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피콜로같은 나메크 성인으로.
머리가 빡빡이인 편이 좋다. 여자중에 머리가 빡빡이에 더듬이나 점이 6개 찍힌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에네르기파나 마관광살포가 가능한 분이라면 안된다. 기념일이라도 까먹는 날엔 진지하게 배에 구멍 뚫릴테니까.
시력이 0.3이라 안경을 쓰는 나, 저녁에 고기먹자- 고 하던 사람들이 약속 두어시간전에 각자의 사정을 빌미로, 혹은 만우절 드립이라고 파토를 냈다. 고기먹을 시간에 맞추어 체육관에서 운동하던 나는 머엉, 집에 갈까 하다가 이대로 들어가긴 아쉬워서 정리운동 겸 강둑을 따라 산책이나 하러 가기로 했다. 황사가 있는지 없는지 방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상관없이 바람이 있으니 썩 나쁘지는 않았다. 머리속에는 고기가 떠나질 않았지만 뭐 오늘이 아니면 또 먹을날이 있겠지! 하며..
익숙한 번호의 마을버스가 도로를 지난다. 정류장에 우뚝 멈춰섰을 때, 나도 모르게 잠깐만요! 하고 손을 흔들며 버스를 탔다. 버스카드도 없는 게, 왜냐고? 하필이면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이 그 누나랑 같은 길이의 머리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입은 옷도 그럴 싸 했었다. 그 사람이 입을 것 같았던 옷. 시력도 나쁜놈이, 교정시력이 1.0도 안되는 놈이 그건 또 귀신같이 발견했다. 우치하 일족이 따로 없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 웨이브가 들어갔지만 머리가 풍성하게 있지는 않은 그런 머리. 까만색에 머리카락이 얇을 것 같은 느낌. 약간 작은 머리에, 옆 머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얼굴. 앉아있는 모양새와 가방위에 가지런히 모아놓은 손 까지 딱 2초정도 걸려서 보았다. 그리고 달려갔다. 버스에 올라타서는 카드도 찍지 않고 그 여자를 보았다. 그치만, 내가 생각한 그 사람은 아니었다. 당연히, 그 사람은 처음부터 이 거리에 있을리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또 다시 억장이 무너진다.
기사 아저씨께 죄송하다며 다음 정거장에서 내렸다. 내린 뒤에도 계속 힐끔 힐끔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산책가는 길이었는데 되려 되돌아와 버렸다. 이런 일이 한 두번 있는건 아니다. 그 누나는 사실 평범한 헤어스타일에 평범한 옷차림에 평범한 체격이었다. 말하자면, 한국인 다운 몸매, 한국인 다운 키, 그 나이대에 할 법한 대중적인 헤어스타일이 조합된 사람. 그래서 길에서 몇 번이고 모르는 사람을 서서 돌아보게 되고, 쳐다보게 되고, 확인하게 되고, 그리고 다시 울렁거린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다음에 좋아하게 될 여자는 크리링 같은 사람이 좋겠다고. 그 사람이 이젠 기억속에서만 마주칠 사람이 되었을 때에도 길에서 멍하니 돌아볼 일 없게 지구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사람이었음 좋겠다고. 매번 다른 사람을 보고 철렁한 가슴을 추스릴 때마다 입맛이 쓴 그 느낌이 싫어서. 그래서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아는 사람은 아시다 시피, 그 사람의 무엇 하나만 닮아도 발걸음은 딱 멈추고 자동으로 고개가 돌아가는 것이다. 심지어 공장에서 수 없이 찍어낼 옷이나 구두, 백 같은게 같더라도...
돌아오는 산책로에서 한 선남선녀가 자전거를 사이에 두고 키스를 한다.
야밤에 조명도 어두침침한, 한적한 나무사이의 산책로에서 나처럼 혼자 터덜터덜 걷는 사람이 민폐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참 욱하더라. 트위터에다 공중도덕이 어쩌구, 예의범절이 어쩌구하며 궁시렁대며 그 사람들을 욕했다.
서로 고개가 약간 기울여 다가가는 그 모습이 너무 ..
나도 저러고 싶었는데.
왜 이제는 이런 것마저 신경쓰게 되는지
도통 날 이해할 수가 없다. 어디까지 고장난건지.
집에 돌아와서 메일을 썼다. 메일을 그렇게 오래 써 본건 오랜만이다. 몇 줄 되지도 않는 말을 지웠다가 썼다가, 맨 정신에는 안될거 같아서 고이 모셔둔 참이슬 한병을 왈칵 쏟아붓고는 고개를 기우뚱거리며 다시 쓰고, 하얀 모니터 바탕 위에 나쁜 놈이 되었다가, 착한 놈이 되었다가, 육두문자가 새겨졌다가, 사랑고백이 새겨졌다가, 아쉬움의 찌꺼기를 바르다가, 억울한 마음을 수놓다가, 그러다 다시 다 지웠다. 결국에는 잘 지내냐는 물음과, 왜 그랬냐는 물음과, 힘들다는 하소연과, 나도 잘 지낼거니까 잘 지내라는 인사와, 언젠가 성공한 당신 모습을 보면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고 자랑할 수 있겠다며 중얼거리는 애써 착한척과, 그 행간 사이에 제발 이대로 떠나가지 말아달라는 절망어린 말을 숨겨서, 계속 이어져 있고 싶지만 강한 척, 쿨한 척 그렇게 메일을 보냈다. 언젠가는 보리란 희망을 몇 그램 쯤 가슴에 심어두고 싶어서. 그 사람은 분명 일때문에 메일을 확인하니까, 지금은 무시하더라도 세월이 지난 언젠가는 볼 지도 모른다고.
내가 정말 좋아했던 몇 곡의 노래들이
그 사람이 좋아한다고 말했던 것 때문에
MP3 리스트에서 사라진게 좀 아쉽다. 기억나니까 어쩔 수 없다고 다독인다.
언젠가 다시 들을 때 애잔하고 아련한 느낌으로 들릴 때가 오겠지.
그치만, 유독 전화번호부에서 차마 그 사람 이름을 지울 수는 없었다.
메세지도, 음성도, 메일도 다 지웠는데.
내 전화번호부에는 당신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20대의 1년을 바친 사람이니까, 그렇게라도 남아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중에, 혹시라도, 행여나 나 자신의 부고를 보내게 될 때에,
내 전화번호부에 당신이 없으면 안되니까.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그 때에는 국화꽃 한 송이 사들고 찾아와 지금 하지 않은 인사를 전해주려나.
아니면 단 1g도 기억하지 못한 채 모른 척 하려나.
조금은 당신이 움찔하려나.
그래서 지우지 못한다.
당신은 그 때에는 조금은 미안해하려나.
이렇게 안녕이다.
별 일도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