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보아온 로맨스 드라마, 로맨틱 코메디 영화 등에서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에게 적절한 타이밍에 키스를 성공한다. 그런것만 보고 자랐으니, 키스라는건 그냥 적당한 침묵 사이에 얼굴을 들이밀면 오케이 정도라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 첫 키스는 달콤하다거나 말랑하다거나, 후광이 보인다거나, 혹은 귓가에 벨소리가 울린다거나 하기 전에 '민망함'부터 닥쳐왔던 것 같다.
동갑의 여자아이는 괄괄한 아이였다. 활기차고, 소년처럼 웃는 가식없는 아이. 우리 둘은 학생이었고, 가장 많이 데이트 한 곳은 서로 집 데려다 주는 길 위였다. 그 아이와 이야기 하는건 너무 재미있고 즐거웠어서, 날씨가 아주 더운, 혹은 아주 추운날에도 서로의 집을 데려다 주고 가고 주고 가며 같은 동네를 몇 바퀴를 돌고는 했다. 그런 나날들 사이에 나는 조심스레 어깨에 손도 올려보고, 머리도 쓰다듬어보고 손도 잡아보았다. 때로는 약간 작은 듯한 그녀의 주머니에 두 손이 함께했었고, 때로는 조금 널찍한 내 주머니로 그녀의 손을 감싸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그녀는 우리가 자주 지나다니던 아파트 내의 작은 공원에 있는 벤치에 잠깐 앉자고 했다. 날씨는 약간은 더운 듯 하지만 반팔이 어울리지 않는 봄날의 밤. 그녀는 그 곳에서 내게 머리를 기대었다. 그 때, 그녀의 작은 숨결에 들썩이는 머리가 어깨를 간질일 때, 나는 대뜸 좋아한다는 말을 꺼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만지작 거리며 손가락 끝의 지문 하나하나를 기억하려고 꼼지락 대었지만, 정작 어떤 사이인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와 남이고 싶지 않았다. 어깨로 느껴지는 숨 소리와 내 심장의 박동소리가 귀를 터트릴 것 처럼 크게 들려왔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잡고 있던 손에 깍지를 끼어주었다.
봄날의 밤. 한적한 공원 벤치. 깍지 낀 손. 주황색 가로등 불빛. 그리고 내 옆에 있는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그녀. 머리속에 떠오르는 것은, 지금 이 상황이 어릴때부터 보아온 로맨스영화들의 씬들과 겹치는 상황이라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그녀에게 키스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이 정도 쯤이면 허락해 줄 것 같았다. 그녀가 약간의 틈만 보이면, 나는 그녀의 입술을 훔치러 달릴것이다. 저 풍차를 향해 달리는 로시난테에 탄 돈키호테처럼. 그녀의 붉고 매끄러워 보이는 입술위를 뛰어오르기 위해.
숨을 두어번 푹 내쉬고,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바라보고, 기댄 그녀의 머리를 서너번 쓰다듬고는 슬쩍 어깨를 뺀다. 그녀의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내 눈이 머무른지 하나 둘 셋. 어느새 그녀의 입술은 눈의 망막에 커다랗게 확대되었고, 난 그 입술을 향해 적당한 각도로 얼굴을 들이대었다.
눈을 감고 셋 둘 하나. 첫 키스다 빠밤
......
어라?
.......
눈을 뜬 그 곳에는 어두컴컴한 공원의 풍경만이 있었다. 나는 눈을 꿈뻑꿈뻑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는 내 얼굴을 옆에서 보고있었다. 나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잘 이해할 수 없었는데, 그건 그녀가 멍청한 내 얼굴을 제 자리에 되돌려 놓을때까지 계속되었다. 뛰쳐나갔던 얼굴이 제 자리를 찾자, 민망함이 얼굴로 맹렬하게 올라왔다. 그녀는 매우 민첩하게 내 키스를 피한것이다. 이런 젠장.
그렇게 내 첫키스는 실패로 끝났다. 복싱선수를 방불케 하는 그녀의 깔끔한 스웨이 디펜스와 함께.
그리고 민망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내 두 볼을 감싸준 그녀는
내 첫키스를 뺏아가 버렸다.
젠장, 그럴거면 왜 피했냐.
그 이후로, 나는 키스에서 가장 중요한 예의는
양치질도, 세안도, 면도도 아닌
회피하지 않는 것 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여러분, 예의있는 사람이 됩시다.
물론.. 예의를 갖출 준비도 예의를 갖출 마음도 있지만
예의를 갖추고 싶어도 갖추지 못하는 지금은
으헝헝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