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지도 등장했습니다. 저번에 비해서 확실히 이번엔 익숙한 지명들이 많죠?
저번 편 중간에서 시작하겠습니다.
1592년 4월 12일. 이순신은 거북선을 진수하고 바다에 띄웁니다. 정말 아슬아슬한 완성이었습니다. 임란이 벌어지는 시점이라면 판옥선을 더 만든다면 몰라도 새로운 시도는 못 해 봤을 테니까요.
4월 13일. 절영도에 사냥을 나간 부산진첨사 정발은 대규모의 선단을 목격합니다. 7년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죠.
1. D-DAY
정발에 대한 서술은 둘로 나뉩니다. 첫째는 적선을 세견선이 아닌가 하면서 상황 파악을 못 했다는 거죠. 그런데 저번 편에 썼듯 불과 몇 달 전 최후통첩을 받은 게 정발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상황 파악을 못 했다는 건 그의 무능설로도 이어집니다. 실제 실록 당시 기사를 보면 "정발은 성으로 도망가다가 결국 왜군에게 패해 죽었다"는 식의 말이 보입니다. 뭐 다르게 보면 정발은 침착하게 휘하 전선을 가라앉히고 농성했다고 하죠. 뒤쪽이 맞겠죠?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군은 하룻밤을 지낸 후 부산진성을 공격합니다. 이 날 부산진, 서생포, 다대포 등 부산의 각 해안 요새들이 무너지죠. 경상좌수영의 규모가 전라좌수영보다 약간 큰 정도라서 바다에서의 요격은 힘들었을 것이고, 이전 글에서 적었듯 그 때문에 경상좌수영은 거의 육군화 되지 않았을까 추측합니다. 경상좌수영 박홍은 그 때 동래성에 집결했거든요.
동래산성에는 울진, 양산 병력과 함께 경상좌병사 이각, 경상좌수사 박홍이 집결하지만... 밖에서 호응하겠다느니 하는 핑계를 대면서 도망쳐 버립니다. 그 다음날인 4월 15일, 동래산성은 함락됩니다. " 죽기는 쉬워도 길을 열기는 어렵다 "는 동래부사 송상현의 결의와 일본군이 고이 장례를 치러주었다는 후일담과 함께요.
이 때 100척이라는 대함대를 거느린 경상우수사 원균은 병력을 집결, 부산 앞바다로 향합니다. 하지만 적의 대함대를 보고 후퇴해 버리죠. 다른 기록으로는 어선을 보고 적으로 오인해서 후퇴했다고 하는군요. 뭐가 진실일까요? 이 때 이순신도 박홍과 원균의 말을 듣고 적이 쳐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4월 17일. 조선 조정에 적이 쳐들어왔다는 게 알려집니다. 조선은 급히 이일을 순변사로 상주로 보내고 조방장 변기에게 조령을, 좌방어사 성응길에게 죽령을, 우방어사 조경에게 추풍령을 막게 합니다. 첫번째 지도를 봐 주시고 이일을 제외한 세 명의 장수들을 잘 봅시다.
여담이지만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는 정확하게 소백산맥이네요. 전라도와의 경계도 마찬가지고...
2. 3군의 진격
간략하게 4월 동안의 일본 1, 2, 3군의 진로를 보겠습니다.
1군 : 4월 13일 상륙 -> 14일 부산진, 서생포, 다대포 함락 -> 15일 동래성 함락 -> 18일 밀양 진입 조선군 격파 (VS 박진?) -> 19일 밀양성 진입 -> 23~4일 인동, 선산 진입 -> 25일 상주에서 이일 조선군 격파 -> 26일 문경함락 -> 27일 조령 통과 -> 28일 충주 탄금대
2군 : 4월 18일 상륙 -> 19일 언양성 함락 -> 21일 영천성 함락 -> 22일 경주성 무혈입성 -> 27일 조령 통과 -> 29일 1군과 합류
3군 : 4월 19일 김해 상륙 -> 20일 김해성 함락 -> 21일 창원성 진입 -> 27일 성주성 함락
참 급박하게 돌아가죠? 길을 보시면 1군은 밀양과 울산 함락 후 중로로 북진, 대구 -> 선산, 인동 -> 상주로 바로 올라갔습니다. 반면 2군은 동로로 영천, 경주성을 친 후 1군을 따라갔고, 3군은 1, 2군과 달리 김해에 상륙, 서쪽으로 거창, 성주 쪽으로 경상우도를 쓸어버리면서 진격했습니다. -_-; 다만 이 쪽은 별동대라고 하고 본대는 합천, 김천 방향으로 진격했죠.
