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영화공간] 한국영화 속 짝사랑, 그들의 이야기
오늘 주제는 '한국영화 속 짝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때로는 애틋하고 순수하게, 때로는 절절하고 가슴 아프게 기억되는 한국영화 속 짝사랑, 그들의 이야기들. 수많은 영화 속에서 단골 소재로 등장한 '짝사랑'이지만, 오늘은 그 중 내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다섯 작품을 선정해봤다.
1. [아는 여자]의 이연 - 사랑, 그게 별건가요?
갑작스레 애인에게 이별을 선고받고 덤으로(?) 병원에서 시한부 선고까지 받게 된 프로야구 2군 외야수 동치성. 더 이상 내년이 없고, 주사(酒邪)가 없고, 첫사랑도 없는 이 남자에게 어느 날 우연히 한 여자가 나타난다. 오래전부터 동치성만을 바라봐왔던 그녀 한이연. 그에게 있어, 갑작스레 다가온 낯선 이연의 존재는 단순히 '그냥 아는 여자'에 불과했지만 사실 이연은 동치성이라는 '오직 한 남자만 아는 여자'였던 것. 첫사랑의 존재조차도 부정하며 본인의 시한부 인생을 천천히 정리해가려던 이 남자에게 이연이라는 낯선 여자의 존재는, 그의 삶에 끼어든 엉뚱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가 불어넣어주는 삶의 온기와 엉뚱한 활력 속에 치성은 점차 마음을 열어가게 된다.
이렇듯 영화
[아는 여자]는 두 남녀의 평범하면서도 엉뚱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사랑과 연애에 대한 현실적인 판타지이다. "저요, 사랑에 대해 잘 몰라요. 근데 사랑하면 그냥 사랑 아닙니까? 무슨 사랑, 어떤 사랑 그런 게 어디있나요. 그냥 사랑하면 사랑하는 거죠." 라는 영화 속 좀도둑의 대사처럼, 이 영화는 사랑의 위대함이나 특별함이 아닌, 사랑의 일상성을 통한 수수함과 잔잔함을 이야기한다. 이른바 사랑이라는 것이 꼭 정해진 운명이나 인연처럼 대단하고 화려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삶과 일상으로부터 잔잔하게, 그리고 서서히 스며들 수 있는 것임을 일깨워주는 영화. 이렇듯 장진 감독은
[아는 여자]의 여주인공 이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사랑, 그게 뭐 별건가요?" 라고 말하며 빙그레 미소 짓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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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명대사]-
"코 파지 마요.. 안돼요, 더 이상 코 파면 안돼요.."
2. [은행나무 침대]의 황장군 - 천년을 기다린 한 남자의 사랑
짝사랑의 가장 비극적인 상황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거나 다른 사람의 연인이 되어있는 상황이 아닐까. 영화
[은행나무 침대]의 황장군의 입장이 그렇다. 모든 것을 가졌지만 오직 하나,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미단 공주의 마음을 얻지 못한 그.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미단 공주의 처소 앞에서 눈바람을 맞은 채로 몇날 며칠을 기다려보지만 끝내 그녀는 황장군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고 결국 사랑하는 종문과의 죽음을 택한다. 결국 죽음도 갈라놓지 못한 궁중악사 종문과 미단 공주의 사랑은 현세로 이어지게 되고, 황장군 또한 미단 공주를 좇아 천년이란 긴 세월을 기다려 다시금 그녀 앞에 나타나게 된다.
영화
[은행나무 침대]는 천년을 이어온 미단과 종문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미단 공주만을 바라보며 천년을 기다린 남자, 황장군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냉정한 카리스마로 무장한 그이지만, 그가 바란 것은 단하나 미단의 마음뿐이다. 영화 속 악역이자 강자처럼 느껴졌던 황장군의 모습에서 점차로 관객들이 동화되며 감정이입을 하게 된 이유는 이러한 사랑의 순수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영화의 마지막, 결국 사랑하는 미단의 마음을 얻지 못한 채로 불타는 은행나무 침대 앞에서 눈물지으며 "제발 나오라"며 절규하던 황장군의 안타까운 모습은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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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명대사]-
"미련하게도.. 천 년을 하루같이 한 여자만을 사랑한 남자가 있어. 그 시간도 모자라 그 사랑이 무참히도 짓밟히고 있어. 세상은 항상 내게 이런 식이었지. 낯선 타인처럼 등을 돌리고 언제나 비웃듯 나를 손짓해."
