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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09/24 20:49:25
Name 눈시BB
Subject [일반]  그 때 그 날 - 미래 (3) 영남만인소


시작하기에 앞서서.
여기에 관련된 일들을 인터넷에서 나름 오르내립니다. 홍어, 슨상님 같은 것보단 덜하지만 경상도가 이백년 동안 반역향으로 지정됐다느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있죠. 이인좌의 난 이후 이백 년 안에 조선 멸망했는데요 -_-;

주의해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정여립의 난 이후에도 호남은 크게 차별받지 않았고, 서인의 텃밭으로 남았습니다. 반면 영남은 북인이 무너지고 남인이 무너지면서 소외됐었죠. 하지만 좀 더 따져보면 이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관직에 등용되는 건 거의 다 서울과 경기, 기껏해야 충청도 수준이었거든요. 서원은 이렇게 정계에서 밀린 지방의 사림들이 마구잡이로 세운 거죠.

둘째. 그런 상황에서도 호남은 서인의 텃밭으로, 영남은 남인의 텃밭으로 남았습니다. 정조 대의 상황에서 지방은 이 정도의 의미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상도의 상황을 보죠. 그들 입장에서 영남은 김종직에서 이황으로 이어지는, 조선시대 사림의 성지나 다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곳이 역향으로 지정됐죠. 임진왜란 때 전라도에서 의병이 많이 일어난 이유 중 하나로 "역향으로 지정된 게 억울해서 충성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것과 비슷하다고 봐야 될 겁니다. 우리가 남이가 정신으로 몰락해버린 남인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역향으로 몰린 영남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셋째. 호남이고 영남이고 진정으로 차별할 상황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 두 도는 조선의 인구 절반 이상을 감당하던 곳이었죠. 평안, 함경도와는 대접이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여립의 난 이후 임진왜란 때 이미 선조가 호남에 사과하는 교서가 있고, 정조 역시 영남이 나라의 근본이라느니 하면서 대우해 줍니다. 자기 뜻을 따라 줘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영남은 소외된 지역으로 둘 수 있는 도가 아니었죠. 호남이든 영남이든 "그 때부터 수백년간 차별했다" 이런 건 "한민족은 한의 민족이다"랑 다를 게 없습니다. 뭐 어쨌든 정계 진출이야 극도로 어려웠지만요. 정약용이 아들에게 그랬죠. 사대문 밖을 벗어나지 말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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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남만인소
"경상도 유학 이우 등 1만 57인이 상소하였다" (정조 16년 윤4월 27일)
참 담담하게 적고 있습니다만...

이전에 병자호란 얘기하면서 조선시대 인구 통계에 대해 알아봤습니다만... 경상도의 인구가 1700년 직전에 100만이 약간 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 시기 많아 봐야 이백만이 안 되었겠죠. 설마 상것들이 여기에 참가했을까요. 조선 후기로 가서 양반의 수가 급격히 늘어난다고 하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여기에 참가한 이들은 유생들이었습니다.

말이야 동인 서인 이리저리 하지만 서로 섞여 있었던 다른 도에 비해 경상도는 남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았습니다. 이탈리아에 신교는 발을 들이기 어렵죠. -_-; 이황이 살았던 곳이 바로 경상도였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해도 상상 이상의 수치입니다. 망했다 하나 북인도 있을 것인데 말이죠. 영남에 있는 유생들 거의 전부가 여기에 참가했다고 봐도 큰 과장은 아닐 겁니다. 수백명만 참가해도 큰 일인데 일만명이 참가한 상소, 그 내용은 이랬습니다.

"마, 지들이 의리를 마음 속에 푹 간직하고 있은 지 고마 30년이 다 돼 갑니더. 근데요, 감히 입도 못 열고 가슴만 치면서 아무 말도 못 했으니 죽어도 변명을 어떻게 하겠십니꺼. 최근에 유성한이라는 놈이 속으로 불측한 마음 품고 상소 올렸다는 말을 듣고 나름대로 생각한 것도 있고, 전하가 신들에게는 임금이요 아부지 아입니꺼. 감히 뭐를 숨기겠습니꺼."
"의리란 그는(것은), 천하에 보편된 그고(것이고), 백 대가 지나도 공정하게 처분되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더. 지금 전하께서 계신데 지들이 아~무 말도 안 하면 평생의 한이 될 겁니더. 이에 감히 문경새재를 넘어왔습니더."

"신들은 곧 영조 대왕께서 50년간 길러낸 자들입니더. 생각건대 우리 장헌(!) 세자께서 영조의 후사로 14년간 대리하셨다 아입니꺼. 그 때 영남 사람 중에 가까이 모신 자가 많았는데 돌아와서 윽수로 좋은 분이셨다 캅디더. 진짜 지들이 목숨 걸고 섬기고 싶었던 분입니더. 근데 [음흉하고] [완악한] 무리들이 지들 자리 뺏길까 두려워갖고 일 저지르고 그걸 은폐했습니더. 이걸 사람을 속여도 하늘을 속일 수 있겠십니꺼?"

