여가 나오자 노인과 어린이들도 길을 막고 곡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난중잡록에는 부하 장수들이 따로이 비석을 세웠는데, 그 이름을 타루비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 비석을 바라보는 자는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라는군요.
그가 전사하자 비변사는 사당을 세울 것을 건의했고, 선조는 여기에 별 반대 없이 응합니다. 역시 좋은 장수는 전사한 장수인 것 같네요. 1600년에 시호를 내리는데 충민忠愍이었다고 하죠. 승록대부 좌의정에 추증됩니다.
이덕형은 노량 해전에 대한 정보를 모은 후 선조에게 보고를 합니다. 그 중 한 대목을 옮겨 보죠.
"왜적의 시체와 부서진 배의 나무 판자·무기 또는 의복 등이 바다를 뒤덮고 떠 있어 물이 흐르지 못하였고 바닷물이 온통 붉었습니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다"(一揮掃蕩 血染山河)" 이 여덟 글자를 검에 새기며 했던 맹세와, 그의 마지막 분노가 느껴지는 한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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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정유재란편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뭐... 더 하고 싶은 말은 모두 후일담으로 돌리죠. 한 서너개쯤 해서 임진왜란 후일담을 써 보겠습니다. 끝이 보이네요.
생각해보면 노량 해전은 결코 만만한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노량 해협은 명량처럼 좁지 않았고, 밤이라는 배경은 조선 수군에게 불리했죠. 거기다 조선 수군은 배후의 고니시군을 걱정해야 했고, 천덕꾸러기 명군도 걱정해야 했습니다. 겨울이었고, 지형적으로도 그리 유리하지 못 했고, 조선 수군은 고니시를 치느라 여러 날 동안 바다에 나가 있었죠. 그리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이제까지 붙은 적들과는 차원이 다른 적이었죠. 그저 순수한 힘과 힘의 대결, 이것이 노량 해전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무튼 기나긴 임진왜란 프로젝트(?)의 마지막, 임진왜란 후일담(혹은 왜란이 끝나고) 편을 준비하며, 글을 여기서 맺겠습니다. 퇴원하니까 좋네요 @_@)
끝으로 난중잡록에 실린 추모시 하나 실어보죠.
6년 동안 한산에서 호랑이 위엄을 지녔으니 / 六載閑山擁虎態
몇 번이나 거북선은 적의 소굴을 갈겼다 / 幾時龜船剪孤叢
언성 금패는 붕거를 부르는데 / 偃城金牌招鵬擧
하상의 외로운 군사는 위공을 돌아오게 하였네 / 河上單師返魏公
세 번이나 벽파에서 이겨서 생전에 절개를 다하고 / 三捷碧波生盡節
하루아침 와해에서 죽어 충성을 바쳤네 / 一朝瓦海死輪忠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며 산을 두고 맹세한 말은 / 揮旗鳴鼓盟山說
영웅에게 물려 주어 눈물이 한없이 흐르네 / 留與英雄淚不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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