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빙고 – 양혜석/곤마
양혜석 작가는 잘 모르지만, 곤마 작가의 조선 좀비 실록이란 작품은 첫 화를 보고 정말 썩소를 지은 경험이 있어서 그다지 기대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의외로 괜찮군요? 양혜석 작가가 스토리 라인을 잡아준 것 같은데, 확실히 좋은 만화는 좋은 이야기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림체도 조선좀비실록에 비해 훨씬 자연스럽구요. 물론, 강남 스타일 스러운 처자들이 조금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작가의 스타일이라 이해하고 넘기도록 합시다.
미스테리 극장 에지를 떠올리게 하는 시체의 묘사 (초점없는 눈동자로 죽은 이의 얼굴을 그리는)가 현실성에 부감을 더해줍니다. 1차, 2차, 식으로 공포를 깔아놓아서 절정으로 다다르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고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무엇보다 액자식 구조 안에 하나의 반전을 숨겨두고, 절정에 다다르는 부분은 액자 바깥에서 꺼내는 이야기 구조가 좋네요. 의도적으로 허술해 보이는 이야기를 깔아두고, 그 허술함을 반전의 논리적 요소로 활용하는 진행이 탄탄합니다. 서늘한 촉각적 심상을 지니면서도 많이 쓰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선한 ‘빙고’라는 소재 또한 인상적입니다.
옥의 티라면,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대사들이 눈에 띕니다. 말대꾸를 하는 듯한 궁녀의 대답이나, 신분의 차이를 잊은 듯한 아비의 거친 대사 같은 것들 말이죠. 그런 것들을 제하면,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컨셉에 딱 맞는 작품이 나왔네요.
32. 초상화 – 강지영
미술실 모나리자 괴담을 조선시대의 배경에 맞춰 변주한 작품이군요. 덕분에 익숙한 소재가 그리 식상해 보이지 않고 나름 신선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는 것, 특히 인물화를 그리는 게 사대부 자제들이 저렇게 전문적인 교육을 받을 정도로 환대받는 직업이었던가요? 알쏭달쏭 하군요.
건성인듯한 주인공들의 얼굴 묘사에 형편없는 귀신이튀어나오는 건 아닌가 했지만 웬걸, 귀신의 등장 모습은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1,2위를 다툴 정도로 충격적이고 무섭습니다. 프레임을 꽉 채워 등장하는 인물화의 얼굴이 정말로 근접해 있는 듯한 효과를 줘서 움찔하게 만드네요. 분량에 알맞게 전조를 적당히 깔아놓아서 예측은 가능하되 그 예측이 긴장감으로 작용하게끔 만든 플롯의 짜임새도 괜찮습니다. 다만, 클라이맥스여야 할 부분의 손 있는 귀신의 활약이 적어 끝에 가서는 조금 밍숭맹숭한 감이 있군요.
33. 생귀신 – 손하기
이런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대체 어떤 만화를 그렸을까 싶어서 찾아봤는데, ‘위아더 능력자’라는 심히 캐쥬얼한 코메디 작품을 그린 여성 작가라서 조금 놀랐네요. 윤태호 작가를 표방한 듯한 그림체가 상당히 인상적입니다. 의도적으로 묘사에 있어서 거칠고 불균형적인 포인트를 주고, 클로즈업을 많이 써서 보통 사람들에게서 수상쩍은 분위기를 뽑아내는 재주가 있군요.
다만 전설의 고향의 컨셉과는 심히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왜 그러는가? 에 있어서 가해자들의 집단 광기를 이해할 길이 없군요. 이 정도의 이유 없는 악의는 너무 현대적이라서 전설의 고향과 연결고리를 심히 찾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도시괴담에 가까워요. 선인은 없고, 악인과 더한 악인의 대치 구도 또한 너무 현대적이구요. 인간의 욕망을 근원으로 한 이 덫의 작동원리 말고, 역사적, 혹은 비극적인 의미를 부여했다면 훨씬 더 좋은 작품이 됐을 겁니다. 또한 경찰을 너무 바보로 아는데, 저 정도 수의 사람들이 깽판을 친 흔적을 경찰이 못찾을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최소한 두 번은 죽은 현장을 경찰이 저렇게 허술하게 놔둘리가요.
