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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9/25 21:08:26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네그로니 백작을 쓰러뜨리다.
고등학교 때 <물개>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이 있었다. 복잡한 어원은 아니고, 다만 <물리를 가르치는 개새X>란 뜻이었다. 지구과학 수플렉스, 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도 있었다. 레슬러같은 다부진 육체를 자랑하고 다니던 지구과학 선생이었다. 말이 되든 되지 않든, 어원이 단순하든 복잡하든, 우리는 꽤 많은 것들에 별명을 붙인다. 그리고 때론 이름보다 별명을 더 자주 부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나는 나와 같은 하숙집에 사는, 알고 지낸 지 족히 5년은 되는 한 지인의 이름을, 꽤 최근까지, A라고 알고 있었다. 모두들 그를 A라고 불렀으니까. 당연히 나도 초면부터 그를 A라고 불렀다. 그렇게 5년이 지나고 얼마 전에야 사실을 알게 되었다. A는 그의 별명이었다. 본명은 따로 있었다.

내가 그의 별명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

바에 혼자 오는 사람이 실명을 밝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명함을 주거나, 충분히 친해지거나 하지 않는 이상은. 둘이 오면 그나마 편하다. 그들의 담화 속에서 이름을 알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항상 혼자 오면서, 명함 같은 건 취급하지 않고, 50cm 남짓한 바테이블이 주는 묘한 거리감을 즐기는 손님의 경우라면, 역시 이름을 알게 되는 건 힘들다. 바텐더도 결국 평범한 인간이기에, 인류의 오랜 전통에 따라, 그런 손님에게는 혼자만의 별명을 붙이곤 한다.

태초에 네그로니 백작이 있었다. 까지는 아니고 가게 오픈과 함께 네그로니 백작이 있었다. 서른 중반에서 마흔 중반까지를 커버하는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얼굴. 지극히 학자스러운 복식과 표정과 어투. 두꺼운 책. 그와 안면을 트고 지낸 지는 꽤 되었다. 그나 나나, 한때 신촌의 바를 떠돌던 취객 1,2,3이었으니까. 언젠가 bar X에서 마주쳤고, 다다음 날쯤 bar Y에서 마주친다거나 하는. 그런 그가 가게를 열고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손님으로 왔다. 아. bar M 사장님한테 들었어요. 가게 여셨다고.

뭘 추천해드리지. 고민하다가 네그로니를 추천했다.

최고의 칵테일 한 잔을 고르라면 역시 네그로니다. 감독이자 배우였던 오손 웰즈가 <쓴 맛은 간에 무척 좋고, 진은 건강에 나쁘지. 훌륭한 밸런스 아닌가?> 라고 표현한 칵테일. 지중해의 태양과도 같은 붉은 색. 자몽과 레드와인의 쌉싸름하고 달콤한 향에 오렌지 껍질로 포인트를 주고, 이 모든 것을 독한 진으로 화사하게 발산시키는 칵테일. 오손 웰즈를 떠나서, 개인적으로도 '맛의 밸런스'라는 차원에서 단연 최고의 칵테일이 아닌가 싶은 바로 그 것. 이탈리아의 카밀로 네그로니 백작이, 단골 바의 바텐더 포스코 스카셀리에게 <지금까지 항상 마시던 Americano(커피가 아니다. 캄파리와 스위트 레드 버무스, 탄산수를 섞은 상쾌하고 씁쓸한 칵테일이다)에서 탄산 대신 진을 넣어보면 어떨까?>라고 요구하여 탄생한 칵테일. 식전주의 황태자.

나는 위풍당당하게 그에게 나의 <그것>을 뽐내었다. 그는 나의 <그것>을 매우 정성스럽게 탐닉했다. 기다란 손가락으로 나의 <그것>을 살며시 들어올리고, 나의 <그것>를 입 안 가득 머금은 그의 얼굴에는 석양과 같은 홍조가 피었다. 나의 <그것>는 그를 충분히 만족시킨 것 같았다. 그의 심장의 고동이 들리는 것 같았다. 더 쓰면 어딘가 음란한 느낌이 고조될 것 같으니 이쯤 하겠다. 여기서 <그것>은 물론 <그것>이 아니라, 네그로니다. 오오 나의 빨간 태양.

