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편을 처음보시는 분들은 제 아이디를 검색해서 1편부터 봐주세요.
그럼 재밌게 읽어주세요!
- - -
##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간사하다. 그녀와 만나고 그녀와 다음 약속을 잡았다는 이유하나만으로 이렇게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다니. 오늘이 토요일이라는 사실은 당연히 아름다웠고 다가오는 시험마저도 유쾌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심지어 아픔으로 몸져누운 환자들이 있는 병실마저 나쁘지 않았다.
“저기 형. 무슨 좋은 일 있어?”
지나치게 표정관리를 못한 탓일까. 병실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소민이가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물었다.
“좋은 일이라. 있다고 할 수 있지.”
나는 미소 지으며 의아한 눈빛을 내게 보내고 있던 소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좋은 일?”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소민이가 눈방울을 빛냈다. 저 반짝이는 눈을 보면 항상 이상하게 마음의 무장이 해제된다. 나는 줄곧 주변사람들에게 비밀로 했던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살짝 일부분을 털어놓았다.
“사실은 어제 약속 있다는 사람 여자였거든.”
병실 안에 있는 사람 중 소민이를 제외하고는 내 얘기를 귀담아 들을 사람은 없었지만, 조심스레 소민이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법이니 조심해서 나쁠 일 없겠지.
“뭐!? 형!”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여주다니. 자기 간호도 팽개치고 여자를 만나러가서 그런 걸까. 머쓱해지며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내 예측은 소민이의 천사 같은 마음씨를 간과했기 때문에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여자라니! 우리 누나는?”
소민이는 내게 서운하거나 원망스런 마음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자기 누나를 생각해서... 응?
“무슨 소리야. 여기서 소희가 왜 나오는데?”
곱씹어보니 소민이의 발언은 소스라칠 만큼 무서운 얘기였다. 잊고 있었다. 귀엽고 착한 소민이의 최고 단점.
“당연하잖아. 나는 내 미래의 매형은 현우형 아니면 안 돼!”
그것은 바로 소희를 데려갈 사람이 오직 나뿐이라는 억지였다. 미국 가기 전에는 어려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크고 나서도 이 점까지 달라진 게 없었다. 소민이에게 무서운 소리하지 말라며 손 사레를 치고 싶었지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눈망울을 보니 마음이 약해진다. 이 착한 녀석을 앞에 두고 제 누나의 험담이나 다름없는 소리를 할 수 없었다.
“있잖아 소민아. 나랑 소희는 어렸을 때부터 쭉 친구였어. 알지?”
“응.”
“그래서 물론 소희가 예쁘고 요리도 잘하고 좋은 여자인 건 나도 잘 알지만 전혀 여자로 보이지 않아.”
이 정도 말했으면 소민이도 잘 알아들었겠지.
“그럼 여자로 보려고 해봐. 솔직히 우리 누나 성격이 괴팍해서 그렇지! 동생인 내가 봐도 예쁘고 재주도 많은걸!”
그래 너도 알고 있구나. 네 누나 성격이 아주 괴팍한 걸. 알면서도 그러는 건 반칙이라고. 그나저나 이 녀석 미국물을 먹더니 꽤 근성이 생긴 것 같다.
“그래. 그렇지. 근데 이런 얘기는 소민이 네가 아무리 해도 소용없을 걸? 만에 하나 내가 소희를 여자로 보게 됐다고 치자. 소희는 전혀 날 남자
로 안볼 걸?”
“그건... 아냐!”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억지를 부리다니. 새삼스레 소민이가 옛날보다 훌쩍 커버리긴 했어도 여전히 어린 남동생 같다.
“아니긴 뭐가 아닌데?”
귀여운 아이를 괴롭히는 느낌으로 미소 짓는다. 소민이가 쭈뼛, 머뭇거린다.
“그러니까...”
“응. 그러니까?”
내심 소민이가 이 억지를 어떻게 이어나갈지 궁금해져 귀를 기울였다. 그 때.
“야 은소민!”
“누나?”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소희가 등장했다. 젠장! 타이밍도 좋다. 나와 소민이는 서로 소희의 눈치를 살폈다. 설마 우리 둘이 했던 얘기를 들은 건 아니겠지? 자기가 없는 자리에서 북 치고 장구치고 있던 사실을 알면 그냥 넘어가진 않을 것이다.
“그래 누님 오셨다. 어디 불편한데는 없고?”
“어? 어어.”
소희는 오자마자 이리저리 소민이를 살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투박하게 소민이를 대하기는 해도 동생에 대한 애정을 알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소희 몰래 소민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압박을 가한다. 그래 내가 나서는 것 보다야 환자이며 동생인 네가 나서야지.
