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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31 05:09:49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왜란이 끝나고 (임진왜란 시리즈 완결) + 정기룡에 대해서
쉬고는 싶은데 확실히 마무리는 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냥 요점 정리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이렇게 장편이 될 줄도 몰랐고, 괜히 더 길게 미루다가는 더 안 될 거 같으니까요. 혹시 더 얘기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 때 가서 다시 쓰도록 하죠.
1. 재조지은
- 왜란이 끝난 지 2년 후인 1600년, 명군은 완전 철수합니다.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서 명군을 잔류시키자는 논의도 없지는 않았습니다만 명군 무용론은 전쟁 당시부터 전후까지도 계속됩니다. 선조도 "장수들이 명군을 따라서 비리를 저지른다"느니 하는 말들을 하면서 명군에 부정적인 모습을 계속 보이죠. 사실 이게 맞는 말이었습니다만... 이후 명에 대한 은혜는 끝 없이 강조됩니다. 재조번방지가 대표적이죠. 이름부터가 나라를 다시 만들어줬다는 거니까요.
- 특히 원군을 보내 준 만력제 신종과 경리 양호에 대해서는 급이 달랐죠. 만력제는 일을 제대로 안 하면서도 조선에 대한 문제는 크게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조선황제, 고려 천자 이런 거였죠. 당시 원군을 파견하는데 든 비용이 은으로 780만냥이었다고 합니다. 거기다 조선에 기근이 들자 군량을 지원해 주기도 했죠. 이 때문에 창덕궁 후원에 대보단을 세워서 그를 기립니다. 양호의 경우도 명군의 힘을 가장 크게 보여 준 전투였던 울산성 전투를 지휘했고, 군사들의 약탈을 막는 데도 최대한 힘 써서 별명이 고려재상이었다고 합니다. 1604년, 양호를 기리기 위해 선무사에 배향을 결정하고 북경에 사신을 보낼 때 화상을 구입해 오도록 지시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것은 광해군 대까지 계속됩니다.
- 여기에는 선조의 정치적인 이유가 듬뿍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의 반란을 너무 경계했습니다. 정유재란 때 명군을 다시 부르는 것에 회의적인 말이 나오자 조선군으로는 막을 수 없다느니, 외환보다는 내변을 걱정해야 된다느니 하면서 명군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명군의 힘 자체보다는 반란을 걱정한 게 더 크죠. 이순신을 향한 끝 없는 질투가 대표적입니다. 결국 이는 조선군의 공 자체를 깎아내리는 쪽으로 발전했습니다. 아래의 말이 선조의 왜란에 대한 최종적인 결론입니다.
“이번 왜란의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고 우리 나라 장사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으로 일찍이 제 힘으로는 한 명의 적병을 베거나 하나의 적진을 함락하지 못하였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는 바다에서 적군을 섬멸하였고, 권율은 행주에서 승첩을 거두어 약간 나은 편이다.
그리고 중국 군대가 나오게 된 연유를 논하자면 모두가 호종한 여러 신하들이 어려운 길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를 따라 의주까지 가서 중국에 호소하였기 때문이며, 그리하여 왜적을 토벌하고 강토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별도로 훈명을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일찍이 생각해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호종한 사람을 녹훈할 적에 아울러 녹훈하도록 말했었다. 그러나 이는 대신들이 의논하여 처리하는 데 달렸다.”
- 1600년 이후 각종 공신을 선정하는데, 이 때에도 이런 방침은 계속되었습니다. 결국 1604년 호종공신 86명, 청난공신 5명, 선무공신 18명이 정해집니다. 호종공신에는 내시 24명 등이 포함돼 있었죠. 선무공신 18명의 명단은 이렇습니다.
1등 이순신·권율·원균
2등 신점·권응수·김시민·이정암·이억기
3등 정기원·권협·유사원·고언백·이광악·조경·권준·이순신(李純信)·기효근·이운룡
86명의 호종공신에 비하면 너무나도 초라한 면모를 보여 줍니다.
