헉헉대며 한 여름의 용산 거리를 뛰어다녔다. 그놈의 컴퓨터 수리가 뭔지, 조립식 컴퓨터를 살 때는 싸고 좋았지만 고장만 한번 났다하면 고역이다. 일을 세시에 마치자 마자 뛰어왔건만 뚝뚝 떨어져 있는 수리센터들을 다 돌아다니기엔 역부족이었다. 세군데에서 전부 '부품에 이상은 없습니다 고객님'소리를 들을때는 허탈한 기분에 수리가 필요없음에도 괜시리 기분이 찝찝해졌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채 식지않은 땀줄기가 영 보람이 없었던 것 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판자촌과 빈곤함이 도사린 골목 옆에 꼭대기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게 올라간 아파트를 보노라면 이 동네를 눈에 담았다는 것 만으로도 좋은게 아닐까 하는 위로는 얻었다.
집까지는 퍼런 버스를 타면 금방이었다. 가방에 부품들을 차곡차곡 넣어 버스에 올라탔다. 다행히 문 앞 바퀴 위 자리가 비어있어서 냅다 앉았다. 버스는 퇴근길 차량들 사이에 낑겨 천천히 움직였다. 버스의 운행코스를 보니 용산에서 노량진을 들러 서초구까지 가는 것이었다. 노량진 하면 많은 기억이 떠오르지만 뻘뻘 흘린 땀과 욱신거리는 발바닥 덕에 딱히 무언가를 회상하지는 않고 그저 그런가보다 하고 멍 하니 이어폰에서 나오는 음악만 듣고있었다.
-이번 정류장은 노량진역입니다. 다음 정류장은..
앞문이 푸쉭하고 열리고 사람들이 하나 둘 올라탄다. 츄리닝에 무거워 보이는 책가방을 맨 여자, 교복에 땀투성이로 거무죽죽한 남학생들, 또각거리는 구두에 테이크아웃 커피를 든 여성. 벗겨진 머리에 허리가 굽으신 할아버지. 틀어 올린 단발머리에 하늘색 블라우스, 무릎 언저리까지 오는 치마를 입고 파란색 스니커즈 운동화를 신은 누나. ...어?
푸시이이익 하고 문이 닫힌다. 카드가 기계에 닿으면서 삑 소리가 난다. 이 모든것이 늘어난 테이프를 감듯 어어어어어어 하며 느릿느릿하게 지나간다. 난 꼿꼿히 두 눈만 그 여자의 얼굴에 고정되어있다. 심장소리만 쾅, 쿵쾅, 쾅 하고 울리는데 고개를 돌릴수가 없었다. 한쪽 팔에 익숙한 상아색 가방을 들고는 총총거리며 아주 천천히 내 옆을 지나간다. 고개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을 만큼 그 사람을 쫒고나서야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안 나는 푸하- 하고 한 숨을 내뱉는다. 자리에 앉으려는 누나에게 차마 들킬까 홱 하고 고개를 돌려서 푹 하고 숙였다. 세상이 좁다지만, 이건 말도 안되는거 아니야? 하고 속으로 비명을 질러본다.
벌써 5개월째가 되어간다. 시작없던 사랑도, 이별아닌 이별도. 시작도 맺음도 없었기에 사라지지 않는 것 처럼 혹은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다음 정류장에서 나는 앞문으로 후다닥 내렸다. 차마 뒷 자리를 돌아볼 용기도 없었다. 내린 뒤에 차가 부웅 소리를 내며 출발할 때까지 난 돌아서 있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 어디서라도 우연히 마주치길, 우연히 마주치길 하며 그렸던 사람이 막상 눈 앞에 등장하니까 숨이 턱 하고 막히더라. 제발 아니길 빌다가, 제발 이쪽을 보지 말기를 빌다가, 제발 날 못 알아채길 바라다가 정작 아무 일 없이 보낸 뒤에야 허무함이 남는다. 숨이 멎을 만큼 깜짝 놀람에 꽉 쥔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정류장 옆 벤치에 주저앉아서 멍하니 버스가 지나간 도로의 끝을 바라본다.
우연처럼 마주치면 할 말이 많았고, 아무렇지 않은 태연함으로 웃을 수 있을꺼라 생각했다. 예전처럼 닮은 사람을 보고도 깜짝깜짝 놀라는 일도 없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장난인지 정작 그렇게 그리던 본인을 보는 순간 얼음이 되더라. 그때의 나와는 다를 게 없는 부끄러움에 숨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끝까지 마주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었을까. 아니면 그저, 또 한번의 인사가 가져다 줄 많은 미련들이 무서웠던 것일까. 다행히 그 사람은 날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하루종일 허탕만 쳤구나. 하고 어둑어둑해져가는 하늘을 바라본다. 설레임도, 슬픔도 없어진 그 사람은 여전히 잘 살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확인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마주치기도 하는구나. 하며 어이없음에 피식 웃었다. 아무말도 못 한 오늘을 분명 후회할 날이 있을까 하고 물으니 병X하고 대답한다. 참 떠나가는것도 갑작스러웠던 사람이, 불쑥 하고 튀어나오니 아직도 심장이 덜컹대는 것 같다. 이제는 우연히 마주쳐도 다시는, 다시는 인사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숨을 멈추고 바라본 그 옆모습이 예전보다 좋은 것 같았다. 기쁘기도, 기쁘지 않기도 하였다. 영원히 태연할 수 없음은 시작과 끝이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해 진 초저녁 바람이 겨드랑이를 차갑게 간질이는 것이 여름이 끝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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