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론 우즈 NO.33 OB, 두산 베어스: 1998~2002,
NO.44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2003~2004, 주니치 드래곤스: 2005~2008
이 사내는 1988년 몬트리올 엑스포스와 계약을 하였고 이 후 볼티모어오리올스 그리고 보스턴 레드삭스로 이적하였다.
하지만 1군승격을 한 번도 하지 못 한 채. 낯선 동양의 나라로 온다.
처음으로 외국인 선수제도를 도입한 이 나라의 프로야구.
뭐가 뭔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살아 남아야 했다. 열심히도 하였다.
마침내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도 갈아치웠다. 누굴까? 바로 타이론 우즈다.
LG 트윈스가 단 2년간 활약을 하였던 페타지니를 대표 타자로 꼽을 수 있다면
두산 베어스는 다른 선수가 필요없다. 바로 타이론 우즈다.
프로야구 외국인 선수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한 98년 장종훈의 한 시즌 최다 홈런인 41홈런을 42홈런으로 갈아치웠다.
팀 내에 융화도 잘 했고 그만큼 성적으로 보답을 한 탓에 '흑곰'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여담이지만, 당시 OB에서 두산으로 넘어가려는 시기였던 98-99-00년의 두산 클린업 트리오는
어느 구단에 내 놓아도 뒤지지않은 타선이었다.
김형석-강형석-임형석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석트리오' 이후 마땅한 히트상품이 없었던 베어스로서는
우즈-김동주-심정수, 이른바 우-동-수 트리오로 리그에 베어스의 이미지를 집어넣기 시작하였다.
(오묘하게도 그 때부터 LG는 서서히 팀이 가라앉기 시작을 하였다.)
3명이 90홈런 300타점은 너끈하게 기록을 할 수 있는 파워와 정확도를지녔기 때문에 상대팀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우즈는 어쩌면 이러한 베어스의 기운을 제대로 타고 나 '코리아 드림'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리고 당시 두산에서 밀어 때리는 기술까지배워 한국에서는 거의 무적이었다.
그 결과 01년 한국시리즈 MVP를 타냈고 소속팀은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특이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인데 덩치에 비해 발도 빠르고 눈치도 있어서 01년도에 기록한 도루 숫자가 12개다.
재미있었던 사실은 당시 주니치의 타격코치였던 사사키 쿄스케가 우즈의 타격을 상당히 높게 평가를 하였다.
그래서 실제 주니치가 우즈를 입단하기 위해 교섭을 시도했지만 조건이 맞지가 않았는지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이 후 당시 일본으로 본인이 갈 수는 있었다는 느낌은 왔었나 보다.
2002 시즌이 끝이 난 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로 그는 일본 프로야구계로 진출을 했다.
필자는 당시 우즈에게 지급을 했던 연봉이 6천만엔 (당시 6억~7억원 수준)으로기억을 한다.
아무래도 연봉 지급과 자금력에 한계가 있는 두산으로서는 그를 더 이상 잡기가 힘들었을것이다.
그렇게 넘어간 일본 요코하마 베이스타스. 그런데 그는 타격을 정말 두산에서 제대로 배우기는 했나 보다.
첫 해에 40홈런으로 홈런왕을 획득하더니 2004년에도 45홈런으로 2년 연속 홈런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소속팀이 2003-2004년 연달아서 최하위를 기록하는 바람에 그의 기록도 아무래도 빛을 발휘하기가 힘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그렇게 시즌이 끝난 후 계약 교섭에서 다년계약을 요구했지만
나이도 많고 찬스에 약하다고 구단이 판단을 하는 바람에 요코하마에서 더 이상 뛸 수는 없었다.
마침 중장거리 타자가 필요한 구단이 당시 주니치 드래곤스와 한신 타이거즈였는데
그를 데리고 온 것에 성공한 팀이 주니치 드래곤스였다.
마침 주니치도 그를 2년 계약으로 데리고 오는데 합의하여 우즈는 주니치로 이적을 하였다.
그렇게 맞이한 2005년. 그런데 순탄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4월 6일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상대투수의 공에 왼손 새끼손가락에 맞아 골절상을 입었다.
그래서 받은 전치 6주의 진단을 이겨내고 나왔지만,
5월 5일 어린이날 야쿠르트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가 머리 근처로 던지는 볼에 대노한 나머지 마운드로 쫓아가
오른쪽뺨을 후려 최장처분을 받아 10경기 출장정지를 받았다. (나중에야이 두 사람은 화해했지만)
하필 그 당시 받은 퇴장처분으로 인해 교류전에서 주니치는 크게 흔들려버려 우승에 실패하였다.
그 탓이었는지, 8월 6일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의 경기에서
관중석에 붙은 「Money、Kaese!(金返せ)-돈 토해 내!」라는 플랜카드를 보고
그날 약이 올라 일본 진출 처음으로 한 시합 3홈런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당시 주니치는 한신 타이거즈와 1위 다툼을 할 시기였는데 당시 자료가 없어서 알 수는 없지만,
우즈가 부진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 본다.
06년 일본 시절부터 계속 지적을 받았던 승부처에 약하다는 것을 극복하기 위해
시즌 초 부진에도 불구하고 47홈런으로 홈런왕과 타점왕에 올랐다.당시 리그 우승까지도 힘을 보탰다.
그런데 승부처에 약하다는 소리는 하필 일본시리즈에 들어가서또 들어야했다.
당시 .267에 홈런, 타점 0으로 기록하는 바람에 일본시리즈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 했던것.
07년 시즌 초반 잘 나갔지만 지병인 허리통증으로 인해 타율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을 한 시기였다.
결국 한신-요미우리-주니치의리그 1위 3파전에서 그가 부진한 바람에 주니치는 2위를 기록했다.
그런데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그 해 부터도입하기 시작한 클라이맥스 시리즈 (우리의 플레이오프에 해당)에서
3홈런을 날리면서 일본시리즈 진출에 큰 힘을 보탰다. (그 해 주니치는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08년 노쇠화와 교류전이후 부진에 빠지면서
차세대 주전인 모리노 마사히코와 세이부에서 이적한 와다 가즈히로에게 주전으로 밀려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홈런 숫자는 여전했지만, 타점이 현저하게 줄어버렸고 계약 협상에서
39세의 나이와 고액 연봉이 부담스러운 주니치는 (당시 6억엔 수준으로 기억함) 결국 자유계약을 통보하였다.
이 후 소프트뱅크에서 그를 데리고 오기 위해 검토는 해 보았지만
당시 그가 3억엔이상을 요구해 무리라고 판단하고 단념하였다.
한신에서도 검토는 한 듯 보이나 당시 크레이그 브라젤을영입해 우즈의 영입은 없었던 일로 돌아섰다.
지금은 미국에서 부동산 관련 업무를 하고 있고 선수로서는 은퇴 한 상황이라고 봐야 할 듯 싶다.
본인은 지금도 야구 선수로서 다시 복귀를 하고 싶어하는 눈치인데
(44세세면 오히려 멕시칸리그가 맞지 않을까?) 글쎄, 지금도 데리고 갈 팀이 있을지는 의문이다.
(요코하마 시절 타이론 우즈의 홈런)
(주니치 시절 타이론 우즈의 홈런 - 후지카와 큐지의 표정에도 주목)
곁다리 영상
(이승엽과 시비가 붙은 우즈 - 외국인 선수끼리 시비가 붙은 신기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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