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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5/02 08:55:46
Name 다다다닥
Subject [일반]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여보세요. B후배시죠. 예예 저 A예요. 오늘 왜 온라인 회의 참가 안하셨어요. 이게 아시겠지만,
서로서로 시간이 맞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서, 다음부터는 진짜 그러시면 안될 것 같아요.
저번에도 회의 참가하신대놓고 술자리에서 스마트폰..........."

"....................."



잘못 들었나. 흑흑대는 소리가 들리는데.
잘못들었겠지. 내가 뭐 그리 심한 말을 했다고 울기까지 하겠어.
어. 진짜 우네......... 큰일났다.



"후배님. 저기 제가 말씀을 좀 심하게 했나봐요. 제 말씀은 후배님을 다그치려는 게 아니라
이왕 같이 하는 거 열심히 하자는 의미였어요.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 마시고............."

"흑흑흑.......엉엉엉......엄마"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몇 십초 되지 않는 시간에 내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본다.
뭔 말에 충격을 먹고 우는 걸까. 내가 무슨 말을 잘못 뱉은거지.
아씨, 차라리 전화 하지 말걸. 물밀듯이 후회가 밀려온다.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 울음소리가 더욱 커진다. 잠깐 수화기에서 귀를 떼본다.



"선배니임~~, 제가 요즘요 너~~~~어무 힘들어요. 제가 졸업반~이거든요~~?
원서를 썼어요. 열심히. 아주 열심히. 근데!! 왜!! 다 떨어뜨리냐구요. 저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해야 원서 붙여줄거냐구"



술을 먹은 거였다 (--;;) 혀가 꼬부러져서 목젖에 닿지 않을런지는 모르겠다. 흑흑대면서 혀도 반쯤 꼬부러져서 알아듣기가 잘 들리지가 않는다. 토익 파트1이 이 것 보단 잘들리겠네. 잠깐만. 근데 왜, 내가 이런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지 이해가 안간다.

온라인 회의를 빠져놓고 술을 맛나게 드시고 계시면서 뭐 잘했다고 5학번이나 많은 선배에게 어디서 술꼬장을....  
개구리복 입고 강원도에서 눈치우고 있을 때 막 고등학생 된 것이 감히......
반 반말, 아니 반존대를 해. 언제 봤다고.
결정적으로 난 니 원서를 떨어뜨린 적이 없쓰요.ㅜㅜ

순간 욱한다 --;; 한 번 지를까... 아니다. 참자. 친구들로부터 인내력 종결자로 지칭받는 나 아니겠나. 이정도 시련 쯤은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어야 진정한 인내력 종결자가 되는 것이라 스스로를 다스린다.


후~~~ 후~~~  맘이 불안정할 때 하면 효과가 있다는 네이버 지식인에서 배운 복식호흡도 시전 해 본다.



"그런데요, 얼마 전에 제 동생이 사고를 쳤구요, 제 남자친구는 저보고 한심하다구 하구요,
집에서는 취업 못한다고 압박을 주고요, 정말 미치겠어요"

"아, 예 후배님. 저기 그게... 제..제가.. 후배님을 그렇게 잘 몰라서... 여튼 답답한 거 있으면 말해보세요"



이게 뭔 상황인가 싶다 --;; 난 분명히 이 친구의 잘 못된 점을 다그치고 싶어 전화한 건데. 공수가 바뀌어 버렸다. 원하지도 않았던 카운셀러가 되고 말았다.
이 친구가 하는 말들을 그 이후로 20분간 더 들어야 했다.

어제 꿈자리가 사나웠다.
난 꿈이 기억나는 날에는 항상 무슨 일이 일어났던 기억이 난다. 좋은 일이 건 나쁜 일이 건.
오늘 새벽에 꾼 교통사고를 당해서 어떤 깡패한테 끌려가 죽도록 맞았던 꿈. 필시 그 때문이리라. 지금 이 황당한 상황을 겪고 있는 건.



