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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6 01:13
경상도 어디수군인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경상좌수영이면 기습의 형태로 굴러갈 공산이 크고 경상좌수영 수군기지들 상당수는 육상에서의 공격에 장악되었다는 점을 미루어 볼때 이곳에 배치된다면 어느정도 활약이 힘들어보이기도 합니다. 부산포, 동래성 등지에서 전투에 참여, 전사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경상우수영이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집니다. 경상우수영 관할구역에는 한달여동안 일본군 한명 나타나지 않습니다. 경상도에 일본군이 상륙했다고는 하지만 경상좌우도 경계를 놓고 본다면 경상우도 관할구역은 절반 이상이(대구 근방일대) 일본군 진격로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경상우수영 최대의 대읍인 진주성도, 그 동쪽의 진포에도 손을 안댑니다. 즉, 경상우수영을 맡을 경우 거의 한달이란 여유시간이 존재하고, 조선 수군의 행정체계면 한달이 아니라 3~4일이면 관할구역 내의 전 함대를 본영에 집중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에 경상우수영의 함대규모는 최소 11관 20포. 5관 5포 판옥선 25척 규모였던 전라우수영의 3배에 육박하는 70~73척에 달하는 판옥선 보유 및 운용규모를 나타냅니다. 전라좌우도 전 수영의 판옥선을 다 모아도 경상우수영 하나와 엇비슷합니다. 총병력 1만이라는 징비록의 기술은 전혀 과장이 아니고 오히려 축소된 걸로 여겨질 정돕니다.(상하번 다 불러모으면 1만 5천여정도 되던가.) 이 전력이 부산포로 나아간다면 일본군은 절대 막을수 없습니다. 일본 수군은 한참 이후에나 도착하고 그나마도 너무 중소영주들 뿐이라 동원병력을 다 모아도 1만이 채 안됩니다. 북상하던 육군이 내려와서 막을수밖엔 없지만 언제 소식을 전하고 언제 내려와서 함대를 꾸려 막을지는 막막해지게 됩니다. 이건 뭐, 게임 끝이죠.
11/04/06 01:23
자세한 건 좀 이따 달기로 하고...
예전에 워포그에서 나왔던 드립들을 모아보도록 하죠. 선조실록 임진년 4월 모일(4월 16일~ 4월 말) 경상우수사 이순신이 부산으로 건너오던 왜선단을 격파하고 왜선 몇십척을 침몰시켰다. 왜 선단은 대마도로 도망가 우리 수군이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다. 왜선은 다시는 부산 앞바다로 나오지 못했고, 부산과 동래를 점령한 소서행장은 며칠만에 항복해 목숨을 구걸했다. 사헌부와 사간원 대간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왜군을 끝까지 추적해 섬멸하지 못한 이순신을 체차시키고 국문하라고 아뢰었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다만 이순신을 백의종군에 처했다. 사신은 논한다. 이순신은 한갓 무부로서 용렬하고 임금에게 충성스럽지 못해 왜군을 끝까지 추격해 섬멸하지 못하고 다만 몇 안되는 수급으로 전공을 자랑하려 했다. 만약 수군을 거느리고 대마도까지 추격했으면 왜선 상당수를 잡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순신은 다만 물길이 익숙하지 않고 바람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핑계를 댔으나, 사실은 싸울 의욕이 없었다. 남왜북로의 병화가 거듭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는데 무부들은 제몸의 안전만 생각하니 남쪽 변방에 장수다운 장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목도하니 뇌가 터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선조실록 5월 모일 전라좌수사 원균의 장계 제가 경상우수사였으면 왜선들을 끝까지 추격해 대마도를 점령하고 낭고야성을 불바다로 만들고 감박사마(註 : 감박사마는 일명 관백이라 하고 이름을 평수길이라 하나 실제 성은 풍신이다.)를 추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싸움에 게으른 이순신과 경상우수영 소속 장수들을 처벌하여 일벌백계하소서! 임진년 5월 임금의 비망기 "수군의 일은 수군의 일이고 육군의 일은 육군의 일이다. 과인은 이순신이 왜 땅에 쳐들어가 수길의 목을 베어온다 해도 사사로이 용서할 수 없다."
11/04/06 01:30
확실히 좌냐 우냐에 따라 전략이 달랐을 것으로 생각은 되지만
이순신 장군의 23전을 보면 명량해전을 제외하면 대부분 '유리' 했던 전장과 전술을 택했습니다.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의 전력을 어떻게 판단했을지는 어느누구도 모릅니다. 그당시 이순신 장군은 전라좌수사였으니 말이죠. 막을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면 '요격' 을 하러 갔었을 것 같고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면 전력을 온전히 보전해서 다른 수영으로 일단 피신했을 것 같습니다. 최소한 원균처럼은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1/04/06 01:34
경상우수영을 통상어른이 잡았다면 동원가능 전력만 1만이 넘어갑니다. 심지어는 한산도에서의 3도수군통제사 시절에도 이정도 병력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없었던게 통상어른이죠. 이건 정말 호랑이에게 날개달아주는 격입니다.
11/04/06 03:10
일단 제승방략은 제가 맨 처음 한 얘기기도 하고 말씀을 드리자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류성룡의 말이 틀린 겁니다. 그래서 제 글 (조선의 전쟁 준비) 이 류성룡을 좀 까는 식으로 진행됐었죠. 원래 제승방략의 대규모라면 "을묘왜변" 수준이고, 류성룡이 말한 대규모는 "임진왜란" 수준이죠. 의도적인 거면 선조 실드용이고 아니라면 그냥 결과론에 매달린 거죠. 당시 조선에 임진왜란 수준의 대규모 공격을 막을 제도는 없었습니다. 200년 동안 한 게 게릴라전 토벌 뿐이었으니까요. 후의 속오군도 크게 달라진 건 없었구요. 정말 대규모로 맞부딪힐 거라면 훈련도감식의 상비군으로 가야 했지만 임란 전에 상비군 체제를 갖출 거라는 건 기대하기 힘듭니다.
