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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11/09 18:09:43
Name 분홍돌고래
Subject [일반] [크리스마스 씰]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 싶어요.
바람이 차가워지고 낙엽이 떨어지는 이맘 때가 되면 어김없이 학교로 찾아오는 손님이 있습니다. 올해는 유독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 되어 버렸네요. 네, 크리스마스 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저는 현재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담임으로 아이들을 맡은 첫 해인지라 크리스마스 씰 판매 권유를 받은 것도 올해가 처음이에요. 저 역시 어린 시절 학교에서 크리스마스 씰을 팔 때면 조금이라도 예쁜 것을 사기 위해 줄을 서던 기억이 있는지라 부장선생님께 올해의 크리스마스 씰을 건네받자마자 아이들이 먼저 떠올랐어요. '10살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씰에 관심이 있나? 사는 아이가 있을까? 내일 얘들한테 알리고 알림장에 써야겠네....' 제 손에 쥐여진 3장의 크리스마스 씰을 바라보며 이것저것 생각하는데 한 달여 전 떠들썩했던 기사 하나가 생각나더군요.

관련기사 : http://news.nate.com/view/20101008n10414
크리스마스 씰 모금액이 결핵협회장 차량유지비로 쓰였다는 국정감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차량유지비 및 리모델링비 등 결핵환자를 위한 결핵퇴치 관련 사업에 쓰이는게 아니라 상당수의 돈이 관서운영비라는 이름으로 결핵협회의 운영비로 쓰였다는 것이죠. 이 기사가 나온 후 현재 결핵협회 게시판에는 이를 지적하는 글들이 올라와 있지만 관리자의 답변은 기사가 게재된 10월 8일부터 멈춰있는 상태입니다.

현직 교사들의 학교에서의 씰 판매를 중지하라는 글에도 아무런 답변이 달리지 않은 채, 올해도 어김없이 크리스마스 씰은 매년 그래왔듯이 각 학급에 할당되었습니다. 한 장에 11개의 씰로 구성되어있으며 씰 하나당 300원, 한 장에 3000원이네요. 남는 씰은 돌려보낸다는 강매가 아닌 권유이지만 왠지 찝찝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었어요. 아픈 사람을 돕는 일에 쓰인다는 크리스마스 씰, 그렇게 믿고 있는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할지... 아이들의 착하고 예쁜 마음을 더럽힌 어른들의 모습을 제 입으로 밝히기가 참 부끄러워 많이 망설였습니다.

결국은 알림장을 적어주며 집에 가서 부모님께 여쭙고 오라는 말로 결정권을 넘겨버렸어요.  알림장을 적어주는데 아이들 몇 몇이 관심을 보이더니 자신들의 용돈을 계산하기 시작합니다. 어떤 아이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사겠다며 그새를 못 참고 부모님께 전화를 하구요. 10살짜리 아이들의 용돈이라고 해봤자 몇 백원입니다. 어쩌다 1000원을 받으면 그 날은 최고로 행복한 날이 되지요. 개구쟁이 종현이가 주머니에서 300원을 꺼내더니 씰을 유심히 들여다 봅니다. 올해의 씰 디자인은 한글 캘리그라피입니다. 아이들의 취향은 아닌데도 조금이라도 멋진 것을 고르겠다며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그 모습이 참 예뻐 웃음이 났어요. 한편으론 착잡했구요.

어쩌다 수업 시간에 보상으로 주어지는 캐릭터 스티커에도 시큰둥한 요즘 아이들, 크리스마스 씰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편지보다는 이메일, 메신저가 주된 의사소통의 창구가 된 지금 우표 옆에 붙이는 증표로 사용하기에는 그 쓰임새가 크지 않아요. 그런데도 조그마한 지갑에서 천원짜리를 꺼내 씰을 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쓰이든 그 마음만은 같을거라 생각했어요.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 싶어요."

아이들의 그 마음을 차마 망가뜨릴 수가 없어 그저 '사고 싶은 사람은 돈 가져오세요-'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던 초보 선생님은 30개 중 단 2개만이 남은 씰을 보며 한숨만 내쉬고 있습니다. 중소 도시의 변두리 농촌 마을, 6학급의 소규모 초등학교인 이곳 3학년 18명의 아이들 상당수가 편모 또는 편부 슬하의 넉넉치 않은 가정에서 살고 있어요. 그런데도 할당된 씰의 대부분을 팔았네요. (강매는 전혀 아닙니다. 남은 것은 되돌려 보낼 계획이었어요.)

지금도 제가 잘한 것인지, 아니면 제 선에서 씰을 전부 되돌려 보내야 했을지 이미 때 늦은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만 올해부터 제작된 씰은 온전히 결핵으로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쓰여졌으면 합니다. 부디- 아이들의 예쁜 마음을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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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귀신
10/11/09 18:22
수정 아이콘
무책임한 말 같지만, 글쓴님과 같은 상황이 됐을 때 전 제 돈으로 다 사버렸습니다. -0-
2009년 겨울이었는데, 결코 씰 모델이 김연아 선수였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놈의 '할당'이라는 것 때문에 담임교사들이 속 많이 썩지요. 마치 많이 뽑아낼수록 능력있는 교사인 양 추켜세우는 간부급 교사들의 행태도 아직까지는 여전하구요. 그런 거 하나하나에 목숨거는 교감 교장들이 불쌍할 때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질럿
10/11/09 19:09
수정 아이콘
결핵협회장 차량유지비라니;;
몽키.D.루피
10/11/09 19:25
수정 아이콘
아이들이 참 착하네요.. 전 한번도 사본 적이 없는데..
10/11/09 19:52
수정 아이콘
그 감사 결과 본 뒤로, 구세군부터 시작해서 각종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안내게 되었습니다.
낸 돈이 어디로 가는지 믿을 수도 없고, 또 올바르게 쓰이고 있는지 알아보기도 힘들더군요.

심지어는 아이티 난민 도우라고 성금 매달 나가도록 계좌이체 허용했더니, 아이티 난민은 안돕고 성금으로 장기적금 들고..
부패하고 더러운 인간들의 온상인 것 같아서, 앞으로는 눈 앞에 직접 보이는 게 아니라면 남 믿고 성금도 못 줄 것 같습니다.
9th_Avenue
10/11/09 20:38
수정 아이콘
정말... 왜 이런 돈을 그렇게 사용합니까? .. 답답하네요.
그나저나 학교를 졸업한 뒤에 크리스마스 씰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듣고 가네요^^;;
예전에 우표수집하면서 같이 모았었는데~
10/11/09 22:44
수정 아이콘
그냥 눈 먼돈이라는 생각이 뇌리에 박혀있는거죠
전혀 죄책감이나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는 사람들에게 제돈 10원도 아까워서 절대 저런곳에는 기부를 하지 않게 되었네요
그 시초는 평화의댐이었지만요 [m]
소원을말해봐
10/11/09 23:28
수정 아이콘
고통받는 이들을 돕기는 커녕 두번 죽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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