34. 동티귀 – 손영완
대낮이라는 배경이 작품의 몰입을 심하게 거슬립니다. 쨘!! 하고 나타나 있는 귀신의 등장 또한 플롯의 흐름에서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라고 자시고 할 틈이 없어요. 그냥 뜬금없을 뿐이죠. 공포의 대상이 너무 구체적이고 확연해서 무섭다기 보다는 위험한 산짐승 같은 느낌입니다. 디자인 또한 동양의 것과는 거리가 한참 떨어져 있어서 시리즈의 컨셉, 작품 내의 배경과 따로 노는 느낌이 너무 큽니다.
무엇보다도, 전 이 귀신의 변덕스러움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귀신은 분명히 처음에는 주인공을 단죄할려고 사정없이 몰아붙였죠. 봐줄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놓고서는 무슨 기회를 줬다느니… 금을 돌려놓는 장면도 좀 웃깁니다. 아니 생각도 못하나요? 견물생심이라 했거늘, 하물며 품에 지니고 있는데 저 정도 갈등이야 너무 인간적이고 당연한 거지요. 실질적으로 또 다시 들고 도망갔으면 모를까. 귀신이 너무 쪼잔하고 제멋대로라서 인과응보의 느낌이 안나고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근원으로 하는 공포물에 이 소재는 맞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 운명,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오만함이나 불경함을 주제로 하는 작품에 걸맞는 소재지요. 석판 아래 황금이 깔려있는데, 누군들 안가져가겠습니까? 귀신이 무서워서 놔두고 가는 게 더 겁쟁이 같고 이치에 맞지 않죠.
35. 장원급제 – 고리타
욕망과 양심 사이 갈등하는 인간의 이야기입니다. 귀여운 그림체 때문에 공포 장르에 있어 약점이 뚜렷한 데도 중간중간 개그 욕심을 부리는 만용이 대단하군요.
플롯 상으로도 참 빈약하기 짝이 없습니다. 주인공이 친구를 죽였다- 이게 이 작품의 핵심이고 가장 무서워야 할 부분이죠. 친구의 혓바닥에 답이 쓰여졌건, 그 스님이 귀신이건 이미 중요치 않은 사실이에요. 거기다가 죽기 전 참회하고 있는 사람을 굳이 지옥으로 끌고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죽기 전까지도 정신 못차리고 있는 사람에게 자각을 시키거나, 야망을 좌절시켰을 때 욕망의 허망함과 인간다움의 중요성이 납득이 가는 법이죠. 죄를 씻고자 고매하게 살아온 저 노인의 노력은 다 깡그리 무시해버리는 것도 좀 황당하군요.
36. 청삼 – 해즐링
그림을 보고 처음에는 맛집 남녀의 작가인줄 알고 긴장했다가 나중에서야 작가를 제대로 보고 안심했습니다.모노톤과 청색 적색으로 포인트를 주려 했지만 파란 색이 너무 인공적인 색이어서 잘 와닿지가 않는군요. 선도 너무 거칠고 작화의 약점이 잘 감춰지지 않습니다.
아내의 모습은 쓸데없이 흉해서 거부감이 듭니다. 주인공이 아내에 대해 가지고 있는 난처한 감정도 잘 이해가 안갑니다. 친구의 목숨을 외면하고 호위호식하고 있는 인물에게, 그것도 남존여비의 사상이 전반적으로 깔렸으며 한탕 크게 해낸 속물이 저런 아내를 왜 집에 두고 있겠어요? 쫓아내고 진즉에 기생이건 뭐건 들였겠지요. 거기다가 청삼 하나로 너무 극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도 좀 현실감이 부족합니다. 산삼을 팔아서 재물을 마련하는 건 그렇다 치지만 사회적 신분의 이동과 주인공의 거만함은 조선후기라는 배경에 너무 어색해보여요. 암만 돈이 많고 자신이 칼자루를 쥐었다고 해도 고위직의 벼슬아치에게 저리 떵떵거릴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이 환상이 사실은 두 심마니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라는 해석의 여지가 있는 결말은 좋네요. 이 결말대로 갔다면 공중에 떠있는 귀신은 없애는 게 훨씬 나았겠지만요.
