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중반 랩스(Raps)사와 바이킹(Viking)사가 공동 개발하기 시작한 클랩스케이트. 이 뒷날이 고정되지 않은 스케이트에 대한
아이디어는 노르딕 스키의 크로스 컨트리에서 부츠와 스키가 분리되는 것에서 나왔던 모양입니다.
스케이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푸쉬(push)로, 전진하려는 방향의 90도 옆 방향으로 스케이트 날을 밀어내면 전진할 수가 있습니다.
스케이트 날이 얼음에 닿으면 두 물질의 온도차이로 인해 얼음표면에 얇은 수막이 형성되는데, 이 때 정확한 방향으로 푸쉬를 하면
지탱하고 있는 발이 미끄러지면서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대부분의 푸쉬의 과정은 스케이트 날의 뒤쪽부터 시작하여 앞쪽 날로 끝나게 되는데, 이 끝나는 과정에서 앞 날의 끝 부분이 얼음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얼음이 파이게 됩니다.
보기에는 굉장히 멋있지만 이 순간은 스케이팅의 감속요인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클랩스케이트는 뒷날을 뒤꿈치와 분리시킴으로서 푸쉬의 거리를 증대시키고, 푸쉬의 전 동작과 마무리에 걸쳐 블레이드와 얼음을 밀착시켜
전진에 필요한 탄력을 최대한으로 만들어냅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클랩스케이트는 엄청난 혁신이었으며, 모든 것을 바꿀 힘을 가진 아이디어였습니다. 위 사진이 바이킹에서 제조하고 있는 클랩 블레이드입니다.
그러나 제작 초기, 랩스와 바이킹에서 공동으로 만들어낸 시제품은 그다지 안정적이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클랩스케이트는 뒷날이 떨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충격이 발생하는데, 이 충격을 견뎌내어야 할 뒤꿈치 부분이 계속 파손되었다고 합니다.
뒤꿈치 부분에 보강을 계속하여 만족할만한 강도를 얻어내자, 이번에는 스케이트 날 무게의 밸런스가 어긋나게 되었고, 이를 보완하자 이번에는 날의 강도가 계속되는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는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이었죠.
스케이터들의 반응도 문제였습니다. 애써 만든 시제품을 선수들에게 착용시켰더니 적응이 어렵다며 계속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빙상계는 예나 지금이나 굉장히 보수적입니다. 특히 장비에 대해서는요.
다른 추진장치의 도움을 받지 않는 운동 중 평지에서는 가장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운동이 스케이팅입니다. 따라서 더욱 위험하지요.
또한 중심운동이기 때문에 장비의 세팅이 극도로 정교해야 하며 세팅이 조금만 어긋나도 선수는 몇 초 안에 이를 알아채게 됩니다.
스케이트 날은 너무 예민해서 바늘만한 흠집만 나 있어도 고속으로 스케이팅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작은 모래 한 알만 밟아도 바로 보호펜스와 얼굴을 부비거나 얼음과 엉덩이를 맞대야 하지요.
이런 스케이팅의 특성에, 새로운 개념의 장비인 클랩스케이트로 인해 자세를 일부 수정할 필요성까지 생기자, 스케이터들은 클랩스케이트를 포기하고 맙니다.
몇 년의 시간과 투입된 자금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상황, 랩스 사는 결국 클랩스케이트 개발을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나, 바이킹은 이를 포기하지 않았지요. 연구와 개량을 거듭하며 때를 기다립니다.
2) 금색과 빨간색의 단풍, 쇼트트랙 세계를 물들기 시작하다.
바이킹 사의 말단 기술자였던 Johan Bennink(이하 요한) 은 새롭게 저변을 넓혀가는
쇼트트랙에 대한 바이킹의 태도에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바이킹은 스피드 스케이팅 용 블레이드만을 생산했고, 쇼트트랙 선수들은 이를 쇼트트랙에 맞게 세팅하여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쇼트트랙과 스피드 스케이팅은 정말 비슷하면서도 또 많이 다른 운동이라는 점입니다.
기술의 기초는 비슷하지만, 트랙의 크기에서부터 차이가 나기 때문에 세부 기술은 많이 다릅니다.
정말 큰 문제는 위 그림의 바이킹 블레이드에서 보듯이, 블레이드 끝의 날카로운 부분이었습니다.
블레이드 끝을 연마하여 처리하지 않고 뾰족하게 남겨두었기 때문에 많은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쇼트트랙처럼 선수들이 충돌하여 넘어지는 경우에 블레이드 뒤쪽의 날카로운 부분이 대퇴부를 관통하는 등 끔찍한 사고가 가끔 일어났지요. 제 눈으로 본 것만 두번입니다.