- 재조지은에 대해서는 명 역시 강조했습니다. 임란 당시부터 그에 대한 보답으로 각종 기념물을 세우라고 강요했죠. 전후에는 명의 궁궐 공사비용을 대라고 했습니다. 이에 조선에서는 면주 5000필과 인사 500근을 보냅니다. 이것은 계속 강조돼서 광해군 대에 이르러 후금이 강해지자 두고두고 조선의 발목을 잡게 됩니다.
2. 교린의 복원
- 왜란 후에는 일본에 복수하자는 의견도 대두됩니다. 대표적인 것이 황신으로 대마도 정벌을 주장하죠. 하지만 나라 힘이 안 그래도 약해진 상황인데 이건 거부당합니다. 그나마 왜란 중에도 계속됐던 북방에 대한 경계는 지속되었고, 바다 역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죠. 원균이 저지른 피해는 복구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이산해는 병력이 적게 들어가는 소형선으로 바꾸자고 하기도 했고 나대용 역시 거북선을 소형화한 창선을 개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방침은 바뀌지 않아서 판옥선은 조선 후기로 갈수록 대형화되고 거북선 역시 계속 만들어집니다.
-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지배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잘못을 다 바로잡았으니 다시 외교를 하게 해 달라고 하죠. 이에 대해 조선 조정은 계속 논의를 거치다가 왕릉을 파괴한 자를 붙잡아 오라는 조건을 붙이게 됩니다. 뭔가 어이없지만, 이게 조선이었죠. -_-; 이렇게 계속 사절이 오갑니다. 이 과정에서 사명대사 유정은 조선인 포로 3500명을 데리고 오기도 합니다. 이에야스는 두 명을 뽑아서 조선에 바치고, 조선 조정 역시 이들이 정말 능에 손을 댔는지 의심스럽지만 둘을 처형하는 선에서 끝냅니다. 1607년 통신사가 파견된 이후 이들은 조선에서는 교린을 계속하며 오랑캐들을 교화한다는 의미로, 일본에서는 막부의 권위를 세우는 의미로 삼았으며 통신사의 행적은 두 나라간의 교류의 장이 됩니다.
-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 간 도공들은 일본의 도자기 기술을 몇 단계 위로 끌어올립니다. 한편 일본에 끌려간 유학자들 역시 일본에 성리학을 전파하죠. 에도 막부에 이르러서 일본의 성리학은 크게 번성하고, 주군에게는 절대 충성해야 한다는 것 역시 이 때 퍼지게 됩니다. 근대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도 이들 성리학자들은 조선에 우호적이었다고 하는군요. 강항처럼 돌아와서 일본의 사정을 보고한 사람도 있고 계속 포로가 송환되기는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 뼈를 묻고 그 자손들은 일본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고아가 된 소녀를 데리고 오기도 했죠. 그녀의 이름은 줄리아 오타로 고니시가 몰락한 이후에도 신앙 생활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이에야스의 천주교 박해 때도 끝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 현대에 들어서야 그 때 납치됐던 후손들이 한국을 찾아 조선에 남은 후손들과 만나기도 하고 임진왜란에 대해 연구하기도 하는 등 비교적 훈훈한 모습을 찾을 수 있습니다만... 그 때 그들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짐작하기도 어렵습니다. 특히 조선에서는 천시되었다가 일본에서는 대우받았던 도공들의 경우는요. 성리학자도 마찬가지였죠. 그들이 과연 주인을 바꿀 수 있었을까요. 강항이 일본 땅에서 남긴 시에서 그들의 마음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만 리의 청구라 바닷길이 멀고 먼데 / 萬里靑丘海驛長
꿈 혼은 어디서 바삐 가고 바삐 오나 / 夢魂何自去來忙
삼청 이별의 한은 봉래산 밖이거니 / 三淸離恨蓬山外
가고픈 일편단심 한강의 남쪽일세 / 一片歸心漢水陽
생각하면 인생이란 참으로 잠깐이라 / 算得人生眞抄忽
천도를 살펴보면 막연한 것이 아니라네 / 看來天道豈蒼荒
인을 이루고 의를 취함은 우리의 가훈이라 / 成仁取義吾家訓
아이들도 견양에게 절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네 / 童子猶慙拜犬羊
이 때 조고원이라는, 일본 천황의 숙부였던 승려가 부채 열 자루를 보냈는데, 그에 대한 답례로 이런 시를 써 주었다고 합니다.
