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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2/02/15 11:00:38
Name nickyo
Subject [일반] 2007년 12월 25일. 8일간의 잊혀진 기억.
"야 기지배야. 니 사람이 이래 멋져부러도 된다냐?"


얼큰하게 들어간 술잔이 대짝으로 한 짝 나올무렵에, 푸욱 하고 내쉬는 한숨에서 소주내음인지 입냄새인지 모를 때.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 만으로도 취할것 같은 그 어두컴컴한 술집 한 구석에서. 그는 그렇게 고개를 푹 숙였다 들었다 하며 이리비틀, 저리비틀거렸다. 틈틈히 추임새로 "나쁜 놈. 나쁜 사람.."이라며 중얼대다가도, 이내 기운 찬 목소리로 "나가 그 형님은 그럴 줄 알았디! 그랴.. 직이게 멋져불제 참말로.."라고.


"나는 말여, 어릴때부터 아주 잘난 놈들을 좋아했당게. 해태 타이가즈으 선동렬아재부터 말여. 내 우상이란 다 그런사람들이었으야. 잘나고 멋져분 사람들. 그런데 말여, 이게 살다보니께 그런게 아녀.."


눈 앞에 놓인 술잔을 또 벌컥 들이붓는다. 난 그가 무슨이야기를 하려는지 안다. 벌써 몇번을 들었는지 몰라. 그래도 오빠의 술 주정중에 이 이야기를 나도 참 좋아한다. 그날, 나도 함께 보았다. 저런걸 왜 보냐며 타박했던 내가 바보같았을 만큼, 세상에 그런 삶의 방식도 있음을 깨달은 날, 오빠가 자기보다 왜소한 저 사람의 땀 한방울 한방울에 숨을 꿀꺽 삼켰는지.


"이게 말여, 사람이 아무리 잘나도 영원할 수가 없당께.. 나가 크로캅이! 크로캅이가 그렇게 괴물같아 보였는디, 세상에 그만한 괴물딱지는 없을거여. 근디 몇년 지나붕께 그냥 사람이 되부렀으야.. 사람이 그려. 사람이.. 심장 하나에 머리 하나 달린 사람은 영원할 수가 없당께.. 언젠가는 내려와야 된디..."


쪼르르 하고 빈 술잔에 술을 채운다. 배시시 웃고있는 표정을 들켰는지, 오빠는 뭐 그리 좋냐고 화장실을 간다며 왼쪽으로 두걸음, 오른쪽으로 세걸음 비틀댄다. 주인 잃은 술잔을 손가락으로 뱅글 뱅글 돌려본다. 맑은 술이 찰랑, 찰랑이며 몸을 흔든다. 턱을 괴고 멍하니 바라보는 술잔위로 흐물흐물, 한 사람이 떠오른다.



나는 그게 참 무식하다고 느꼈다. 왜 저런데 목숨을 거는걸까? 왜 저렇게 힘들게 살지? 그래서 그런데에 열광하는 오빠가 밉상스러웠다. 매번 그런 스포츠 경기들을 보면서 타박을 하면, 오빠는 그저 기지배로 태어나니 뭘 모르지 쯧쯧 거리며 발가락으로 저리가라고 휘적휘적대었다. 승질이 나서 엉덩이를 뻥 차주고는 했다. 그날도 그랬다. 2007년 크리스마스에, 다른 커플들은 다 오붓한 하루를 보낼때 꼭 봐야하는 게 있다며 집으로 날 부르고는 테레비 앞에 앉혔던. 그리고 본다는게 고작 권투시합이라니.. 짜증나고 화가났다. 하지만 오빠는 내 어깨를 꽉 잡고는 말했다. 꼭 봐야만 한다고.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이길수 없겠구나 싶었다. 결국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테레비 앞을 지키기로 했다. 조금 동네 노는 형 처럼 보이는 왜소한 사람이 우리나라 선수라고 했다. 세계챔피언이었다는 말, 서른 다섯이라는 말. 늦은 나이라는 말까지. 얼핏 신문에서 본 기억이 난다. 최.. 최.....



"끄윽, 아야. 좋다. 오빠야 왔다...."


