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께서 "갈비탕 아닌가?"라고 하시어 내관이 없고 오늘은 부패釜貝(가마솥에 조개를 쪄서 먹는 것)이라 아뢰니 "아아 난 부패가 제일 싫노라" 하시었다. 이 때 세자와 수양 대군이 들어 와 예를 올리는데, 상이 이르기를
"수양은 나이가 들수록 태종 대왕을 닮아가는구나. 마치 다시 태어나신 것 같아 기쁘도다."
하니, 수양 대군은 그저 겸양하며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사관은 논한다. 이 때 수양 대군이 황급히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는 말도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세종 실록 27년 3월 13일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거 안 나옵니다)
세조께서는 일찍이 세종에게 항상 "아바마마랑 닮았구나. 닮았어"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 때 세종은 겉으로는 기뻐하셨지만 안색이 어둡고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 한다. 어렸을 때는 다른 것 같기도 했는데 장성하며 더욱 닮아가니 사람들은 이를 상서롭지 못 한 징조로 여기면서도 겉으로는 좋은 말만 했다.
(중략)
세조는 매양 불도를 숭상하여 "오홈마니반메옴"을 퍼뜨리고 다녔는데 하루는 상왕 (단종을 이른다) 과 사냥을 가다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을 발견하여 "내가 마음(心)으로 볼 수 있는(觀) 법을 깨쳤으니 네놈 왕씨들은 모두 없어져야 된다!"고 꾸짖으매 그 모습을 보던 상왕이 몰래 붓을 떨어뜨리는 척 하여 무덤에 다가가 "잘못했다 하면 용서받으실 겁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무덤에서 "왕씨 다 죽게 생겼다 이놈아!"는 말이 울려 세조께서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다 끝내 넘어질 뻔했으나 뒤에 있던 소나무가 급히 달려와서 부축했으니 그 충성에 감탄하여 정이품 벼슬을 내리니 이게 바로 정이품송이다. 이양인들의 얘기에도 엔투(円投)와 후오룬(後吳嫩)이라 불리는 움직이는 나무가 있다 하니 한낱 허망된 말로 여기면 안 될 것이다
(수양 비사. 구하신 분 있으면 저한테도 좀...)
태상왕 (태종대왕을 이른다) 께서는 세조가 어릴 때 문안을 드리려 해도 한사코 거부하고 서로 만나는 것조차 거부하였으며, 공적인 자리에서 세조를 대함에 있어 언제나 칼을 차고 호위를 더 엄히 하였다 한다.
근래에 서학이 들어오면서 도불갱아圖不坑我라는 말이 들어왔는데, 여기서는 같은 얼굴과 모양을 한 두 사람이 만나면 하나는 죽는다고 했으니 이것을 여기에 넣어 설명하려는 흉측한 무리도 있으나 군자가 믿을 도는 아닌 것이다. 또 어떤 불궤를 도모했던 이는 "태종대왕께서 거동이 불편하지 않으신데도 굳이 세종대왕께 선위하신 것은 이를 경계함이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세조께서 태어나신 지 1년 후에 태종께서 선위하셨기에 나온 망발일 뿐이다. 이는 "세조가 집현전을 없애서 조선의 과학력이 떨어졌다"는 참소를 올린 유생 문명중과 다를 바 없는 소인의 말이라 하겠다. (작은 글씨로 "홍문관도 똑같은 옥당(역주 Jade Hall)이고 없애고 다시 지으면 포인투(역주 :의미불명)가 누적되거늘"이라고 적혀 있다)
(정약용의 유품 중에 나온 글. 탄소 측정 결과 25.7%로 사실상 진품으로 판명됐습니다)
태종대왕께서 승하하시기 전 비로소 대군을 만나 끌어안으며 "나는 평생 효도하지 못 했으니 너는 커도 효도하거라" 하였으나 세조께서는 아직 어리시어 뜻을 모르고 고개를 젓기만 했다. 이에 태종께서 안색이 변하시고 가슴을 두드리시다 결국 쓰러지셨는데 한나절 후에야 다시 일어나시어 "만나면 안 될 것을 기어이 만났으니 어찌 하랴. 그래도 내 뜻을 따라 주길 바랄 뿐이노라." 하셨고, 숨을 거두시기 전 "아신세신(我信世信)"이라 하셨는데 처음엔 이를 세종대왕을 뜻 하는 것인 줄 알았으나 후에야 세조대왕을 뜻하는 것인 걸 알고 모두 놀라워하면서도 그 선견지명에 두려워 했다.