맑은 바람 부쳐주는 열폭 만잔을 / 十幅蠻牋陣陣淸
보내주는 스님 정이 감사하구려 / 寄來深荷上人情
구차한 삶 하늘보기 부끄럽더니 / 偸生久値看天日
이제부터 낯 가리고 다닐 수 있구려 / 從此氈城掩面行
- 한편 도공 등 기술자들 중에는 오히려 일본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합니다. 왜란 중이나 직후에 자력으로 탈출한 사람들에게는 세금 면제 등 특혜가 주어졌습니다만, 그 후에는 그런 것도 별로 없었죠. 특히 여자들에 대한 시선이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갑니다. 마음이 복잡하네요.
- 이후 조선과 일본은 조선 말까지 친교를 유지하게 됩니다. 해피엔딩일까요.
3. 왜란 전으로
- 왜란이 끝난 후 조정은 전쟁 기간의 임시 법령들을 폐지하고 남은 공명첩을 모두 태워 버립니다. 선조는 신하들을 공신으로 삼아 우대했고, 신하들은 나라를 보존했다는 것으로 존호를 올려 보답하죠.
- 이 때 토지대장이 손실되면서 나라의 재정이 크게 나빠졌습니다만, 왕족들에게 주는 혜택은 여전했습니다. 특히 임해군과 순화군의 막장 짓은 여전했고, 선조는 이들을 감쌀 뿐이었죠. 그들이 원한 것은 땅에 떨어진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는 것 뿐이었습니다. 이건 광해군 대에도 계속돼서 궁궐을 재건하는 공사들이 동시에 이루어졌죠. 개혁 군주로 이름 높은 광해군이지만 여기에는 변명할 수가 없을 듯 합니다. 결국 지배층의 구호는 단 하나, 왜란 이전으로 돌아간다는 것 뿐이었습니다.
- 선무공신의 수가 극히 적은 것 역시 이것으로 봐야겠죠. 문 중심이라는 조선의 방침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이순신이 전사하고 권율 역시 왜란이 끝난 후 사망합니다. 왜란이 끝났지만, 지배층은 여전히 바뀌지 않았습니다.
- 보통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조선을 전후로 나눕니다만, 현재는 사림의 집권과 세도정치를 기점으로 전/중/후로 나누는 학설이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고추, 담배의 도입이나 신분제의 문란, 언어의 변화, 소작농의 증가 등 등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고 합니다만, 이 영향이 꼭 임진왜란으로 볼 수 없었다거나 임진왜란 이전에도 이미 변화하고 있었다는 등의 반론 때문이죠.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 컸던 전쟁에 비해 조선의 변화는 시대를 나누는 수준까지 이르지 못 했다는 것이죠.
- 군사 분야에서는 척계광의 기효신서를 바탕으로 한 절강병법을 최대한 받아들이고, 조총과 연사력이 좋은 불랑기를 크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또한 왜란 중에 훈련도감을 만들어 삼수병 체제를 갖추는데, 조선 초에 사병을 없앤 이후 최초의 직업군인이라고 봐야겠죠. 이들은 호란에 이르러서는 오천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조선의 군사 제도는 오위에서 오군영체제로 점차 변하게 됩니다. 지방군 역시 속오군 체제가 되죠.