"(신나게 욕한 후) 전하께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천벌을 시행하시가(하셔서) 흉악한 무리들을 과감히 쳐 없애삐리야 된다는 겁니더. 아니 으띃게 17년 동안 아무도 세자께서 죄가 없다는 걸 말 안 합니꺼? 전하께서도 와 그런 놈들을 뿌리 뽑지 않으신 겁니꺼? 전하께서 처음 등극하실 때 흉악한 놈들 다 쓸어버린 그는 진짜 최고였는데예, 아름답기는 한데 잘 된 것 같지는 않습니더."

"전하께서 선세자의 역적을 다스리는 그는 천지가 다 허락한 그고 신명도 (합쳐서 천지신명) 살펴보실 낍니더. 마땅히 그 죄를 밝히가 죽이삐리야 의리가 세상에 밝히질 수 있는 거 아이겠습니꺼?"

"(뒤에 긴 얘기들은 생략하고) 지들이 또 이라믄 그 놈들이 지들을 역적으로 몰 겁니더. 그래도 각오하고 있심더. 이게 이루어진다믄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심더."

간단히 줄이면 이렇습니다. 이 때 정조는 상소를 올린 우두머리, 이우에게 이 상소문을 직접 읽으라고 했고,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상이 억제하느라 목이 메어 소리를 내지 못하여 말을 하려다가 말하지 못하였다. 이처럼 여러 차례 되풀이 하다가 한참 후에 이르기를"

"다만 정신이 혼미하여 다 말하기는 어려우니, 그 대략만을 말하겠다. 내가 애통함을 머금고 참아온 지가 이미 30년이 지났고 왕위에 올라 예를 거행한 지도 또한 20년에 가깝다. 허다한 세월에 어느 날인들 근심을 품지 않은 날이 있었겠는가마는, 이미 감히 의리로 명백히 말하지도 못했고 또한 능히 형벌을 통쾌히 실시하지도 못했다. 평일에 독서한 것이 학력에 바탕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일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몸소 실천하고 마음으로 체득한 이치가 조금 있다고 여겨진다. 40년 동안 강구한 것은 바로 이 의리이니, 가령 순임금과 주공이 이 처지에 놓였다면 어떤 투철한 견해가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나의 식견으로서는 평소 강론하여 결정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조도 나름 길게 대답을 하는데, 그 내용은 영남을 믿는다, 지들 말 다 맞다, 그 역적들에 대한 처분 역시 계속 고심하고 있었다, 지금은 이런저런 면에서 이게 한계인 것 같다, 이런 식이었습니다. 그 거대한 규모를 생각하면 뭔가 애매했죠.

퇴계 이황의 후예, 남인은 이렇게 노론에 대해 총반격을 개시합니다. 그들이 내건 것은 사도세자 추숭이었죠. 그 배후, 아니 선봉에는 채제공이 있었습니다.

+) 뭐 사실 영남만인소라 하면 유명한 건 고종 대의 사건이겠죠.

2. 남인은 수면 위로
선조 때의 류성룡을 생각해보면, 그 이후 남인은 정말 보잘 것 없었습니다. 퇴계 이황의 후예로 싸움을 싫어하는 편이었고, 때문에 갈등은 주로 서인과 북인이었죠. 광해군 때 북인이 집권했을 때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했을 때도 그들은 만년 야당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현종이 서인을 견제하기 위해 남인을 끌어들였지만, 숙종 때 살짝 정권을 잡은 후 환국으로 밀려납니다. 이후 그들은 소론, 특히 준론과 함께하면서 많은 역모를 일으켰죠.

영조의 탕평은 남인 역시 포함됐습니다. 하지만 세력이 워낙 적어서 제대로 눈에 뜨이지 않았죠. 거기다 이인좌의 난으로 경상도가 반역향으로 찍히게 되었습니다. 이 때 평 영남 비. 영남을 평정한 걸 기념해서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 기분은 어땠을까요. 세력은 더욱 위축될 수 밖에요. 그런 상황에서도 영조는 꿋꿋하게 탕평을 지켜냈었고, 남인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영조가 끌어올린 남인 중에 채제공이 있었죠. 영조 때부터 세손 교육 등에 참가하고, 정조에 이르러서도 신임은 계속되었습니다. 실무 쪽으로도 대단한 수완을 보여 줬죠. 정조는 노론의 온갖 공격에 그를 지켜주며 남인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남인을 키우려면 남인의 근거지인 영남을 살려야죠.