(해동야설. 동이라고 적혀 있는 판본도 있다. 선의로 썼다고 하니 진품일 것입니다. 의외로 훈민정음으로 적힌 것도 있는데 거기에는 이 말이...)
... 계속 하다간 끝이 없겠네요. 그만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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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아버지 태종과 둘째 아들 세조. 이 둘에게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우선 왕권이 강했던 왕이었고 이상보다 현실을 추구했으며, 오랜 실무 경험과 문무 겸전으로 종친 중에서도 돋보였습니다. 사관들의 잔소리에 짜증내면서도 유교 정치의 근본을 흔들지 않았고, 학식도 대단해서 당대의 유학자들을 데꿀멍하게 만든 왕들이었죠. 태정태세문단세 동안 (정종은 좀 -_-a) 유능이라는 말을 안 넣을 수 없는 왕들이 나타났다는 건 우연일까요 조선 왕실의 축복일까요.
에 그리고... 권력을 위해서는 가족도 죽이는 왕들이었죠 -_-;
꽤나 피를 흘려서 왕위에 올랐고, 둘 다 많은 분야에서 업적을 올린 왕들이었지만, 평가는 꽤나 갈립니다. 세조가 좀 많이 까이는 면이 있긴 합니다. 사육신의 업적은 후대에도 충신의 표본으로 칭송되었고, 그들의 "나으리" 드립은 현대에 들어와서 더 통쾌하게 느껴지니까요. 그가 숙청한 김종서 등은 명장이자 명신 그룹이었구요. 반면 태종이 숙청한 정도전 등에 대한 재평가는 꽤나 최근에 이루어졌죠. 그나마도 "요동 정벌하려 했던 정도전 죽이고 명나라에 알아서 기었다"는 좀 요상한 쪽으로 까이고 있구요.
뭐 하는 모습도 닮았고 얼굴도 붕어빵인 -_-; 두 사람. 이 둘에는 꽤나 큰 차이가 있습니다. 폐위된 단종에 대해 얘기하기 전에... 세종대왕을 만든 태종을 세조에 한 번 비교해 보겠습니다.
1. 둘의 방식
어차피 왕조국가에서 왕권을 위해 피를 흘리지 않은 왕은 없다시피 하니까 그렇다 치죠. -_-a 그 이유도 명분을 업은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서였으니 다 따지고 보면 다를 건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그 이후죠. 그리고 그 일을 벌인 방식이구요.
태종도 사람을 죽일 때 별의별 이유를 다 갖다 댔습니다. 특히 자기 처가 민씨 집안을 박살낼 때가 그랬죠. 그 이전에도 이들을 벌 주라거나 하는 적은 많았스니다만...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은 이 말이었죠.
(태종이 세자에게 선위하려 했을 때) "온 나라 신민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스스로 다행하게 여겨 기뻐하는 빛을 얼굴에 나타냈으며, 전하께서 여망에 굽어 좇으시어 복위하신 뒤에 이르러서도, 온 나라 신민이 기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민무구 등은 도리어 슬프게 여겼습니다." (태종 14년 7월 10일)
남들이 울 때 웃었고, 웃을 때 울었다. -_-a 말 그대로 핑계일 뿐이었죠. 이후 그들의 동생 민무회, 민무휼을 죽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겉으로는 반대하는 척 하면서 대신과 대간들에게 더 큰 벌을 요구하게 했고, 그들이 포기하려고 하면 "왜 더 나서지 않는 거냐"면서 오히려 탓 했습니다. 대신들은 태종의 진심을 알 때까지 계속 무릎 끓고 그들의 죄를 물어야 했죠.