왠지 후삼국시대에 심심하면 말했던 선산(일리천) 합천(대야성) 상주, 조령, 죽령 등이 보이네요. 소백산맥의 세 관문 조령은 1군이, 왠지 경주 쪽으로 가서 죽령으로 갈 것 같던 2군은 1군 따라 조령으로, 3군은 따로 추풍령으로 진격했습니다.
여기서 이전 편에서 제법 옹호했던 제승방략의 최대 약점이 드러나 버립니다. 보시다시피 일본군이 경상도를 휩쓴 것은 개전 10일만이었습니다. 이전에 전방에서 시간 끄는 동안 후방에서 병력 집결하는 게 경상도에서는 아예 불가능했던 거죠. 특히 중앙에서 장수가 내려오는 걸 기다려야 되는 상황은 최악의 결과를 내버렸습니다. 다만 반대로 변명을 할 수 있는 게, 그 당시 상황에서 누가 10일만에 저기까지 올 줄 알았겠어요. -_-; 나름 대비 다 하고 각 성마다 방어병력 있는 상황이었으니까요.
이 때 경상도 방어군은 거의 괴멸되었고, 밀양을 지키던 박진은 경주 쪽으로, 경상우감사 김수는 밀양, 진주를 거쳐 거창 쪽으로 후퇴합니다. 최소한 이들은 크게 욕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계속 경상도에 진주하면서 싸우려고 했으니까요. 한편 김성일은 자기가 반대했던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 때문에 잡혀갔다가 죄를 공으로 씻으라고 영남초유사에 임명되어서 진주로 가서 싸우면서 일본군의 진격을 어느 정도 저지합니다. 뭐 진주가 주 진격로에서 떨어지긴 했지만, 이후 경상도에서 그가 보여 준 활약은 죄를 다 씻지는 못 해도 어느 정도 인정해 줄 만 합니다.
한편, 22일에는 진주 북쪽 의령에서 최초로 곽재우 의병군이 거병합니다.
3. 이일
"신립이 조령을 버렸다"는 욕을 많이 듣는데, 수정실록을 보시면 이일을 보낼 때 조령, 죽령, 추풍령에 각기 장수를 파견해서 각 길목을 지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는 게 신립이 잘 했는가 못 했는가를 알 수 있겠죠.
조정의 대처는 그렇게 세 장수로 길목을 막고, 신립은 충주에 가서 기를 모으면서 적을 격멸할 준비를 하고, 이일은 상주로 가서 적을 격퇴하는 것이었죠. 사실상 반격의 선봉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모인 병력이 모두 도주해 버립니다. 일단 4만명이라는 건 제가 확인하지 못 했습니다만... 이 때 김수, 이전에 도망갔던 이각, 박홍 등은 여기에 모이지 않았을까 싶은데 김수는 왠지 거창에 있고 이각, 박홍은 그 전후의 전투에서 아예 이름이 보이지 않고, 상주목사 김해는 산에 숨어 버렸죠.
이일이 서울에서 출발할 때 병력이 "모이는 사람이 없어 80명"이라고 하는데(300명이라고도 합니다) 이걸 강조하는 건 이전에 말씀드렸듯 초반에 조선에 준비를 못 해서 병력이 부족했다... 이걸 강조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제승방략의 체계와 신립이 경군 8000을 끌고 간 것, 한강, 임진강 방어선에서 만 단위의 병력이 있던 거 생각하면 이일이 이끌 병력은 서울에서 끌고 내려가는 게 아닌 그 때 모인 조선군 병력이겠죠. 아무튼 이일이 내려가는 도중 도망쳐서 남은 병력은 60명이었다고 합니다. 이건 병력이라기보다는 군관 등 하급지휘관과 이일 직할 병력이 아닐까 싶네요.
