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세의 영조에게 시집 온 15세의 어리다 못 해 불쌍한 중전. "인심이 가장 깊다" "목화꽃이 가장 아름답다"느니 하는 전래동화의 모태가 됐을 법한 여인이 정순왕후입니다.
"사도세자를 인정하지 않고 정조와 대립했으며, 정조가 죽은 후 손자를 끼고 권력을 차지해 스스로를 여주라고 칭한 여인. 정조의 개혁을 모두 없애고 정조의 정적인 벽파를 끌어들인 악녀."
뭐 대충 이게 그녀에 대한 평입니다. 일단 이를 위해서는 약간의 사전 정보가 필요하겠죠.
벽파 = 사당의 이익만 고집하는 편[벽]한 무리. 사도세자 추숭 반대 세력. 명분과 의리를 따름.
시파 = [시]류에 영합하는 자들. 사도세자 추숭 지지. 임금의 뜻을 존중.
이들은 노론에서 갈라져 나온 무리였습니다. 소론과 남인도 이렇게 갈라졌지만 소수로 왕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왕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죠 영정조 대의 탕평의 목표 중 하나가 자기 당의 주장보단 왕의 뜻을 더 따르는, 어쩌면 자기색이 없는 이들을 길러내는 거였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조 대, 특히 사도세자 신원 문제에서는 이렇게 노론 벽파와 당을 초월한 시파가 대결하는 양상을 띄게 됩니다. 그리고 이 벽파가 전의 김귀주와 후의 심환지로 대표되는, 사도세자를 죽이고 세손이 왕에 오르는 걸 막았으며 사도세자의 신원을 막고 정조를 독살했으며 정조가 죽은 후 집권해서 온갖 횡포를 휘두른 세력으로 나오게 되죠. 그 대표가 정순왕후였습니다.
글쎄요... 그럴까요?
+) 이 부분은 정말 얽히고 설히면서 복잡합니다. 간단히 쓰려고 하지만 저 자신도 왜곡한 부분이 있을 거고, 생략한 부분도 많아서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많겠네요. 뭐 덕분에 이 부분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은 노론은 악의 축이라는 건데... 이덕일씨의 작품이죠.
(1) 미칠 듯한 존재감
사도세자가 죽은 후, 그의 장인 홍봉한은 실력자로 거듭납니다. "대의를 위해 사위를 내친" 충신이니까요. 그에 대응한 세력이 바로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비롯한 외척이었습니다. 거기에 심환지 등 의리를 중시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청명당이라 부르며 연합했죠. 홍봉한은 세손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정작 그 세손은 외가를 불신했습니다. 당연하죠. 자기 사위도 버렸는데 자기라고 다를 게 있었을까요. 그와 동생 홍인한 등은 슬슬 세손을 적대했고, 이 과정에서 김귀주는 세손 보호를 기치로 그들을 공격합니다. 결과는 홍봉한 측의 승리였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죠. 이 무렵 세손은 상소를 올리는데 대비, 정순왕후를 찾아갔던 거죠. 이 때의 모습과 그 이후의 모습을 보면 정순왕후와 김귀주는 세손과 서로 신뢰관계, 혹은 홍봉한에 대항한 연합 관계로 봐도 될 것입니다.
정조가 즉위한 후, 권세를 부렸던 홍인한과 정후겸은 사약을 받습니다. 문제는 이 때 김귀주 역시 처벌당했다는 겁니다.
"심지어는 내가 자전에 아뢴 일을 베껴 쓰기까지 하였으니, 신(臣)자의 분의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
"홍인한을 이미 죽이고 김귀주가 자취를 접하게 된다면 어찌 하나의 척리(척신)를 제거하고 하나의 척리를 만드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궁께서 이미 홍인한에게 은혜를 끊었으니 자전께서도 또한 어찌 김귀주에게 은혜를 끊지 않았겠는가?" (정조 즉위년 9월 9일)
바로 세손 시절 상소를 올릴 때 정순왕후에게 한 말을 김귀주가 이용해 먹었다는 점입니다. 또한 이 말 전체에서 "척신"에 대한 경계를 가득 담고 있죠. 그렇다면 정조가 그를 처벌한 것은 달리 봐야 될 것입니다. 그 전까지 정순왕후와 김귀주는 세손을 보호하는 방침이었고, 벌을 받는 이유가 된 상소부터가 "홍봉한이 세손을 위협했다"는 거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때의 숙청은 홍인한 등의 척신을 제거함과 동시에 앞으로 척신이 될 김귀주를 제거한 거라고 봐야 될 것입니다.