이런 모습은 세조 때와 꽤나 비슷합니다. 자기가 공격 받았다는 핑계로 자기의 적을 몰아붙이고, 바지 사장 수준이었던 임금 대신 권력을 휘둘렀다가 평화적으로 이어받았다는 점에서요. 심지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실력자로 인정받고 온 것까지 비슷합니다. 하지만... 그 후의 대처가 너무도 다르죠.
정도전의 가족은 당대에 이미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요직까지는 아니었지만 관직에 진출할 수도 있었죠. 그가 철퇴로 죽인 정몽주는 그가 왕일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정도전 이후로 그가 죽인 인물은 의외로 얼마 없습니다. 간단히 몰살시킨 쪽은 자기 처가밖에 없어요. -_-;
반면 세조는 대신들을 한 차례 쓸어버린 후 단종을 압박하기 위해 이 놈 저 년 다 엮어서 처벌을 주장했고, 왕 된 이후에는 다 죽여 버렸습니다. 자기가 숙청한 자의 가문은 아예 노비로 떨어뜨려버렸죠. 공주의 남자에서 계속 나오죠. 자기 남편을 죽인 자의 밑에서 종 살이를 해야 한다는 슬픔을 겪었던 거죠. 그 중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할 만한 사람은 금성 대군 정도입니다.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도, 금성대군의 반란도 모두 서로의 연계 없이 각자 했었습니다. 세조에 반대하는 세력은 그 정도로 제대로 된 구심점이 없었죠. 세조가 자기 자신에게 떳떳했으면 그들을 다 죽일 이유가 있었을까요? 물론 사육신의 난 때 겪었을 위험 때문이었을 순 있겠죠. 어차피 화근을 다 정리하는 건 당연한 거니까요. 그만큼 그는 정통성도 확실히 지지해 줄 만한 세력도 없었다는 거겠죠.
태종과 세조. 꽤나 비교되는 두 인물입니다만, 태종의 경우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정적을 깔끔하게 제거했고, 나머지 숙청은 자신도 아닌 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처가를 없앤 거야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 했던 계모에 대한 미움도 컸겠지만, 외척에 대한 경계가 그만큼 강했다는 거겠죠. 덕분에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도 위험하다는 이유로 죽었습니다. 하지만 이거이나 이숙번 등의 경우 민씨 형제들이 했던 것보다 더 심한 발언을 하고도 죽이진 않았습니다. 힘을 쓰지 못 하게 할 뿐이었죠. 나이 먹어서 아들에게 별 위협이 안 될 하륜은 건드리지 않았구요. 처가에 대한 것만 빼면 철저하게 핀 포인트로 공략한 것입니다. 자기 형의 무덤까지 파헤친 세조와는 달리 정말 섬세했죠.
태종이 세조 같은 상황이었다면, 혹은 그 반대였다면 태종도 세조처럼 다 쓸어버렸을 거고 세조도 태종처럼 섬세하게 했을까요? 어차피 이건 만약일 뿐입니다. 만약으로 얘기하면 롯데도 우승하죠. (응?)
둘 다 "실세"라는 점은 비슷했지만, 그 내용은 이렇게도 달랐습니다. 명분의 힘일 겁니다. 둘의 성향 차이도 분명 존재했겠지만요. 이런 점에서 하나 더 따져볼 것이 있죠.
2. 공신에 대한 대우
태종의 숙청은 공신에게로 향했습니다. 무사했던 사람은 조영무와 하륜 정도였죠. 역사 시대부터 쭉 있어 왔던 토사구팽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비운의 영웅으로 남은 사람도 많았지만,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었죠. 그러지 않을 경우 드러난 폐해가 바로 세조 치세에 나타났으니까요.