37. 아기 장수 이야기 – 황준호/연제원
흐드러지다 로 호평을 받았던 연제원 작가의 작품이라 다른 작품들보다는 기대를 했습니다만, 이름값만큼은 못하는 작품이네요. 전체적으로 수상한 시대 분위기와 억압당하는 개인은 잘 그려냈습니다만 정작 중요한 공포가 실종되어 버린 느낌입니다. 그렇다고 결말 부분의 아기의 등장이 딱히 충격적이거나 인상 깊지도 않아요.
막막하고 암울한 개인의 심리는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만, 그것이 너무 무력한 느낌이라서 무섭다기보다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조금 더 거국적인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낼 거였다면 주인공을 둘러싼 이웃과 마을의 압박을 조금 더 그려넣었어야 했어요. 또한 자식을 스스로 죽여야 하는 부모로서의 딜레마가 전혀 그려지지 않아서 마땅히 그려져야 할 인간적인 비극과 갈등이 잘 드러나질 않습니다.
38. 여로 - 정철
우와…무슨 그림이 이리도 탁월한지. 그림만으로도 감상할 가치는 충분합니다. 조선시대 인물들 치고는 심히 서양인스러운 이목구비가 걸리긴 하지만, 투박하고 촉촉한 느낌의 그림체가 시대적 사실감을 잘 부여하는군요. 인물들의 주름살과 얼굴, 생생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표정은 드라마의 깊이를 한층 더 보강해줍니다.
다만 호랑이의 등장은 전체적인 작품의 주제와는 상충되는 부분이 있네요. 이 작품의 주요 갈등 지점은 무지와 그로 인한 집단의 광기입니다.그리고 이걸 해결하는 것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입니다. 그러나 백호의 출현은 초자연적인 존재, 신령한 존재의 개입을 뜻하는 데, 이게 이 작품의 주제인 인간의 지혜와 어울려 보이지 않아요. 인간끼리의 갈등과 해결에 괜히 덧붙인 미신적인 부분이네요. 이 이야기를 글로 요약해 본다면, ‘호랑이가 나타났고, 무녀는 부끄러워했다’ 라는 부분이 상당히 어색하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39. 탈귀– 럭스
인물들의 생김새나 배경 자체가 너무 현대적이네요. 전통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선이나 채색에서 본래 그림체와 동떨어진 그림체를 택했던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는변화가 필요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그래도 시종일관 진지한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고, 호러의 기본은 지키고 있는 모습입니다.
다만 힌트로 주어졌던 부분이 조금 뻔해서 반전의 예측이 쉽습니다. 목도리를 굳이 하고 있는 걸 본다면 누가 봐도 목매달은 자국을 가리려고 하는 걸 예상할 수 있겠죠. 또한 저주의 메카니즘이 조금 모호해서 이해가 잘 안 됩니다. 그러니까, 탈귀는 무녀한테 기생을 하고 있다는 말인건가요? 무녀는 이미 죽어서 자살을 했다는데? 아니면 이게 거짓말이고 무녀가 제물로 한 처녀를 희생시킬려 했지만 그게 실패해서 사또를 대신 제물로 삼은 건지? 이래저래 번거롭거나 어색한 결말입니다. 서술자로서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또를 굳이 사건의 중심에 두는 게 구성 면에서 좀 부자연스럽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부분은, 남매 사이의 애틋한 정과 속죄라는 부분에 있어서 나쁘지 않은 드라마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걸 결말인 척 바람만 잡는 용도로 소비해버린 게 결과적으로는 악수로 작용했다는 겁니다. 훈훈하게 끝났으면 더 좋았을 작품이었어요.
40. 돌아가는 길 – 황영찬
또 고려장이야!! 정말 지겹습니다. 이게 이 시리즈의 마지막 고려장 이야기였다는 게 다행일 따름입니다. 아니 왜 날조된 역사적 사실을 가지고 굳이 이야기를 그리는지 모르겠어요. 더군다나 그게 침략국이 속국의 민족성을 왜곡시키고자 한 정치적 의도가 들어있는 데도 말입니다. 효 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고려장 말고는 아예 소재가 없나요? 소재 이전에 주제 자체가 식상하단 느낌은 없었을까요?