김수가 성을 높게 쌓은 것도 그런 측면에서 봐야죠. 아무리 대대로 산성 방어였다고 하지만 조선시대 200년 동안 적이 서울로 쳐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고구려처럼 시도때도 없이 수도로 밀려올 때도 아니었죠. 고려 역사만 봐도 수도가 털린 게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리고 고구려의 전략은 산성-읍성의 조화이지 산성 일변도가 아니었죠. 오히려 발해가 읍성 일변도로 가서 그렇게 쉽게 몰락했다는 말이 있더군요. 아무튼 당시로서는 그게 한계였습니다. 오히려 동래성은 부산진성 등이 방어하는 동안 병력을 모아서 토벌해야 되는 입장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집니다. 이각, 박홍이 도망간 후에도 송상현 휘하에 남은 게 삼천이었죠. 도망가지 않았다면 육칠천까지는 가능했겠네요. 그리고 부산진성은 최전방 GP나 다름 없어서 "적이 온다! 조국이여 안녕!"하는 위치였구요. 산성 방어 위주라고 하더라도 그 산성 방어에는 청야 작전이 뒤따릅니다. 고구려가 약해진 게 당나라가 여러 차례 소규모(그래도 사오만 단위)로 계속 청야를 강요해서이기도 했죠. 전쟁이 여러 차례 이어진 것도 아닌 상황에서 그렇게 만드는 건 무리가 따릅니다. 실제 전쟁 진행 중에서 산성이 큰 활약을 한 것도 전쟁 중이었기 때문이죠. 아무튼 동래성은 제승방략에 따라 각 군이 집결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의 규모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이 무너진 건 이각과 박홍의 도주 탓이 큽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동래산성, 금정산성은 숙종 대에 가서야 세워집니다.
11/04/06 03:27
의병 편에서 언급한 김성일의 장계에 원균이 행동도 나옵니다. 배 한척으로 포구에 숨어 있었죠. 김성일은 이 역시 불러들여 고성을 치게 하는데 갔다가 적 일백명이 오자 다시 후퇴해 버립니다. 이 때가 6월 19일입니다.
난중일기에는 4월 29일에 원균이 "적이 공격해서 아군 진포가 함락됐다. 10척을 분멸했지만 부득이하게 후퇴한다"는 공문을 받습니다. 이른바"원균 10척 분멸설'의 근거가 되죠. 하지만 일본측에서 이걸 확인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애초에 수군이 서쪽으로 가지도 않았죠. 그 전에 거제도가 함락되었다면 이미 수영이고 뭐고 다 불지르고 민가도 다 약탈하든 그냥 접수하든 했을 것인데 옥포 해전에서 적은 막 약탈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김성일의 장계에서 거제현령 김준민에 대해 나오는데 성을 지키다가 근왕할 일로 불려간 후 왜적이 성에 가득 찼다고 했습니다. 이 근왕이 용인 전투인 것을 생각하면 거제도가 함락된 건 빨라야 4월 후반입니다. 혹은 옥포해전 때인 5월 7일 전후로 봐야 될지도 모릅니다. 김성일의 장계는 6월 28일자였으니까요. 아무튼 그 병력은 50여척. 이전에 나이트해머님 말씀 듣고 한 번 일본 수군 규모를 계산해 봤는데 수송 등의 문제를 생각하면 다 모아도 한산도 대첩 때와 그리 차이가 안 납니다. 공격했더라도 한꺼번에 다 가진 않았을테니 아무리 많이 잡아도 100척 정도? 최전방인 경상좌수영이 병력을 제대로 모은 걸 생각하면 경상우수영 역시 병력을 제대로 모았다고 봐야 됩니다. 그 수는 100척입니다. 근데 김성일 장계 날짜감각 잡기 어렵네요. -_-; 원균이 도주한 시점에 대해서는 이 장계 날짜 문제 좀 제대로 정리하고 다시 써야겠습니다.
11/04/06 03:32
오히려 연려실기술에는 원균이 적이 너무 많은 걸 보고 휘하 전함을 자침시키고 숨었다, 혹은 어선을 착각해서 숨었다는 말이 나옵니다.
임란 초기에 육지의 경상우수영 진포가 함락된 게 어느 정도 있겠지만, 이후 김성일의 대처로 대부분 수복했고 진주성에 참가한 장수들 중에도 수군과 왔다갔다 한 장수가 많습니다. 대표적인 게 곤양군수 이광악이죠. 덤으로 왜적이 닿을 리가 없는데 후방 진포도 장수가 다 도망가고 없었죠. 결국 이런 창고를 불태우고 갑니다만, 후에 원균과 기효근 등이 "우리는 싸우러 갔었는데 왜 불태움?"이라고 하는 근거가 됩니다. 하지만 김성일이 쓴 걸 보면 이 때 원균은 숨어 있었죠. 이런 점들을 보면 통상대감이 경상우수사였다면 이 전력을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보존할 수 있었을 겁니다. 적이 수송선인 걸 생각하면 "부산포왜란" 정도로 끝났을 수도 있겠죠. 다만 수송선이래도 300~500척인 이상 쉽게 공격하지 못 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김해 서쪽으로 진출하는 건 막을 수 있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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