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게 크게 당한후 잠시 대반격을 해보았던 금나라는 칭기스칸 생전에 버티고 있었습니다.
1229년 몽골 제국의 두번째 대칸이 된 우구데이는 1232년부터 모든 역랑을 총동원해서 금나라를 공격, 거기에 배후를 치는 별동대까지 사용했고 결국 금나라는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결국 금나라는 남송에 도움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면에서 몽골이 좀더 빨랐습니다. 1232년 몽골은 양양성으로 사람을 보내 송나라와 같이 금나라를 치고, 대신에 식량을 원조해주면 고맙겠다 하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송 조정에선 격론이 벌어졌지만 금나라에 대해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는 대신들은 몽골의 제안에 동의했습니다.
금나라의 사신은 그 다음에 도착해 "우리가 망하면 다음은 송나라의 차례다." 며 설득했지만 워낙 감정이 좋지 않아 소득이 없었습니다. 송나라의 명장 맹공(孟珙)이 출진하고, 몽골과 송나라의 연합군에 결국 금나라는 멸망하고 맙니다.
송나라의 입장에서는 드디어 국가의 치욕을 씻었지만 이젠 몽골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다시 조정은 의견이 갈렸지만 이 기회에 국가의 치욕을 완전히 씻어보자, 라는 의견들이 힘을 얻어 송나라의 군대가 북상, '삼경팔릉의 회복'(북송8인의 묘와 변경,낙양,귀덕부)을 달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군량이 부족해 오래있을 수 없었고, 몽골은 이런 도발에 강하게 대처하여 결국 송나라 군대는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1235년 2월의 쿠릴타이(집회)에서 남송 공격에 대한 방침이 정해지고, 몽골군은 다시 역량을 전부 기울여 남송을 공격한다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서 - 중 - 동 크게 세 곳을 전장으로 삼는 공격이었습니다.
서쪽 ─ 사천 공격
중 ─ 양양 공격
동쪽 ─ 회남 공격
그야말로 전중국을 아우르는 광대한 전쟁이 시작되어, 1236년까지 남송의 주요 거점들이 함락되기 시작했습니다. 35년 10월 성도가 떨어지고, 다음 해 3월 양양이 함락되었으며 1237년이 되자 몽골군은 동쪽으로 황주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부터 몽골군은 전례없는 엄청난 저항을 받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한발짝도 나아가질 못하고 오히려 격렬한 공격에 뒤로 물러나야 했습니다. 송나라의 명장 맹공은 강릉에 대핸 공격을 막아내고, 오히려 몽골군을 연전연파하면서 양양 일대를 다시 수복하고, 기주를 되찾았으며, 사천으로 가서 몽골군을 또 다시 막아내었습니다.
6년간 벌어졌던 전역에서 몽골과 송나라는 끊임없이 투쟁했는데, 결국 1241년 우구데이 칸이 사망하자 몽골군은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송나라는 사천 지방에만 10여개의 성을 새로 쌓아 올리고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올 때를 대비했습니다.
우구데이 칸이 죽은 후 구유크 칸이 대칸이 되었으나, 바투와 분쟁이 극심했습니다. 다시 전쟁이 재개 된것은 몽케 칸이 즉위한 후였습니다. 몽케 칸은 이번에도 똑같은 전략으로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1258년에 공격을 재개했습니다. 직접 나선 친정이었습니다.
서로군 사령관 ─ 몽케 칸
중로군 사령관 ─ 쿠빌라이
운남을 돌아서 공격하는 별동대 ─ 아리크 부케
대전략은 몽케가 사천을 휩쓸고, 쿠빌라이와 합류해 강남을 일거에 쓸어버리자는 것이었는데, 몽케 칸은 사천 지역의 대부분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왕견(王堅)이 지키는 조어성을 함락시켜야 했는데, 몽케 칸은 넌지시 투항을 권하기도 했지만 왕견은 오히려 사자를 살해하고 군민 10여만과 결사항전을 다짐했습니다. 화가난 몽케 칸은 조어성에 대한 공격을 대대적으로 시작합니다.
본래, 사천의 다른 지역들을 병합시키기는 했지만 대부분 몽골군의 기세를 보고 지레 겁을 먹어 항복한 것이라, 전투다운 전투는 조어성 전투가 처음이었습니다. 몽케칸은 반드시 조어성을 함락시키고 싶었지만 쉽지가 않았습니다. 몽골군의 정밀한 공성 병기도 너무나 단단한 조어성엔 별 소용이 없었고, 아무리 공격을 해도 송군은 계속 몽골군을 몰아내었습니다. 몽골군은 잠시 구름사다리를 타고 성 내 진입에 성공하긴 하나, 다시 큰 저항에 직면해 퇴각하고 맙니다.
몽케 칸은 전투가 전혀 예상외로 흐르자 당황해서 군사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회의에선 이곳에 소규모 병사만 남겨두고 쿠빌라이와 합류하자는 의견과, 아예 북쪽으로 도망가자는 의견까지 다양했는데 대부분은 조어성을 함락시켜야 한다는데 뜻을 모았습니다. 이에 몽케 칸은 계속해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5개월이 넘도록 공성전은 아무런 성과도 없었고, 몽골의 장수 왕덕신(汪德臣)은 직접 성 아래로 가서 "싸우자!" 고 도발 했지만 성에서 쏜 화살을 맞고 전사 하기도 합니다.