"지난 무신년에 역적 정희량이 영남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영남 인사들은 죽고 싶도록 부끄러워하고 분해하면서 편지로 서로 깨우치고 격문으로 고하여 집집마다 창의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년 봄 그런 사람들을 찾던 때에 전부가 누락되었으니 억울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책자로 안동 등 13고을의 창의한 사적을 하나하나 서술해서 아룁니다" (12년 11월 8일)

경상도 유생 이진동 등이 올린 상소입니다. 영남이 모두 반란을 일으킨 게 아니라 의병을 일으킨 쪽도 많다는 거죠. 뭐 이 중에서 안동은 영조도 인정한, 역적에 포섭되지 않은 곳이긴 했습니다. 조정에서 인정받는 명문가 안동 김씨가 있는 곳인데요 뭐.

+) 이 경우 역시 마찬가집니다. 안동 김씨 세도라 하지만 모두 서울에 사는 이른바 장동 김씨였습니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의 근거지였죠.

정조는 이에 대해 "영남은 사부의 고장, 사림의 근본이라 하면서 채제공에게 영남인들을 천거하라고 합니다. 채제공 역시 영남의 충성심을 강조하죠. 이 이후의 과정이 참 재밌습니다.

일단 노론, 특히 벽파는 이들을 경계합니다. 형조 판서 윤시동은 여전히 무신년 이인좌의 잔당들이 남아 있다고 하지만 채제공은 "남인은 청남과 탁남으로 나뉘었다"면서 나라에 반역한 이들과 충성한 이들은 다르다는 걸 강조하죠. 정조는 확실히 채제공의 편을 들어 윤시동을 유배 보냅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다가 정조 16년에 일이 터진 거죠. 만인소의 첫머리에 나온 유성한의 상소입니다. 뭐 내용은 공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 되는 부분은 이런 거였죠.

"이는 혹 별다른 은미한 뜻이 있어서 그러한 것입니까? 신이 비록 그 연유를 상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또한 꼭 그렇지만은 않은 점이 있을 듯합니다."
"신이 또 삼가 항간에 전하는 말을 듣건대 ‘광대가 대가 앞에 외람되게 접근하고 여악(기생?)이 난잡하게 금원(금지된 곳)에 들어간다.’ 하니, 이는 비록 사소한 절목이지만 또한 성상의 큰 덕에 누가 될 염려가 없지 않으니, 이런 것들도 또한 등한시할 수 없습니다."

아닌 척 하지만 다른 뜻이 있는 거 아니냐는 거였죠.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공부 안 한다면서 뭐라 한 상대는 조선 왕조에서 둘째라면 서러울 (문제는 결코 둘째로 놓을 수 없는 세종대왕) 천재요 노력가였던 정조였습니다. 대간은 물론 대신들도 들고 일어나서 그를 처벌해야 된다고 했죠. 정조의 대답은 조선 왕들의 전통, 안 된다였습니다. 당~연히 신하들은 더 큰 처벌을 요구해 가죠. 여기서 더 나아가서 "그는 졸개일 뿐이니 그 배후를 찾아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 배후로 거론된 이는 윤구종이었습니다. 정조는 "그런 소문을 믿냐? 근데 계속 말하니 어쩔 수 없네. 조사해 봐라"고 하죠. 당시 윤구종이 입은 죄는 "다들 유성한을 욕 할 때 혼자 미친 척, 아픈 척 하며 숨었다"는 것과 이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일찍이 동릉의 별검이 되었을 때에 매번 혜릉을 지나갈 적마다 말에서 내리지 않자, 능졸이 규례를 근거하여 고하니 그는 문득 말하기를, 「이 능에서도 또한 말에서 내려야 하는가?」 하였다 합니다. 그 말을 전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므로 신이 일찍이 통분해하였으니, 이도 또한 미친병에서 나와 그런 것입니까?"

혜릉은 경종의 비 단의 왕후의 능, 나름 뜬금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쨌든 국문당한 윤구종. 이런 저런 변명을 대면서 "마을 사람들도 다 아니까 대질시켜 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정조가 주목한 건 혜릉을 무시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성한과의 관계는 이미 사소한 거라고 했죠. 그리고, 결국 그는 정조가 원한 답을 토해 냅니다.

"의릉(이 쪽은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의 무덤)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흉악한 말인가. 이게 무슨 흉악한 말인가.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역적이 있단 말인가. 더없이 존엄한 곳에 대해 함부로 말하고, 심지어 임금을 욕하는 말까지 하였으니, 이 흉악한 말을 들음에 내 마음의 분함이 어떠하겠는가"

정조는 이렇게 흥분하며 친국하겠다는 결정까지 내립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채제공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립니다.