이일이 상주에 도착한 건 23일. 위에서 봤듯 그 때 이미 1군은 상주 코 앞까지 들이닥쳐 있었습니다.
이일이 곡식을 풀어서 모은 게 수백여(800명이라는 말이 있더군요)명. 근데 대오를 편성하니 병력이 600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 운동장에 몇 백 명 겨우 모아 놨는데 줄 세우고 뒤로 번호! 하니까 열 배 넘게 뻥튀기 됐다는 거죠. 뭘까요 이거.
아무래도 장수들이 도망간 상태에서 병사들도 흩어졌다가 이일이 오니까 어느 정도는 다시 모인 듯 합니다. 거기다 결코 적은 병력이 아닌 게, 아래에서 언급할 신립의 충청도 병력이 8000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고 상주 남부가 거의 먹힌 걸 생각하면 그리 적지 않습니다. 을묘왜변 때 왜구가 7000여명, 오히려 메뉴얼대로 모인 게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갈 정도죠.
물론 훈련도는 열악하고 적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는 건 안 자랑...
이일은 여기서 큰 실수를 하나 저지릅니다. 적이 바로 가까이 왔다고 알린 백성을 헛소문 퍼뜨린다고 죽여 버린 거죠. 거기다 척후도 보내지 않습니다. 신립과 1위를 다투는 명장이라던 이일이 이 정도였으니, 당시 조선 장수들의 인식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지금 봐도 "이렇게 빨랐냐?" 하는 생각이 들 정돈데 그 때는 어땠겠어요. 하지만 이건 치명적이었습니다.
25일. 이일은 공격을 받고 패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습진(習陣) 중이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고 하니... 진법을 연습 중이었다는 거죠. 이일의 처참한 상황도 짐작은 갑니다. 모아 두라는 병력은 다 흩어졌고 직접 병력을 다시 모으고, 처음부터 훈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에게 일주일 정도의 시간만 더 있었다면 나름 전투를 해 보지 않았을까 합니다만... 적은 이미 코 앞에 닥쳐 있었죠.
거기다 훈련을 하면서 척후도 제대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정찰병을 발견한 병사들이 있었지만, 죽은 사람이 생각나서 함부로 보고를 못 했습니다. 권위가 저지른 대표적인 실패 사례일까요... 결국 남쪽에서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이일은 군관 하나를 보내지만 이 역시 적의 저격병에 죽고, 이일은 적이 눈 앞에 닥칠 때까지 상황을 모릅니다.
이일은 정말 자기에게 시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4. 신립
류성룡은 신립이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4월 1일에 둘이 했다는 대화에서 신립은 그 유명한 "조총이 어디 쏘는데로 맞습니까"라는 발언을 했죠. 충주로 내려갈 때 선조와의 대화에서 "적들은 군사를 쓸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조는 변협과 비교하며 그가 살아 있었으면 걱정 없을 거라느니 하면서 은근슬쩍 신립과 비교하죠. 변협은 을묘왜변 때부터 공을 세운 명장으로 신립과는 달리 남쪽에서 활약했습니다. 안타깝게도 90년에 죽죠.
북방에서 신립이 세운 기록은 상당하긴 합니다. 니탕개가 1만을 이끌고 쳐들어 왔을 때 단 500의 기병으로 무찌르기도 했죠. 선조의 4남 이우의 장인이기도 해서 선조가 신립에게 건 기대는 컸을 겁니다. 이런 측면에서 탄금대를 봐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정실록에는 류성룡이 장사 8000명을 같이 보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게 징비록 등으로 가면 자세하게 나오는데 신립이 병력을 모으려 하니 응하는 사람이 없었고 -_-; 그 때문에 열받아 있으니까 류성룡이 지가 모아서 보내겠다는 식으로 말하죠. 재조번방지 등 다른 기록도 여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이더군요. 이 병력에는 경京군, 즉 한양의 무사부터 활 잘 쏘는 한량들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에 말 한 필씩을 동원해서 딸려주었다고 하죠. 단순히 어중이 떠중이를 모은 것일 수도 있지만 수도를 지키는 무사까지 딸려보냈다는 건 그렇게 오합지졸만을 모은 건 아니라는 걸 말 해 줍니다. 거기다 기병의 비율도 높았죠. 한마디로 당시 여유가 남은 병력을 모두 보내줬다는 것입니다. 정만록에는 이들 경군을 만여명이라고 서술하면서 충청도 지방군과 따로 떼어 놓는데, 이 점을 보면 팔천은 최소 병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충청도 병력은 팔천, 생각보다 신립군은 많았다는 거죠.