3. [올드 미스 다이어리]의 미자 - 세상을 향한 그녀의 외침
직장에서 구박받는 실수투성이 성우, 서른 둘, 소심한 푼수, 그리고 노처녀.
[올드 미스 다이어리]의 주인공 최미자를 상징하는 단어들이다. 멋진 남자와의 로맨스를 꿈꾸는 서른 둘의 노처녀 최미자. 하지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직장 생활, 가족들의 구박과 잔소리, 끝 모르게 풀리지 않는 연애의 실타래 등 그녀 앞에 놓인 현실은 갑갑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 앞에 나타난 근사한 외모의 꽃미남 지PD. 예전 사랑에 상처받고 배신당하며 남모를 연애의 트라우마 속에 살아가던 그녀는 왕싸가지 연하남 지PD에게 마음이 꽂혀버리게 되고 이 남자를 차지하기 위한 최미자의 '연하남 후리기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영화
[올드 미스 다이어리]는 연하남 지PD로 상징되는 '이 세상'을 향한 노처녀 최미자, 그녀의 도전과 외침을 담고 있는 영화이다. 대한민국이란 사회에서 30대 미혼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이른바 노처녀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어떤 아픔인지를 영화는, 특유의 재기발랄한 웃음과 유머를 통해 편안하면서도 속 시원하게 풀어낸다. 특히나 영화의 종반부, 확성기를 들고 지PD의 집 앞에 찾아가 그의 면전에 대고 그동안 쌓인 연애의 설움과 울분을 토해내던 그녀의 절절한 외침은, 많은 여성 관객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며 진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올미다] 최고의 명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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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명대사]-
"왜! 왜 나한테 뭐라고 그래?! 내가 어떻게 했다고- 왜 다들 나한테 함부로 해! 내가 그렇게 만만해? 내가 그렇게 우스워? 나 누구한테도 심한 말 해본 적 없어.. 나 누구한테도 함부로 해본 적 없어.. 근데 왜 다들 나한테 함부로 해! 왜 나를 독하게 만들어. 왜 예의를 안 지켜?!
맘에 없으면, 단둘이 술 마셔주지도 마.. 영화 보잔 말도 하지 마.. 전화해서 뭐했어요, 미안해요, 담에 봐요, 그딴 말도 하지 마.. 맘에 없으면, 돌아서 머리통이 깨져도 그냥 받아주지 마.. 단둘이 술 마시고 만나주고 그랬으면.. 그렇게 했으면.. 사랑하지 않아도 그냥 사랑해줘야 돼.. 그게 예의야.. 알어? 그게 예의야, 예의!"
4. [건축학개론]의 승민 - 그 시절, 우리들의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있게 마련이다. 그 사랑이 이루어졌든 이루어지지 못했든, 나 홀로 가슴 졸이던 짝사랑이든 아니든, 우리들 누구에게나 가슴 시리고 설레던 첫사랑의 기억은 존재한다. 영화
[건축학개론] 속 숫기 없는 스무살 대학생 승민은 '건축학개론' 수업에서 음대생 서연을 처음 만나게 된다. 풋풋하고 예쁜 서연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승민은 그녀와 우연한 계기로 친해지며 그녀에 대한 설렘과 사랑을 조금씩 키워가지만 쉽사리 고백하지 못하고 홀로 마음 졸이게 된다. 그리고 이 둘 사이에 나타난 킹카 선배 '재욱'의 존재는 승민의 마음을 바위처럼 짓누르며 풋풋한 사랑의 설렘을 지독한 실연의 아픔으로 바꾸어 버린다.
이렇듯
[건축학개론]은 우리들의 첫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영화이다. 누구에게나 학창시절, 첫눈에 반해버린 첫사랑이 있게 마련이고 그 사람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홀로 끙끙 앓으며 맘고생 하던 시절이 있게 마련이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인 승민과 서연이 13년이 흐른 후에 재회하여 과거의 대학 시절을 뒤돌아보듯,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각자 자신의 첫사랑의 추억을 되돌아보고 되짚어보며 이른바 '관객 각자의 영화관'에 들어서게 된다. 영화
[건축학개론]에는 기억에 남는 명대사들이 많지만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가슴을 후벼파는 실연의 상처에 절망한 채로 힘들어하던 승민을 끌어안고 납득이가 위로해주던 장면이다. 욕설로 점철된 거친 말투 속에 담겨진, 친구 승민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는 납득이의 마음에서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어린 시절 아픈 첫사랑의 기억이 짠하게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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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명대사]-
"어우, 쌍년! 진짜 개 좆 같은 년!! 야~ 다 잊어, 여자가 걔 하나야?! 관두라 그래! 그런 썅년은 줘도 안 가져! 야! 다 잊고 내가 내년에 대학가면 너 확실하게 책임질게.. 진짜...