“근데 누나.”
“응 왜? 어디 불편해?”
“혹시 들었어?”
꿀꺽.
도둑이 제 발 저린다더니. 물어봐 놓고도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나한테까지 들린다. 아주 찰나의 정적이 흐르자 소민이를 따라 나도 마른침을 삼켰다.
“뭘? 너 설마.”
“응?”
도끼눈으로 소민이를 재려보는 소희.
“내 욕했냐? 어쩐지 복도 걸어오는데 귀가 간지럽던데.”
휴. 다행이다. 소희는 못 들은 모양이다. 동시에 소민이도 표정이 풀어지며 해명했다.
“아냐! 내가 누나 욕을 왜해! 이렇게 맨날 동생 챙겨주는 누나를!”
괜히 저러니까 더 의심 살 것 같다. 내가 보기에도 과장된 액션을 누나인 소희가 모를 리 없다.
“그렇지?”
응? 아무래도 환자의 가호가 있는 것 같다. 날카로운 추리의 날을 새울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소희는 표정을 풀었다.
“어쨌든 그렇다고 해도 이 누나는 너에 대한 그 날의 분노가 풀리지 않아. 빨리 나으라고. 동생아.”
분명 말투도 그렇고 표정까지 산뜻했지만 왠지 모르게 무섭다. 그 날의 분노라면 역시 소민이의 사고 당일을 말하는 거겠지. 왠지 소희라면 정말로 소민이가 완쾌하고 나서 몇 대라도 꿀밤을 쥐어박을 것 같다.
“으아. 그것만은 봐줘.”
소민이가 한껏 울상을 지었지만 소희는 가볍게 소민이를 묵살하며 나를 돌아봤다.
“현우야. 오늘 시간 좀 내줄래?”
이것은 데이트 신청? 일리는 없고.
“왜?”
“장 좀 보려고. 혼자가려니까 심심해서. 너도 알겠지만 얘가 참 생긴 거랑 다르게 입맛은 까다롭잖아. 어제 내가 만든 타르트가 먹고 싶다고 해서 간만에 만들어보려고.”
“그래? 그럼 만들면 나도 좀 주는 거지?”
정말 놀랍게도 소희는 진짜 요리를 잘한다. 소민이 말마따나 소희가 정말 가진 바 재주가 많은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요리뿐 만아니라 간단한 제빵까지 가능할 정도다. 물론 맛도 있고. 장 한 번 같이 봐주고 소희가 만든 타르트를 얻어먹을 수 있다면 나쁘지 않지.
“주겠지?”
“그래. 같이 가지 뭐.”
흔쾌히 소희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럼 말 나온 김에 지금 가자.”
소희의 말에 소민이가 다시 한 번 울상을 지었다.
“누나! 오자마자 바로 가려고? 현우형까지 데리고? 나 혼자는 심심하단 말이야.”
이 남매는 옛날부터 그랬지만 참 미묘하다. 누나는 동생을 괴롭히고, 동생은 괴롭힘을 받는다. 사이가 안 좋을 법도 한데, 이럴 땐 서로에 대한 은근한 애정이 느껴진다. 뭐 가끔 둘 사이를 보고 있으면 나도 저런 형이나 누나가 있었으면 할 때도 있었다.
“지금 너 먹고 싶다는 타르트 재료 사러 가는 거거든?”
소희가 곧바로 핀잔과 동시에 주먹을 들어보였다.
“그, 그래. 얼른 다녀와. 기다릴게.”
역시 주먹은 빠른 법이다. 이런 누나나 형이 있었으면 한다는 것은 역시 취소다.
그렇게 소희와 나는 소민이를 뒤로하고, 병원을 나섰다.
23에 계속..
- -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천진희님이 특히 좋아하실 편인 것 같습니다. 다음편도 소희와의 에피는 이어질 거구요.
연주는 다다음편에서 나올 것 같네요.
대충 전체적인 플롯은 다 짜놓고 이야기를 진행중이지만, 역시 중간에 덧붙여지는 내용도 있어서 조금 예상보다 길어지네요. 단편이.(이제 단편도 아니지만)
호흡이 길어질수록 질려하는 분들이 생길까 염려됩니다. 열심히 쓸게요! 감사합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정리해보면
주인공은 군필 복학생인데 학교에 자길 엄청 챙겨주며 신호를 던져대는 이쁜(!) 여후배가 있고
자신은 여자로조차 안보지만 스스로도 인정할만큼 이쁘고 재주많은(심지어 요리도 잘하는) 소꿉친구가 있는데다가
헌팅까지 성공해서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여자분을 만나려고 하고 있다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