- 문제는 이렇게 만들어진 체제들이 왜란 전과 크게 바뀐 게 없었다는 거겠죠. 거기다 변화했다는 게 하필 일본군에 맞춰진 거라서... 후에 크게 당합니다. -_-;
4. 일본과 명
- 일본은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가가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쇼군에 오르게 됩니다. 이 때 임진왜란 참전 다이묘의 대부분이 서군 편이었는데, 모두 몰락하죠. 대표적으로 고니시 유키나가와 모리 데루모토의 참모였던 안코쿠지 에케이가 있습니다. 결국 이들이 도요토미가에 충성했던 다이묘들이었고, 임진왜란 때는 결국 제 살 깎아먹기였던 거죠. 직접적인 전장은 아니었지만 서일본은 큰 타격을 입었고, 왜란 후 포로를 돌려보내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 역시 인구가 크게 줄어서였습니다. 다만 도도 다카도라나 와키자카 야스하루, 고바야카와 히데아키 등 처음부터 동군 편을 들거나 배신한 다이묘도 상당하죠.
- 이에야스 편을 든 동군에 있던 다이묘는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있습니다. 이들은 그저 이시다 미쓰나리에 대한 증오에서 이에야스 편을 들었고, 이들이 미쓰나리를 암살하려고 시도한 것에서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의 서막이 오릅니다. 이 점에서 세키가하라 전투를 단지 친도요토미 vs 반도요토미의 대결로 볼 게 아니라 도요토미 세력 간의 문치파 vs 무투파로 봐야 된다고 봐야 되겠습니다만 그 이후가 너무 이에야스의 계산대로 흘러갔죠. 결국 가토와 후쿠시마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에 대한 충성을 지키다가 죽고, 이에야스가 암살했을 거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 그러고보니 고니시 유키나가는 천주교인이라서 할복을 거부하고 처형당했고,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 때의 기억으로 구마모토성에 우물을 120개가 넘게 만들고 다다미도 고구마 줄기를 이용해서 유사시 식용이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하는군요. 이후 도도 다카도라와 함께 축성의 달인이 되었습니다.
- 일본이 전쟁을 일으켰어야 했냐는 논의는 더 이상 하지 않겠습니다. 양 쪽 다 설득력이 있으니까요. 다만 이 전쟁이 도요토미가의 제 살 깎아먹기였다는 점은 확실할 듯 하네요.
- 명은 이후 청에 의해 몰락합니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만력 3정으로 오랑캐 토벌을 너무 해서 나라가 기울어졌다는 평도 있습니다만 그러고도 명이 50년을 더 버텼다는 것과 그의 무덤 건설 비용 등 각종 사치를 보면 그냥 핑계 같긴 합니다. 명의 멸망 원인은 청의 공격과 농민 반란 때문이었죠. 고려 황제 같은 별명을 얻긴 했습니다만 임진왜란이 명 멸망의 결정적 원인이 될 순 없습니다. 일본과 육지 밑 바다로 접한다는 것은 명에게 있어서도 큰 위협이었고, 임진왜란 때의 파병은 명분과 실리가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5. 선조
- 임란이 끝나고도 선조는 잘 먹고 잘 살다가 1608년에 죽습니다. 재위 기간 41년이었습니다. 그보다 재위기간이 길었던 왕은 영조와 숙종 정도였죠.
- 선조 대에 이르러 사림의 집권이 확고해지고 율곡 이이 등 각종 인재들이 많이 등장합니다만, 그에 대한 평가는 임진왜란 때로 집중돼 있죠. 조금 불쌍하긴 합니다만, 임진왜란 때 그가 보여 준 모습들은 비판 받아 충분합니다. 이순신에 대한 질투는 두 말할 필요 없고, 광해군에 대한 질투는 이후 광해군이 폭군이 되는 것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명이 내정간섭에 가까울 정도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자 그 역시 차가운 모습만 보이죠. 이랬던 그가 유언으로 남긴 게 형제들끼리 화목하라는 것이었으니 참 아이러니합니다.