내가.. 싱숭생숭이 다 데리고 올게. 첫눈 오는 날 딱 약속 정해서 만나가지고 2대2 더블데이트. 대학생처럼! 눈싸움도 하고 막, 눈사람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손목 때리기! 손목 때리기! 야, 생각만 해도 존나 신난다. 그지? 승민아? 어..?
...힘내, 새끼야.."
5. [파이란]의 파이란 - 세상이 버린 삼류 깡패를 사랑한 여자
영화
[파이란]은 인천의 삼류 건달 강재와 그를 사랑하게 된 한 여인, 파이란에 관한 이야기이다. 하나뿐인 혈육인 이모를 만나기 위해 한국을 찾은 파이란은 이모의 이민 사실을 알게 되고 갈 곳 없어진 그녀는 한국에 체류하기 위해 인력 소개소의 주선으로 생면부지의 남자와 위장 결혼을 맺게 된다. 그 남자는 꿈도 희망도 없이 하루 하루 근근히 살아가는 나이든 삼류 건달 이강재. 하지만 고독하고 쓸쓸한 타국 생활에서 홀로 외로움을 견뎌내는 파이란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는 증명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서류상의 남편 이강재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파이란에게 냉소와 멸시의 눈빛을 보낼 때 유일하게 그녀를 향해 항상 웃음짓는 사진 속 남편에게 고마움을 넘어 사랑을 느끼게 된 파이란.
하지만 파이란이 간절히 바라던 이 둘의 만남은, 지병으로 인한 그녀의 죽음으로 결국 성사되지 못한다. 서류상 아내인 파이란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뒤늦게 그녀의 장례를 치르고 그녀가 남긴 편지를 받아든 강재. 비루하고 보잘 것 없는 자신에게 '세상에서 가장 친절한 사람'이라고 망설임없이 말해주며 고마움과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파이란의 편지를 읽으며 강재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영화
[파이란]은 이렇듯 보잘 것 없고 초라한 인생을 살아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강재'에게, 나를 인정해주고 사랑해주는 단 한사람의 존재만으로도 보잘 것 없는 우리네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따뜻해질 수 있는가를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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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명대사]-
"강재씨,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 아무 것도 없어서 죄송합니다.. 세상 어느 누구보다 사랑하는 강재씨, 안녕."
마치며 - 지금 여기,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
보통의 다른 멜로 영화들, 이른바 달달한 멜로 영화들보다 이러한 '짝사랑 영화'들이 더욱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누구나 한번쯤은 가슴 속에 아련한 추억과 시린 아픔으로 남아있는 이러한 지난 사랑의 경험들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다섯 편의 영화들 또한 전부 각양각색의 이야기와 사연을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랑은 이루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기도 했지만 결국 그 속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존재한다. 이른바, 사랑의 아픔을 통한 자기 내면의 성장. 사랑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영화 속 그들은 전부 사랑 그 이전의 자신과는 달라진, 또 다른 나의 모습을 발견하며 삶의 발걸음을 한걸음 더 앞으로 내딛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 속의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들고, '그때 왜 그렇게 찌질하고 바보같이 굴었을까' 하는 후회막심한 과거의 가슴 아픈 사랑의 기억들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자연스레 추억으로 남고, 또 자기 성장을 위한 쓴 약이자 밑거름으로 남게 마련이다. 똑같은 후회를 반복하기엔, 지난 시간 동안 너무나 가슴 아프고 힘들었으니까.
결국 우리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지난 사랑과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 후회로 일관하는 모습이 아니라, 지난 사랑의 아픔을 담담하게 인정하고 끌어안으며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어."라고 스스로를 응원하며 다독이는 자세, 그리고 어제가 아닌 '오늘'을 바라볼 줄 아는 태도가 아닐까. 결국 지난 과거의 사랑도 좋고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들도 좋지만,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지금 여기에,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