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사관과의 첫 기록입니다.
태종이 좌우정승등을 불러 잔치를 벌이고
무신 10명등을 거느리고 사냥을 나갔는데,
뒤에 누군가 따라와 물으니 사관 민이생입니다.
임금이 옆의 내시에게 저게 뭐냐 물으니 사관의 직무라 합니다.
또 옆의 총제 이숙번은 사관의 직책이 중요하니 이유를 묻지 말라 합니다.
태종 1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3월 23일(임오) 2번째기사
태종이 신하들에게 묻습니다.
전날 사관이 사냥하는 곳까지 따라온 것을 보고 대체 왜 그런가...하면서요.
이에 대해 모두 대답하기를
사관의 직책은 사건들을 기록하는 것인데, 하물며 임금의 거둥을 기록하는 건
당연한 거라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임금은 궁궐에 있어
경계하는 뜻이 시간이 지날 수록 풀리고 게으른 마음이 날로 생기는 것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이 두려워할 것은 오로지 '하늘'과 '사관의 기록'뿐입니다.
라고 조언합니다.
이 때까지 이런 부분을 알지 못했던 태종은 이런 제도가 있구나..하며 이해하려 노력하며
위임초 이런 부분을 수긍하고 그 뒤부터는 행동에 조심하기 위해 노력하는듯....보입니다.
태종 1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4월 16일(갑술) 2번째기사
약 한달 뒤 사관의 입시를 건의하고 태종은 쿨하게 허락합니다.
태종 1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4월 29일(정해) 1번째기사
그러나 보름도 안 되서 문제가 생깁니다. 이놈의 사관이 편전에까지 들어오려고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편전 출입이 거부된 사관 민인생은 몰래 뜰로 숨어들어가게 됩니다.
허가되지 않았던 사관이 갑자기 편전에 보이자 태종이 대체 어찌 들어왔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관 민인생이 대답하기를,
전날 문하부에 사관이 입시하기를 청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아 몰래 들어왔다고 하지요-_-;
기분이 언잖은 태종은 편전에는 들어오지 말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민인생은,
비록 편전이라도 대신에게 일을 아뢰고 경연을 하는데,
만약 사관이 없다면 그것을 어떻게 기록하겠냐고 반문합니다.
이에 태종은 허허 그러면서 편전은 자신이 편히 쉬어야하는 곳이니
들어오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대궐 밖에 있더라도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잇으니
밖에서 쓰라고 명합니다.
이에 민인생은 자신이 여기 없어도 위에 하늘이 있다며 태종을 경고를 하는 지경에 이르지요.
사관입시에 대한 문제제기는 열흘 뒤 경연에서 또 한 번 논쟁이 되기도 합니다.
태종 2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7월 8일(을미) 2번째기사
태종이 편전에서 업무를 보는데 밖에 웬 이상한 사람이 몰래 엿보고 잇는 겁니다.
태종이 대체 저게 누구냐고 물으니 또 그 놈의 사관 민인생입니다.-_-;;
더이상 참을 수 없는 태종은 화를 내며 육아일 이외에는 사관의 입궐을 금지시킵니다.
태종 2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7월 11일(무술) 1번째기사
생각할 수록 괴씸한 민인생은 결국 귀양가게 됩니다ㅜ.ㅜ
태종 5권, 3년(1403 계미 / 명 영락(永樂) 1년) 3월 27일(갑진) 1번째기사
약 2년 뒤 태종은 다시 사관을 입시하게 합니다.
전에 사관을 파한 이유는 종친과 같이 과녁에 화살을 쏜 거 가지고
'날마다 무신과 더불어 과녁을 쏜다.' 라고 하니 종친들이 들으면 얼마나 불쾌하겠느냐는 겁니다.
이런 일 때문에 사관의 입시를 금한 거지 사관 자체를 꺼려서가 아니다..
라는 약간은 구차한(?) 핑계를 대며 다시 사관 입시를 허가합니다.
태종 7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2월 8일(기묘) 4번째기사
사냥하다 말에서 떨어지는 추한 꼴을 당한 태종은 이를 사관에게 알리지 마라...
라고 말한 기록을 사관은 그대로 기록합니다..-_-;
태종 8권, 4년(1404 갑신 / 명 영락(永樂) 2년) 9월 16일(갑인) 1번째기사
춘추관 기사관등이 편전의 입시는 필요하다며,
그 필요성을 태종에게 조목조목 설명하지만 또 다시 거부당합니다.
태종 9권, 5년(1405 을유 / 명 영락(永樂) 3년) 6월 14일(무인) 1번째기사
사관이 제대로 입시하지 못하는 것을 염려한 것인지 형조 참의 최긍등이
사관의 임무는 사시을 적는 것인데, 지금 경연 이외에는 공식적으로 참관이
허락된 것이 없으니 유감이다. 라는 조언에 의해
사관을 불러 참관을 허락하게 합니다.