그림은 좋네요. 그런데 이야기의 정체성이 조금 모호합니다. 불효자 아들을 구해준 아버지가 귀신인 의미가 애틋한 부성애인지 아니면 불효에 대한 귀신의 응징인 건지 말이죠. 의도된 열린 결말이라고 보기에는 좀 껄끄럽습니다. 전자에 가깝게 해석을 하자면 목이 꺾인 아버지의 환영이나 마지막 장면의 다른 노인 귀신들의 모습이 불필요한 공포를 조성하고 있습니다. 후자에 가깝게 해석을 하자니 아버지의 따스한 모습이 너무 생생하고, 아버지란 존재를 복수귀로 만들어서 인과응보라기에는 너무 치졸하거든요.
41. 이여광 이야기 – 김이랑
구미호 전설에 연쇄 살인마라는 설정을 덧붙여 나름의 변주를 꾀한 작품입니다만, 일단 조악한 그림체에서부터 감상에 지장을 받네요. 아니 아무리 황량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라지만, 저 인물들이 사는 곳은 무슨 아공간입니까? 블리치도 아니고, 배경이 생략된 부분이 너무 많네요. 이를테면 요리하는 장면에서는 아무 배경도 없이 하필이면 도마에 파 하나만, 한 단도 아니고 딱 하나만 썰고 있습니다. 이거 클리셰를 이용한 코메디인가요?
연쇄살인마를 묘사한 부분도 정말 깊이가 없습니다. 사건의 은폐를 위해 친구를 죽이려 하는 사람이라면 왜춘이 아비를 죽여도 산 속에서 진작 죽였겠죠. 최소한의 피해자만 내고 싶어하는 정상인이라면 자신이 범인인 걸 들켰을 때 저렇게 표정을 바꾸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 자기 자식을 죽인 범인의 정체를 안 아버지한테, ‘그냥 넘어갔더라면’ 이라는 대사를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그냥 저능아네요. 자신의 범행에 가장 중요한 도구를 저딴 식으로 허술하게 처박아놓은 것 또한 이 심증을 뒷받침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반전에 대한 평은 베댓란의 어느 댓글로 대신하죠. “애기들 좀 그만 먹어;;;;;”
42. 천의 노래 – 서재일
진작 나올 법 했는데 이제서야 나오는 신분 사회 안의 이야기입니다. 일단 그림은 좋군요. 강가를 배경으로 고요하고 한적해서 쓸쓸하기까지 한 배경의 연출도 좋습니다. 등장인물들의 표정도 생생하고 대사 또한 나름 시대상을 반영하려 노력한 티가 보이네요. 무엇보다도, 전설의 고향 답게 ‘한恨’의 정서가 잘 살아있네요.
다만 신분제의 비극이라기에는 개개인의 성격과 사연이 더 강조되어 있군요. 문제는, 인물이 너무 악하게 그려져서 위악 僞惡 의 느낌이 더 강하게 납니다. 저렇게 대놓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사람을 갖다놓으면 나쁘지 나쁘지 이 놈 욕하자 하고 독자를 떠미는 느낌밖에는 안납니다. 주인공의 사연 또한 너무 전형적이어서 식상한 느낌마저 나는군요.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는 귀신 또한 서정적인 작품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결과적이지만 악독한 한 개인의 횡포와 그에 대한 복수의 이야기보다는, 신분제의 부조리에 핍박당하는 인간의 황폐한 삶을 그려내는 게 어땠을까 싶어요. 그것이 한이라는 정서와도 더 통하는 게 있을 테니까요.
43. 망태 할아버지 – 박찬호
수묵화스러운 연출이 좋습니다. 망태 할아버지의 괴기스러운 모습도 잘 그려져 있네요. 망태 할아버지가 쫓아오는 장면은 꽤나 무시무시합니다. 어린 아이에게 있어 노인이란 미지의 존재라는 점을 잘 잡아낸 작품이네요.