"대저 경종은 4년간 왕위에 올랐던 임금이고, 선세자는 14년간 정사를 보던 왕세자였습니다. 우리 동방에 사는 사람의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누가 경종의 조정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았겠으며 낮은 사람이나 높은 사람을 막론하고 누가 선세자 앞에서 절 하고 섬기지 않았겠습니까"

"그리하여 경종에 있어서는 윤구종과 같은 극악한 역적이 감히 신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말을 멋대로 하였고, 선세자에 있어서는 유성한과 같은 흉악한 역적이 목이 메이는 것으로 인하여 식사를 폐지할 수 없다는 등의 말로 은근히 위를 핍박하였습니다."

"경종에게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자가 어찌 선대왕(영조)에게 충성할 리가 있겠으며, 선세자를 무함하는 자가 어찌 우리 전하를 사랑하고 받들 리가 있겠습니까."

... 정말 묘한 논리였습니다. 자, 여기서 하필 죄로 지목된 게 영조에게 불충이 아닌 경종에게 불충이었다는 것을 잘 기억해 둡시다. 이지영은 여기서 더 나아가서 이런 저런 자들이 죄를 지었지만 아직 그 남은 자들이 있으니 마저 처벌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구는 뭘 했고 누구는 뭘 했으며 누구는 뭘 했다고 아주 자세하게 적고 있죠. 이전 편에 다룬 오회연교를 아주 빼다 박았습니다.

이렇게 어떻게 보면 뜬금 없이 사도세자 얘기가 튀어나왔습니다. 애초에 유성한이 딴 소리 한 걸 꼬투리 잡아서 이렇게 한 것이거나, 유성한이 강경파라서 툭 튀어나왔다가 제대로 걸린 거겠죠. 이런 상황에서 튀어나온 것이 바로 영남 만인소였습니다. 소론이었던 이병모, 서유린도 여기에 거듭니다. 여기에 힘 입어 2차 만인소가 올라옵니다. 이번엔 더 늘어나서 1만 3백 68명이었습니다. 분위기가 달아오를대로 오른 상황, 정조는 마지막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비록 불초하고 무식하지만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조상을 존경하는 마음은 안다. 그런데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채 30년간 원통함을 삼키며 살았다. 생각해 보라. 내가 등극한 후 모년의 의리(역시 시도세자 문제 맞는 듯)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분명히 말 하지 못 했고,  그들을 죽인 것도 다른 일 때문이었으며, 그들을 성토한 것도 다른 조항에 의거해서였다. 화가 났지만 말을 하지 않고 말 하고자 했지만 자세히 하지 않은 것은 원한을 잊어서 그랬겠는가? 아니다. 영조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는 할 만큼 했으니 여기서 니가 더하지 않아야 효도하는 손자도 되고 효도하는 아들도 된다고 했다. 나는 이 말에 따르기 위해 참고 있는 것이다."

"모년의 큰 의리는 절대 말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내 본심이 이러니 처분에 미진함이 있더라도 더 이상 언급하지 마라. 나 역시 생각이 있는 것이니 어찌 편히 앉아만 있는 것이겠는가."

에... 너무 쉽게 줄여지네요. 정말 구구절절 많지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사도세자는 억울했고, 지금까지 처벌한 역적들은 사실 사도세자를 죽인 이들이라는 것. 하지만 일부러 다른 죄로 벌 했는데, 영조가 죽으면서 절대 그에 대해 말하지 못 하게 했기 때문. 그 모년의 의리는 정말 중요한 것이고 절대적으로 지켜야 된다는 것. 하지만 이들을 언젠가는 벌하겠다는 것. 그리고... 내 본심은 이런 것이니 더 이상 말을 꺼내지 말라는 것이었죠. 지금 이렇게 말 하는 건 영남에서 만 명이나 와서 말해서 특별히 대답한 것일 뿐이라는 거였습니다.

저 중에서 [할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손자이자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아들] 이 부분을 잘 기억해 둡시다. 솔직히 말도 안 되는 겁니다. 사도세자에게 죄가 없다고 하면 할아버지에게 불효고 죄가 있다고 하면 아버지에게 불효니까요.

정조의 말에서 계속 볼 수밖에 없는 모순, 결국 그 원인을 찾자면 저것이겠죠. 어차피 미친 아빠, 신원하는 것 따위 무시하면 편했을 겁니다. 반면 반대하는 세력 숙청하고 시파와 남인만 중용하면 정말 쉬웠겠죠. 정조 즉위 이후의 모습을 보면 세력이 크다고 겁 먹은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과감하게 자기의 적들을 잘라 냈죠. 결국 벽파는 정조의 정적이 아니라 정조의 보호 아래 커 온 것입니다.

결론 스포일러 그만하고 그 이후를 보겠습니다. 사도세자가 죽은 지 30년이 되던 해, 나라를 들썩였던 남인의 반격은 이걸로 일단락 되었습니다.

