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자기 사이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음모를 꾸미는 대목에서는 사실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김치양은 몰라도 헌애왕후는 왕족입니다. 그것도 그냥 왕족도 아니고 태어나면서부터 왕족이었던데다가 세 명의 왕(경종, 성종, 목종)과 아주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왕족이 아닌 사람이 그냥 권신으로 있는 것과 왕이 되는 것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또 그게 가능성이 있는지 알지 못할까. 이런 생각이죠.
역성혁명이 아닌 이상 동양에서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힌 왕조의 성이 바뀌는 경우는 드뭅니다. 하지만 아주 예가 없는 건 아닙니다. 신라 52대왕 효공왕(김씨)이 아들 없이 죽자 사위인 신덕왕이 즉위하는데 그는 박씨였죠. 하지만 이 경우도 신라 왕실이 기울어져 거의 다 무너져가던 무렵이었죠. 그에 반해 고려는 현재 김치양의 비롯한 권신들이 정사를 마구 주무르고 있었지만 당장 나라가 망하네 어쩌네 할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목종에게 아들이 없었지만 아직은 젊은 나이였고, 여인에게 관심이 없어 결국 아들을 얻지 못하더라도 왕위를 이을 왕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그렇다고 헌애왕후가 그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김치양 일파의 대량원군(왕순, 12살때 받은 작위입니다.)을 죽이려는 음모는 치밀하고 대담해서 헌애왕후의 동조,묵인이 없지 않고서는 가능하다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니까요. 어쩌면 헌애왕후는 자기도 태조의 손녀이니 자신이 낳은 아이도 따져보면 태조의 피를 이어받았고 또 아비는 달라도 어쨌든 왕의 동생이니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아주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왕순은 12살에 대량원군에 봉해졌습니다. 거기다가 목종의 가장 가까운 친척(목종의 당숙이자 이종사촌동생)인만큼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그냥 제거하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었죠. 그래서 김치양과 헌애왕후는 대량원군을 강제로 출가시킵니다. 절에 보내 사람들의 시선이 멀어진 틈을 타 제거하려는 셈이었죠. 처음에는 숭교사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객들을 보냈는데 그때마다 숭교사의 승려들이 지켜주었습니다. 고려사 세가 현종 총서에 보면 숭교사의 한 승려가 꿈에 별이 떨어져 용이 되었다가 사람이 되는 것을 보았는데 그게 왕(대량원군)이었다고 적혀있습니다. 물론 이건 후세에 만들어 넣은 얘기겠지만 왜 숭교사의 승려들이 대량원군을 살리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어느정도 추측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대량원군은 다시 삼각산의 신혈사로 옮겨졌습니다. 신혈사는 진관이라는 노승 하나만 수련하고 있는 작은 암자였습니다. 그리고 김치양의 암살음모도 박차를 가해갔습니다. 어느 날은 독이 든 술과 떡을 보내 먹이려고 했으나 진관이 대량원군을 숨기고 산에 놀러갔다고 속였습니다. 나중에 음식을 버리니 산새들이 먹고 죽었죠. 그리고 끊임없이 자객을 보내왔습니다. 진관이 방에 땅굴을 파서 거기에 대량원군을 숨겨 살렸습니다.
나중에 대량원군이 왕이 된 후 진관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신혈사를 크게 증축하고 진관의 이름을 따 진관사라 이름 지었습니다. 진관사는 오늘날도 남아있습니다.
대량원군도 그저 가만히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다는 사실을 목종에게 알리려고 여러 번 편지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는 도중에 유행간에 의해 번번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대량원군이 차기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유충정이 편지를 목종에게 전합니다.
