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참소
9월에서 11월이 되기까지, 김방경의 토벌군과 삼별초는 대치만 계속 하고 있었습니다. 몇 차례 전투가 있었지만, 이렇다 할 승부는 나지 않았죠. 동사강목에서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적의 배에는 괴상한 짐승의 그림을 그렸는데 강을 덮어 물에 비치며, 마치 나는 듯이 움직였다. 싸울 때마다 적은 북을 치고 외치며 돌진하는데, 서로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여 여러 날을 버티었다."
토벌군이라 하나 김방경이 거느린 병력도 소수였고, 몽고에서 파견된 아해는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었습니다. 고려군의 비율이 얼마나 될 진 몰라도 그들이 바다에 얼마나 익숙할지도 미지수였죠. 반면 삼별초는 수십년 동안 바닷길에는 밝은 이들이었구요. 다만 전라도 점령이 실패했으니 삼별초도 쉽게 들어오지 못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깨뜨린 것은 적 중에서 도망쳐 왔다는 홍찬 등의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어이 없는 모함을 하죠.
"방경이 적과 내통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해는 김방경을 바로 가두어 버립니다. 이어 다루가치에게 보고하며 벌 주기를 요청했죠. 서울로 끌려가는 김방경의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모두 울었다고 합니다. 헌데 일이 다행히 잘 풀리니, 이 다루가치가 무고한 홍찬과 대질시킨 것이었죠. 덕분에 김방경이 무죄인 것이 밝혀졌고, 원종은 그를 위로하며 다시 상장군에 제수한 후 보냅니다.
이 다루가치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데, 이런 공명정대한 모습을 보면 5월에 파견된 탈타아로 보입니다. 이게 누구인지는 찬찬히 얘기하겠습니다.
2. 제주도는 적에게로
이런 혼란스러운 틈을 타 삼별초는 후방에 기지를 마련합니다. 바로 제주도였죠. 고려 중기까지도 제주도는 독립국 내지 고려의 식민지로 그 곳의 유력자에게 성주 등의 벼슬을 내리며 다스리게 했습니다. 이랬던 것이 숙종부터 의종 때 이르러 지방관을 파견하게 됐죠. 그간 있었던 격동의 역사 속에서도 제주도는 무난히 지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파견된 지방관들이 부패하기가 너무 쉬웠다는 것이죠.
대몽항쟁이 끝날 무렵 제주도에 파견된 자들의 문제가 여러 차례 문제되기도 했습니다. 15세 이상 되는 남자는 기존의 세금 이외에 콩 10섬씩을 바쳐야 했고, 아전들도 말 1필씩을 바쳐야 했습니다. 여기에 고씨 등 토착 호족들 역시 만만치 않았구요. 밭 사이의 경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아 땅을 뺏기는 경우가 많았고, 이는 1234년 판관으로 부임한 김구가 밭 사이에 돌담을 쌓은 후에야 어느 정도 해결됩니다. 이게 현재까지 제주도의 특징으로 남아 있죠.
이런 상황에서 중앙 정부에 대해, 혹은 고려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여론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고려사 등의 사서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는 1267년 문행노의 반란이 기록돼 있습니다.
이런 제주도에 삼별초는 손을 뻗기 시작합니다. 조정에서도 이를 걱정해 영암 부사 김수에게 200명을 주어 제주도를 지키게 했고, 이전에 등장했던 장군 고여림에게 70명을 주어 뒤따르게 했죠. 이 고여림도 제주 고씨(야하~)였구요. 이런 상황에서 삼별초 별장 이문경은 제주도에 상륙합니다.
당시 제주도의 성주 고인단은 중립을 표명했고, 고려군도 삼별초도 그가 있는 대촌성(현 제주시청 근처)에 들어가지 못 합니다. 그리고, 둘은 전투를 벌였고 삼별초가 승리하죠. 이 때 고려군에 나주 출신으로 19살이 된 진자화라는 이가 있었는데 그가 적진에 들어가 곽연수라는 자를 베니 사기가 크게 올랐다고 합니다. 하지만 다시 들어가서 전사해 버리니, 삼별초는 이 기세를 타고 돌격했죠. 이렇게 고여림과 김수는 전사했고, 제주도는 삼별초에게 완전히 떨어집니다. 성주 고인단이 그들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제주도에서의 활동은 마지막까지 묵인했고, 제주도민들은 오히려 삼별초를 도왔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삼별초는 해방군이었겠죠.