다만 망태 할아버지라는 소재를 전설의 고향이라는 컨셉에 맞게 각색했느냐 하는 질문에는 자신있게 예스를 답하기는 어렵습니다. 근대 이후라는 배경이 문제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어서 이 작품은 지극히 현대적이거든요. 식인이라는 행위의 잔혹함과 아동의 착취라는 부분에서 현대의 도시괴담의 향기가 짙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결말은 좀 이해가 안갑니다.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괴담에 실체를 부여한 ‘망태 할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라서 다른 이야기가 들어갈 틈이 별로 없어요. 마지막 모자의 이야기가 좀 모호합니다. 시대의 변화라고 보는 게 제일 타당한 것 같은데, 그러면 이제 그런 건 다 옛날 이야기야 하고 여운을 오히려 눌러버리는 결과로 이어지니까요.
44. 가시나무 새 – 차용운
그림이 독특하군요. 부슬비처럼 조금씩 젖게하는 서정성이 있어요. 천민과 서자라는, 사회적으로 고립된 자들이 공간적으로도 고립된 곳에서 단 둘이 지내는 이야기는 쓸쓸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무섭진 않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에 깔린 섬세한 감수성은 인상적입니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죠. 산에 내려간 이후의 삶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을 거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더 씁쓸한 맛이 나기도 하네요. 저 아이의 증상을 뜯어보면, 미움이라는 감정보다는 스트레스에 의해 가시가 돋는 것 같거든요.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사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사족인데, 아이의 생각이 좀 짧은 것 같기는 해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아재가 고용인에게 선처를 받았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라면 몰래 내려가는 도련님을 아재가 붙잡고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다시 설교를 하며 도로 데려가는 장면으로 끝을 냈을 겁니다. 외부의 위협에서부터 고립된 공간에서 서로를 의지하며 사는 그들에게 안식을 가져다줬다면 조금 더 훈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요.
45. 호랑이형님 – 조안나
인물들의 외양이나 행동거지가 썩 어색하지 않습니다. 원전이 되는 이야기를 어떻게 비틀었는지 다른 설명없이 민화 형식으로 삽입해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연출도 좋네요. 장남에 대한 편애를 덧붙여 우애에 대한 이야기를 비튼 것도 꽤나 설득력 있는 설정입니다. 다른 만화들이 대개 하기 마련인, 1인칭 인물의 직접적인 서술이나 3인칭 전지적 시점의 나레이션을 취하지 않고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전후 사정을 전하는 연출도 좋습니다.
이 전의 작품들이 연쇄살인마를 단순한 물욕이나 정신 이상자로 표면적 묘사를 한 것에 비하면, 이 작품 속 아우의 증오는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애인을 겁탈하고 죽인 친형이나 그 친형을 감싸고 자신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어미의 비뚤어진 애정이 충분한 동기를 부여하니까요. 그 증오를 마구 발산하지 않고, 차갑게 삭혀두며 평소에는 멀쩡하게 다니는 아우 희범이의 모습도 상당히 그럴싸 합니다. 쓸데없이 폼 잡지 않고, 자신의 계획을 위해 착실하게 할 일 하고 다니는 일상적인 모습, 저런 데서 곱씹을 때 오는 공포가 숨어있는 거겠죠.
46. 애오개 – 조혜원
개화기 시대의 작품이 드디어 나왔네요. 병인양요 이전의 이야기들은 이제 좀 식상하지 않습니까? 일제 강점기 시절의 이야기가 아주 안나온 것은 아니지만요. 사실적이면서도 묘하게 과장되어 있는 그림체도 시대와 잘 어울립니다. 또 소재 자체도 시대 배경과 잘 맞아 떨어집니다. 나약한 지식과 미개한 야만의 대결은 폭력과 문명이 혼재되어 어수선하던 그 시대 상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으니까요. 이런 근대적인 작품 또한 필요한 법이지요.
