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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1/06 09:10:36
Name OrBef
Subject [일반] 울적할 때 보고 또 보는 영화 클립들.
저는 사람들 상대할 때에는 거의 항상 방긋방긋 웃지만 혼자 있을 때에는 거의 언제나 약간 우울한 편입니다. 짧게 말해서 멘탈이 좀 약하지요. 몸이 약하게 태어났어도 가장이 되었으면 닥치고 일을 해야 하듯이 멘탈이 약하더라도 가장이 되었으면 닥치고 일을 해야 하고 따라서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그런 면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원래 성격이 그런 만큼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혼자 술 마시는 시간이 꼭 필요한데, 혼자 벽 보고 술 마실 수는 없으니 주로 책을 읽든 (술 마시면서 책을 읽는다고?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막상 해보면 은근히 즐길만 합니다. 다만 그 다음 날이 되면 뭘 읽었는지 기억이 별로 나지 않으니 아주 중요한 책은 정신 말짱할 때 읽어야겠지요) 영화를 보든 음악을 듣든 하지요. 근데 울적한 기분에 술까지 마셔놓고 나면 새 영화보다는 옛날에 본 영화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들을 돌려 보고 또 돌려 보고 하게 됩니다. 그런 장면들 중에는 매우 사적인 것들도 있지만 (비밀이라는 게 아니라, 당최 다른 사람과 공감하기 힘든 이유로 좋아하는 장면들), 사람 생각하는 게 대충 다 비슷하다 보니 제가 좋아하는 장면을 남들도 좋아하는 경우가 더 많고, 그런 것들은 유튜브에 올라와 있더군요. 해서 그런 클립들을 몇 개 줏어와서 잡담이나 할까 합니다.

1. 덱스터


거의 전설이 되어버린 오프닝 씬입니다. 저는 덱스터 시리즈를 보면서 거의 모든 에피소드에서 너무 푸근하고 행복하다고 느꼈었는데, 그게 뭐 제가 연쇄 살인에 대한 욕구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 속이 텅 비어있다고 느끼는 덱스터가 주변 사람들과 어떻게든 어울려서 살아가려는 그런 모습이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는데요, 그렇다고 제가 뭐 사춘기 중학생마냥 저 자신이 매우 특별하다고 느끼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쁘게 살다 보니 느끼지 못하거나 억누르고 있을 뿐, 실제로는 다들 마음 속 한 구석에 저런 공허함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블루 벨벳


블루 벨벳도 제 올타임 즐겨찾기 리스트에 있긴 한데, 덱스터 때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도 주요 소재인 섹스와 폭력이 좋아서는 아닙니다. 다만 저는 이 영화에서 미칠 듯한 강도로 보여주는 현실과의 괴리감이 너무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가끔.... 이라기엔 조금 자주 저는 뭔가 '이 세상은 내가 원래 있을 곳이 아닌 거 같아' 라는 기분을 느끼곤 하는데, 물론 그렇다고 해서 폐인처럼 산다든지 위대한 실존주의 철학자가 되겠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저런 기분을 느낄 때에는 의식적으로 그 느낌을 떨쳐버리려고 노력합니다. 다만, 아주 가끔은 그 기분을 즐기고 싶을 때가 있지요. 그럴 때 이 영화를 봅니다.

3. 새벽의 저주


이 영화는 이젠 뭐 너무 여러 번 봐서 전체 영화를 다시 보진 않습니다. 다만 이 장면은 유튜브 즐겨찾기에 넣어 두고 수시로 열어보지요. 제가 좀비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그 잔인함이 좋아서는 아닌... 건 아니고 맞긴 한데, 그보다 더 큰 이유라면 역시 좀비 영화 특유의 절망감과 고독함입니다. 좀비 영화라면 결국 세상 사람의 대부분이 소통 불가능한 괴물이 되고 남은 사람은 얼마 없고 그 남은 사람도 결국 하나씩 좀비로 변해가는 스토리를 따라가게 되는데, 저는 그런 스토리가 우리가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사회로부터의 단절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느껴지곤 하거든요. 우리는 어차피 주변인 몇십 명과만 이런저런 공감을 하면서 살아가지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과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서로는 서로에게 일종의 기능으로만 존재할 뿐이지요.