마침 목종은 그 때 병상에 누워 있었습니다. 연등회를 구경하던 중 화재가 일어나 천추전이 타버렸고 여기에 충격을 받아 병을 얻은 것입니다.(일설에는 이 화재가 목종을 죽이려는 김치양의 음모라는 얘기도 있지만 저는 거기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목종은 본래 심약한 사람인데다가 그동안의 향락으로 몸이 꽤 쇠약해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거든요.) 목종은 자기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채충순 등을 불러 대량원군을 부르게 합니다. 그리고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권을 안정시키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어명을 받은 강조는 도성으로 향합니다만 도중에 위종정, 최창이라는 사람이 이 어명은 김치양과 헌애왕후가 조작한 것이라고 알립니다. 그래서 강조는 다시 서경으로 돌아갑니다.
그 때 마침 왕이 죽었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이를 강조의 아버지가 듣고 아들이 걱정되어 왕이 이미 죽었고 김치양 등이 권세를 휘두르고 있으니 어서가서 바로 잡으라는 편지를 보냅니다. 강조는 이 편지를 받고 군사 5000명을 이끌고 도성으로 향합니다. 그러다 평주에서 왕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강조는 여기서 잠시 머뭇거립니다. 이미 군대를 이끌고 왔음이 알려졌을테니 돌아가든 도성으로 향하든 반역으로 몰릴 거라는 게 충분히 예상되기 때문입니다. 여러 장수들과의 논의 끝에 강조는 그대로 도성으로 가서 대량원군을 왕위에 세우기로 결심합니다.
강조는 그대로 도성으로 들어가 궁을 장악하고 목종에게 잠시 절에 머무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목종은 법왕사로 몸을 피했습니다. 강조의 추종자들이 강조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그는 거부하고 마침 채충순과 황보유의가 데려온 대량원군을 왕위에 세우니 그가 바로 제 8대왕 현종입니다.
강조는 곧이어 김치양 부자 및 유행간 등 7명을 처형하고 김치양 일파와 헌애왕후의 친족 30여 명을 유배보냅니다. 그리고 목종을 폐하여 양국공으로 삼습니다. 폐위된 목종은 말을 얻어 어머니 헌애왕후와 함께 충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강조가 뒷일을 염려하여 목종을 죽이기로 하였습니다. 충주에서 강조의 부하들이 목종에게 사약을 먹기를 강요했습니다. 목종은 거부했고 결국 강조의 부하들이 목종을 살해하였습니다. 1009년 2월 당시 그의 나이 30세였습니다. 처음 묘호를 민종이라 하였다가 나중에 목종으로 고쳤습니다.
헌애왕후는 다시 황주로 떠났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죽은 후에도 20년을 살았고 1029년 66세의 나이로 숭덕궁에서 세상을 뜹니다.
저는 헌애왕후가 소위 말하는 악녀나 요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드라마에서 띄워주는 그런 여걸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녀가 정말 정국을 장악했다면 겨우 일파 서른 여명을 제거하는 정도로는 강조의 정변이 성공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현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이에 대해 항의하는 목소리조차 하나 없었습니다. 강조의 정변에 태클을 건 건 전혀 엉뚱한 세력이었구요.
저는 그냥 그녀가 보통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권력을 잡아서는 안되었을 보통여자요. 그녀는 목종이 김치양을 제거하려고 했을 때 막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목종은 정말 헌신적인 아들이었습니다. 고려사에서도 목종이 쫓겨난 후에 어머니를 얼마나 극진히 모셨는지에 대해 나와 있습니다. 그런 아들이 어머니가 김치양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도 제거하려고 했다는 건 그만큼 김치양의 폐해가 극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김치양을 막을 수 있었던 건 헌애왕후뿐이었습니다. 그의 권력이 헌애왕후에게서 나온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고 심지어 김치양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아 그 아들을 왕위에 올리려는 김치양에 동조하기까지 했습니다. 절대 군주제 국가에서 왕위 계승의 혼란은 곧 나라의 혼란으로 이어짐에도요. 그러나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그녀와 김치양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두 아들은 목숨을 잃었죠. 어찌보면 헌애왕후는 정인인 김치양을 포기하지 못해 아들을 죽인 셈입니다.
이제 18세의 현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오르자마자 현종의 역량을 시험해보기라도 하는듯 위기가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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