철푸덕 주저앉은 오빠는 다시 술을 꼴깍, 입에 털어놓는다. 그리고는 내 손을 꼬옥 잡는다.


"그 형님이, 젊을적에는 말여. 요렇코롬 턱을 딱 땡겨불고 팔 양쪽으로 머리를 탁탁 막아부러. 그러믄 아들이 아무리 때려도 쓰러지지를 않는 거여. 그러다가 아들이 지치믄말여. 언제 그렇게 맞았냐는듯이 파파팍! 하믄서 때려 눕혔당께. 쓰러지질 않어 그 형님은. 그게 멋저부렀당께.. 내 그래서 그형님을 좋아했디. 아따 저 성님은 맞아도 아프지도 않은갑다. 근데 그 형님도 영원할 수는 없었디... 나이가 들구, 골병이 드니께.. 아이엠에뿌때 딱 지고나서 계속 지는거여. 그러드니 은퇴하것다고.. 못살것다고.... 턱턱 맞고 풀썩 쓰러지는걸 보믄서.. 아 이 형님도 내려오는구나 싶은거요. 짠했제. 벌써 가나 싶드라고잉.."


"근디, 그때부터 10년이 지난거여. 그동안 그 형님은 몇번 더 지고, 몇번 더 수척해졌고, 그 사납던 눈빛이 순하게 변해서는. 아따 사람이 맥이풀려버렸구먼. 그렇게 아쉬워했당께. 그랴도, 그랴도, 내도 나이가 묵어보니께. 그게 아닌거여. 사람이.. 사람이 그렇게 변하는게 맞는거여. 언제까지고 독기등등하게 살순 없당께. 내려오는 그 모습이 짠하디. 짠했어. 예전에는 그런기 많이 싫었는디 그땐 영 싫지가 않은거여. 알게 되뿐게.. 그냥 안타까운 것이여.... 아 이제 놔줄때가 됬거정키로, 아쉬운기 어쩔수가 없디.."


"야, 니도 봤기로.. 그런형님이 세계 최고를 다시 노린다고 했을때는 말여. 말리고 싶었당께. 더 비참해 지지 말라고.. 근디 그 형님이 을매나 멋진지 알간? 사람들이 다 안된다고 할때두 말여, 묵묵히 뛰었당께. 나가 할 수 있다구.. 후배들 운동할 길 닦아줄거라구... 모든게 힘들고 아프다고 내려놓은 그 형님이, 이를 꽉 악물고 돌아왔는디. 그걸 보니께 내도 심장이 쿵쾅쿵쾅 하는거여. 아지매! 여 술좀 더 갔다주소잉!"



"그라고 가셨제. 예술로 가셨디.. 사람이 그렇코롬 멋져불믄 안뒤야.. 그렇코롬 멋져불믄........ 죽을때까정 내려올 줄 모르고.... 그렇고롬 멋져불믄 잊을수가 없잖여.. 잊을수가.............."



직원 이모가 술병을 가지고 오실때쯤, 오빠는 이미 고개를 테이블에 박고 소근대고 있었다. 무슨 할말이 많은지, 웃으면서 술을 물리고 가만히 오빠를 바라봤다. 앞에 다 식어버린 술잔을 들어 털어넣는다. 싸르르르한 소주가 목구멍을 뎁힌다. 나 역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권투경기. 2007년의 크리스마스는 잊혀지지 않는다. 맞아도 맞아도 쓰러지지 않던 왜소한 그 남자. 마지막에 풀썩 주저앉았을 때, 오빠보다 내가 더 큰 비명을 지르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그를 보고는 두 손을 번쩍 들었을때. 그렇게 세계 정상에서 떠나간 그가 잊혀지지 않는다. 오빠 말이 맞다. 그 사람은 너무 멋졌다. 그 뒤로 가끔 오빠와 격투기 같은걸 보기는 하지만.. 그런 감동은 별로 없었다. 언젠가 티비에서 그 사람의 삶을 보여줄때 어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맞는게 무섭다. 아프다. 힘들다며 도망가고 싶어했던. 그저 유약한 한 사람이었던 그 왜소한 남자는 결국 도망가지 않았다. 죽음앞에서도 그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도 되는거냐고. 울음을 터뜨린 내게 오빠는 나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 형님이 멋진거여..