주제와는 상관없지만, 좀비 영화를 좀 다른 기분에서 - 즐기자! - 볼 때가 있는데, 그럴 때의 원탑은 이거죠:
http://youtu.be/RNFOTlwaEHk

4. 영화는 아니지만 WWF (WWE 의 전신) 소속의, 그리고 비명에 죽은 레슬러들.



지금이야 뭐 레슬링 볼 나이는 지났지만 저도 한때 이걸 굉장히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에는 '정의 vs 악당' 으로 받아들였었고, 나이가 좀 든 다음에는 '저거 다 쑈임. 하나도 안 아픔' 이라고 받아들였었지요. 그리고 그 레슬러들이 굉장한 고통을 참으면서 경기에 임한다는 것, 그러다 보니 약물에 중독되는 경우도 많고 따라서 평균 연령이 매우 짧다는 것,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는 안습한 연봉만 받으면서 살다가 폐인으로 끝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제가 레슬링에 흥미를 잃은 지 한참 지나서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언젠가 이 영상을 볼 일이 있었는데, 그 날 비로소 이 레슬러들이 살아야 했던 힘든 삶에 확 와 닿으면서 너무 안쓰럽게 느껴졌지요.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종종 보곤 합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동안은 행복하게 살아야죠.



얼마 전에 마님이 하도 같이 보자고 해서 응답하라 1994 를 봤는데, 거기 장국영 닮은 친구가 서울 올라와서 사기당하고 첫날밤에 잠을 청할 때 이 노래가 브금으로 나오더군요. 서울의 달을 본방 사수하면서 봤었는데, 거기서 느껴지는 고독함, 뭔가 나만 따로 노는 듯한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보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참 와 닿았던 좋은 드라마였습니다. 살면서 무슨 일이 있을지 알 수 없고 죽은 다음에 뭐가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살면서 행복할 때가 아주 없진 않다면, 그러면 그걸로 된 거지요. 허무함은 철학적 사고를 통해 논리적으로 도달하는 결론 같은 게 아니라 그냥 기분일 뿐이고, 그렇다면 허무함게 느끼면서 살지 행복하게 살 지는 우리가 정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 하지 말고 다 같이 하쿠나 마타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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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린다
13/11/06 09:36
수정 아이콘
덱스터 저 오프닝 씬은... 진짜 예술의 경지를 넘어서 외설의 경지입니다... 영화, 드라마 통틀어서 최고로 좋아 하는 오프닝
13/11/06 09:49
수정 아이콘
저건 영상물 박물관 같은데 꼭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니다. 도대체 저런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을 지 저로서는 상상도 가질 않아요.
SugarRay
13/11/06 10:26
수정 아이콘
저와 비슷한 취미를 갖고 계시군요. 저는 엄청 힘들 때는, 영화의 어떤 장면들을 틀기 일쑤인데

-시드니 루멧 영감의 네트워크에서 앵커가 분노해야 한다고 소리치는 씬
- 타란티노의 펄프 픽션에서 우마 서먼과 존 트라볼타가 척 베리 노래 틀어 놓고 춤추는 씬
-데이빗 핀처의 소셜 네트워크에서 제시 아이젠버그가 퇴짜맞은 직후 하버드를 통통 튀면서 달리는 씬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에서 줄리안 무어가 약 살 때 분노하는 씬 등을 트네요.

대체로 힘들 때 잠깐 침착해질 수 있는 씬이나, 혹은 저 대신에 대신 분노해주는 씬을 보는 것 같아요.
13/11/06 10:33
수정 아이콘
오오 펄프 픽션의 저 장면 저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네... 저도 제 감정을 추스리거나 반대로 (집에서 혼자서 조용히) 폭발시키고 싶을 때 영상들을 찾는 것 같아요.
王天君
13/11/06 11:06
수정 아이콘
펄프 픽션과 소셜 네트워크는 저도 엄청 좋아하는 장면이네요.
인규Roy문
13/11/06 10:39
수정 아이콘
4번영상 썸네일에 나오는 이름을 말해서는 안되는 자의 티셔츠가 참 아이러니하군요.
13/11/06 10:53
수정 아이콘
오.... 말씀 듣기 전에는 못 알아봤습니다. 거 참.... 세상 사는 게 참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많지요.
인규Roy문
13/11/06 10:55
수정 아이콘
전처가 키운 큰 아들이 레슬링을 한다던데 아버지의 악명이 너무 커서 잘 될까 싶기도 하고...그렇네요;
13/11/06 10:56
수정 아이콘
아들이 무슨 죄겠습니까 잘 되길 바랄 뿐입니다 ㅠ.ㅠ
철석간장
13/11/06 10:50
수정 아이콘
이글을 읽어내려가면서 떠오른게 매그놀리아의 개구리우박 + wise up 이었습니다...
어찌나 인상적이었던지...