- 그는 능력면으로 따지면 조선의 역대 왕 중에서도 수준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능력을 좋은 데 쓰지 못 했죠. 붕당을 오히려 이용해서 한 신하에게 힘을 몰아 넣지 않은 점은 대단하다고 봐야겠습니다만... 그가 평생에 걸쳐 평가를 바꾸지 않은 신하는 단 한 명, 원균 뿐이었습니다.
- 선조에 대한 평가야 이전 글들에서 내내 했으니 여기서 맺겠습니다. 이렇게 전쟁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조선이 평화롭게 전쟁에서 입은 상처들을 복구할 시간은 얼마 없었습니다. 북쪽에서 새로운 기운이 생겨나고 있었으니까요.
6. 임진왜란의 의미
임진왜란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요. 일단 나라가 망할 위기에 처한 것을 이겨냈다는 것, 그 과정이 너무나도 드라마틱하고 누가 뭐래도 흠 잡을 수 없는 영웅이 있다는 것 등이겠죠. 임진왜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많은 것을 말 해 줍니다. 전쟁이 벌어지면 백성들의 생활이 어떨지, 이것은 기록이 적고 승리한 것만 강조하는 이전의 전쟁들과 크게 구별됩니다. 임진왜란 전후부터 호란에 이르는 기간의 모습은 어떤 외교가 더 필요할 지에 대해서 말 해 줍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을 과정에서의 모습은 평화에 너무 몸을 맡기면 안 된다는 것을 말 해 주죠. 도망가기에만 급급했으면서 자기들 기득권만 챙기려 했던 사대부의 모습과 의병으로 스스로 일어나 나라를 지키려 했던 상반되는 모습은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으며, 지도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도 알 수 있게 해 주죠.
그리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쳐 조선을 구하고 떠나간 한 영웅의 모습에서 우리가 어떻게 나아가야 할 지도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임진왜란에 나오는 것이죠.
선조는 재조지은을 강조하며 임진왜란 때 힘껏 싸운 장수들의 공을 무시했고, 백성들을 어루만지는 것보단 왕실의 권위를 내세우는 데 집착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이들은 잊혀지지 않았고, 그 고귀한 정신은 현대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지금도 임진왜란을 기억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 정기룡에 대해 - 세상은 새로운 영웅을 원한다
사족 같습니다만 떼기는 힘드네요. 현재 정기룡에 대한 재평가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꼴이 꼭... 원균옹호론과 비슷하네요.
요점은 이렇습니다. 정기룡은 왜란 내내 크나큰 공을 세웠고 그가 30대의 젊은 장군인데다 어느 당파의 도움도 받지 못 해서 공을 인정받지 못 했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1605년에 "뒤늦게야" 그 공을 알게 돼서 선무공신 1등에 올랐고, 사실 선무공신 1등은 네 명으로 이순신, 권율, 원균, 정기룡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성웅이라 부르라"는 소설에서는 노량해전 역시 정기룡이 육지에서 적을 밀어내서 가능했고, 그는 노량해전 때 수륙협공을 위해 이순신과 나아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책의 서평 중 일부입니다.
"마지막 결전을 치를 때 육지에서 협공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종식하게 한 것도 정기룡이었다. 바꿔 말하면 육지에 정기룡이라는 뛰어난 명장이 있었기에 이순신의 승리도, 임진왜란의 끝도 가능했다는 얘기다."
육지의 이순신 정기룡. 하지만 그 실체는 조금 다릅니다.
정기룡이 오른 1등은 선무공신이 아닌 "선무원종공신"이었습니다. 선무공신보다 한 단계 아래급으이었죠. 여기에 이름 올린 이는 총 9060으로 우리가 잘 아는 의병장 및 장수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포함돼 있습니다. 애초에 선무공신 자체가 1604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1605년은 결코 뒤늦은 게 아니며, 그의 1등 역시 이순신에 비할 바가 아니죠.
분명 그가 임진왜란 당시부터 각종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경상우병사에 올랐으며 명에게도 인정받았습니다만, 현재 나오는 그의 공 대부분은 그의 가문 기록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모두 받아들이면 안 되며, 오히려 아군을 죽여서 공을 세운 척 했다는 의심 역시 받고 있는 상황이죠.