5. 탄금대?
유극량, 변기, 조경. 이제 이 세 인물들에 대해 좀 생각해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유극량은 안동 북쪽 죽령 (견훤의 한이 쌓인 ㅠㅠ) 을 맡았습니다. 그는 여기서 패했고, 임진강에서 다시 투입되었다가 전사합니다.
조경은 추풍령을 맡았고, 역시 전투에서 패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후에 금산에서 적을 격퇴하기도 하고 후에 권율과 함께 행주산성에서 싸웁니다.
그리고 조령을 맡은 변기... 이름답게 인터넷 검색으로는 참 힘들군요. -_-; 이일은 패전 후 변기에게 갔고 거기서 패배했다는 장계를 올립니다. 그리고 26일 충주에 도착한 신립은 이일과 변기를 소환합니다.
조령을 비운 거죠.
김여물은 조령을 막고 험지에서 싸울 것을 주장합니다. 이일은 너무 쉽게 패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건지 적을 정면에서 맞서 싸우면 승산이 없으니 한양으로 물러나자고 하죠. 그 말 때문에 죽을 뻔 하지만... 하지만 신립은 이에 반대하면서 아군이 기병이니 유리한 평지에서 싸우자고 합니다.
이에 대한 이유를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일단 세 요충지에 모두 장수가 주둔한 상태였습니다. 추풍령과 죽령이 뚫린 게 언제였는지 몰라도 그 방향에 대해 적의 공격이 오는 건 확실했고, 조선군은 소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신립이 조령에만 집중하면 다른 곳은 뚫려 버립니다. 그럼 뒷통수를 조심해야죠. 만약 세 곳을 다 방어하려고 한다면 기껏 모아 놓은 병력을 또 쪼개야 됩니다. 한편 신립이 갔을 때 이미 다른 두 곳도 뚫린 상태라면 더 위험하죠. 최대한 빨리 조령 방면의 적을 격퇴하고 다른 곳으로 가야 됩니다. 애초에 그의 역할은 방어가 아니라 격퇴. 거기에 신립은 소수의 기병으로 다수의 기병을 무찌른 바 있고 일본군을 가벼이 보고 있었습니다. 왜구 때의 기억 때문이었겠죠. 하지만 일본군은 정규군이었구요.
거기다 산지에 병력을 배치하면 안 그래도 훈련도 떨어지고 사기 떨어진 조선군이 도망가서 숨기 쉽습니다. 나름 대군인만큼 그걸 막는 건 더 힘들죠. 아마 이런 점이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결정적으로 신립의 병력은 합쳐서 만육천 정도(경군 8000 충청군 8000)로 볼 수 있고, 보기에 따라 그 이상도 가능합니다. 반면 고니시 유키나가의 1군은 저번 글에 적었듯 16700. 2군이 뒤따르고 있다고 하지만 탄금대 전투에 개입하지 않았고 29일에야 합류하는 걸 보면 하루 거리 정도 뒤쳐져서 오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각 다이묘들의 병력들이 따로 모인만큼 합동공격은 쉽게 찾기 힘들고, 고니시와 가토는 한양을 향한 경쟁 중이었고 사이도 많이 나빴습니다. 어쩌면 가토는 1군이 신립에 의해 패하길 바랬을지도 모르겠네요. 거기다 1군은 강행군으로 지친 상태였습니다.