벽파에 대한 논리 중 가장 큰 오류는 사도세자 신원 반대 = 사도세자 제거 세력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서 [세손 즉위 반대]세력이기도 하구요. 정순왕후가 영조의 비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영조와 세자 사이의 골이 깊어질대로 깊어졌을 때입니다. 그리고 당시 조정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반대하는 세력 자체가 없었죠. 또한 정조가 자기 아버지를 신원하려 한 것은 자식으로서는 이해할 만 하지만, 명분으로서는 분명히 영조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김귀주가 임금의 뜻보단 명분과 의리를 강조하는 청명당이었고, 거기서 발전한 게 벽파인 상황에서 사도세자의 신원을 반대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습니다. 당연히 이 때문에 정조와 노론 시파 + 남인과 노론 벽파간의 힘싸움이 벌어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건 [사도세자 신원 반대] 이것 하나 뿐입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있을 때부터 미친 듯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역모에 연루돼 유배된 종친 이인, 정조는 매년 그를 찾아가지만, 역적을 찾아간다는 건 분명 명분에 걸렸죠. 정순왕후는 다양한 협박을 통해 그것을 저지하지만, 정조 역시 몰래몰래 그를 만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죠. 아무리 혈육이라 해도 그의 목숨을 위한다면 그를 조용히 두는 게 나았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악착같이 그를 수면 위로 끌어냅니다. 이를 통해 정조는 혈육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죠. 한편으로는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올리면서 그의 무덤에 찾아가서 오열했습니다. 이렇게 효성을 강조하면서 시간을 두고 자신의 아버지를 죄인에서 구출하려 한 거죠.
거기에 딴지를 건 것이 정순왕후였습니다. 그녀 역시 정조의 목적을 꿰뚫은 것이죠. 수렴 청정도 아니면서 마구 나서는 그녀의 모습은 오히려 "여중 요순"이라는 평을 듣습니다. 시파부터 남인들도 그녀의 주장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죠. 그들이라고 이 의미를 몰랐을 리가 없죠. 하지만 명분은 정순왕후가 쥐고 있었습니다.
(2) 심환지의 어찰
여기서 한 번 따져 봐야 할 것이 최근에 발견된, 정조가 심환지에게 보낸 어찰입니다. 300건에 가까운 이 편지에는 다른 신하들에 대한 원색적인 욕과 이두부터 한글까지 섞어 쓴 구어체,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는 내용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서로 짜고 정치를 하는 모습을 보여 주죠. 기존의 "개혁 군주"로서의 모습과 여기서 발견된 "막후 정치에 능한 노련한 군주"의 모습, 양 쪽이 싸우는 게 현재의 정조에 대한 평가입니다.
이 어찰을 통해 정조 독살설은 완전히 물 건너 갑니다. (애초에 이모씨가 주장한 게 워낙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일 뿐이었죠) 정조는 심환지를 그 정도로 편하게 대했고, 정적으로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정조가 조선을 개혁하려 했고, 심환지와 정순왕후로 대표되는 벽파가 그걸 반대해서 실패했고 결국 독살당했다, 이런 주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인 거죠. 마찬가지로 정조와 정순왕후의 행장, 명의록, 일등록 등에는 정조와 정순왕후가 사이가 좋았다는 일관된 모습이 기록돼 있죠.
물론 정조는 마지막까지 벽파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습니다. 그들 사이에는 분명 대립이 있었지만, 그건 정조의 개혁 정치에 대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일까요?
