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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07 08:28
영광스런 첫 댓글이네요
자스에서 본 그 사람입니다 크크 어서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그런데 통상대감의 저 말도 안되는 해전이 세계에는 얼마나 알려져 있는건가요??
11/05/07 08:51
제가 제대로 알고 있는건지 모르겠지만 명량 해전 때 처음 전투 개시 후 기함 한 척으로 수십척의 적 군선을 맞받아쳤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어떤 전쟁영화를 만들고 소설을 쓰더라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 같은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상이 되지 않네요.
제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다고 가정하더라도, 저 패배의식이 가득한 몇 안되는 수군과 고작 열두척의 배를 보고 담담히 아직 나에게는 열두척의 배와 군사가 있다고 담담하게 보고하며 그 의지를 과연 따라잡을 수 있을지... 제 한 사람의 몫조차 버거워서 심신이 지쳐가는 요즘인데 충무공의 나라의 존망을 어깨에 짊어지고 사지로 향하는 그 모습이 그려지면 마음이 벅차오르면서 작고 미약한 제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11/05/07 08:57
갓이죠 갓
그냥 말그대로 갓입니다. 조선 아니 반만년 한반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갓이라고 불려도 무방함이 없는분이십니다. 이건뭐 다른 장수들은 인간계에서 싸우는데 이분은 신과 우주의 영역에서 지켜보고계시니.....
11/05/07 09:41
정말 원균은 두고두고 까여도 싸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만명의 병사와 250여척의 수군을 몰살시켜버린 주범이니 은영전에서 양웬리가 그랬죠 '우리 아군은 항상 손발을 묶어놓고 싸우게 만든단 말야' 전방의 적보다 후방의 무능한 아군이 더 무섭다는건 임진란때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고작 열두척의 배라니, 만약 이순신이 계속 삼도수군통제사의 지위에 있었다면 정유재란은 순식간에 종결됬을텐데 말이죠
11/05/07 10:17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습니다.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 아... 도대체 누가 감히 이 분을 깐단 말입니까 ㅠ.ㅠ
11/05/07 11:29
왕의 귀환.....아니 신의 재림........ 도대체 이분은 진짜 하늘의 버프라도 온몸으로 받으셨던건가....
진짜 이분........드래곤이셨던건....;;;;
11/05/07 11:34
장군이 내려오면서, 무기와 곡식을 수습하는데, 거의 방치된 상황이라 들었습니다.
창고는 문이 잠겨있고, 버려진 물품도 있었으니, 이정도면 당시 관리들의 대처하는 방식의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덕분에 이순신 장군이 가지고 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니, 조금 아이러니 합니다. 그리고 배설(이분 성함이..ㅡ.ㅡ)이 전투에 주저하는 부분은 당시 상황에 비추어보면 명확할 것 같습니다. 말도 안되는 상항으로 이순신 장군이 압송되었고, 이어지는 칠천량 전투의 대패(?)한 후, 실질적으로 병력이 와해된 상황입니다. 더군다나 격군들도 많이 줄어들었고, 여러가지 지원도 없고(하긴 이순신 장군이 보급을 준 적이 있어도 받은적은 거의 없었음), 또 다시 싸우라고 하니 누가 가려고 할까요? 아무튼 다음편 내용 기대하겠습니다.
11/05/07 11:34
명량에 가봤었는데.... 정말 저긴 천혜의 요충지입니다.
길목이 좁고 물살도 화창한 날씨였음에도 엄청 험하더군요 -_-; 현대라면모를까, 당시 노에 의존하는 배들은 저곳은 악몽이였을겁니다. 아참, 철쇄설은 거의 정설로 취급되는걸로 알고있습니다.
11/05/07 11:38
배설의 마음이 역(逆)이든 겁(怯)이든 그것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마음이 아니였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역(逆)에 무게를 조금 더 두고 싶네요. 그리고 이순신 장군님에 대한 찬양은 다음회 까지 일단 모아 두겠습니다. 흐흐
11/05/07 12:37
이미 이순신장군님은 조선과(정확히는 조선정부겠죠?;;;) 일본 양쪽과 전쟁중이셨다고 보는게 맞을것 같습니다 -_-;;;
오직 백성들을 위해 벌이는 2:1의 전쟁... 저 같아도 선조 이 XXX! 하면서 난리를 피웠을것 같은데...(그러고 전후에 역적으로 시망테크..겠죠?;;;) 탄신일때 그냥 까맣게 잊고 말았는데...언젠가 시간내서 제승당에 한번 가야할듯...^^
11/05/07 13:03
철쇄설은...