<무척 향이 좋고, 밸런스가 뛰어나군요. 쓴 맛을 좋아하는 제 취향에도 나쁘지 않아요. 신기하네요. 지금까지 주로 거의 맥주만 마셨는데, 한번 본격적으로 칵테일에 입문해보고 싶게 만드는 술이군요> 가 그의 내 <그것>에 대한 첫 평가였다. 그리고 그는 다른 주문을 했다. 비슷한 느낌의, 괜찮은 칵테일이 더 없는지요?

잠깐 고민하다, 나는 진 피즈를 만들었다. 한 보금 마신 그는, 이건 너무 가볍군요. 라고 약간 찌푸린 표정을 지어보였다. 역시 네그로니가 나은 것 같아요. 네그로니를 한 잔 더 주세요. 그것이 그의 첫 방문이었다.

이후로 그는 언제나 바에 와서, 무거운 책가방을 옆 자리에 두고는, '항상 마시던 걸로'를 주문했다. 나름대로 약간의 베리에이션이 있었다. 원래 비피터 진을 사용했지만, 몇 번 그와의 대화를 통해 고든 진이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간간히 그는 '뭐 좀 다른 걸 한번 마셔볼까요?'라고 질문했다. 헌터. 스푸모니. 마티니. 블러드 앤 샌드, 정도를 추천한 것 같다. 하지만 어떤 것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네그로니가 역시 최고로군요. 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봐요, 더 난처한 건 이쪽이라고. 그 즈음에 나는 그에게 홀로 <네그로니 백작>이라는 별명을 지어두었다. 몇 번 이야기를 통해, 역시나 그가 대학에서 무언가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의 고향을 알게 되었고, 그의 취미를 알게 되었고, 종국에는 그의 이름까지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내게 그는 <네그로니 백작>이었다. 그리고 작은 목표가 생겼다. 네그로니 백작을 쓰러뜨리는 것. 그는 때로 나를 도발했다. 바텐더님이 가능한 칵테일 중에 괜찮은 게 없으시면, 아예 뭐 새로운 오리지널을 한번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하는 식으로.

늦봄에 가게를 열고 여름을 거쳐서 그렇게 가을이 왔다. 갑자기 날씨가 쌀쌀해 진 어느 날, 나는 온 손님들에게 따듯한 칵테일을 추천했다. 레몬. 위스키. 설탕 반 티스푼. 뜨거운 물. 정향 두 조각. 동양 차 같은 느낌이 나는 위스키 토디. 반응은 뭐 나름대로 나쁘지 않았다. 두어 손님들에게 더 추천하고, 밤이 되었다. 밤이 되고, 네그로니 백작이 찾아왔다. 늘 마시던 걸로 드릴까요? 네. 그러죠. 그리고 나는 네그로니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네그로니를 다 마신 후에, '뭐 좀 다른 걸 마셔볼까요?'라는 예의 대사를 읽어내렸다. 흐음. 뭘 드리지. 아, 날씨가 조금 쌀쌀하니, 따듯한 칵테일은 어떨까요?

뭐. 한번 해보죠.

사실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건 네그로니 백작의 취향이 아닐텐데. 그래도 뭐. 한번쯤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만드는 내내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일말의 기대에 찬 표정으로 내 작업을 지켜보고, 잔을 받고, 마셨다. 그리고 잠시 그는 말을 정지했다.

이거. 좋네요.
네?
괜찮다구요. 네그로니에 필적할 만 하네요.
네?

처음에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지 몰랐다. 그리고 곧 깨달았다. 아. 드디어. 이겼다. 네그로니 백작을 쓰러뜨린 것이다. 잠시간 희열이 스쳐가고, 곧바로 기분이 가라앉았다. 아 뭐야 이거. 위스키 토디는 내가 가게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하기도 전 시절, 그냥 단순한 칵테일 애호가였던 시절에도 확실하게 알고 있었던, 30종류의 레시피에 들어 있는 칵테일이었다. 구글링해서 찾은 것도 아니고, 오리지널도 아니다. 지나치게 클래식한 느낌이기에 지금 사람들에게 익숙한 녀석이라고 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지만, 그렇다고 테네시 왈츠처럼 가짜 클래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 팝하고 트렌디해서 쓰레기 뭉치 레시피 속에서 건져낸 녀석도 아니다. 네그로니와 마찬가지로, 그냥 어느 순간 부터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들어 있던 그런 편하디 편한 칵테일이었는데. 그게 답이 될 줄이야.

