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한 달 반 동안 토, 일요일은 물론이고 자유시간도 없이 프로젝트에 매달린 여파는 지독했다. 추석 연휴 때에 쉬지 못했다고 대표님이 화요일부터 팀 전체에 휴가를 줬지만, 그 휴가란 게 열에 들떠 침대에 눈 떴다가 일어나니 끝. 말 그대로 일장춘몽이었다. 미열이 있는 채로 털레털레 회사에 나오니 아무도 없다. 오늘은 내가 당직이니까 사람이 있으면 이상한 게지 뭐.
나오고 나서 그냥저냥 있다가 기억이 지우개로 지워졌지만 어쩐지 몸이 기억하고 있는 루틴 업무를 설렁설렁 마쳤다. 아침부터 미역국에 갈비 구이로 거하게 식사를 한 터라 밥 먹을 생각도 들지 않아서 두시 정도에 간단하게 빵과 차로 점심을 대신했다. 이미 액면가로는 음식점 가면 대표님보다 내가 밥상을 먼저 받을 정도가 된 지 오래지만, 이제는 진짜 나이도 오늘을 기점으로 40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게 되었으니 여러 가지로 얄궂다.
당직 일자를 정하던 월요일에 나는 오늘 당직을 자청했다. 왜 하필 생일 당직이냐고 묻기에 식구들 다 일 나가는데 나만 집에 덩그러니 남아 생일을 맞이하는 것도 좀 그래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서 딱히 개천절과 이어지는 징검다리 연휴가 부럽지는 않다고 덧붙였다. 정말 딱히 부럽지 않다.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않고 할 일만 하는 날이라면 쉬는 날이 언제인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며칠 쉬느냐만 제대로 보장해 주면 될 뿐이다. 생일상도 아침에 받았고 어머니도 동생도 열심히 사느라 일 갔다가 자정이 넘어야 들어오는 게 다반사다. 가끔 자정 이전에 집에 들어오는 내가 가장 열심히 살지 않는 것 같다.
당직인데 쓸쓸하지 않으냐고 누가 카톡으로 물은 걸 뒤늦게 확인했다. '크리스마스 당직 2년 연속 해 봤는데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다'라고 답문을 남겼다. 저녁으로 뭘 먹을까 생각했다가. '젊은이도 늙은이도, 인생에 고민은 끊이지 않지만, 그래도 맛있는 고기를 먹으면 그따위 고민은 모두 해결되는 거야.'라는 글줄을 읽은 게 생각나 고기를 사 들고 가기로 했다. 고기 사 들고 집에 들어가는 길에는 남은 미역국과 밥과 아직 뜯지 못한 피규어와 정령의 사당과 금전옥루로 가는 길이 기다리고 있겠지.
- The xi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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