(권람이 자기를 한 고조에 비유해 시를 지어 올리자) "정승은 나를 한 고조에 비유하는가? 한 고조는 능히 공신을 보전하지 못하여 지난해에는 한신을 죽이고 금년에는 팽월을 죽이었으며, 또 태자를 바꾸려 하였으나 사호로 인하여 그치었으니, 하나도 취할 만한 것이 없는 자이다. 내 비록 어질지 못하다 하더라도 반드시 한 고조는 되지 않으련다" (세조 9년 1월 2일)
에 뭐 이런 식이었죠 -_-; 계유정난 전에도 "공신을 너무 많이 책봉한다"는 비판을 들을 정도면 이건 정통성 부족이니 하는 문제를 떠나서 그 자신의 성향이라고 봐야 될 겁니다. 절을 마음대로 지어도 아첨을 들을 정도의 왕권이었습니다. 거기에 힘으로 뺏었다 하지만 그의 정치력과 열정, 애민은 세종대왕과 비교해도 그리 뒤지지 않을 정도였죠. 그런 점으로 본다면 이건 공신들의 힘이 막강해서 그들을 억누르지 못 한 것이 아니라 억누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 자신이 백성들의 말 하나하나에 귀 기울이면 뭘 할까요. 공신들의 영역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데요. 덕분에 이들 세력은 흔히 역사책에 적힌 "훈구파"의 바탕이 되었고, 성종은 이들의 권력을 제한하기 위해 무반에 힘을 싣고 한편으로 재야의 인사들을 등용하니 이들이 "사림파"입니다.
+)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세조가 불교를 좋아했다는 것에 대해 "단종 등에 대한 죄책감 때문이었다"는 설명이 있습니다. 왠지 이게 핑계로 보여요. "우리 세조대왕께서는 어디까지나 죄책감 때문에 그러셨지 불도를 좋아한 건 절대 아니었다능~" 이런 식으로요. -_-;
뭐... 가만히 생각해 보면 세조도 억울한 점은 많습니다. 어느 시대나 그렇게 권력을 휘두르는 집단은 있었고, 왕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과 타협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 걸 두고 생각해 본다면 세조는 정치를 잘 한 면에 있어서는 충분히 순위권에 올릴 수 있죠. 북방에 대해 한 정책이나 검소했던 모습, 죽을 때 "죽으면 빨리 썩어야 되니까 돈 아껴라" 했던 (기존의 절반밖에 안 들었다 합니다) 모습은 간지를 느껴질 정도죠.
그가 이렇게 까이는 건 사육신이 워낙에 잘 알려진 거랑 조선시대가 비교적 최근이라는 게 큽니다. 신숙주와 한명회를 필두로 하는 공신 세력도 권력을 휘두르기도 했지만 그만큼 일도 잘 하기도 했구요. 군사독재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애초에 비교 불가능한 게 그 때는 왕조시대고 지금은 민주주의죠. -_-a 조선의 기반을 깔았던 태종과 비교돼서 근시안적인 모습이 보이지만 그건 태종이 잘난 거라고 봐야겠죠. 예종은 금방 죽어서 그렇지 공신들에 밀리지 않을 만한 모습을 보여 줬고, 성종도 시간의 힘과 사림을 통한 견제로 훈구를 어느 정도 묶어 놓기도 했으니 (오히려 성종 때는 대간들이 너무 날뛰어서 문제였죠) 그 폐해는 그렇게까지 심각하진 않았습니다.
뭐... 짜증나는 게 공부를 하면 할수록 대 놓고 마음껏 깔 수 없게 된다는 거죠.
... 그래도 깔래요. 조선의 장점이 뭔데요. 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서 마음껏, 자세하게 깔 수 있다는 건데요 뭐. 군사독재 문제야 지들이 먼저 세조 이용해 먹었으니.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한 쿠데타? -_-;
어찌됐든, 공신은 물론 왕권에 위험을 주는 외척까지 다 숙청해 버린 태종, 숙청은커녕 공신 한명회를 외척으로 업그레이드시킨 세조. 이 둘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3. 아들을 위하여
불휘 기픈 남간 바라매 아니 뭘쌔 곶됴코 여름 하나니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끄덕하지 않으니 꽃 좋고 열매도 많다)
새미 기픈 므른 가마래 아니그츨새 내히 이러 바라래 가나니 (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그치지 않으니 내를 이루어 바다로 간다)
용비어천가에 나오는 말이죠.