평소에 언제나 네그로니 두세잔, 혹은 맥주 서너 병을 마시고 가게를 나서던 그는, 위스키 토디를 네 잔 정도 마시고 떠나갔다. 앞으로는 이것과 네그로니를 마셔야겠군요. 라는 말과 함께. 가게 문을 닫으며 나는 막 신이 나 있었다. 으라차. 막 자랑을 하고 싶어졌는데 생각해보니 자랑할 사람이 없어서 잠깐 우울해졌지만 뭐 그러면 어떤가. 신이 났다. 그리고 돌아온 쉬는 날, 나는 오랜만에 내가 어깨너머로 술을 배운, 서울에서 가장 훌륭한 바텐더가 하는 바에 놀러갔다. 이것저것 시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바텐더가 내게 물었다. 아, 전에 말씀하셨던 그 네그로니 손님, 어떻게 되었어요? 나는 신이 나서 계절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이어진 네그로니 백작과의 사투를 소상히 자랑했다. 그리고 느꼈다. 아, 갈 길이 멀다. 대선배님은 단 한 방으로 이렇다 할 이야기도 안 했는데 곧바로 '아, 전에 말씀하셨던 그 네그로니 손님, 어떻게 되었어요?'라고 찔러오는데, 나는 네그로니 백작과 두 계절동안 사투를 벌였구나.

정진을 마음속으로 약속하며, 사투의 기록을 짧게 남기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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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쏠
11/09/25 21:16
수정 아이콘
크크. 축하드려요. 근데 고도의 홍보글+음란성글이네요. 이번글 되게 재밌어요. 여태 헥스밤님의 글중에 제일 재밌네요. 아무것도 모르는 칵테일얘기가 절절히 공감하던 짝사랑글보다 재밌다는게 신기해요.
진리는망내
11/09/25 21:24
수정 아이콘
글 재밌네요.
치킨치우 위에 있는 바인가요?

바같은 곳은 별로 안가봤는데 가면 알아서 추천해주시고 그거 먹고 하는건가요?
허느님맙소사
11/09/25 21:38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뭔가 철옹성 같던 어떤 것을 무너뜨렸다고 생각하면 희열이라고 할까, 뭔가 신나지요 크크.

전 서문 사는데 지금이라도 운영하시는 바에 가서 네그로니랑 토디 한 잔 마시고 싶어지네요.
하지만 혼자 가는 건 익숙치도 않고 가난한 학생이라 ㅠㅠ 다음에 한번 방문하겠습니다.
11/09/25 21:38
수정 아이콘
야한 글이네요 ;) [m]
윤아♡
11/09/25 21:40
수정 아이콘
글 재미있게 읽엇습니다.
왠지 하루키의 단편을 떠올리게 하는 글이라 갑자기 읽고싶어지는군요.
칵테일은 잘 모르지만 가까운 시일내로 맛보러가겠습니다 흐흐
뺑덕어멈
11/09/25 23:01
수정 아이콘
칵테일 이런 쪽이랑 친하지 않는데 헥스밤님 글 읽으니
영화나 만화처럼 고독을 씹으며 바에서 늘 먹는 걸로 한잔 시키는 폼도 내보고 싶네요..
요새 가을타나.... 혼자 가도 되는 건가요?
王天君
11/09/26 16:50
수정 아이콘
아 재미있네요. 중간에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패러디가 맛깔나네요 하하
언제 한번 가게에 가서 '피지알러1'이라는 손님으로 글 속에 등장하고 싶네요.

질문인데, 칵테일은 맥주나 소주에 비해서 몇 잔정도 마시는 게 보통인가요? 그리고 혼자 가서 즐기는 손님들이 많은가요?
헥스밤
11/09/26 18:22
수정 아이콘
원래 바는 혼자 오는 게 진리입니다. 크크. 이에 관련해서 조만간 논문이 정리되는대로 글 한편 또 질러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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