3. 채제공
이 때 채제공 등은 더 이상 이 말을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이후 채제공은 벽파의 집중 공세를 받았고, 그 역시 여러 차례 사직을 청했지만 정조는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를 수원 화성을 짓는 책임자로 삼죠. 그러다 17년 5월 25일, 그를 영의정에 제수합니다. 무언가 말을 들은 걸까요. 아니면 알아서 안 걸까요. 사흘 후, 그는 상소를 올립니다.

"신은 나라를 위해 죽기를 원하는 사람이기에 죽음이 가까워진 이때에 차마 평소의 회포를 속에만 두고 다시 말하지 않아서 끝내 천고에 눈을 감지 못하는 귀신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에 감히 두려운 마음을 잊고서 그에 대한 말씀을 모두 아뢰려고 하니, 전하께서는 측은한 생각으로 굽어 살펴주소서."
"대체로 나라가 나라꼴이 될 수 있는 바탕은 오직 의리뿐입니다. 의리가 행해지면 그 나라는 다스려지고 의리가 행해지지 않으면 그 나라는 어지러워집니다."

"신이 기유년 현륭원(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길 즈음에 우리 성상께서 입으신 소매자락에 흐른 눈물이 피로 변하여 점점이 붉게 물든 것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일찍이 옛 글에서 혈루(피눈물))라는 두 글자가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것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었는데 부득이하게 군부의 소매자락에서 직접 그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아 하늘이여, 이것이 무슨 까닭입니까. 신은 전하께서 제왕의 효성으로 몸소 증자·민자와 같은 효도를 행하시는 것은 본디 알지만, 진실로 원통함이 하늘에 사무치고 맺힌 한을 펴지 못한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눈에서 흘러 내리는 눈물이 어떻게 참으로 피를 이루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가슴 속에 가라앉히고 또 가라앉히고 억제하고 또 억제하여 의리가 크게 천명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단지 혹시라도 선대왕의 훌륭한 덕에 털끝 만큼이라도 관계됨이 있을까 염려하신 때문입니다. 신이 어리석어 죽을 죄를 짓사오나, 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길 때 피눈물을 흘리신 것은 그 효성과 원한을 뜻 하는 것입니다.] (이후 요약하겠습니다.)

[전하께서 참고 계시는 걸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굳게 결심한 것이 있으니, 사도세자의 무함이 깨끗이 씻겨지고 그 처벌이 확싨히 시행되는 것입니다.

[다른 자들은 신을 미쳤다 했지만 신은 사직에 대한 충성과 의리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에게 새로 제수한 수상직을 체직하시어 하찮은 신의를 온전히 지키도록 해주시고, 이어 신의 말을 채택하여 의리가 크게 밝혀지도록 하신다면 비록 죽는 날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해와 같을 것입니다]

사도세자의 신원. 아니면 나를 내쫓아달라. 마지막 승부수였습니다. 이 때 사관이 벽파였는지 그를 신나게 까고 있습니다. 정조 즉위 초에도 추숭을 주장해서 죽을 뻔 하다가 홍국영 덕에 겨우 살아났는데 또 저런다는 거였죠. 정조 역시 화를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날부터 좌의정이었던 김종수는 하루가 멀다 하고 채제공을 비난합니다.

"신은 저 자와 같은 하늘과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 있을 수 없습니다.

정조는 채제공이 늙어서 그런 거라며 최대한 그를 변호합니다. 한편 채제공 역시 밖에 엎드려서 이렇게 말 했죠.

"신의 죽을 죄는 신이 스스로 압니다. 죽음이 있을 뿐인데 다시 무슨 말로 우러러 대답하겠습니까"

이 소동은 결국 둘 다 파직되는 걸로 끝이 납니다. 하지만 두 달 후, 정조는 마침내 본심을 밝힙니다.

"가령 전 영상이 국가를 위하여 한 번 죽기로 작정하고 미덕을 천양하려는 애타는 마음과 피끓는 정성에서 한 말이라 하더라도 내가 감히 말하지 못하는 것을 전 영상이 감히 말하였으니 그 겉면만을 얼핏 본다면 그의 죄는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좌상(김종수)가 말한 것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전 영상이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였다."

"전 영상이 도승지로 있을 때 영조께서 사관을 물리친 다음 도승지만을 앞으로 나오도록 하여 어서 한 통을 주면서 신위의 아래에 있는 요 자리 속에 간수하도록 하였었다. 전 영상의 상소 가운데 즉 자 아래의 한 구절은 바로 금등(금띠) 가운데의 말인 것이다."

이렇게 금띠는 세상에 나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는 것. 그것을 [다른 사람은 모르게] 채제공에게 전해서 정성왕후의 신위에 감추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리죠.

