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에피소드는 근검 절약 신용에 대해 써보고자 합니다.
정홍순(1720~1784) : 조선 후기 문신. 당대 제일의 재정관 (그가 호조판서로 재직한 10년동안 나라의 재정이 풍족했다고 한다.)
① 갓모 하나때문에
왕이 동구릉(경기도 구리시 동구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능)에 행차를 했다. 정홍순은 왕의 행차에 구경을 갔는데 비가 올 것에 대비해 갓모를 두개 가지고 나갔다. 하나는 자신이 쓰고 나머지 하나는 다른사람에게 빌려주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때마침 비가 내렸고, 자신은 갓모를 쓰고 구경을 하고 있었다. 갓모를 하나 썻음에도 하나가 남은것을 본 한 사람이 자신에게 빌려줄수 있냐고 물어봤고 당연히 그럴 용도로 가져온 정홍순은 그 사람에게 빌려주었다. 그런데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자
- 죄송하지만 비가 그칠 기미가 안보이니, 댁의 위치를 알려주시면 비가 그친후 꼭 돌려드리리다."
사람의 도리상 비오는데 우겨 받기도 곤란했던 정홍순은 자기집을 자세히 알려주었지만 아니나다를까 그사람에게서 연락은 없었다. 그후 20여년이 흐른후 정홍순은 호조판서로 재직중에 새로이 호조좌랑이 임명되어 인사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정홍순은 그 호조좌랑을 유심히 보더니 20년전에 갓모를 빌려간이와 비슷한 느낌에 20여년전 왕의 동구릉 행차 이야기를 꺼냈고, 알고보니 정홍순에게 갓모를 빌려갔던 사람이었던 것.
이에 정홍순은
-한낱 갓모 하나를 되돌려주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 하나만으로 사람의 신용을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런 사람이 어찌 나라의 살림을 맡게 되는 호조의 관리가 될 수 있겠는가? 자네는 기본적인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이네
라고 하며 그를 파직시켰다. (두둥)
② 결호식 비용은 간소하게
정홍순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곳 시집을 보내게 되었다. 부인은 벼슬이 정승이니 잘해야된다고 말했고, 이에 정홍순은 부인에게
- 혼수감은 얼마나 들겠소 ?
부인 : 한 800냥 들겠죠
- 잔치 비용은 ?
부인 : 한 400냥 들거에요.
- 알겠소 내가 마련해보리리다.
라고 하고 혼인날 전날까지 돈을 가져오지 않았다.
- 그냥 깨끗한 옷 입히고 잔치는 집에 있는걸로 적당히 합시다.
부인 : ????
사위는 장인의 인새함에 할 말을 잃었고 결혼식 이후 3년간 발을 끊었다. 3년이 지난 어느날 사위와 딸에게 집으로 한번 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당연 사위는 안가 를 외쳤고 이에 사위의 아버지가
- 그 양반이야 원래 소문난 분 아니더냐 너는 그러면 못쓴다. 다녀오도록 해라
해서 X씹은 표정으로 장인댁에 갔다. 사위의 기분이 어떨지 뻔히 아는 정홍순은 사위에게
- 왜 그동안 뜸했나? 사위 얼굴 잊어버리겠네 허허
사위 : ...
- 내 지난날 혼수 비용과 잔치비용을 들으니 도합 1200냥이 든다고 하더군. 하지만 그 돈을 헛되이 쓸순 없지않겠나. 그래서 내가 그돈 1200냥을 늘려서 땅과 집을 샀으니 이 땅과 집은 자네것일세.
사위 : 아이고 장인어른 그동안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 그동안 인색했다고 섭섭했나? 앞으론 낭비하지 말게
③ 한 닢 때문에
어느날 정홍순은 한닢짜리 엽전이 동강나서 못쓰는걸 보았다. 이에 공인(工人)을 불러 두닢 주고 땜질해서 고쳤다. 이것을 본 아들이
- 아버님 두닢주고 한닢 고치면 손해가 아닙니까?
- 그건 네가 모르는 소리다. 내가 한닢 손해보지만 다른사람에게는 한닢 더 가지 않겠느냐 한나라의 정승이면 백성을 아끼고 사랑할줄 알아야지
또다른 어느날 집수리를 하고 품삯때문에 크게 언쟁을 했다.
아들 : 아니 아버님 한나라의 재상 채면에 천한것하고 다툽니까? 그러지말고 더 주세요
- 내가 인색해서 그런게 아니다. 재상이 후하게 주면 결국 물가가 오르고 그러면 백성들은 더 올려주게된다.
(외전) 정승이 된 이유
그는 사소한 일까지 검소와 절약으로 일관하였으며, 매사에 치밀한 자세를 보였다. 정홍순이 예조판서로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상에 장의를 주관할 때의 일이다. 그는 장헌세자(사도세자)의 의복과 금침과 같은 세세한 것까지 모두 한 쪽 씩 떼어내어 장부와 함께 봉하여 이를 보관해 두었다. 1777년 정조가 즉위하자, 정조는 자신의 아버지의 장례가 어떻게 치루어졌는지를 알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예조판서였던 정홍순을 불러 물어보니, 그는 서리를 시켜 당시 간직해두었던 장례 물품과 장부를 임금에게 드렸다. 이것을 본 정조는 부장품이 풍부하고 예에 빠진 것이 없음을 보고는 매우 가상히 여겨 그를 우의정에 제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