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를롱(Jean-Baptiste Drouet, Comte d'Erlon)
오후 1시 30분부터 시작된 프랑스의 첫 대규모 공세는, 그것이 한 번의 공격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나폴레옹 전쟁의 어떤 공격보다도 거대한 규모를 지닌 공격이 될 것이었다. 그 군단을 이끄는 인물은 바로 리니와 카트르 브라 사이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데를롱이었다. 그의 군단이 리니와 카트르 브라 어느 전선에도 참전하지 못 했기 때문에, 병력들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활기에 넘쳤기 때문이었다. 군단의 숫자는 1만 6천여명 정도에 이르렀다.
그들이 해야할 임무는 간단했다. 적의 중앙으로 진격하여, 돌파하고, 적을 분쇄하여, 괴멸 시키는 것이다. 숲을 등에 지고 일종의 배수진을 친 웰링턴으로서는 한번 전선이 돌파당하고 전열이 흩어지면 이를 다시 수습해서 싸울 여력이 없었다. 간단하게 말해서, 데를롱이 돌파에 성공했다면 워털루 전투는 프랑스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마침내 진정한 사투가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이어지던 엄청난 포격 이후 진군하던 데를롱 군단은, 전투의 첫 국면에서는 분명히 성과를 드러내었다. 적을 향해 진격하던 데를롱 군단은 총 4개 사단 규모였고 이를 지휘하는 사령관은 좌익에서부터 알릭스, 동즐로, 마르코네, 뒤르트 였다. 또한 뒤리트 근처에 1기병 사단을 이끄는 자키노가 있었다.
가장 우익에 있던 뒤르트는 파펠로트 마을을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가장 좌익에 있던 알릭스는 라 에 상트의 정원과 과수원을 장악해나가면서 영국군 95연대 병사들을 몰아내었다. 알릭스의 옆에서 사단을 이끌던 동즐로는 자기 사단의 여단 하나를 돌려 라 에 상트를 둘러 싸고 벌어지는 전투에 지원하였다.
라 에 상트를 지키는 게오르크 바링 소령이었고, 그 병력은 영국 국왕 조지 1세에게 충성을 맹새한 '국왕의 독일군단' KGL 이었다. 1803년 나폴레옹에 의해 하노버 선제후령이 해제되자 하노버 군대의 많은 장교와 병사들은 선제후 게오르크가 국왕으로 있는 영국으로 피신했고, 그들은 독일 군단을 형성했던 것이다. 프랑스와 그 수괴 나폴레옹을 상대로 싸울 이유가 충분했던 그들은 열성적으로 저항했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바링 소령을 지원하려고 오던 보병 대대 하나는 프랑스군의 기병대에게 완전히 괴멸 당했다.
그러나 노도와 같은 보병들의 진격에는 위험신호가 따르고 있었다. 거대한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눈치 빠른 몇명은 그러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뒤틸은 프랑스 혁명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 22년간 전투에서 부하들을 이끌었고, 그 덕분에 이러한 상황을 더 빨리 알아칠 수 있었다. 그는 방어하는 웰링턴 군의 수비력, 그동안 내린 비로 인한 발밑의 진창, 장군들이 성급하고 혼란스럽게 택한 생소한 진형, 열기에 들뜬 병사들이 너무 일찍 목소리를 높이며 힘을 내고 있는 점 등 모든 점이 염려 스러웠다.
"이 열광적인 돌격은 너무 위험해지고 있었다. 적과 부딫치려면 아직도 먼 거리를 전진해야 했고, 병사들은 심하게 질척거리는 땅에서 이동하느라 곧 치졌다. 각반 끈이 뿔리고 신발이 벗겨지기도 했다…… 대열은 곧 혼란에 빠졌고, 맨 앞 열이 적군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면서 혼란은 더욱 심해졌다."
워털루 전투 이후 워털루 전장에는 '사자의 언덕' 이라는 괴이한 기념물이 생겼고, 이 덕분에 전장의 모습은 상당히 바뀌게 된다. 웰링턴은 이후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내 전장을 망쳐버렸군!" 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여기에 더해, 현재에 와서는 세월의 흐름으로 전장은 더 이상 이전의 형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도 워털루 언덕을 오르는 일은 그렇게 즐거운 일이 아니다. 1815년에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며, 하물며 그것이 진창을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 이르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군의 용맹스러운 종대보병들은 그런 난관을 뚫고 언덕을 거슬러 올랐지만,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이면 전열은 무질서로 바뀐 지 오래였다. 다만 전날 카트르 브라의 사투에서 살아남은 네덜란드 - 벨기에 여단은 그런 프랑스군과 마주치자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들의 행동은 이후 무수한 비난을 받게 되었지만, 그들이 카트르 브라 전투에서 정말 용감하게, 그리고 힘들게 싸웠다는 점, 이미 데를롱 군단이 진격해오기 전까지 적의 포격을 견디고 있었다는 점, 여기에 더해 정치적인 입장에서나 민족적 이데올로기에서도 프랑스에 영국이 맞서는 전장에서 목숨을 버릴 기분이 아니었을 사람들이 섞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것도 아니다.