양녕이 온갖 말썽을 피워도 어떻게든 옹호해 주려 한 모습, 결국 그를 폐세자 하고 목 놓아 울었다는 모습에서 냉혈한과는 다른 태종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새로 세자가 된 충녕대군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했죠. 셋째로 정통성이 약한 상황, 거기에 세자 교육도 제대로 되지 않았던 상황이었습니다. 똑똑해서 세자를 갈았지만 마음 놓을 수가 없었죠. 그 때 그가 선택한 것이 바로 왕위에서 물러나는 것이었습니다.
물러나서 놀기도 많이 놀았지만, -_-; 태종이 태상왕이 돼서 한 것은 주로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인 감정은 많이 들어간 것 같지만 아들의 장인 심온을 역모로 몰아 죽인 것은 외척을 견제한다는 점에서 이해할 만 하죠.
+) 이 때 핑계가 돼서 같이 죽은 강상인은 죽기 전에 "나는 죄가 없는데 매를 견디지 못 해 죽는다"고 외쳤다고 합니다. 묵념.
유교 국가인만큼 자식은 왕이 돼도 아버지의 결정을 쉽게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게 틀렸다 할 지라도요. 그런 점에서 특이한 것이 이숙번과 황희입니다. 이숙번은 마지막까지 등용되지 못 했는데, 그 이유는 "부왕이 등용하지 않았는데 내 어찌 등용하랴"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황희의 경우 양녕을 비호하다 쫓겨났음에도 자기가 죽은 후 등용하라면서 추천해 줬죠. 그 둘의 차이는 왕권에 위협이 되는가 아닌가였습니다. 이렇게 위협이 되는 자는 자기의 힘으로 꺾어 주고, 그렇지 않은 자는 쫓겨났더라도 아들의 뜻에 맡기게 했죠. 더 나아가서 아들이 약할 수밖에 없는 군사 부분은 직접 나섰고 그 결과가 (솔직히 좋진 않았지만 -_-; ) 대마도 정벌이었습니다.
건국 때부터 두각을 보이며 사실상 조선 전기의 주인공으로 봐도 아깝지 않을 태종, 그의 마지막은 이렇게 아들의 뿌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정통성도 별로 없었고 제대로 된 실무 경험도 없었던 그 아들은 이렇게 단단한 뿌리에서 성장했죠. 태종이 죽은 후 기가 죽어 살던 신하들이 나름 신참 군기 잡기를 시전했지만 그 정도는 다른 왕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고 덕분에 별 정치적인 사건도 없었습니다. 자식에게 선위하는 것을 자기 왕권 굳히기에만 이용했고, 결국 세자의 힘을 약화시켜 버렸던 선조와 영조와 크게 대비되는 부분이죠.
잠시 자료화면 나갑니다.
역시 태종 하면 유동근씨죠. 이런 사극 언제 또 한 번 나올까요...
"악업은 모두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이렇게 굳건한 뿌리를 통해 조선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을 맞이하니, 그가 바로 세종대왕입니다. 성군은 자신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죠. 태조 이성계가 만든 나라,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온갖 피를 뿌리며 굳건히 뿌리를 세운 나라, 새로운 나라를 일구기 위해 일어난 신진 사대부들, 명이 세워지고 왜구가 토벌되면서 정말 오랜만에 찾아온 안정, 그리고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나라를 번성할 책임이 있는 성군, 그 자리에 세종대왕이 있었던 것이죠.
세조를 더 욕하고 싶은 이유는 이 황금기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게 단종이었다는 거겠죠. 뭐... 태종에 대해서는 얘기하고 싶은 것도 너무 많고, 영상도 너무 길었으니 세조 얘기 하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세조도 자식이 걱정되긴 했던 모양입니다. 첫째는 죽어 버렸고, 뒤를 이은 예종은 노회한 공신들을 상대하기엔 너무 어렸죠.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이미 사십줄이어서 오래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이시애는 난을 일으키며 한명회와 신숙주를 내세웠는데, 이 때 신숙주를 가두고 한명회를 집에서 나오지 못 하게 했습니다. 그 역시 공신을 걱정하기 시작했다는 거겠죠.