또 하나는 skins 시즌1의 엔딩 + wild world

두개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걸 보니 저는 릴레이식의 노래엔딩을 좋아하나보네요~ ^^

어쨌던 덱스터의 오프닝은 정말 쒝쒸 + 식욕증진 최고죠!!!
13/11/06 10:54
수정 아이콘
개구리 우박도 역대급이죠! 저도 그거 넣을까 하다가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했지만 종종 보는 영상입니다
王天君
13/11/06 11:12
수정 아이콘
전 인셉션에서 코브가 자신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틀어놓습니다. 감정이 격렬해졌다거나 필요 이상으로 가라앉았을 때 이 영상을 보면 감정에 휘둘리는 제 자신이 좀 침착해지고 사고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기분이에요. 내 고통은 아직 저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 하는 생각과 함께 저런 일을 당한 사람은 어떤 기분일까 하고 캐릭터에 자신을 대입하면서 제 자신의 문제를 잊게 되더군요.
전 좀 사색적인 작품을 전 찾는 것 같네요. 프로메테우스에서 데이빗이 홀로 쇼팽의 전주곡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농구를 하거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따라하는 장면도 그냥 멍하니 틀어놓습니다.
13/11/06 11:14
수정 아이콘
오.... 좋은 데요? 코브 관련 씬은 제가 고통쪽으로는 일가견이 없기 때문에 딱하니 도움받을 것 같지 않지만 프로메테우스의 두 장면은 말씀듣고보니 저한테도 잘 맞을 것 같습니다.
13/11/06 17:09
수정 아이콘
글을 보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씬은 Once의 When Your mind's made up 이랑 If you want me 입니다. 수없이 다시 돌려봤었는데 지금 쓰려고 하니까 제목이 기억안날 정도로 본지가 오래 됐네요.. 간만에 다시 들어야겠습니다..(근무시간인데..)
13/11/06 17:12
수정 아이콘
엌 이 노래 뭔가요 그야말로 OP인데요? 이 뮤지컬 꼭 봐야겠습니다!!!
13/11/06 17:24
수정 아이콘
으흥? 영화.. 인데요? 제대로 보신게 맞다면 처음부터 보시는걸 추천해 드립니다. 남주의 가창력이.. 어우..
13/11/06 17:29
수정 아이콘
아뇨 저는 물론 안 봤지요. 방금 유튜브에서 노래만 들었는데 베플에서 뮤지컬이라길래 크크
13/11/06 17:33
수정 아이콘
그렇군요 크크.. 저도 OrBef님 이하 여러분들이 추천한 덱스터 오프닝을 봤는데 절반도 못보고 껏습니다.. ㅠㅠ 덱스터 시리즈 다 받아놓고 1부 1편 5분도 못되어서 다 삭제한 기억이.. 오프닝은 좀 다를줄 알았는데 그 컨셉이군요.. 뾰족한 바늘.. 피, 상처들을 무서워해서요 ㅠㅠ
13/11/06 17:28
수정 아이콘
술마시면서 읽기엔 찰스 부코스키만한 작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13/11/06 18:21
수정 아이콘
엌 누굽니까 찰스 부코스키는? 설마 한 권쯤은 읽어봤겠지하고 위키피디아를 봤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13/11/07 19:26
수정 아이콘
오 이 분은 누구시죠. 위시리스트에 3부작 추가입니다. OrBef님의 소중한 글과 선비님의 댓글 감사드려요.
blue moon
13/11/06 18:21
수정 아이콘
덱스터 보지는 않았지만,,저 오프닝 보니 확 땡기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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