토마스 픽턴(thomas picton)
이 공격의 선봉에 선 데를롱 군단의 동줄로 사단은 잠시간의 시간을 이용해 대열을 정비하기 위해 멈춰섰다. 하지만 그가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나는 네덜란드 - 벨기에 연합군의 모습을 보고 잠시나마 방심 했다면 이는 큰 실수였다. 근처에 있던 픽턴의 영국 5사단은 전혀 달아날 기분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로와 잡목숲 곳곳에 숨어 프랑스군의 포탄을 피하던 5사단은 숫자가 3,000여명이었고 이는 적에 비해 열세한 전력이었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픽턴은 지금은 물론이고 당대의 기준으로 보아도 사려 깊은 인격자라고 볼 수는 없는 인물이었지만, 군대를 위기에서 구해 낼 용맹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카트르 브라 전투에서 심한 상처를 입었지만 워털루 전투에 참여하기 위해 그 사실을 숨겼고, 이 사실은 그의 사후에나 알려지게 되었다. 그런 픽턴의 눈에 동즐로가 완전히 혼란에 빠진 군대의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광경이 들어왔다. 완벽한 기회를 잡은 픽턴은 곧바로 프랑스군의 전초선을 강타했다.
영국군의 보병들은 "후라(hurrah : 만세)!" 라는 외침을 내지르며 사격을 퍼부었고, 프랑스군의 종대는 처참하게 살육되었다. 일단 군대의 앞선에서 이변이 벌어지자, 아직 타격을 받지 않은 프랑스군의 뒤쪽 대열조차 혼란에 빠졌다. 픽턴은 적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고 총검 여단을 돌격시키며 소리쳤다.
"돌격! 후라!"
바로 그 말이 픽턴이 생애에서 외친 마지막 말이 되었다. 영국군의 보병들이 열기에 차서 진격하고 있을때, 픽턴은 관자놀이에 총탄을 맞고 즉사했다. 하지만 그가 내린 마지막 명령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영국군의 거센 공격에 동즐로는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위기에 빠진 동즐로를 구하기 위해 프랑스군의 또다른 사단이 마르코네의 지휘 아래 진격해 왔다. 그들은 "황제 폐하 만세!" 를 외치며 반격을 시작했고 우익에 있던 뒤뤼트 역시 사단 병력을 이끌고 합세했다. 여기에 더해 보병들의 뒤에 있던 프랑스 기병대마저 움직이기 시작하자 영국군은 또다시 파멸에 빠지는 듯 했다.
상황을 바꾼것은 워털루 전역의 부사령관 옥스브리지가 출격시킨 기병대였다. 어려운 상황에서 먼지를 뒤덮어 쓰며 적을 상대로 분투하고 있던 영국군의 92연대는, 그들의 옆을 위풍당당한 왕립 노스 브리티시 2용기병연대가 스쳐 지나가며 전진해가자 감격을 금치 못했다. 회색말들을 보유했기 때문에 더 그레이(The Gry)라는 별명을 가졌던 2용기병연대를 비롯해 1,2 왕실경호연대, 왕립근위병연대, 1근위용기병연대 등의 영국군 기병대의 전력은 막강했다.
유럽 대륙에서는 지난 20년간의 전투로 인해 좋은 말들이 씨가 마를 지경이었고 바로 그 점이 1813년과 1814년의 나폴레옹을 파멸로 이르게 한 요소였지만, 본토가 침략당한 적이 없었던 영국의 중기병들은 상황이 달랐다. 건장한 기병대원들은 아주 큰 말을 타고 있었고, 자신들의 앞길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듯 달려나가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너무 용맹스러운 나머지 '주체를 못하고 내달리고 보는' 심각한 단점도 가지고 있었다) 당당한 동지들의 모습을 본 92연대 등은 진심을 담아 환호했다.
"만세!"
영국 기병대는 용맹스럽게 돌격하며 프랑스 기병대를 쫒아내고, 이어서 라 에 상트 주변을 압박하고 있던 적의 좌익인 알릭스의 사단 역시 물리쳤다. 이 시점에서 영국 기병대는 이미 폭주를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오히려 기세를 탄 것이 되어 적을 미친듯이 괴멸시키고 프랑스의 영광스러운 독수리 군기 마저 2개를 탈취했다. 2용기병연대 소속으로 프랑스군의 45전열보병연대에서 군기를 탈취한 찰스 이워트 하사관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적군에게서 독수리 군기를 빼앗었다. 그와 나는 군기를 두고 거칠게 싸웠다. 그가 내 사타구니를 찔러 들어왔을 때 슬쩍 피하고 나서는 그의 머리를 잘라버렸다. 그 다음에는 창기병의 공격을 받았다. 나를 찌르려는 창을 검으로 막아 창은 오른쪽으로 비켜갔고, 나는 아래서 위로 턱을 베어버렸다. 이까지 잘려 나갔다. 이어 한 보병의 공격을 받았다. 그 작자는 내게 총을 쏜 뒤 총검으로 달려들었다. 그러나 금세 승부는 끝났다. 나는 공격을 막은 다음 위에서 아래로 머리를 베어버렸다. 독수리 군기 쟁탈전은 그렇게 끝났다."