"지금 물러가기를 청하는 상소에서 죽음에 임박하여 이런 진실을 말한 것은 전 영상만이 이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 혼자서 그 일을 말한 것이니, 이는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의 발로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한편 김종수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 합니다.
"전 좌상은 이런 본 내막을 모르기 때문에 단지 그 표면에 나타난 것만을 의거하여 지난 여름 이후로는 감히 말하지 못할 의리로써 성토한 것이니 이 또한 속에서 우러나온 충성과 의리에서 발로된 것이다"

절묘한 한 수였죠. 이를 통해 사도세자를 신원하는 것 역시 영조의 뜻이 되었습니다. 신원을 주장한 채제공도, 그걸 비난한 김종수도 죄가 없다는 것이죠. 이후 뜬금없이 사도세자의 존호가 올라갑니다. 혜경궁 등이 오래 살면서 그거에 대한 기념이라느니 하면서 정조까지 다 같이 받는 분위기였긴 했지만요. 이걸 주관한 사람 역시 채제공이었습니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얘기를 함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느껴지는 건 정조 때 사도세자 추숭이 아예 안 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아닙니다. 정조 초부터 세자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은 기본적인 인식이었습니다. 즉위년에 이미 장헌세자로 한 단계 높아졌고 경모궁으로 나라에서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벽파에서 홍봉한 등을 공격한 이유도 세자를 죽이려 했다는 거였죠. 여기까지는 벽파도 인정한 단계였습니다.

정조는 여기서 더 나아가려 했습니다. 추숭이라는 단계로요. 이걸 주도한 것이 채제공입니다. 하지만 죄인이 단 한 대만에 죄가 없어지는 것은 곧 영조에게 불충한 거였죠. 정조는 이걸 원치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죄를 없애고 싶습니다. 자기가 직접 말할 수 없었죠. 결국 필요한 건 이걸 끊임 없이 강조한 후 다음 대로 넘기는 것입니다.

이후 채제공에 대해서 큰 논란은 보이지 않습니다. 정조의 방침이 확실해졌고, 더 이상 그가 모험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죠. 이 시기에 이르러서는 벽파의 김종수, 심환지는 물론 순조 대의 정순왕후도 세자를 말할 때는 보통 왕족에게 하듯 찬양을 많이 합니다. 수원 화성은 완공되었고, 세자의 묘 역시 그 근처로 옮겨졌습니다.

의리와 효성, 유교적 정신에 따라 함께 가야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아들이 아버지에게 죄를 지었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상황, 그런 상황에서 손자는 그 둘을 함께 갈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함께 떠 안고 가려 했습니다.



4. 의리와 효성
정조 1년, 홍계흐의 아들 홍술해의 처(-_-;) 효임과 아들 홍상범에 의한 역모가 일어납니다. 이 때는 홍계희가 축출되고 그 아들 홍술해도 유배당한 상황이었죠. 바로 홍국영을 제거하려다 그들이 제거된 거였습니다. 당연히 이 때 추대되려 했던 왕족들은 죄가 있든 없든 죽을 위기에 처했죠. 그 중에 사도세자의 서자 이찬이 죽습니다. 정조 9년의 역모에는 이인이 표적으로 잡히죠. 사도세자가 양제에게서 얻은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양제 이야기는 다음 과거 편에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때 정조의 모습이 참 묘합니다. 그는 이인을 죽이라는 주장에 단식으로 맞섰고, 결국 유배로 결정냅니다. 다음에는 제주도였던 유배지를 강화도로 옮겨버리죠. 단식까지 하며 자신의 입장을 고수해서 신하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정조는 13년부터 이인을 만나러 가기 시작했습니다. 역적을 만나는 것, 당연히 신하들은 반대했고 그 중심엔 정순왕후가 있었죠. 혜경궁 홍씨는 홍씨 가문이 하나씩 당할 때마다 단식을 하는 등 자기 가문을 위해 싸웠습니다. 반면 정순왕후는 김귀주가 몰락하는 상황에서도 꾹 참고 있었죠. 그런 상황에서 그녀가 일어난 겁니다.

아예 궁 밖으로 나가서 살겠다는 정순왕후, 정조는 결국 정조는 물러나야 했습니다. 이 때 둘의 말을 비교해보죠.

"내가 그를 보호하지 못하면 장차 어떤 사람이 되겠으며, 또한 무슨 낯으로 신민을 대하겠는가" 정조
"이 일은 국가와 종사를 위한 것인데도 주상께서 이러하시니, 나는 사제로 물러가 살겠다" 정순왕후

정조가 내세운 것은 우애, 곧 효성과 연결되는 유교의 근본 윤리입니다. 반면 정순왕후가 내세운 것은 국가와 사직을 위한 의리, 역시 유교의 근본입니다.

+) 결국 벽파와 정순왕후가 그렇게 쉽게 정권을 장악한 건 그들이 정조로서도 부정할 수 없었던 명분 때문이었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정조가 그 명분을 철저히 지키면서 세자를 추숭한다는 어려운 길을 갔기 때문이겠죠.