토벌군은 진도 앞 해남에서 멈춰 있고, 제주도가 떨어지며 삼별초의 세력 확장이 계속되는 상황, 그런 가운데 김방경은 돌아옵니다.
3. 일전
당시 고려 정부의 상황도 참 눈 뜨고 보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_-; 세자 왕심을 따라 몽고로 갔던 추밀원부사 원부가 쿠빌라이 칸에게 두연가와 동경행성의 비리를 알린 적이 있었는데 대질하니 동경행성의 관리들은 모두 자기네 편만 들어 고려에서 이들을 무고한 것으로 결론이 나 버렸고, 고려에 온 남송의 무역선으로 고려 사신이 비밀리에 왔다 갔다는 것까지 알려지면서 이를 모두 따지려 든 것이었죠. 어디 이것만 따졌겠어요. 일본 정벌을 위한 준비가 더디다는 것까지 단단히 따지니 원종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삼별초 토벌도 되지 않았고, 안 되겠다 싶어 박천주를 보내 삼별초를 달래려 했죠. 마침 황제의 명의로 된 삼별초를 달래는 조서도 도착한 상태였으니까요.
이런 가운데서 김방경은 군사를 몰아 진도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병력도 제대로 충원이 되지 않은 상태였고, 아해는 여전히 싸우기를 두려워 했습니다. 적이 온다는 말을 듣자 그가 나주로 달아나려 하니 김방경은 이렇게 협박합니다.
"만일 물러가면 이것은 약함을 보이는 것이다. 적이 이긴 기세로 몰려온다면 누가 감히 그 칼날을 당하겠는가. 황제께서 만일 문책한다면 장차 무슨 말로 대답하려는가?"
이에 아해는 물러나지는 못 했지만, 앞으로 나가지도 않았죠. 김방경은 홀로 고려군만 데리고 공격했지만 강력한 반격을 맞았고, 주변의 관군들도 모두 두려워 달아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당당히 돌격합니다.
"승부를 결단하는 것은 오늘에 달려 있다"
기세 좋게 달려갔지만 대장선이라 하더라도 단 한 척, 삼별초는 그의 배를 포위해 진도 쪽으로 몰고 갔습니다. 고려군 지휘관이 적에게 생포될 위기에 처한 것이었죠. 그와 부하들이 죽어라 싸웠지만 다들 크고 작은 부상을 입고 힘이 다 해 있었습니다. 어느새 배는 진도에 거의 다다른 상태, 삼별초는 마침내 그의 배에 뛰어듭니다. 김천록이라는 자가 올라온 자를 찌르긴 했지만 그 이상을 바라긴 힘들었죠.
"차라리 물고기의 뱃속에 장사지내게 될지언정 어찌 적의 손에 죽으랴"
김방경은 그렇게 외치며 바다에 몸을 던지려 합니다. 다행히 허송연, 허만지 등이 말렸고, 그런 모습을 본 병사들이 부상을 입었음에도 다시 무기를 들고 싸웠습니다. 김방경 역시 굳건히 지휘를 계속하니 삼별초도 당황했죠. 이런 상황에서 장군 양동무가 몽충으로 포위망을 뚫으니 김방경은 겨우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살긴 했지만 아해도, 고려군도 다 도망가서 대장선 홀로 싸워야 했던 상황, 치욕도 치욕이지만 이런 명령불복종을 그냥 넘길 순 없었죠. 그는 안세정, 공유 등 구원하러 오지 않은 자들을 군법으로 참하려 했지만, 아해가 말립니다. 그들을 죽이면 역시 싸우지 않은 자기에게도 해가 될 것이었으니까요.
+) 뭐... 수백년 후의 어떤 전투랑 뭔가 오버랩되죠? -_-; 필사즉생 생즉필사라도 튀어나와야 될 분위기입니다.
이 전투로 인해 확실해진 것은, 정말 제대로 된 병력과 작전이 아니면 쉽게 그들을 몰아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김방경 홀로 애써 봐야 될 게 아니었죠.
이후 삼별초의 활동은 최전성기를 맞게 됐고, 쿠빌라이 칸 역시 그들을 쉽게 볼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됩니다. 삼별초의 활동이 계속될수록, 토벌군의 규모도 커져 갔죠.
진도를 쓸어버릴 폭풍이 준비되는 동안,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화려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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