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일본 도쿄의 야마노테센 신오쿠보역 한쪽 벽의 동판에는 한글로 이러한 글이 적혀있다.
"한국인 유학생 이수현씨 2001년 1월 26일 오후 7시 15분쯤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발견하고 용감히 선로에 뛰어들어 인명을 구하려다 고귀한 목숨을 바쳤습니다. 숭고한 정신과 용감한 행동을 영원히 기리고자 여기에 이 글을 남깁니다 "
그는 1974년 7월 13일 울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유년시절을 부산에서 보냈다. 1987년 2월 부산 낙민 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1990년 동래 중학교를 졸업했다.
1993년 고려대학교 무역학과에 입학한다. 사진에서도 드러나듯 이수현씨는 매우 활동적인 사람이였는데, 그는 친구들을 가족과 함께 최고의 보물이라 말하였고, 특히나 수영 테니스 농구와 같이 땀을 많이 흘리는 운동을 좋아했다고 한다. 친구들은 털이 많다고 그를 털프가이 혹은 영감이라고 불렀다.
일본에 대해 더 알고싶다며 2000년 1월 일본의 아키몬카이 일본어 학교에 입학하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늘 성적은 최상위권을 유지했다고 한다.
이수현씨는 일본의 후지산을 정복하고 싶어했지만 2001년 1월 26일 겨울 생에 있어 영원한 쉼표를 찍는다.
- 영화 너를 잊지 않을거야 中 -
이수현 씨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신오쿠보역에서 기숙사로 돌아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술에 취한 한 취객이 반대편 선로로 추락하는것을 보게 된다.
그는 즉시 선로에 뛰어내려 그를 붙잡고 일으키려고 노력했고. 당시 한 일본인이 더 선로로 내려와 그를 거들었다. 순간 열차가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7초 그들이 선로를 이탈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였지만 그 순간 이수현씨는 열차를 멈추려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자리에있던 세 명 전부 숨지고 만다.
당시 이 사건은 엄청난 사회적 이슈였다.
일본 1억2천만 시민은 크게 감동하였고 그들의 개인주의 사회에 대해 다시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5년 후 하나도 준지 감독의 영화 '너를 잊지 않을거야 (한.일 합작영화)' 가 개봉하였다. 당시 영화 시사회에 아키히토 일왕부부와 사회 각계각층 고위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는데 영화 시사회가 끝나고 관객들 전원 상당시간 기립박수를 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희생정신을 기리는 이수현 아시아 장학기금이 설립되었고 이 단체에 가입한 시민,학생 기업인은 1만여명을 넘었는데, 유학생들의 공부를 위해 '이수현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모교였던 낙민초등학교 내성고등하교 고려대학교, 그리고 그가 있던 아키몬카이 어학원는 그를 추모하기위해 추모비를 만들었고 신오쿠보역에는 그의 현창비가 마련되어 있다. (고려대학교에선 사상최초로 고 이수현씨에게 명예졸업장을 수여하였다)
이제는 벌써 10년 전 일이 되어버렸지만 그의 의지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다. 고 이수현씨의 뜻을 살려 일본으로 유학오는 한국 등 아시아 유학생들을 지원하는 이수현 장학기금은 아직도 운영되고 있다. 한·일 교류에 이바지하고 싶다는 이수현씨의 뜻을 살려 일본으로 유학 오는 한국 등 아시아 유학생들을 지원하는 ‘이수현 아시아 장학기금’이 10년째 운영되고 있고 그 동안 485명의 유학생이 이 장학기금의 도움을 받았다고한다.
그리고 매년 기일마다 도쿄로 이수현씨의 부모를 초청해 추모모임을 열어왔었는데 이수현씨의 부모님의 건강과 일정상의 이유로 올해 10주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고 한다. 찢어질때로 찢어진 부모님의 마음은 그 무었으로도 메울수 없기 때문에 그의 의지는 계속 이어져야 한다.
지금도 일본내에는 제2. 3의 이수현이 소중한 목숨들을 살리고 있다.
1억 2천만의 일본일을 감동시킨 그를 우리는 의인이라 부르고 있다.
(판도라 동영상밖에 못찾았습니다;)
그의 선택은 많은 이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여러분들은 아직도 그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너를 잊지 않을꺼야"
영화제목처럼 우리는 그를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을까요?
세월이 흘러 서서히 천천히 조금씩 잊혀져가는 용감한 청년을 기억하며 안타까운 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