결국 정조는 돌아왔지만, 해마다 신하와 정순왕후의 눈을 피해 이인을 만났습니다. 19년에 이르러서는 정순왕후도 포기할 정도였죠.

어쨌든 동생이니 이인에 대한 우애야 없겠습니까만, 그가 진정 이인을 위한다면 그를 그대로 놔두는 게 나았습니다. 계속 역적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게 그 자신의 목숨에 좋지 않죠. 하지만 정조는 몇 번이고 그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가 강조하려던 건 우애, 아니 좀 더 노골적으로 "사도세자의 아들간의 우애"였죠.

+) 아무리 우애가 깊다 한들 역적으로 규정된 왕족에게 왕조 국가는 자비심이 없습니다. 결국 정순왕후가 수렴 청정할 때 그는 죽게 됩니다. 정조 때문이라고 하긴 좀 그렇죠. 정조의 계획대로라면 그 후에도 계속 그의 죽음을 돌봐 주었을 테니까요. 순조의 친정 후에 이인의 자식들까지 죽이라는 청이 벽파도 아닌 시파들에게서 나오는데 순조는 듣지 않습니다. 이를 보면 이인의 문제는 벽파나 정순왕후가 특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조선시대에 당연한 거였고, 반대로 순조는 의지만 있었다면 정조의 뜻을 그대로 계승할 수 있었습니다. 뭐... -_-; 아예 나중에 모두 정리한 편을 쓰는 게 낫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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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시BB
11/09/24 20:51
수정 아이콘
5. 수원으로
정조가 보여 준 모습은 당연히 이인에 대해서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매년 경모궁, 세자의 무덤에 갈 때마다 오열했고, 실신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실신하는 모습이 나온 게 채제공 문제가 거론된 다음해인 18년이었다는 게 참 재밌죠. 이 때 정조가 슬퍼하다가 실신하자 신하들이 서로 업으려고 했고, 김종수는 이 모습에 대해 비판하다가 탄핵당하기까지 합니다.

정조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장용영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장용영을 설치한 것은 궁궐의 호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이다"

수원 화성이 무엇을 위한 거였는지는 말이 많습니다. 개혁 정치를 위한 첫 발걸음, 하지만 그걸 위해서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거중기 등 새로운 기술을 썼다는 거는 임진왜란 이후 조총을 들인 거와 다름 없습니다. 괜찮을 것 같으니까 쓴 거죠. 수원으로 천도?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고 그럴 이유도 마땅치 않습니다. 백성들과의 직접 정치? 그렇게 생각하기엔 너무 크죠.

장용영은 정조 말에는 오천명에 이릅니다. 이들 병력이 임금의 뜻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정조는 "다른 뜻"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결국 수원 화성을 지은 목적은 이 "다른 뜻"을 길게 서술한 한중록에서 찾아야 될 것입니다.

"1804년은 원자(순조)의 나이 십오 세니 성인이라, 족히 왕위를 전할 만하니, 원자에게 왕위를 넘긴 후 처음 먹은 마음을 이루어,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 경모궁(사도세자) 일을 행치 못한 평생의 한을 풀 것이라. 이 일을 영조의 하교를 받아 행치 못하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나, 이 또한 의리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지만) 원자는 내 부탁을 받아 내 마음을 미루어 내 행하지 못한 것을 자기가 대신 행하는 것이 떳떳한 의리라. 오늘날 신하들은 나를 따라 [경모궁 추존을 하지 않는 것이 의리요], 후일에 신하들은 [새 임금을 좇아 경모궁 추존을 받들어 행하는 것이 의리]라."

정조의 목적은 1804년에 순조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이 되는 것, 수원 화성은 그 후에 머물 곳이었습니다. 장용영은 그걸 호위하는 병력이죠. 수원 화성에는 사도세자의 무덤이 있습니다. 의리를 지키면서도 효성도 지키는 것, 그 힘은 시간에 맡겨야 되는 것이었죠. 정조는 그 시간을 단축시키려 한 거구요.

채제공은 이후에는 별다른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김종수는 물론 심환지도 사도세자가 억울했다는 것에 토 달지 못 했구요. 이쯤 되면 단 한 걸음만 더 나가면 될 것이라 여겼을 것입니다. 사도세자 추숭이죠. 채제공이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은 건,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여겨서 그럴 것입니다. 나머지는 1804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때만 기다리는 거죠.

결국 정순왕후와 벽파가 뒤집은 건 이것입니다. 사도세자가 죄가 없는 건 안다, 하지만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 더 이상은 영조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 덤으로 사도세자를 죽인 건 김씨 가문이 아니라 홍씨 가문이다. 정조의 모든 구상과 오랜 노력이 한 방에 무너뜨린 것이지만, 이렇듯 현대의 눈으로 보면, 특히 조선 말기라는 걸 생각하면 하찮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정조의 개혁 정치에 맞추어진 구성은 이렇게 나온 것일 겁니다. 그리고 벽파가 물러난 후에도 시파와 순조는 정조의 뜻을 따라 주지 않았습니다. 사도세자 추숭은 고종 대에 가서야 이루어집니다.