태종 19권, 10년(1410 경인 / 명 영락(永樂) 8년) 4월 28일(갑자) 3번째기사
한동안 또 잠잠한듯 하더니 또다시 대언(왕명을 하달하는 직위)의 뒤를 밟아 몰래 편전에 숨어 들어옵니다.
이를 발견한 태종은 저게 누구냐고 물으니
사관 최사유라고 하니 태종은 네가 여기 없어도 자신이 잘못이 있으면,
대언과 춘추관에 있는 자들이 모두 쓸 것이니 제발 좀 그만 와라..
라고하며 조계 이외의 경연청, 광연루등은 사관이 들어오지 못하게 명합니다.
태종 20권, 10년(1410 경인 / 명 영락(永樂) 8년) 10월 29일(임술) 3번째기사
사간원 좌사간 대부 유백순등이 상소를 올립니다.
여기에 사관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는데, 왕이 있는 곳에 사관이 있는 것이 당연함에도
사관의 한때의 무례함으로 왕의 좌우에 나오지 못하게 하니 왕의 좋은 말씀과 정치가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된다는 등의 내용입니다.
이에 태종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한 사관이 있어 정지시켰는데,
그렇다고 옛법도를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니 다시 사관이 자신의 좌우에 있을 수 있게 허락합니다.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7월 29일(임자) 1번째기사
민인생, 최사유등의 실절로 인해 사관이 편전에 들어갈 수 없었으나
여러번의 상소로 인해 입시를 다시 허락했습니다.
2년뒤 문뜩 태종이 편전에서 정사를 보는데, 사관이 편전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게 언제부터냐며 묻습니다.
경인년부터라고 하니 태종은 아무런 대답이 없습니다. 이에 지신사 김여지등은 태종이
또 다시 사관이 편전 입사가 거부당할까 걱정하게 됩니다.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8월 26일(무인) 2번째기사
아니나 다를까 한 달 뒤 태종은 사관이 또 이런 저런 잘못을 했다 들먹이며
다시 사관이 입시하지 못하게 명합니다.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10월 24일(병자) 1번째기사
좌사간 이육등이 청하기를 편전에서 정사를 볼 때 사관이 입시할 것을 허락해달라하니
태종이 말하기를
사관이 없더라도 사간과 대언등이 모두 있으니 자신의 득실을 기록할 것이다.
저번 몇몇 사관등이 실례한 것이 자신이 심히 미워하니 다시는 청하지 말라라며 허락치 않습니다.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11월 20일(신축) 2번째기사
그러자 이제 대사헌 정역이 사관의 조계 입시를 허락하도록 요청합니다.
이에 대해 태종은
예전에 사관 민인생은 경연 때 병풍 뒤에서 엿듣고-_-;
절차를 밟지 않고 내연으로 숨어 들어오고-_-;
자신이 매 사냥 나갈 때는 얼굴까지 가리고 몰래 따라왔으니-_-;
이런 것들은 모두 음흉한 짓이다.
또 지난해에 또 한 사관이 곧장 내전으로 들어와 그 뒤로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라고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12월 6일(정사) 1번째기사
또 사관 입시에 대해 언급됩니다.
한두 사관의 실수 때문에 옛법을 폐하는 것은 문제가 된다며,
사관 입시를 윤허해 만세의 법을 보여주길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태종 25권, 13년(1413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1월 16일() 1번째기사
마침내 태종이 백기를 듭니다.
사관에게 명하여 조계 입시를 허락하게 합니다.
이 뒤로 태종이 물러날 때까지 사관과 태종과의 특별한 마찰은 없어보입니다.
다른 왕들과 사관들관의 내용을 읽어보지 않아 단언은 못하겠지만,
아무래도 조선초기이다보니 사관체계가 완벽히 잡혀있지 않았던데다가
태종도 한 성격하는지라 사관과의 충돌이 굉장히 잦고
태종이 사관을 얼마나 미워했는지가 기록에서 잘 보입니다.
그럼에도 태종을 막연히 비난할 수만은 없는게,
병풍 뒤에서 숨어 엿듣고, 몰래 숨어들어오고, 사냥갈 땐 얼굴까지 가리고 따라오니
일본에서 닌자가 하는 일을 우리나라에선 사관이 하니
왕의 입장에서 대체 얼마나 짜증이 나고 귀찮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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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작에 관한 것은 제가 역사에 대해 무지하여 말씀을 못 드리겠습니다 -_-;; 하지만 선대왕의 교지를 따르는 것이 정말 중요했던 당시 시대상황에 맞춰 태조가 시작했고, 태종이 왕위에 올랐어도 태조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상황에서 단지 눈에 거슬린다고 하여 실록의 기록을 중단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