몽골군은 조어성에 대한 지원 자체는 계속해서 차단했습니다. 외부의 지원이 조어성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오히려 조어성의 물자는 매우 풍부했고, 수비군의 사기도 전혀 떨어지려고 하질 않았습니다. 송나라 군은 대놓고 몽골군에 물고기와 밀가루를 던지며 "우린 10년도 더 버틸 수 있다." 고 으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반면 몽골군의 상황은 절망적이었습니다. 5개월동안 싸웠지만 성과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많은 대신들과 장수들만 죽어버렸습니다. 비가 오는데다 더운 사천의 날씨는 몽골군에게는 쥐약이었고, 군중에서는 전염병이 퍼졌습니다. 더구나 몽케칸까지 병에 걸렸습니다.
결국 몽케 칸이 죽어버리고 맙니다. 이미 전쟁은 아무 소용없는 일이 되었고, 몽골군은 모두 후퇴했습니다. 이 공성전은 전 세계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쳐 몽골군의 정복 전쟁은 한동안 좌절되었고, 서아시아에서는 훌라구가 대칸의 죽음 소식을 듣고 적은 병력을 남겨둔채 귀환합니다. 숫자가 부족해진 몽골군은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에게 아인 - 잘루트 전투에서 패배하여 몽골군의 서진은 이 시점에서 종료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쿠빌라이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몽케 칸이 죽었다. 그럼 자기도 대칸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공적을 쌓는게 유리하다. 이런 생각으로 주위에서 퇴각하자는 요청을 거절하고 오히려 진군해서 악주를 포위했습니다. 이에 송나라는 가사도와 여문덕 등을 파견해 이를 저지하게 했습니다.
공적에 욕심을 내긴 했지만, 9월이 시작된 전투는 12월이 되어도 성과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슬슬 쿠빌라이는 시시각각 변하는 중앙의 후계자 문제에 애가 타고 있었지만 이제와서 돌아갈 명분도 마땅치 않았는데, 이때 송나라의 가사도가 조정에는 연락을 취하지 않은 체 독단적으로 쿠빌라이와 협상을 벌였습니다. 이것저것 가릴것 없던 쿠빌라이는 요청을 받아들이고 재빨리 돌아갔습니다.
몽골군의 두번째 공격도 이렇게 저지되었습니다.
가사도는 조정에 돌아가 밀약대로 후퇴하는 쿠빌라이의 군대의 최후미 일부만 공격하는 시늉을 한 후에 이를 자신이 악주에서 쿠빌라이를 격퇴하여 장강(양자강) 일대의 몽골군을 몰아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1260년 '영웅' 가사도는 귀환 하였고 조정은 승리의 분위기에 취해 가사도를 위국공으로 삼았습니다.
이 기간 동안 쿠빌라이는 대칸이 된후 내부 분쟁에서 승리하였고, 송나라에는 화친의 의사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가사도 였습니다. 몽골의 사람이 오게 되면 자신의 사기극이 들어날 우려가 있었고 두려워진 가사도는 극렬하게 화친을 반대했고 몽골 사신은 그대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당연히 어이가 없어진 쿠빌라이 칸은 내부 문제가 다 해결되자 다시 남송 공격으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이전 전혀 성과라곤 없었던 송나라 공격을 돌이켜 보고는 기본적으로 전략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양양을 집중 공격하기로 전략을 세웠지요.
양양은 그야말로 요충지로, 이곳을 잃으면 송나라는 끝이다. 쿠빌라이 칸의 주위 신하들은 모두 그렇게 말했고, 항복한 남송 측의 인물에서도 양양의 중요성을 역설했습니다. 쿠빌라이 칸은 사천등을 한꺼번에 공격했던 지난번 과는 다르게 양양에 온 힘을 쏟는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1268년 장장 10여만의 대군이 양양으로 출격하여 주변의 거점을 점령하고 성을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양양성은 견고한 시설이라 공격이 어려웠기에, 적극적은 공격보단 말려죽이는 것이 기본 정책이었습니다. 이에 송나라는 양양으로 지원병들을 급파합니다.
하지만 이건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몽골도 지원군이 드나들면 전략은 실패라는것을 알았기에 저지했고, 장세걸이 이끄는 부대 정도를 빼면 몽골군에 전부 패배했습니다. 대신, 한수가 불어나자 그 틈을 타 배를 타고 물자를 지원해주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몽골군은 크게 당황했지만, 곧 한수를 목책으로 막아버렸습니다.
몽골군의 양양 공격군은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더 불어났습니다. 수만의 군대가 지원되고, 저 멀리 중동에서 공성 병기들이 도착했습니다. 반면에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양양은 고립되어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1272년까지 양양이 떨어질 생각을 안하자, 다시 몽골군은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양양과 번성 중에, 우선 번성부터 함락시키고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번성은 결국 함락되었고, 양양성의 상황은 절망적이 되었습니다. 물자는 모자르고, 사람들은 동요하고 투항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성의 수비대장 여문환은 매일 남쪽을 바라보며 울면서 결사항전을 다짐했지만 상황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이럴때 쿠빌라이 칸은 사람을 보내 여문환에게 항복을 권유합니다.
"그대는 수년동안이나 이 성을 지켰다. 허나 이제는 나는 새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황제께서는 그대의 충성스러움을 가상히 여기고 계신다! 투항하면 큰 상을 내릴 것이다."
"....."
"우리 군대는 지금껏 공격하여 무너뜨리지 못한 곳이 없다. 너는 지금 고립 된 성에 있고 탈출로도 없다. 바깥에는 지원군도 없다. 너는 성을 지키다 죽었다는 헛된 공명을 바랄지 모르겠지만, 성 안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란 말인가?"
결국 주위 사람들의 설득에 여문환은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송나라의 멸망을 뜻하는것으로서, 1년뒤 바얀이 이끄는 20만 대군이 출격하여 1276년 송나라 조정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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