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 빌모츠는 98, 2002월드컵에서 총 5골을 넣으며 벨기에의 마지막 전성기를 이끌었고,
지금은 대표팀 감독으로서 브라질 월드컵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 벨기에 국대 감독 마르크 빌모츠(Marc Wilmots)는 마지막 2002 월드컵에서 그 유명한 오버헤드킥으로 팀을 16강으로 이끌었지만, 그 대회 우승국 브라질을 16강에서 만나게 된다. 빌모츠는 이 경기에서도 선제골을 넣었으나 심판의 오심으로 날려먹고 결국 4R 편대에게 털리며 대회를 마친다. (스콜라리는 대회 후 인터뷰에서 이 경기를 대회 중 가장 큰 고비로 뽑았다.)
빌모츠는 그 다음 해인 2003년 현역 은퇴를 하는데, 이와 동시에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가 입후보한 당은 Mouvement Réformateur(MR)인데, 직역하기 애매하지만 개혁 운동정도로 보면 될 것이다. 빌모츠의 정치인으로서의 업적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니까 임기도 다 안채운 채 때려치고 다시 축구판에 돌아왔지), 월드컵 영웅으로 인기를 얻어 정치에 입문한 것이니 만큼 정치인으로서의 능력을 기대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경제의 요충지, 정치의 고충지
빌모츠가 활동했던 정당은 프랑스어권 자유당이라 불린다. 중도우파쪽에 속했는데, 우리나라처럼 그냥 자유당이라 하면 되지 왜 이리 길게 부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벨기에의 복잡한 정치구조에 대해 먼저 이해해야 한다.
참고로 벨기에의 크기는 우리나라의 경상도랑 비슷하다.
흔히들 네덜란드에서 벨기에가 독립한 것이 네덜란드 독립 후 불어권 지역이 다시 독립해서 인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벨기에에는 프랑스어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벨기에는 여전히 크게 언어권에 따라 두 지방으로 나뉘며, 이들 사이의 지역감정이 꽤 심한 편이다.
중세와 근대를 거치며 현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방은 교통의 요지로서의 이점을 잘 살려 상공업의 중심으로 크게 성장한다. 자세히 말하면 플랑드르 지방이 그 중심이었는데, 15세기 초 부르고뉴 가문이 이 부근의 영토를 상속받으면서 이 지방을 지배하게 된다. 이 때 정치적인 문서들은 모두 프랑스어로 작성되어 지배층의 언어가 되었고, 불어를 못하는 플란데르 지방 사람들을 문맹으로 분리하여 제도적으로 단절시키게 된다.
이후 1477년 부르고뉴 공국을 계승한 공주가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고, 1555년에 펠리페 2세가 플란데르 영지를 받은데 이어 1556년 스페인 왕위를 물려받아 졸지에 스페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하지만 펠리페 2세의 폭정으로 인해 치솟은 불만이 종교를 기폭제삼아 분출하여 북부 네덜란드의 칼뱅파를 시작으로 반란이 일어나는데, 이게 80년간 이어진 네덜란드 독립 전쟁이다.
유럽의 알짜배기 땅을 잃을 수 없던 펠리페 2세는 파르네세 공작을 필두로 진압에 나섰는데, 이 때 프랑스어권의 왈롱지방 사람들 중엔 스페인에 협력한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스페인군은 이를 중심으로 현재 벨기에 북부 플랑드르 지방까지 총 17개 주 중 10개 주를 굴복시킨다. 이후 이 지방은 네덜란드 독립 이후에도 200년 간 계속 스페인의 통치를 받게 되며, 현 벨기에 영토의 근간이 된다.
또한 플란데르 지방은 브뤼헤와 안트베르펜(앤트워프)을 중심으로 모직물 공업등 상공업을 중심으로 번영한 경제 중심지였으나, 산업혁명 이후 많은 수의 모직물 공업의 자본이 영국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산업혁명 시기에는 남부 왈롱지방에 집중된 탄광과 철광석 광산을 이용해 중공업이 발달하여 막대한 부를 쌓게 되고, 두 지방의 빈부격차도 벌어지게 된다.
벨기에 독립 이후에도 이러한 추세는 한동안 계속되고 북부 플란데르 지방과 남부 왈롱 지방의 지역감정은 골이 깊어지게 된다. 그러나 요즘은... 중공업 부문이 쇠락하고 북부 플란데르 지방이 금융업으로 부활하고, 토사로 막혀 항구기능을 잃어버렸던 브뤼헤도 관광 명소가 되는 등 플란데르 지방이 서비스업이 번성하였고 왈롱지방의 중공업은 쇠퇴하여 다시 역전되었다.