2007년 12월 25일. WBO 인터콘티넨탈 플라이급 세계타이틀전. 최요삼 선수는 훌륭한 방어로 다시 세계 챔피언을 거머쥐었다. 그리고 2008년 1월 3일. 그는 영원히 세계 최고가 되어 우리를 떠났다. 그렇게 강한 세계 챔피언이면서도 맞는것이 두렵다며 아파했던. 힘들게 운동하는 후배들을 보면서, 자기밖에 없다며 그렇게 무서워했던 링 위에 다시 올라오기 위해 산을 누비고 샌드백을 두드렸던 그는 갔다.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말했던 서른 넷의 재기를 성공하고, 다시 세계챔피언을 따내면서도 그는 어릴때의 천둥벌거숭이 같은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매 경기를 삶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겠다던 그는, 어느새 턱이 부서져도 상대를 때려눕히던 불굴의 젊은 복서에서, 완숙한 노장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갔다. 선수로서는 한참 늦은 35살에 세계를 다시 거머쥐고, 삶으로서는 너무나 짧았던 35세에 그는 갔다. 남들처럼 그저 조용히 쇠잔했다 한들 미워할 리 없었던 그는. 그렇게, 자신을 불태우고 갔다. 죽으면서도 6명의 사람에게 장기를 나누며. 살아서는 복싱의 길을 열겠다고, 죽어서는 새 생명을 열겠다고. 그렇게 살다 갔다. 복싱계에는 선수보호가 제대로 안되는 구조를 사회의 물망으로 끌어올리고, 죽어서는 장기기증을 통해 사람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21세기에 이런 드라마가 또 어딨을까 싶건만, 그가 남긴것들을 금세 잊어버리고 여전히 바뀐것은 없다. 그래서 벌써 잊혀져 버린 그를 다시 기려본다. 그가 바랬던 복싱의 부흥과, 후배들이 운동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겠다던 소망은 그가 떠나면서 함께 가져가버렸는지 금세 재가되어 사라진, 이젠 어느 구석진 술자리에서, 그를 기억하는 몇몇의 추억담에 술안주밖에 안되는 그의 드라마를 다시 기억한다. 잊어서 미안하다고. 마지막 영웅으로 떠나간 당신을 잊어서 미안하다고.





최요삼 권투선수
출생-사망1974년 10월 16일 - 2008년 1월 3일

2007 세계복싱기구(WBO) 인터콘티넨탈 플라이급 챔피언
1999 세계권투평의회(WBC) 라이트플라이급 챔피언
1996 라이트플라이급 동양챔피언
1995 라이트플라이급 한국챔피언
1994 라이트플라이급 신인상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생각이 존재하는 것이다.

-최요삼. 2006년 한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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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쏠
12/02/15 11:10
수정 아이콘
경상도 사투리에서 질문의 어미는, 대답이 긍정/부정으로 나눠질때 '-나?' 이외에는 '-노?' 를 사용합니다. 밥 먹었나? 밥 뭐 먹었노? 롯데 이깄나? 롯데 경기 어떻게 됐노? 엄마 계시나? 엄마 어디계시노?
.. 첫문장 읽고나서 글읽는 내내 신경쓰여서요. 잘읽었어요. [m]
12/02/15 11:19
수정 아이콘
눈물이 날것 같네요.
PoeticWolf
12/02/15 11:20
수정 아이콘
참 멋집니다, 이 분. 전 사실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서야 알게 된 분이긴 하지만, 이분 스토리에 많은 감동을 받았었어요.
모든 걸 쏟는다는 건 어려워서인지, 참 아름다워보이고.. 감동적이에요. 난 뭐하고 사는걸까;;;
잘 읽었습니다~!
12/02/15 11:45
수정 아이콘
최근에 티비에서 스페셜방송하더군요. 봤는데...짠하더군요.
짱구™
12/02/15 11:53
수정 아이콘
그대 살아가는게 힘들어도
사랑이란 말 사랑이란 말
항상 잊지마요
그대 때론 외롭고 두려워도
사랑이란 말 사랑이란 말
항상 잊지말아요
김치찌개
12/02/15 18:22
수정 아이콘
글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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