+) 다만 그 둘 사이가 편지에 적힌 것처럼 친밀하진 않은 것 같습니다. 그 편지 자체가 남아 있는 게 문제죠. 정말 충신이자 심복이었다면 그 편지를 태워버려야겠죠. 아마 자기가 정치적으로 몰릴 때 정조와의 친밀함을 드러내기 위해 남긴 게 아닐까 싶네요.
(3) 뒤집기
정조가 죽은 후, 정순왕후는 수렴 청정을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 그녀는 자신을 "여군" "여주"라 칭하면서 마치 자기가 군주인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죠. 이를 통해 정조가 한 개혁 정책을 모두 뒤집고, 탕평을 포기하고 벽파를 집권시킨 것으로 평가 받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한 정책 중에서 이를 확고히 뒤집을 만한 건 없습니다. 흔히 예로 나오는 장용영(수원 화성을 경호하는 부대)을 없앤 것, 장용영부터가 정조가 이후에도 두기 위해 만든 게 아닌 자신의 "다른 뜻"을 위해 일시적으로 만든 부대입니다. 정조가 죽은 이상 있을 이유가 없어진 거죠. 시파의 힘을 약하게 하기 위해서라는데 정작 장용영 대장에 시파 김조순을 앉힌 건 정순왕후였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정조가 이루지 못한 공노비 해방을 이루었고, 부정부패 등을 챙기는 건 순조 때보다 더 했습니다. 시파와 남인을 축출했다 하지만 이시수부터 김조순까지 시파를 등용했죠. 이 이시수는 그녀의 수렴 청정 후 그녀를 견제하는 데 일등공신이 됩니다. 영정조 대의 탕평 때도 한 쪽이 우세한 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던 거죠. 탕평이 완전히 없어진 건 벽파가 소멸된 순조 집권 후였습니다.
역시 문제가 되는 건 천주교 박해였겠습니다만... 고지식할 수밖에 없는 벽파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고, 남인을 숙청하는 목적도 강했죠. 여기에 더해서 황사영 백서 사건이 벌어집니다. 청 황제와 서양의 힘을 이용해 조선을 직접 지배해서 천주교를 자유롭게 믿게 해 달라는 것은 빼도 박도 못 하는 박해 구실이 되었죠.
그녀가 뒤집은 건 다른 것이었습니다.
순조 즉위년 12월 18일, 어마어마한 분량의 언문 하교가 내려집니다. 거기에는 사도세자의 일은 부득이한 거였다는 것, 정조는 벽파의 뜻에 동의했다는 것 등을 골자로 한 거였죠. 이를 통해 그녀는 "정조의 뜻"을 내세워서 정조가 이루려 한 것을 뒤집습니다. 사도세자 신원이었죠. 이를 통해 벽파에 힘이 실렸고, 김귀주가 복권됩니다. 이를 통해 시파와 남인, 특히 홍봉한, 홍인한에 이은 홍낙임 등 홍씨에 대한 총 반격을 시작하죠.
결국 그녀가 정조 때부터 쌓아 온 힘으로 뒤집은 건 "집안 싸움"이었다는 겁니다. 그 충격이 당시에는 컸죠. 즉위할 때부터 피라미드 만드는 파라오처럼, 그가 사도세자를 신원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그의 재위 기간과 같습니다. 마침내 자기 아들 대에 이르러 바꿔지길 기대한 거죠. 하지만 정순 왕후는 이걸 뒤집었습니다. 역시 자기 가문을 위해서요.
문제는 이게 현대의 눈으로 보면 감동적이긴 해도 영 규모가 안 난다는 거겠죠. 그 때문에 사도세자 문제에 더해서 정조의 개혁 정치 자체에 대한 반동으로 급이 올라간 것입니다. 정조의 개혁 정치에 대한 평가가 좋아질수록, 악역이 된 그녀의 평은 낮아질 수 밖에요.