네로가 그렇게 보고싶어했으나 은화가 없어 못본 그림은 앤트워프에 있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다.
루벤스는 종교개혁의 여파인 성상파괴를 막고자 지원이 빵빵해진 성당의 제단화를 그리는 궁정화가로서
고향인 앤트워프로 돌아온 후에 궁전과 같은 집에 살며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는다.
플란더스의 개를 보면, 성모승천 그림을 보고 엄마의 품을 떠올리는 네로처럼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그리스도 그림을 보며 네로의 모습을 투영하는 우리의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그림 실력이 출중했으나 부유한 지역 유지인 귀족의 아들에게 유학기회가 걸려있는 미술대회 1등을 빼앗기고, 돈이 없어 성당의 그림 구경도 할 수 없게 되자 추운 밤에 몰래 들어갔다가 파트라슈와 함께 얼어죽은 네로는 그 시대 플란데르 지방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
이러한 복잡한 역사의 배경 속에, 현대에 와서도 우리나라처럼 양당제로 하나의 거대 정당이 대통령과 나라를 운영해 나가는 정치 체제는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벨기에는 왕정 국가이지만 실제로는 여러 정당들이 여러 형태의 연정을 구성하여 운영해 나가는데, 이에 더해 위에 설명한 지방색이 더해져 한 정당에도 네덜란드어권 정당과 프랑스어권 정당으로 나뉘어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여기에 1차대전 이후 독일에게서 받은 자투리 지역도 있어 독일어권 세력도 작지만 있기는 있다...
그래서 중도우파 진영 세력끼리 연합하여 선거에서 과반수를 차지했음에도, 가장 세력이 큰 두 정당이 합의하는 것도 힘든데 각 정당에도 플란데르와 왈롱 지방끼리 합의를 해야 하므로 네 정당이 합의를 봐야 하는 경우가 많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나라는 둘이서 싸워도 이모양인데 최소 넷이니 합의가 원만히 될 리가 없다. 선거가 끝나고 이긴 쪽에서 연정 구성을 하는데에도 엄청난 진통을 겪어 몇 달간 무정부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다반사고, 간신히 협상에 협상 끝에 내각 구성을 했더니 연립정부를 이루는 5개 연합 정당 중 하나가 탈퇴해버려 과반수가 깨지는 경우도 있고 아무튼 참 정치적으로 복잡한 곳이다.
가까운 2011년에는 무정부상태로 541일을 지내면서 종전까지 이라크가 가지고 있던 289일 기록을 경신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근데 사실 막장이긴 해도 나라가 망하지는 않는게, 애초에 벨기에는 중세 시대부터 지역마다 도시공동체가 발달하여 2,666개나 되는 지방정부의 입김과 역할이 매우 세고 지방의 행정은 시의회에 거의 일임되어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플란데르 지방의 완전 자치구 분리를 내세운 NVA가 대승하면서, NVA 연대 당수이자 앤트워프 시장에 오른 데 베버 시장은 공공연히 분리 독립을 시사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가장 큰 이유는, 막대한 부를 가진 플란데르 지방에서 왈롱 지방으로 주는 교부금이 그들 입장에선 아깝기 때문이다. 만약 내년 총선에서 다시 NVA가 승리할 경우 국제뉴스를 통해 벨기에 뉴스를 많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축구는 국민통합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 나라의 국가대표 경기를 그냥 축구 경기보다 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보게 된다. 국가대표팀은 말 그대로 그 나라의 대표이자 상징이고, 그 멤버를 구성하는데 있어서도 실력이 제일 중요하지만 그 외적인 요소도 생각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 전 국민이 보고 있다는 시선 때문에도 그렇고, 선수의 발탁이 단순한 발탁을 넘어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 축구 국가대표팀의 최종 목표라 할 수 있는 월드컵은 개최지 선정에서부터 모든 경기가 끝날 때까지 그 기간 많은 나라의 국정 운영에 여러 의미에서 영향을 주기도 한다.