만육천 vs 만육천칠백. 신립이 적의 병력을 정확히 알았을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해 볼 싸움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6. 결전
하지만 탄금대는 기병에게 그리 맞는 땅이 아니었습니다. 논이 많아서 돌격이 힘들고 마침 비도 온 상황이었죠. 여기에 하나가 더 끼어들죠. 배수진. 사기가 낮고 훈련도가 부족한 병력이 모인 이상 신립이 목숨 걸 것은 정예 기병대일 뿐이었을 것이고, 나머지는 도망가지 못 하고 죽어라 싸우게 하기 위해서였겠죠.
http://historyu.egloos.com/1728929
이 글을 참고해주세요. 아마 제 글 전체적으로 이 글을 베꼈다는 느낌을 많이 받으실 겁니다. -_-; 에 참고한 거예요;;;
일본측 기록에는 이 때 신립의 병력이 과장돼서 나타납니다. 팔만 수준으로요. 전형적인 전과 과장이지만... 그 때 고니시를 따라 종군했던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도 적이 상당한 대군이었고 아군은 지쳐 있었으며 기병 돌격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 때 신립은 여러 차례 돌격을 시도하는데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세 차례로 압축되는 듯 하네요. 어느 정도 과장이 있더라도 일본군이 여기 충격을 받은 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신립이 용감히 싸웠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구요. 루이스 프로이스의 기록에 "조선군의 하급자 중에는 약간 비겁한 자들이 눈에 띄었지만 상급자들은 매우 용감무쌍하였다고 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뭔가 낯선 느낌이 나네요.
조선측 기록에는 신립이 돌격하는 동안 좌우에서 다른 적들이 협공했다고 합니다. 당시 1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7000과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5000을 주력으로 하는 병력이었는데 아마 중군이 고니시 유키나가, 좌군이 소 요시토시, 우군이 이외의 병력일 듯 하네요. 위에 링크한 글에서는 전형적인 "망치와 모루"라고 평가하더군요. 고니시군이 최대한 버티는 동안 (탱커 -_-;) 소 요시토시군이 내려치는 거죠 (딜러). 서정일기에서도 이 두 군이 공격했다고 돼 있다는군요.
이로 인해 신립군은 포위되었고, 신립은 최대한 길을 뚫어보려 했으나 포위망은 좁혀지고... 결국 신립군은 전멸하고 신립과 김여물은 활로 적 수십 명을 쏘아 죽인 후 강에 뛰어 듭니다. 이 때 둘의 대화가 “그대는 살고 싶소”하니 김여물이 빙긋이 웃으며 “어찌 내가 죽음을 아낄 것이라 하시오” 였죠. 신립의 말에 대한 해석이 좀 여러 가지 있는 듯 싶지만...
신립이 천, 이천, 이천씩 추행진 형식으로 순차적으로 돌격했다는 말들이 있는데 출처를 모르겠네요. 그냥 사료들을 분석한 건지... 일본측 기록에는 반달형인 언월진이었다고 한다던데요.
7. 본 게임 시작
나름 결론을 내려 보겠습니다.
신립이 굳이 조령에 있는 병력까지 불러들인 것은 확실한 결전을 위해서였고, 다른 두 관문이 뚫릴 위기인 이상 조령만을 지키는 것은 옳은 선택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방어가 아닌 격퇴를 위해 파견되었고, 일본군을 무시하고 있었으며, 이미 소수의 기병 돌격으로 다수의 적을 격퇴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거기에 병력도 결코 꿀리지 않았죠.
하지만 기병 돌격과 배수진을 위해 선택한 탄금대는 그리 좋은 전장은 아니었습니다. 시간도 부족했죠. 26일에 신립이 충주에 도착했는데 탄금대 전투는 28일이었습니다. 그나마 강행군한 일본군에 비해 진형을 미리 갖추고 싸울 수 있었겠지만 확실히 좋은 지역을 선택하기는 힘든 시간이었죠. 이일 때와 마찬가지로 북방에만 있어서 현지 지형을 잘 모르는 것도 크다고 봅니다.