(4) 또 다른 여주(女主)
그 위세와는 달리 정순왕후의 청정 기간은 단 3년이었습니다. 심환지가 죽은 후 1년, 벽파에 제대로 된 구심점이 없는 상황인데다 순조는 겨우 14살이었죠. 그녀가 벽파의 수장이라면 명분상으로도 아무런 하자가 없고 반대하는 신하도 없는 가운데서 홀연히 청정을 그만둔 겁니다. 벽파의 위치가 온전하지 않은 상황에다 순조의 장인 김조순의 힘이 커져 가는 가운데였죠.
그런 점에서 그녀가 받는 평가는 부당합니다. 권력을 휘두르긴 했으나 그게 정조의 것을 뒤집는 수준은 가지 못 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그렇죠. 그리고 3년만에 권좌에서 내려올 정도로 자신을 제어할 줄도 알았습니다. 그녀가 바꾼 건 사도세자에 대한 문제와 천주교에 대한 문제 이상은 없었구요.
반 년 후, 시파의 반격이 시작되자 그녀는 다시 발을 내립니다. 하지만 이시수에게 역공을 당해서 말도 제대로 못 꺼내고 물러나야 했죠. 그 때 이시수가 내건 명분은 "수렴 청정을 그만뒀는데 다시 할 수 없다" 이거 하나였습니다. 그 후 몇 달 안 돼서 죽게 되죠. 청정을 그만둔 후 1년이 안 돼서 죽은 걸로 봐서 자기 몸의 한계를 느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벽파의 위세가 여전했다면, 그녀의 힘이 흔히 알려진 수준으로 막강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그녀 자신은 물러나고도 충분히 국정을 장악할 수 있을 거라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이후 시파의 역공으로 벽파는 완전히 무너집니다.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을 집필하면서까지 자기 가문의 명예를 되살리려 했고, 순조는 그런 그녀의 영향을 받았죠. 그리고 어쨌건 아들입니다. 그 자신이 정조의 뜻으로 기울 수밖에요. 여기에 김한록이 "8자 흉언"이라는 말로 세손의 즉위에 반대하는 주장을 했다는 걸 "뒤늦게" 밝혀내면서 김귀주가 거기에 관련 있다는 주장이 계속 됐고, 김귀주는 완전히 몰락합니다. 세손의 즉위를 반대한 세력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채로요.
벽파 몰락 이후 김조순의 안동 김씨가 조선을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이른바 세도 정치의 시작이죠. 재밌는 건 이런 가운데서도 사도세자는 결국 신원되지 못 했습니다. 벽파가 다시 살아날까 두려운 것이었을까요? 정조의 뜻이 실현된 것은 고종 때였습니다.
결론을 내려 볼까요. 그녀는 분명 여걸이었고, 정조와는 다른 길을 걸은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각자의 명분과 각자의 집안을 위한 거였고, 그녀가 한 모습은 벽파에 이끌려가는 모습이 아닌 영조, 정조와 비교할 만한 하나의 군주의 모습이었습니다. 어쨌든 정조와 다른 모습을 보였으니 악역으로 부족함은 없겠지만, 음모론처럼 모든 사건의 배후를 그녀로 지목하는 것은 아닌 것 같네요.
+) 다만 그녀가 말한 "여군" "여주"가 그냥 대비들이 늘상 쓰던 거라는 반박은 아닌 것 같네요. 물론 대비들을 칭하는 용어로 여군, 여주가 쓰인 건 맞습니다만, 수렴 청정을 한 여인들 중 그 말을 실제 쓴 사람은 정순왕후 뿐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말은 문정왕후 때 벽서에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죠. 시간이 흘러 그 의미가 희석됐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그녀가 심심하면 그 말을 쓴 걸로 봐서 의식적으로 한 게 맞을 겁니다. 물론 단순한 그녀의 입버릇일 수도 있구요.
5. 조선의 여인들
이후 순원왕후와 조대비로 알려진 신정왕후가 있습니다. 그냥 성만 보죠.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였고, 조대비는 풍양 조씨였습니다. 양대 세도 정치 가문이었죠.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를 끌어 올리는 지주가 되었고, 조대비는 그런 김씨에게 맞서 조씨의 힘을 되찾기 위해 대원군을 끌어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바로 고종이죠. 조선이 망할 때가 다가옵니다.