철쇄를 연결한 듯한 장치가 진도대교를 건설하기 전에도 있었다고하죠. 철쇄와 육지를 연결하는 장치가 육지에 있었고, 그것은 진도대교를 건설하면서 철거했다고 하더군요. 뭐.. 그 장치를 찍은 사진이 존재하기는 합니다. 현재도 그 장치가 있다면 탄소연대 측정등을 통해서 언제 만들어진건지 조사한다던가... 그러겠지만 그러지는 못하고, 다만 그곳에서 살고있는 주민들에게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철쇄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추측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워낙 명량해전 자체가 말이 안되는 일어날 수 없는 해전이기에 이런 '설'이 나오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거기에 불멸의 이순신이 철쇄설에 단단히 한몫했죠. 또 강강수월래의 유래가 또 한몫했구요. 그리고, 제 부모님 고향이 진도입니다. 때문에 저... 울돌목을 아주 잘 아시죠. 부모님이 고향에 살고 계실 무렵 배를 타고 많이 다녔는데... 저 울돌목을 자주 지나다니셨는데 저 울돌목의 위력을 지금도 혀를 내두르십니다. '모터' 를 이용한 동력선도 저곳을 통과하기가 굉장히 힘이 들다고 합니다. 썰물때와 밀물때 각각 그 흐름을 거슬러 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4~500년전 인간의 힘으로만 그 흐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이죠.
11/05/07 13:40
제발 이 다음편 빨리 해주세요..
저 숨넘어가서 꼴까닥 하면 글쓴이 책임입니다..^^ 정말 제가 가장 좋아하는 위인인...이순신장군님.. 군인 으로써 이보다 더한 인물상을 과연 세계사에서 찾아 볼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진짜 읽다보면 이거 소설 아냐? 하는 생각마저도 들게 한다는.. 정말 말그대로 이순 신 입니다...신...이름도 신이네요. 그러니 빨리 다음편 연재해주세요..제발...!!
11/05/07 13:57
今臣戰船尙有十二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戰船雖寡 微臣不死則不敢侮我矣
아 정말 대단합니다. 저 장계가 쓰여질 당시엔 조선수군도, 본인의 몸도 최악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인데 저런 자신감을 보여주는것도 그렇지만 저 말을 지켜냇다는게 정말 대단합니다.
11/05/07 14:10
드디어 시작이군요.
오히려 기적같은 명량해전보다, 그 명량해전을 앞두고 있었던 이순신 장군의 의연한 태도가 더욱 가치롭게 느껴집니다. 막상 싸움은 '에라 모르겠다' 라고 할 수 있다지만, 누가 나보고 죽을 자리로 걸어 들어가라고 하면, 그리고 혈육같은 부하들을 그 사지로 함께 끌고 들어가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군님은 그럼에도 한 마디로 대답하셨군요. "내가 살아 있는 한, 우리를 우습게 보지 못할 것이다."
11/05/07 14:24
명랑해전 철쇄설, 현재 논문 확인중.