뭐 그건 나중 얘기고... 채제공은 23년에 죽습니다. 묘하게도 그의 정적이었던 김종수도 그 직전에 죽죠. 채제공의 죽음에 대한 정조의 평가입니다.

"이 대신은 불세출의 인물이다. 그 품부받은 인격이 우뚝하게 기력이 있어, 무슨 일을 만나면 주저없이 바로 담당하여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았다내가 즉위한 이후로 참소가 여기저기서 빗발쳤으나 뛰어난 재능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는데, 극히 위험한 가운데서 그를 발탁하여 재상 지위에 올려 놓았었다."

이제 시간을 더 돌려보겠습니다. 심심하면 나왔던 정조 대의 역모와 그에 대한 대응, 여기서 벽파는 무엇을 했고 시파는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보겠습니다. 홍국영의 비중이 얼마나 될 지 모르겠네요.

그리고... 이를 통해 사도세자를 죽인 게 정말 누구였던 건지 파 보려고 합니다.

---------------------
내용 줄이거나 할 수가 없어서 댓글화 합니다.
11/09/24 21:31
수정 아이콘
으흐. 눈시BB님 글은 왠만하면 다 읽는데.........이것 참. 이 부분이 어렵네요.
뭔가 세력들이 얽히고 섥혀서 어디서부터 정리해 나가야하는지 감이 안 옵니다.

다시 읽어보니.....그냥 정조가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선택을 해야했네요. 아버지냐 할아버지냐. 이거 참............
연산군은 '아빠야 엄마야?'라는 인류 최대의 난제-_-에서 쿨하게 엄마를 선택했고 폭군이 된 반면,
정조는 '아빠야 할아버지야?'라는 상대적으로 쉬운 문제를 두고 더 어렵게 낑낑댄 느낌이네요.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서, 인간적으로 정조가 참 불쌍하면서도 무서운 사람이다 싶네요.
감성소년
11/09/24 22:09
수정 아이콘
눈시BB님 혹시 조선왕 독살사건이라는 책 아시나요?
이 책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왠지 가벼운 흥밋거리만 다룰 것 처럼 지은 제목과 달리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워서 다 읽게 되었습니다. 책을 읽으면 아시겠지만, 효종이나 소현세자를 비롯해서 이번 글의 주제인 정조도 나오구요 조선왕조 마지막인 고종까지 다룹니다.
중요한 것은 조선에는 유난히 독살설에 휘말린 왕이 많으며, 갑자기 급사한 왕들 모두가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는 점, 그 결정이란 것이 신하들 혹은 당시 권력들에게 반대하여 세운 결정이라는 것인데요..
저자는 조선이란 왕조가 비정상적으로 오래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런일이 발생했다고 보고 있더라구요.
왠지 눈시BB님이 읽어보시면 흥미를 가지실 것 같아 제목만 보고 먼저 선플을 달았네요.
11/09/24 22:36
수정 아이콘
쿨하게 하나를 버리기엔 정조가 너무 똑똑했던 걸까요.크...
가끔은 기회를 잡자마자 순식간에 다 죽여버린 세조가 진짜 천재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정조를 영조로 쓴 부분이 몇군데 있네요! (영남만인소에서 정조가 대답하는 부분과 2번에서 영조16년->정조 16년이죠?)
Je ne sais quoi
11/09/24 23:16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금등지사를 통해 모순되는 두 가지를 하나로 이끄는 정반합을 이끌고자 한 정조 (뭔 소린지 -_-;;). 정치의 고수가 되기 위해선 역시 플라톤 말대로 철학자가 되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영남만인소가 고종대가 더 유명한가요? 저는 편향되게 읽어서 그런지 몰라도 영남만인소하면 바로 정조가 떠오르는데 ^^;
눈시BB
11/09/25 06:13
수정 아이콘
일단 검색하면 나오는 게 고종 때라서요 ( ..);; 저도 고종 때를 먼저 알았구요
백마탄 초인
11/09/26 10:58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심환지와의 편지로 막후 정치가 알려졌다고 들었는데요..

아마도 정조는 심환지를 믿고 심환지는 정조를 잘 이해했다고 봐야겠지요..

저는 전란 이후 영,정조의 공을 인정하긴 합니다만...

결국 제대로된 개혁은 없었죠;;

그때 막장으로 가서 나라가 한번 바꼈었으면 어땠을까? 라는 쓸데없는 가정을 늘 해봅니다.

그리고 항상 좋은글에 감사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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