어딘지 고딕스러운 분위기가 이 작품의 독특한 매력입니다. 음울한 배경, 강박적이고 신경질적인 인물들이 풍기는 이질적인 분위기가 좋군요. 특히나 마님이라는 정체 불명의 인물은 단순히 정신 이상자나 연쇄 살인마로 규정하기에는 뭔가 추가해야 할 ‘불쾌함’ 이 있습니다. 딱히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무언가 익숙치 않은 것,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마주할 때의 위화감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라고 할까요.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에 있어서 남녀의 일반적인 구도가 바뀐 것 또한 나름 신선하구요. 다만 저게 다 환상이었다는 결말보다는, 주인공의 꿈 정도로 처리하고 포우의 작품들처럼 무의식의 공포와 현실의 공포를 은근히 겹치게 하는 연출로 마무리했다면 더 좋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은 있네요.
47. 윤회 – 김재한
배경을 어떤 식으로 처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펜선 위주의 인물과 완벽하게 녹아드는 것 같지 않네요. 보라색으로 처리한 배경은 상당히 음산하고 을씨년스럽긴 합니다. 그런데 몇몇 그림에서 어색한 부분이 보여요. 이를테면, 주인공이 소나무 뿌리에 복부가 꿰뚫린 장면은 사람의 신체가 아니라 자동차 앞유리가 깨진 것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람 살덩어리에 균열이 가있는 건 많이 이상하네요.
베니싱 트윈의 소재도 나쁘지 않고, 순환 구조를 띄고 있는 이야기 구조 또한 좋네요. 다만 저 남매 중 실제의 삶을 살아가는 쪽의 실생활과 실제 죽음이 생략되어 있다는 점이 좀 걸립니다. 소나무 숲에서 죽는 장면은 어디까지나 탯줄로 이어진 상태에서 한 쪽의 제거를 의미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살해인데, 그렇다면 그것이 실제 삶으로 어떻게 나타나는지 또한 보여줘야지요. 이야기만 놓고 보면 서로 임신했을 시 어떻게 뱃속에서 서로를 제거하는지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게 좀 애매한 부분이에요.
48. 미호이야기 – 혜진양
구미호 소재도 식상하지만, 이 작가가 자신의 다른 전작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이야기를 하는 건 아무래도 게으르다고밖에는 할 수 없군요. 무엇보다도, 전 이 작가의 장황하고 억지스러운 내러티브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정작 필요한 감정전개는 대사나 나레이션으로 다 때워버리고, 사건과 사건의 연결 속에 인물의 감정을 억지로 끌고 가는 듯이 보이거든요. 자기가 만들어낸 비극에 자기가 박제되어 있는 듯 하군요.
49. 가체 – 이윤창
평소에 코메디를 그리던 작가라 어떻게 호러를 소화할까 걱정했는데, 예상 외로 잘 뽑아냈네요. 전작 타임 인 조선이 진지한 사극이기도 했다는 점을 제가 잊었습니다. 숨박꼭질의 구전노래와 가체라는 소재를 잘 혼합했다는 점에서 신선하면서도 전설의 고향의 컨셉에 충실할 수 있었네요.
이윤창 작가는 아주 고어체를 쓰지 않으면서도 그럴싸한 조선시대 구어체를 참 잘 씁니다. 또한 그림체가 단순하면서도 클로즈업이 됐을 때의 인물들의 표정을 보면 이 작가가 그림을 못그리는 건 절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죠. 그래도 역시 귀신의 박력은 조금 떨어지는 감이 있네요. 귀신은 최대한 적게 노출시키고 삼청댁 마님의 공포에 질린 모습을 더 많이 그렸다면 작가의 약점을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스토리는 흠잡을 부분이 없지만 또 지나치게 안전해서 심심한 감이 있네요.
시험기간 공부는 안하고 레포트 쓰는 기분으로 마침내 이 길고 긴 리뷰를 다 마치고야 말았네요. 앞으로도 네이버 웹툰에서 호러 장르에 꾸준히 손을 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학원폭력물과 연애물, 일상공감툰으로 점철된 바닥에서 어느 한 장르를 파고 드는 것은 다양성을 제공할 뿐 아니라 작가들의 연출과 스토리 구상에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하니까요.
다만, 다음에는 기획 단계에서 미리 소재를 정해주거나 작가들의 아이템이 겹치지 않도록 신경써줬으면 좋겠습니다. 문둥병과 고려장 소재는 이제 정말 지겹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