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현재 직원 250명 정도되는 작은 규모의 항체제조회사의 생산부 직원으로 근무중입니다. 일한지는 약 1년 정도 되었구요.
우선 회사의 시스템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저희 회사에 생산부는 총 세 팀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조직배양(Tissue culture), 컨주게이션(Conjugation), 그리고 제가 소속된 퓨리피케이션(Purification)이 있습니다. 연구팀, 제품개발팀, 혹은 생산부에서 어떤 제품을 생산할지 결정이 되면 조직배양팀에서 그 제품, 즉 항체의 세포를 추출하여 배양한 뒤에 배양액을 만듭니다. 여기서 저희는 제품의 이름을 클론(Clone)이라고 일컫습니다. 그렇게 배양팀에서 완성된 배양액은 제품생산의 중심인 purification 으로 넘어오죠. Purification 은 그 배양액을 Protein G Sepharose 라는 단백질을 이용해 배양액을 투과시켜 항체를 추출합니다. 그런데 이 배양액의 부피는 1리터부터 12리터 혹은 24리터까지 천차만별입니다.
그리고 생산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배양액이 1리터냐 12리터냐 24리터냐에 따라 달라지죠. 1리터의 배양액을 받았을 경우 빠르면 3일 안에 생산을 끝낼 수 있는데 24리터의 배양액을 투과시켜야 할 경우 2주에서 길게는 3주까지 걸립니다. 또한 세포의 산출량(yield)도 제품마다 제각각입니다. 예를 들어, A 라는 제품은 12리터짜리 배양액에서 10~20mg 밖에 못 뽑는데 반해 B 라는 제품은 3리터짜리 배양액에서 100~150mg 까지 산출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곧 팀장이 팀원들에게 어떤 제품을 생산하라는 배정을 하느냐에 따라 월말에 윗사람들에게 보고되는 성과보고서의 숫자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론적으로, 팀장은 '배양액은 낮지만(즉, 시간은 적게 걸리지만)' '산출량이 좋은 제품' 을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자신과 친한 부하직원' 에게 '의도적으로' 배정시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배양액은 높지만(즉,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산출량은 낮은 제품' 을 '자신이 싫어하는' 혹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부하직원' 에게 '의도적으로' 배정시킬 수도 있죠.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부하직원들이 산출량이 높고 낮은 제품을 모르고 있을 때는 크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혹은 팀장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더라도 적절히 섞어서 준다거나 한다면 미심쩍긴 하지만 명백하진 않기 때문에 반발하지 않죠. 하지만 부하직원들도 산출량이 높고 낮은 제품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저희팀 팀장은 멕시코인 2세의 여성입니다. 팀원은 팀장을 합쳐서 9명입니다. 이 중에 한국인은 저를 포함하여 4명, 일본인 2명, 백인 1명, 멕시코인 2명입니다. 최근에 저희 팀장이 이직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생산부장에게 들켜서 사무실로 불려간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좀 다운이었죠. 그런데 기분이 다운되면서 일에 의욕도 없어지니 팀을 거의 내팽개치다시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원칙적으로 점심시간은 1시간인데 2시간을 쓴다거나, 팀장의 손이 필요한 일도 대충 처리해주고,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등 저희끼리 팀장이 저러면 안되지 않나하는 식으로 대화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멕시코인 팀원이 그녀와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에 같이 대화도 하면서 기분을 풀어줬던거 같아요. 아무래도 같은 민족이고 하니 얘기도 잘 통했겠구요.
그런데 그녀가 그 멕시코인 직원과 친하게 지내기 시작하면서 저를 포함한 다른 직원들에게 차별을 당한다고 느낄 정도로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에 일본인 여자 직원이 부득이하게 오후 3시쯤에 치과에 예약이 있어서 반차를 써야했는데 팀장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일을 끝내지 않았다는 이유로요. 동료 한국인 직원이 그녀가 끝내지 못한 일을 대신 끝내주겠다고 했음에도 팀장은 단호하게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한다면서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그녀는 치과에 가지 못했고 예약시간을 다음으로 미뤄야했습니다.
며칠 뒤에 그녀와 친해진 멕시코인 직원이 치과에 가야한다는 이유로 반차를 써야했는데 일본인 직원에겐 허락하지 않았던 반차를 허락해주고 오히려 옆자리에 앉은 한국인 직원에게 그가 치과에 가야하니 끝내지 못한 일을 끝내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직원들 사이에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죠. 저도 처음에 듣고 굉장히 놀랐습니다. 그녀가 최근에 일을 처리하는게 불만이긴 했어도 이런 행동까지 할 줄은 몰랐던거죠. 그러다 오늘 정말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매주 월요일은 팀장이 팀원들에게 생산리스트를 배정해주는 날입니다. 그런데 리스트를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뭔가 심상치 않은걸 느꼈죠.
이유는 팀장이 배정해준 생산제품 리스트에 있었습니다.
멕시코인에게 배정해준 제품이 총 3개였는데 배양액은 3리터에서 6리터. 그런데 모든 팀원들이 알고있는, 회사 내에서 Top Seller 중에서도 판매량 랭킹 2위와 3위로 분류된 최상급 제품만 2개가 배정된 것이었습니다. 리터당 거의 50mg 에 육박하는 초대박 제품인거죠. 게다가 다른 제품 2개를 섞지 않는 이상 품질테스트도 무조건 통과를 보장하는 제품이구요. 간단하게 계산하면, 그 멕시코인 직원은 3개의 제품에서 적게는 800mg 많게는 1g 가까이 항체를 추출할 수 있습니다. 저희 회사가 보통 마이크로그램(ug)이나 밀리그램(mg) 단위로 제품을 판매하니까 저게 얼마나 많은 양인지 짐작이 가실겁니다. 가격이 1mg 당 몇백불에서 몇천불인데 1명이 고작 3개의 제품에서 몇만불어치의 값을 낼 수 있다는 말이죠.