그 때문에 나온 것이 구성군 이준과 남이 등의 젊은 공신들이었습니다. 세조 말에는 이들이 나이에 걸맞지 않는 엄청난 승진을 하게 되며 구공신들과 대립하게 되죠. 세조가 더 살았다면 공신들의 세력이 축소되었을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따지면 롯데도 우승한다니까요. -_-; 결국 그는 공신들을 더 견제하지 못 하고 죽게 됩니다. 오히려 늙은 공신들이 어린 왕을 보필하게 하는 원상제를 만들어 이들의 힘만 키워주게 되었죠. 예종 대에 이르러서는 구공신과 신공신이 대립해서 또 피를 흘리게 되었으니 이 때 죽은 이가 남이였습니다. 구성군도 죽진 않았지만 성종대에 역모에 휘말려 폐서인되죠.
예종은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아서 그런지 나름 기대가 됐습니다만, 금방 죽어버렸죠. 이 역시 나름 안타까운 부분이긴 합니다. 그의 뒤를 이은 성종, 이 때 뿌리가 되어 준 이가 세조의 아내 정희왕후였죠. 그는 경혜공주나 단종의 비 정순왕후를 돌봐주며 나름 속죄를 했고, 한명회와 연합하긴 했지만 자기 손자의 왕권을 공고히 해 주었습니다. 어찌됐든 그 남편에 그 아내였던 것 같네요. 정희왕후가 아니었다면 조선은 또 혼란기를 맞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태종과 세조,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두 인물이지만 그 속을 보면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특히 각자의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후대에 영향을 준, 뿌리로서의 역할을 본다면 너무도 큰 차이가 나죠. 자기 자신의 권력만이 아닌 미래의 비전 이런 걸까요. 이런 것까지 정의하기에는 필력이 너무나도 부족하네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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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할수록 열받는 왕중 하나가 세조인거 같습니다-_-
능력 및 시대상황 여부와는 상관없이 정말 현재 지어진 조종으로 절대 부르기 싫은 왕중에 하나가 세조가 아닌가 싶습니다-_-;
친구들과 역사 얘기하다 흥분하면 수양대군 이쉐키 가서 죽여버리고 싶다느니-_-;하는 과격한 언사가 막 나오기도 하죠
능력여부완 관계없이 결코 봐줄수 없는 건 본문에 적혀있듯이 자기 할아버지인 태종을 따라한답시고 했으면서 전혀 다른길로 가버린거 떄문이죠-_;아오!!
태종 인생의 후반부는 정말 '용의 눈물' 대사 하나로 압축해도 될 것 같습니다.
"악업은 모두 내가 지고 가니 주상은 성군이 되시오"
태종을 비롯하여 중국의 유방, 주원장 등 자신의 힘으로 왕위를 가진 이들이 그 공신들을 숙청하는 것을 볼 때면 정말이지 인간사 덧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조는 나름대로 인간적이었던 것일까요? 결과적으로 공신들을 잘 대접해주었으니까요. 그게 정치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였든 간에 말입니다.
하지만 태종이 공신과 외척들 목을 우수수수 날린 결과가 세종대왕의 역대급 태평성대이니, 역사란 참으로 오묘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 초반을 묵직하게 이끌어갔던 고 김무생씨(태조)와 고 김흥기씨(정도전).
정도전이 담담하게 죽음을 맞던 장면이 생각납니다. 한국 사극의 명장면으로 남을 궁예의 최후(태조 왕건)보다 더 인상깊었습니다.
중반을 휘어잡았던 유동근씨(태종)와 남편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최명길씨(원경왕후 민씨).
왕권을 위해 비정하게 정적들을 제거해 나가던 유동근씨의 포~스와
태종 최고의 정치적 동반자였다가 남편의 왕위 등극 후 가족이 몰살당해버린 비운의 여성 최명길씨의 연기가 뇌리에 남습니다.
그리고 후반부의 원톱에 가까웠으리만큼 충격적이었던 이민우씨(양녕대군).
(실제 역사와는 별개로)미칠 수밖에 없었기에 미쳐야 했던 한 인간의 내면을 정말 잘 연기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이민우씨에 가려져서 그런지, 미래의 세종대왕 안재모씨(충녕대군)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