지금까지 이런 수렴 청정들에 대해 적어 봤습니다. 자... 총평을 해 볼까요.
수렴 청정의 역사에서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가문"입니다. 특히 문정왕후부터 정순왕후, 그 이후까지 모두 자기 가문을 등용하기 위해 노력했죠. 동양에서는 악의 축으로 통용되는 "외척"입니다. 이 때문에 수렴 청정은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수렴 청정 자체의 배경을 생각하면 다른 생각이 들죠. 수렴 청정을 했을 때에 왕권이 강한 시기는 없었습니다. 왕이 어리다는 것부터가 나라가 흔들리는 상황이었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자신들의 친척을 끌어들이는 거였죠. 타락할 수밖에 없죠. 그런데도 그녀가 손을 내밀 수 있는 상대는 그들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숙주와 한명회 등 기존의 권신들과 결탁한 정희왕후는 대단하다고 봐야 될 겁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한명회가 공신이자 외척이라는 위치였기 때문에 가능했고, 그 때문에 성종을 앉힌 거였죠.
수렴 청정 기간에는 뭔가 확실한 업적을 찾을 수 없습니다. 수렴 청정 기간이 짧은 이유도 있었고, 무언가 업적을 만들기 위해서 외척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던 것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수렴 청정은 어디까지나 임시직이었다는 겁니다.
애초에 왕은 어린데 "직계 어른 남자"가 없어서 맡는 게 수렴 청정입니다. 그런 남자가 있었으면 지가 왕 하죠. 그런 왕을 보호하는 임시직이 수렴 청정이었습니다. 예. 세상에 자길 좋아하는 여자가 한 명쯤 있다면 그건 자기 엄마겠죠. 결국 이 여인들은 자기 아들을 지키는 정도밖에 하지 못 한 겁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봐야 이전 왕의 정책을 정리하는 정도겠죠. 이런 건 딱히 드러나지 않구요. 뭔가 업적을 만들기 위해서는 장기 계획을 세워야 되는데 몇 년 하고 말 상황에서 그게 가능하지도 않았죠. 문정왕후가 죽을 때 한 말에서 왠지 그런 걸 느낄 수 있습니다. 불교를 되살리는 게 오래 못 갈 걸 알면서도 했다는 거요. 어쩌면 그녀는 자기의 힘을 어느 정도 쓸 수 있을지 실험해 본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걸 빼면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자기 가문과 왕권 살리기밖에 없죠. 문제는 다른 왕들도 이걸 피라미드 만들듯이 평생에 걸쳐 해 온 거라는 점입니다. 정통성이 약한 왕들은 더 했죠. 하지만 왕들 얘기하는데 그런 걸 길게 얘기해 봐야 뭘 할까요. 대신 수렴 청정한 여인들에 대해서는 그게 강조되는 것이죠.
중국의 경우처럼 그것을 넘어서 힘을 쓸 수 있었다면 얘기가 달라졌겠지만, 조선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임시직은 임시직으로 그 권력을 제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 거죠. 결국 문정왕후도 순정왕후도 거기에 따라야 했습니다. 영향력이 강했다던 인수대비는 오히려 그런 여자의 위치를 강조하는 내훈을 지었구요. 최대한 예외를 허용하지 않는, 자랑해도 좋을 조선의 문치였습니다. 조선이 제대로 망조를 보인 게 그런 시스템이 무너진 세도 정치 때부터라는 걸 잊으면 안 되죠.
하지만 이 시스템은 "암탉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유교의 정신에 맞춰 만들어진 것입니다. 여자라는 것에 강조를 찍지 않는다면, 그녀들의 업적은 없다고 무방합니다. 그걸 요구하지 않는 나라였으니까요. 결국 그녀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한도 내에서 최선을 다 한 것입니다. 그나마 이 선을 넘어간 문정왕후가 한 게 잘 한 업적이라 보긴 어려운 불교 살리기인 게 참 아쉽군요.