하지만 용맹과 영광이 가득했던 이 돌격은 최대의 성공을 거둔 시점에서 만용과 무모함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 시점에서 기병대가 공격을 멈추고 재집결을 하여 후방에 대기했다면 이는 영연합군의 완벽한 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며, 응당 그러하여야 했다. 그러나 승리의 영광에 도취된 기병대는 집합 나팔신호조차 무시하고 프랑스군의 포병대를 베기 위해 쫒아나갔다.
냉소적인데다 귀족적 마인드를 가진 웰링턴은 비천한 하층민과 무뢰배들이 가득한 군인들을 경멸했지만, 이베리아 반도 전쟁에서 자신의 지휘 아래 경험을 쌓고 영광을 성취한 병사들에 대해서는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가 워털루 전투에 앞서 병사들의 질을 보고 투덜거린 이유도 영미전쟁 탓에 자신이 이끌던 병력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떠난 상황 탓이었다. 그러나 웰링턴은 반도전쟁 중에도 '기병대' 라는 조직에 대해서는 질색하는 태도를 보였다.
유사 이래 최근의 백여년을 제외한 수천년 동안 기병대는 전투의 승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조직이었다. 그러나 까탈스럽고 종잡을 수 없는 '전장의 군인' 들 중에서도 그것이 가장 심한 기병대는 그때그때에 따라 믿을 수도 없는 활약을 보여주지만 반대로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웰링턴은 기병대의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면서 폭주해서 내달리고 보는' 모습에 대해 혀를 찼다. 그리고 이는 워털루에서도 똑같이 재현되었다.
적의 포병대를 추격하여 베는 재미에 맛이 들린 기병대는 아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지점을 떠나 끝도 없이 적을 추격했다. 어찌나 열성적으로 달리는지 이미 말들도 지쳐 기력을 소진한 상태였지만, 기병대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오직 앞만 보고 미친듯이 달려댔다. 기병대를 이끌던 폰슨비 등은 어떻게든 이 멧돼지처럼 미친 병사들을 자제시키려 했지만 전투의 열기 속에서는 모든 것이 허사였다. 심지어 어떤 장교는 이렇게 외치며 달려나갔다.
"파리로!"
자제를 못하던 기병대원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대가를 치루었다. 우익에 있던 자키노등의 기병대와 새로운 흉갑기병들은 영국 기병대를 좌우에서 찔러대어 괴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수 많은 기병대원들은 허둥지둥하며 어쩔 줄을 모르다 처참하게 살육되었고, 중기병들은 경기병들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목숨만 건지고 돌아올 수 있었다. 돌격에 나선 영국군의 기병대원 2,500명 중에 1,000여명 정도는 귀환하지 못했다. 이는 부대를 이끌던 폰슨비도 마찬가지였다. 그 역시 프랑스군의 기병에게 살해된 것이다. 16경용기병연대의 톰킨슨 대위는 그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저녁이 다 지날 무렵에는 여단 전체를 합해도 일개 대대를 넘지 못했다. 1용기병연대의 한 대대에서는 한두 명 밖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 대대는 모두 적군의 예비부대 속으로 말을 달렸고 죽임을 당했다. 나는 적군이 자신들의 손아귀에 떨어진 포로를 한 명도 살려두지 않았다고 본다. 단 한 사람도 항복하는 일 없이 대대 전체가 전사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전투가 소강상태에 이른 3시 쯤이 되면, 양측은 서로 자기 위안을 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다. 웰링턴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는 데를롱의 진격을 철저하게 격퇴했고, 적의 4분의 1에 달하는 병력을 없앴으며, 약 2,00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여전히 우구몽에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기에, 웰링턴은 우구몽과 라 에 상트 모두에서 나폴레옹의 의지를 저지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적 기병전력의 40%를 제거했으며 이제 남은 기간 동안 영국군의 기병대는 더 이상 부대로서 제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 자명했다. 아직 나폴레옹에게는 충분히 여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 벌어질 공세에서 이 부분은 영국군에게 있어 대단한 문젯거리가 될 만 했다.
만일 죽은 픽턴의 5사단이 아군 기병대의 우렁찬 고함 소리와 돌격에 유혹되어 내달렸다면 그 시점에서 모든것이 끝났을 수도 있다. 그렇게 틈이 발생했다면 나폴레옹은 틀림없이 적을 괴멸시키고 승패를 결정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보병들은 기병대와는 달리 진지로 되돌아가라는 명령을 충실히 준수했기에 파국을 피할 수는 있었다.
아직 아무것도 확정된 것은 없었다. 전투는 이제 중반을 향해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