그런데 다른 직원들의 제품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멕시코인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에게 배정된 제품은 4개에서 5개인데다 배양액은 최소 6리터에서 최대 24리터였습니다. 하지만 추출량은 거의 바닥인데다 (리터당 <10mg) 대부분 품질테스트를 통과하기 힘든 제품들인겁니다. 당연히 그 멕시코인 직원을 제외한 팀원들은 멘붕이었죠. 1년도 채 안된 팀원도 뻔히 알고 있는 추출량이 높은 제품을 팀장이 모를 리가 만무합니다. 이게 또 문제인 것은 추출량이 낮은 제품은 항체와 단백질의 결합능력(binding rate)가 낮기 때문인 경우가 많아서, 이럴 경우에 배양액을 1번이 아니라 2-3번씩 투과시켜야 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보통 12리터의 배양액을 단백질에 투과시키는데만 1주일이 걸리는데 그걸 2-3번씩 반복하면 1달이 걸릴 때도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추출량은 극도로 낮구요. 저 같은 경우 3번 투과시켜야 해서 생산하는데 1달이 걸린 제품이 있었는데 생산량은 10mg 도 안되는데다 품질테스트도 통과하지 못한 적이 있습니다. 결국 그 제품은 생산중단이 되었습니다.
월말보고서가 부장에게 보고되면 내막을 모르는 부장은 당연히 추출량(생산량)이 높은 멕시코인 직원은 칭찬하고, 생산량이 낮은 다른 직원은 갈굽니다. 생산시간이 얼마나 걸리냐, 통상적인 추출량이 얼마냐, 배정된 배양액이 얼마냐는 부장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장은 배양액이 높든 낮든, 추출량이 높든 낮든, 모든 직원들에게 꾸준하고 동일한 숫자를 요구합니다. 일본인 팀원은 억울한 마음에 휴게실에서 저에게 푸념하다가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고, 성질급한 한국인 직원은 오늘 당장 다른 직장을 알아본다며 난리였습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팀장은 1시간 일찍 퇴근. 팀을 감독하고 지휘하는 팀장이 조기퇴근 해버리고, 대놓고 차별하고 편애한다고 느낄 정도로 노골적으로 행동하니 당연히 팀원들은 일할 의욕이 없습니다. 며칠 전에 조직배양팀장이 저희 팀에 볼 일이 있어서 온 적이 있는데 저에게 슬쩍 오더니 원래 이곳 분위기가 이렇게 어둡고 조용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뒤돌아보니 모든 팀원들이 각자 자리에서 고개만 푹 숙이고 핸드폰을 만지고 있거나 그냥 멍하니 앉아있더라구요. 그래서 어떻게 대답해야할지 머뭇거리고 있는데, 제 눈치를 보더니 한마디 하더군요.
"팀장이 멘붕이구나?"
그 말에 제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더니, 그 사람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그리고는 몇초 뒤에 그녀가 몇마디 더했습니다.
"요즘 너네팀이 왜 이렇게 일을 허술하게 처리하나 했더니 알만하다. 팀장이라는 인간이 개차반이니 분위기가 이 모양이지."
이 때 알았습니다. 생산부 전체적으로 저희팀 팀장의 평판이 얼마나 안 좋아졌는지를요.
전 사실 어떻게 행동하는게 맞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당연히 불만이 없는건 아닌데 당장 이직을 생각하더라도 회사를 옮길 형편도 안되고 여러모로 신세 진 사람들, 정든 사람들도 많아서요. 올해 들어서 생산부에서 나간 사람만 5명이 넘는데 업무량은 계속 늘어나고 그렇다고 새 직원을 고용할 생각도 안합니다. 남은 사람들의 업무량은 매주 매달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팀원들이 매주 미팅 때 부장에게 일손이 모자르다고 하소연해도 "너희는 충분히 할 수 있어!" 혹은 "일이 많으면 주말에도 와서 일해야지!" 대답만 돌아올 뿐입니다. 사실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저희 회사는 초과수당을 지급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주말에 와서 일할 필요도 이유도 없죠. 일을 많이할수록 돌아오는건 칭찬이 아니라 더 많은 업무량이고, 지난달보다 생산량이 조금이라도 낮으면 다음달은 부장의 따가운 눈초리와 갈굼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도 요 몇달간 나름 회사다니는 재미와 감사를 느끼기 시작했는데 다시 안 좋아질까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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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duct mix 를 고려하지 않고 output 을 평가한다니.. 팀장이 아니라 부장 또는 그 위가 문제군요.
어느 회사나 원가가 좋은것/나쁜것, 생산성이 좋은것/나쁜것 취급제품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데, 그리고 제품을 결정하는 것은 생산팀의 역할이 아닌데, 단순 아웃풋으로 생산팀을 평가한다면 제대로 돌아갈 데가 없을 겁니다. 탑 매니지먼트의 문제라고 봐야죠. 팀장의 문제와는 별개로..
회사 내의 인사고과 평가기준부터 잘못되었네요.
추출 난이도가 차이난다면 그에 맞게 가중치를 부여해야지, 그런 거 일절 없이 단순 추출량에 따라서 고과를 부여한다면 당연히 고쳐야 할 고과인거죠.
그런데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 회사 내에서 그런 기준을 고치지 않았고 그게 이 사태의 원인이 되었다면 회사의 전반적인 잘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