물론 왕실 내에서 대비부터 임금의 은혜를 입은 여인들의 힘이 강하긴 했고, 그들이 집안을 좌지우지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유교에서 허용한 범위 내였죠. 조선의 남녀평등에 대해 얘기하면서 "집안에서는 '안 해'라는 말 답게 (실제 안 쪽의 해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권력을 휘둘렀다"고 하지만, 그건 "옛날 여자들이 아무것도 못 했다"에 대한 반론일 뿐이죠. 거기서 더 바깥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휘두르는 건 불가능했죠. 결국 유관순 누나를 뺀다면 여자 위인들은 여자의 분수를 지키고 내조를 잘 한 신사임당 정도가 될 수밖에 없죠. 덕분에 이씨로 가득 찬 화폐에서 또 이씨 가문의 며느리 신사임당이 이름을 올리게 된 거구요. (예. 억지예요)
경성 자살 클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자살한 이들에 대한 얘기를 쓴 책인데요. 재밌는 점이 있죠. 자살한 남자들은 거의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일 하다 좌절하거나 성공하고 자살합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남자에게 버림 받아서, 금단의 사랑을 해서 비관하고 자살하죠. 여자가 집 밖에서 자기 꿈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건 정말 얼마 안 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과 비교할 만한 여자 위인을 찾는 건 정말 헛된 희망찬 꿈일 뿐이죠.
사족이지만 따로 글을 쓰기 뭐 해서 씁니다만... 천주교 박해 과정은 현재 천주교에서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남의 전도가 아닌 자생적으로 일어난 건 정말 의미가 크니까요. 괜히 한번에 105명이나 성인으로 오른 게 아니죠. 하지만... 그 뒤에는 흑역사가 있죠. 프랑스와 수교 후 얼마 안 된 1901년, 제주도에서 이재수의 난이 일어납니다. 천주교의 위세에 힘입어 갖은 비리와 악행을 저지른 천주교인들이 학살된 사건이었죠. 뭐 애초에 천주교에 대한 반감도 있었고 이런 저런 이유가 있었겠습니다만, 천주교인인 저로서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마음대로 믿을 수 있게 된 게 얼마나 됐을까요. 그 수십년도 안 될 시간만에 교인들은 이런 짓을 저지른 겁니다. 몇 차례의 박해로 교인들이 씨가 말라서 개화기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개신교에 밀리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구요. 별 탄압 없이 잘 컸다면 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모르겠네요.
그리고 정말 최근까지도 천주교는 그걸 묻으려 했죠.
여러 나라에서 그래 왔고 한국에서도 고려 때까지 권세를 부린 불교, 종교 개혁을 불러올 정도로 막장이 됐고 한국에서도 믿음의 자유가 열린 후 거의 곧바로 이런 일이 일어난 천주교, 그리고 신자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현재의 개신교까지... 종교가 힘을 가지면 언제나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천주교의 이미지가 그나마 좋아진 게 교황령을 다 잃고 몰락하다시피한 후였다는 걸 잊으면 안 되죠. 풀이 죽었는지 온갖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말 없이 움츠린 기간도 길었구요. 일제강점기 때 천주교는 신사 참배를 허용했었다죠. 애초에 제사를 허용했으면 그 많은 신자들이 죽었을 리도 없었을 텐데요.
비대해지면 타락하고야 마는 종교. 종교의 규모가 얼마나 되든간에 구원받는 사람이 소수일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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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칠 듯한 존재감
사도세자가 죽은 후, 그의 장인 홍봉한은 실력자로 거듭납니다. "대의를 위해 사위를 내친" 충신이니까요. 그에 대응한 세력이 바로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비롯한 외척이었습니다. 거기에 심환지 등 의리를 중시하는 이들이 스스로를 청명당이라 부르며 연합했죠. 홍봉한은 세손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정작 그 세손은 외가를 불신했습니다. 당연하죠. 자기 사위도 버렸는데 자기라고 다를 게 있었을까요. 그와 동생 홍인한 등은 슬슬 세손을 적대했고, 이 과정에서 김귀주는 세손 보호를 기치로 그들을 공격합니다. 결과는 홍봉한 측의 승리였지만, 여기서 중요한 부분이 있죠. 이 무렵 세손은 상소를 올리는데 대비, 정순왕후를 찾아갔던 거죠. 이 때의 모습과 그 이후의 모습을 보면 정순왕후와 김귀주는
정조가 즉위한 후, 권세를 부렸던 홍인한과 정후겸은 사약을 받습니다. 문제는 이 때 김귀주 역시 처벌당했다는 겁니다.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은 저 역시 많이 공감하는 바이고요.