1978년 당시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의 군부의 압박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1990년 월드컵 당시에는 통일을 몇 달 앞두고 있던 서독이 국민의 염원을 담아 결승까지 승승장구하며 이탈리아에서 우승을 이루어냈다. 이후 동독 축구의 핵심이던 울프 키르스텐, 마티아스 잠머등을 통일된 독일 국대로 데려와 활약하게 되는데, 이는 동서독 국민간의 간격을 줄이는 것을 자연스럽게 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근데 동독 출신이 비율로 따지면 많이 적긴 하다.. 애초에 인구 수 차이도 있었고)
국가에서 억지로 동독출신을 뽑아서 선전 효과를 내려고 했다는 게 아니라, 동독 출신 선수도 실력이 좋으면 뽑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서 최소한 그라운드 위에서는 동서독간의 분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줬고 이게 자연스럽게 사회에서도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국가대표팀의 이런 특성이 드러난 우리가 많이 들은 얘기는 옆나라 프랑스 국대다. 식민지 출신 혹은 그들의 후손인 교포 선수들을 유스 시절부터 발굴해 프랑스 국대로 유도하여 발탁한 후 황금세대를 구축하고 세계를 제패하였는데, 남아공 월드컵에서도 그런 일이 계속되길 바랬으나 감독과의 불화로 막장을 달리자 대통령이 열받아 축협을 들쑤시는 일이 괜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
프랑스 대표팀이 여러 인종으로 꾸려진 명단으로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데에는 물론 선수들 개개인의 뛰어난 월드클래스급 실력이 우선시되지만, 시스템 측면에서 보자면 이러한 다양한 출신들의 선수들을 모을 수 있는 여러 요소들 덕분이다. 몇몇 중동 국가들의 경우 자기들이랑 별로 연고도 없던 선수들을 귀화시켜 국대를 꾸리고 망하지만, 지단과 나스리, 벤제마는 축구를 하려고 알제리에서 프랑스에 온게 아니라 부모 혹은 선조들 중에 프랑스로 일을 하려 지중해를 건너온 경우이다. 지단의 부모는 알제리 독립전쟁을 겪은 후 프랑스로 도망왔는데, 이 당시 이러한 많은 수의 북아프리카 계통의 이주민들이 모인 대표적인 항구도시가 마르세유다. (마르세유 클럽은 지금도 아프리카 혈통의 프랑스 국가대표를 발굴하는 한 축이다) 또한 벤제마는 알제리 이민 3세로, 사촌 형이 모스크의 이맘인 무슬림 집안이다. (근데 왜 트랜스젠더를 좋아할까...)
이처럼 알제리를 필두로 코트디부아르까지 서아프리카의 대부분의 국가가 프랑스 식민지를 거치면서 불어를 공용어로 쓰게 되었는데, 이는 식민지 국가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후손 뿐 아니라 8살때 세네갈에서 가족과 함께 건너온 비에이라같은 이민자까지도 프랑스 클럽들의 선진 유소년 시스템을 거쳐 적응한 후에 프랑스 대표팀의 일원이 되는 데에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가장 최근인 2013년 9월 월드컵 유럽예선 소집 명단 중 외국 혈통으로만 짠 프랑스 베스트 11.
물론 대부분의 선수들이 선조가 이민와 정착한 경우로, 저 선수들은 완전 프랑스 사람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렇게 보면 사실 요즘 세상에 이런 출신 혈통을 완전히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벨기에의 또다른 옆나라 네덜란드를 보면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맨시티에서 밀란으로 이적한 데 용 (Nigel De Jong)의 부친은 수리남, 모친은 인도네시아(암보이나) 혈통으로. 지구 반바퀴를 돌아야 갈 수 있는 대표적인 네덜란드의 식민지 두 곳의 피를 물려받았지만 정작 데 용은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 네덜란드 국민으로 다른 네덜란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자랐다.
기성용이 이적하고나서 요즘 묻힌 데 구즈만 (Jonathan De Guzman)은 더 복잡한데, 부친은 필리핀 출신이고 모친은 자메이카 출신인데 어렸을 때 캐나다에 와서 결혼한 후 데 구즈만을 낳았다. 이후 형이 마르세유 유소년 클럽으로 가는 걸 보고 자신도 유럽에 가고싶다는 생각이 커져 12살에 네덜란드로 건너가 페예노르트 유소년 팀에 들어가게 되고, 결국 네덜란드 대표팀에 승선하게 된다.
위에 예를 든 두 선수는 우리가 얼굴만 처음 딱보고는 네덜란드 선수인지 알기 힘들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국대에 승선하기까지의 과정은 매우 다르다. 데 용은 혼혈 출신으로 네덜란드 이민자 후손이고, 데 구즈만은 네덜란드 유스에서 키워내 귀화 조건을 갖추고 자신이 네덜란드를 선택한 케이스다. (데 구즈만의 형은 캐나다 국대를 선택했다) 이렇듯 혼혈 출신들이 유럽 국대에 뽑히는 경우는 크게 나누면 저 두가지 경우가 있다고 요약하면 될 것이다.
-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