"죽고 싶어요"



정신이 확 들었다. 예 뭐라구요? 죽고 싶다구요? 그런 말 함부러 하는 거 아녜요. 그게 얼마나 무서운 말인 줄 알아요. 그런 말 절대 하지 말아요.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비록 내가 후배님 잘 모른다지만 그 것보다 힘든 일 겪고 있는 사람들도 천진데요. 그러지 마세요.
어쩌구저쩌구..... 그럴 일 없겠지만 혹시 죽으면 어떻게하지라는 생각이 들어 하얘진 머리 속에 있는 말들을 나도 늘어놓는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아냈다. 근데, 갑자기 궁금했다. 근데 저 누군지 진짜 아시겠어요 술 많이 드신 것 같은데. C선배 아니예요? 아닌데요....
정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어뜩해 ㅜㅜ. 죄송합니다. 못봐서 모르겠지만 수화기를 붙잡고 아마 계속해서 꾸벅대며 인사를 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친 숨소리가 나오진 않았겠지.



"괜찮아요. 들어가 쉬세요"



전화를 끊고 폭풍문자가 날라온다. 내가 아는 후배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나 보다. '형 죄송해요 얘가 많이 취해서 다른 선배인 줄 알았대요' , '아 그 합격하셨다는 선배셨구나.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다음에 꼭 참가할께요' 문제의 B후배의 마지막 문자를 확인한다.



가끔씩 자신도 모르게 절제하던 감정이 폭발하게 되면 누군가라도 좋으니 자신의 얘기를 모두 털어놓고 싶어질 때가 있을 때가 있다. 귀신같이 그 타이밍에 내가 전화를 한 것 뿐이다. 취기를 빌렸다 하더라도 너무 유약해져서 자신을 놓는 순간이 가장 자신에게도 솔직한 시간이기도 하니까. 조별 발표시간에 얼굴 딱 두 번 본 술먹으면 이름도 잘 떠오르지 않는 단지 '합격한 그 선배'따위에게 말을 늘어놓는 것도 그 때문이었겠지 뭐.

1. 술먹는 사람 말을 모두 믿는 것. 2. 술먹는 사람에게 다음 날 따지는 것. 3. 술먹는 사람을 끝까지 챙겨주려 하는 것. 처럼 바보 같은 게 없다. 술에 관한 20살 때부터의 내 지론이다.

1~3을 모두 못하기 때문에 후배님과 싸울 일은 없겠지만, 내일 그 후배는 내 얼굴을 어찌보려나.



그건 그렇고. 그 후배가 해야 할 부분을 지금 내가 쓰고 있다. 아 진짜.......... 이걸 왜 내가 해야해 ㅜㅜ

후...... 지금, 4대 성인이 공자, 예수, 부처, 소크라테스라던데.. 가장 만만한 소크라테스한테 가서 저도 성인이 될 자격에 몇점 정도 되나요라고 물어라도 볼까. 그럼 네 자신을 알라며 꿀밤이라도 맞을라나.

꿈을 잘 못 꾸면 꼭 일진이 드럽더라.



담배 한 대 피고 시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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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02 09:35
수정 아이콘
그 후배분 예쁜가요... 라는 댓글을 달아야만 할꺼 같아서

잘 읽었습니다~
11/05/02 09:46
수정 아이콘
생기겠네요 라고 할라는데 그 동생은 이미 남자가 있군요..
11/05/02 10:41
수정 아이콘
꿈 잘 꾼다고 좋은 일 있는 것도 아닌데요 뭐...

디씨에서 자주 쓰던 말이 생각나네요. "는 꿈"
라이크
11/05/02 12:04
수정 아이콘
실수를 통한 만남을 기대하며 읽었는데, '제 남자친구' 가 나오는군요 크크
잘 읽었습니다.
11/05/02 12:29
수정 아이콘
그 후배분이 괜찮은 분이 아니었다면 이 사건이 마음에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고,
따라서 이런 감성적인 글을 올리시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같은 남자로서 조심스럽게 추측을 해봅...
다다다닥
11/05/02 20:23
수정 아이콘
다들 여성 분에 관심들이 많으시군요 ^^;;;;
클레멘타인
11/05/02 20:25
수정 아이콘
재미있네요 크크크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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