급속한 기술과 장비의 발전에 의해 나날이 빨라져가는 쇼트트랙의 경기 양상을 바이킹 블레이드는 지원하지 못한 것이죠. 운동경기중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선수들의 안전이, 다른 요인도 아닌 장비 때문에 위협받고 있었습니다.
또한 블레이드의 강도도 문제였습니다.
블레이드의 구성을 이야기 할 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두번째 금색 블레이드를 보시면 되겠습니다. 금색의 로고가 새겨진 부분을 프레임(Frame) 이라 하고, 은색의 얼음에 접촉하는 부분을 엣지(Edge) 라고 합니다.
기본적인 블레이드의 제조 방법은 프레임을 먼저 만들고 그 프레임의 홈에 엣지를 끼워넣어 접착시키는 방법입니다.
바이킹 블레이드는 엣지의 성능에서는 90년대 중반을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여전히 최고였습니다만, 프레임 부분의 강성은 부족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스피드 스케이팅의 프레임 부분에는 벤딩(코너활주에 용이하도록 날을 휘는 것)이 필요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벤딩은 벤딩머신이라는 압력기계를 손으로 눌러서 하게 되는데, 이 압력을 버틸 수 있는 강성이 바이킹 블레이드에는 없었지요.
그래서 예전에는 바이킹 블레이드를 휘어놓는 데 사용하는 고무망치가 선수들의 필수 장비였습니다. 고무망치로 몇 번 때리면 휘어질 만큼의
프레임 강도는, 경기내내 스피드 스케이팅보다 훨씬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쇼트트랙의 특성을 견뎌내기 힘들었습니다.
벤딩이 계속 풀리고(날이 다시 일자로 펴지는 것을 벤딩이 풀린다고 합니다.), 이를 다시 잡고, 또 풀리고...
거기에 스타트 등의 특정상황이나 연습, 경기 중 충돌 등 블레이드가 충격을 많이 받는 상황에서는 날이 못 쓸 정도로 휘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쇼트트랙 씬에서 바이킹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높아져가고 있던 시절. 한, 중, 일 등 아시아 지역의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중국에 공장을 만든 바이킹. 그러나 중국에서 생산된 블레이드의 품질은 그야말로 최악이었습니다. 아무 힘도 없는 프레임에, 당시 부츠에 날을 부착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했던 납땜과정에서 일부 블레이드는 열을 버티지 못하고 표면이 쭈그러 들 정도로, 매우 조악한 품질을 갖고 있었지요.
그러나 바이킹의 점유율은 줄지 않았습니다. 왜냐구요? 대안이 없으니까요...
바이킹의 쇼트트랙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자, 요한은 새로운 회사를 만들 것을 결정하고 메이플스케이트(MAPLE SKATE BV)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1997년 여름, 마침내 요한의 역작 메이플 골드(MAPLE Gold)블레이드가 탄생합니다. 쇼트트랙 전용 블레이드로서, 기존 바이킹 블레이드로 쇼트트랙을 할 때 발생했던 애로사항들을 한번에 해소시킨 블레이드입니다.
알루미늄 7000시리즈의 프레임은 뛰어난 강도와 탄성으로 최적의 벤딩이 가능하도록 지원하였고, Hrc64(엣지의 강도를 말합니다. 설명하려면 조금 길어요;;)의 강도는 얼음이 많이 파이는 코너에서도 저항을 이길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문제가 되었던 것은 1.1mm의 블레이드 두께였지요. 경기용으로는 일률적으로 1mm 두께의 블레이드를 생산하던 바이킹과는 시작부터 다른 태도였습니다.
서양 선수들은 새로운 메이플의 제품을 수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는 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이 눈앞에 있었기 때문에 쉽사리 다른 블레이드를 쓸 수는 없었지요. 기존의 바이킹과 새로운 메이플 골드는 완전히 다른 제품이라 보아도 무방하니까요.
그래서 98년 동계올림픽에서는 금색의 메이플 블레이드가 보이지 않게 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선수들이 바이킹 블레이드와 함께 출전했지요.
그러나...2012년 현재,
나가노 동계올림픽은
바이킹 블레이드가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마지막 올림픽이며,
올림픽이 끝나고 열린 1998년 세계쇼트트랙 선수권대회는
바이킹 블레이드가 쇼트트랙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마지막 공식대회가 됩니다.
P.s 내용이 조금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겁니다. 최대한 쉽게 설명해 놓았으니 천천히 읽어보시면 이해가 빠를 거에요~
다음에는 '3편: 제 손으로 판 무덤' 이 이어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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