애초에 정기룡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은 관군보다 의병장들이 더 알려진 것 때문이며, 정유재란이 임진왜란보다 덜 알려져서입니다. 경주를 탈환한 박진이 얼마나 알려졌을까요? 권율의 휘하 장수였던 이복남이 남원에서 전사한 게 얼마나 알려졌을까요? 권율을 제외하면 알려진 조선 관군 장수는 전사한 김시민 등을 제외하면 없다시피 합니다. 특히 정유재란 때 활약한 이들은 더 하죠. 명군이 주력이었고 결정적인 공이 없었기 때문인지, 이순신의 활약이 워낙에 대단해서인지 정유재란 때의 관군 및 의병의 활약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김덕령이 죽자 곽재우가 산으로 들어가 도 닦아 신선이 됐다고 아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곽재우는 재란 당시 화왕산성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냈고, 광해군 때도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면서 재야에 있다 하나 세속과의 관심을 아예 끊지 않았죠. 이게 얼마나 알려졌을까요?
정유재란 때 조선군은 명군에 완전히 종속된 데다 병력도 적어서 결정적인 공을 세우기 힘들었습니다. 정기룡이 명군과 함께 진군했다 하나 명군의 퇴각으로 역시 돌아왔고, 이후 시마즈 요시히로가 떠난 사천성을 접수해서 왜적 2명을 베는 데 그쳤습니다. 그가 훌륭한 장수였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이순신 급으로 올리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까지 알려진 것은 다 거짓이다, 새로운 영웅이 있었다, 이걸 원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거 같습니다. 마치 원균옹호론을 떠올리는 짓이죠. 이순신이라는, 이미 알려진 영웅에는 질린 거 같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영웅은 지금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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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지친 티가 역력히 나죠. -_-; 휴... 이걸로 임진왜란 시리즈를 모두 마치겠습니다. 첫 글 올린 게 3월 27일인데 거의 2개월을 끌었네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고, 이 쯤이면 거의 다 한 거 같습니다. 북관대첩 같이 더 자세하게 다루고 싶은 소재가 남아 있고 마무리가 좀 부족하다 싶지만...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나중에라도 따로 글을 써 보겠습니다.
호란에 대해서는 아직 더 생각해 봐야겠네요. 우선은 조금 쉬고 싶네요. 지금까지 봐 주시고 지적해 주시고 칭찬해 주시고 재밌게 봐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__)
+) 링크 걸었는데 다 안 되네요. -_-; 이전 시리즈 보고 싶으시면 그냥 제 이름으로 검색해서 찾아보셨으면 합니다.
황산벌-평양성으로 본 삼국시대 말기 3부작 & 후삼국 이야기 (총 8편)
임진왜란 시리즈
임진왜란
0. 주요 쟁점 사항
1. 조선의 전쟁 준비, 빛
2. 조선의 전쟁 준비, 어둠
3. 원숭이의 야망
4. 충장은 탄금대의 불꽃으로 화하여
5. 나라가 망한다
6. 조선의 반격,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7. 형 왔다
완. 대첩, 그리고 혈전
임진왜란 해전사
0. 조선에는 이순신이 있었다
1. 불멸의 원균
2. 태산과 같이
3. 거북선 출격
4. 한산섬 달 밝은 밤에
5. 적의 소굴을 쳤으나
6. 거북선과 수군 장수들
완. 원흉
정유재란
0.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1. 한산은 나라의 남문이건만
2. 칠천량, 한산이 무너지다
3. 무너지는 호남
4. 군인은 전쟁터에서 싸우는 사람이다
5.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배가 있습니다
6. 명량, 천행
7. 전세 역전
8. 호랑이 사냥
9. 사로병진지계
10. 꿈의 끝
완. 이 원수를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유한이 없겠습니다
왜란이 끝나고 - 왜란종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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