미국인 친구 중 하나가 불교에 빠져서 기독교를 욕하며 불교를 옹호하더군요.
그래서 고려 시대 때의 불교에 대해 조금 설명해주었습니다.
타락은 강력한 힘에 의한 폐단으로 나오는 것이지
불교의 교리가 좋고 기독교의 교리가 나빠 그런 게 아니라고요.
다만, 전 종교뿐 아니라 어떤 단체도 조직도 강력한 힘을 가지면 타락할 수 밖에 없다. 라고 설명했네요.
그러나 천주교가 이런 좋은 이미지를 가진 건 반드시 힘을 잃어서라 생각치는 않습니다.
실제 외국에선 천주교의 이미지는 여전히 부정적이지요.
특히 미국에서는 개신교보다 훨씬 힘 없는 종교가 천주교임에도 천주교의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만은 못하고요.
반면, 한국에선 천주교의 영향력이 약하지 않음에도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 있는 건
한국인에게 문화적으로 잘 맞는 교리와 과거 민주화 때의 역사,
그리고 결정적으로 부패를 최소화하게 되는 시스템이 아닐까 싶네요.
시스템적으로 교회는 비대해질 수 밖에 없고 부패되어질 수 밖에 없는 반면,
천주교의 경우는 시스템적으로 그렇게 되는 걸 가능한 막아놨지요.
그 시스템을 깨지 않는 이상
혹은 그 시스템이 너무 오래되어 다른 폐단을 만들지 않는 이상,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미지 나쁜 개신교가 계속 존재하는 이상
좋은 이미지는 상당히 오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천주교가 직접적인 권력을 가지게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이젠 그런 시대가 다시 오기는 힘들겠지요.
심환지 어찰이 정조독살설을 배제하는 증거가 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어찰들이 보여주는 바는 정조와 심환지는 때로 정치적으로 협력하는 관계였다는 것, 편지상으로는 정조가 심환지를 편하게 대했다는 것, 심환지가 정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는것, 다만 심환지는 정조의 지시에 고분고분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겠네요.(정조사후 심환지의 행보를 보면 정조에게 불만이 상당했다는게 더 설득력이 있겠죠. 중요한건 말이 아니라 행동이니까요.)
잘 읽었습니다.
속마음이야 어떤지는 몰라도 여인들이 전면에 나서기에는 이걸 막는 시스템이 있었고 결국 그 시스템안에서
제한될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대해서 동의하게 됩니다
필요이상으로 악녀라는 낙인이 찍힌것이라고 생각할수도 있겠고 결국은 그당시 민중들의 삶이
어떠했는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나마 덜 배고프고 그나마 덜 억울했는지가 중요하겠고 성군이라 칭해지는 왕들의 시대에는 백성들의 삶을
생각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었고 만들려고 노력했죠
본문에 말씀하신 제주도에서 이재수의 난이 급 궁금해 지는군요 ^ ^
제주도 4.3사태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이해가 있지만 이재수의 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니 시간 나시면
말씀해주세요.
마지막 사족에 대해서는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 라는 말한 누구의 말이 옳다라고 생각합니다.아직까지는요.
조선의 역사가 많이 훼손되기도 하지만 500년을 이어온데에는 저력과 이유가 있겠죠
그이유중에 하나에는 500년간 끝임없이 종교와의 전쟁을 벌인것도 500년이나 생존할수 있었던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종교든 그분수를 모르고 사회전체적으로 힘이 강하거나 나설려고 할때 그 사회가 망하는 지름길이고
시초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