그의 기병 돌격은 일본군에도 제법 큰 충격을 준 듯 하며 일본군은 이에 대해 포위 전술로 대항했습니다. 이게 절묘하게 먹히면서 신립군은 그 이상의 전과를 내지 못 하고 전멸합니다.
글쎄요.. 어떻게 평가를 내릴까요. 일단 원균과는 달리 나름 용장이었다고 평가하고는 싶습니다만... 일본군의 포위 전술을 보면 마찬가지로 신립이 너무 못 했다기보다는 일본군이 역시 너무 잘 싸웠다는 평가도 가능합니다. 역시 그에 대한 건 보는 분의 판단에 맡기겠습니다. 역시 기존의 평가 ( 병력이 적었어, 조령을 막았어야지 ) 는 부정하지만 더 나쁜 평가가 나오겠네요. 병력도 만만했지, 근데 왜 졌어 이런 거 -_-; 왠지 임진왜란 전체적으로 " 우리 애가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 이런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준비를 안 해서 당했을 뿐이라는 거죠. 하지만 확실히 실력대결로 진 부분이 너무 눈에 띄네요.
다만 이일 등이 도망친 걸 볼 때 완벽하게 포위되었는지는 의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신립과 김여물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부끄러움에 자결했다고 봐야겠죠. 그리고 그런 면에서 충청도 군사들 역시 도망치지 않고 싸운, 임진왜란 전 기간을 걸쳐 야전에서 도망치지 않고 싸운 병력은 충청도군 뿐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반면 경상도군은 게릴라전을 잘 했고, 전라도군은 농성전을 잘 했다는 평가를 하더군요)
실록에는 신립만을 믿고 충청도 관민들이 도망치지 않았는데 신립이 패하면서 몰살당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전투는 실질적인 조선의 주력이 전멸하면서 조정에서 파천 논의가 나오는 등, 전쟁의 위험을 확실히 느낀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냥 경상, 전라도에서의 변방 얘기일 뿐이었으니까요. 이후 고니시군이 평양까지 진격하는 것을 보면 1군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비슷한 피해라도 줬으면 큰 타격이 됐을 텐데요... 이후 불과 몇 일 후인 5월 3일 한양이 점령당합니다. 일본군의 전투력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드러났으며 이후 평지에서 맞붙는 회전은 거의 없습니다.
이제부터 임진왜란은 단지 경상도에서의 먼 일이 아닌 국가의 존망을 (발음 주의하세요) 걱정하는 것으로 발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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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한 달 나갔네요. -_-; 탄금대 전투를 좀 다뤄보고 싶었습니다.
왠지 계속 하나 빼 놓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조선의 기병은 어디까지나 궁기병 위주였습니다. 신립도 창기병 돌격이 아닌 궁기병 돌격을 뜻하는 치사馳射 말을 했구요. 궁기병이 어울리는 건 이동이 쉬운 평야죠. 흐음... 그런 면에서 탄금대를 선택한 게 왠지 시간 없어서 대충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배수진이라고 하기에는 이일을 비롯 탈출한 사람이 보이거든요.
왠지 신립이 아내에게 편지 쓸 시간이 있었으면 이렇게 했을 것 같네요.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당신이 어떤 소식을 듣던 간에, 이것만은 알아야 하오. 김여물은 영웅답게 죽은 것이 아니오. 내가 죽였소... 나의 자만심이 그를 죽인것이오... 그리고 지금 또 자만심이 나를 삼켰소."
... 너무 철 지난 패러디인가요? 참고로 이 글 제목은 충무공전 2 미션 제목입니다.
다음 편은 진짜 "나라가 망한다"입니다.
여담이 계속 길어지는데... 물에 빠진 걸 어떻게 건졌는지 몰라도 겨우 시신을 수습해서 관에 넣고 들고 가는데 가면서 "장군"이라고 불러봤댑니다. 그러자 "옹야"라고 했다네요. 좀 더 가다가 부르니까 "에헴"이라고 기침소리가 낫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부르자 아무 말이 없었다는군요. 그래서 기침한 고개를 기치미 고개라고 부른답니다.
... 무서워요. 살아 있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