'시뮬레이션을 이용한 역사적 전투사례의 승패요인 분석: 임진왜란시 명랑해전 사례 연구'(저자 조성진(국방대학교 운용분석), 2010년 3월자) -> 철쇄의 유무와는 결과가 크게 차이나지 않음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인. 따라서 무의미함. '명랑해전의 경과와 주요 쟁점 고찰'(저자 이민웅(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2002년) -> '이순신이 함대를 인수한 후 명량해전 전까지 철쇄를 가설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사료된다' '명량해전 연구'(저자 조성도(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 1982년) -> 한자가 많아 알아보긴 힘들지만 전투 경과 설명에 철쇄의 존재 없음. 현재로썬 학계의 대세는 '철쇄가 없었다' 라고밖엔 볼 수 없는 결과인데요. 이거. 여타 주제에 비해 국회도서관이라던가 하는데로 완전히 넘어간 게 많아 제휴사이트 활용으로 찾는데 의외로 어려움을 겪고 있긴 합니다만, 위의 논문들에서 철쇄설에 대해 다루는 건 별로 주목할 거 없는 가설 정도고 이를 가볍게 반박하는 걸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한국학술정보를 뒤져봐야겠지만 제휴사이트도 아니다보니 이게 또 상당히 돈이 들어가는 짓이라...(최소 3만원 결제?!) 하나 더 추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亂中日記)》,《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에 나타난 Combat Sports -MechiKoff & Estes(1998)의 이론에 근거를 토대로-' (저자 김산(한국체육대학교), 안진규(충남대학교), 박용범(중앙대학교), 2011년) -> 명량해전에 대해서 명량해협을 이용한 이순신의 전략 및 전술의 승리라고 평하고 있음. 마찬가지로 철쇄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존재하지 않음. 하나 더 추가. '정유재란기 명량해전의 주요쟁점과 승리요인 재검토' (저자 제장명(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8년) -> '수중철쇄를 설치하여 일본군선들을 걸어 넘어뜨렸다고 하는 전투 방법에 대해서도 이는 설화이지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는 점에 필자도 동의하면서...',
11/05/07 14:39
철쇄설은 개인적으로 말도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단순 계산으로 한척당 1톤씩만 잡아도 300톤이 넘는 배들이 밀고 오는 것을 감당할정도로 단단한 철쇄를 만드는 기술이 조선시대에 있었을까요??? 거기다 물살이 거세 배들이 달려오는 속도까지 계산하면 1m 이상의 철판을 세워 놓지 않는 이상 힘들어 보이는데요.... 거기다 판옥선과 세부키네의 흘수의 차이까지 계산해서 철쇄를 330m가 넘는 해협에 정확하게 설치할 시간도 없어 보이구요. 철쇄설이 나온 기록은 택리지와 행장록뿐인데 행장록의 경우엔 김억추가 검기를 날렸다는둥의 내용이 담겨져 있어서 ;;;
11/05/07 14:56
마실 님// 모모리 님// 나이트해머 님// 키스도사 님//
왠지 문맥상 "전설"의 오타가 아닐까 싶은데요 (...) 아니면 울돌목 현지의 얘기를 하신 거니 현지에서 그렇게 취급되고 있다라든가요. 나이트해머님은 좀 진정하셨으면 합니다. 논쟁 불 붙은 상태라면 몰라도 이런 상황에서 너무 과격하십니다
11/05/07 16:56
음? 수많은 댓글이 있군요. 제가 정설이라고 한건
일단, 역사스페셜과 그곳 명량 기념관에 가면 실제로 철쇄설을 대문짝하게 (.....) 붙어있으며, 그때 철쇠를 걸었다는, 배들을 물살에 떠네려가지 않게 쇠사슬을 묶었었다는 기둥이 세워져 있었기 떄문입니다. 같이 가신 교수님의 말에 따르면, 만약 철쇄설이 사실이라면, 그때 사용한 사슬은 그 지역에서 배들이 물살에 떠네려가지 않게 묶어둔 사슬들을 이어서 만들었을 것이며, 조선과 일본 선박의 구조를 봤을때 저지가 가능하다면, 혹은 버티다 끊어져도 어느정도의 선두 저지효과만 있더라도 격파된 선두의 배들이 일종의 바리게이트역활을 해줄것이기 때문에 효과가 있을것이다. 라고 하셔서 정설로 동의되고 있는줄 알았죠 (...) 생각해보니 저도, 그 교수님도 전공이 그쪽이 아니군요.
11/05/07 17:20
저도 개인적으로는 철쇄론을 믿지 못합니다.
그런 정황상 철쇄를 운용할 여유가 전혀 없을뿐더러, 이순신 장군의 기록에도(난중일기) 그 부분에 대한 훈련에 대한 기록도 없습니다. (비상시국에 밑의 지휘관에게 철쇄와 같은 중요한 상황을 빠뜨릴수 없으니까요) 거기다가 철쇄를 운용할 인력이 있으면 바로 격군이나 수군으로 편입시켰을것입니다.(격군의 수가 대푹 감소) 워낙에 극적인 승리인데, 이것을 설명하려고 하니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다보니 그런것 같습니다. 택리지인가? 아무튼 거기에 울돌목 근처에 철쇄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부분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지역간 왔다갔다 하기위해 설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지난번에 방영한 불멸의 이순신은 참 불편했습니다. 백병전 / 강강수월래 / 철쇄 삼종 세트가 나오더군요. 그덕분에 저렇게 믿는 사람들도 많구요.(백병전은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11/05/07 17:38
그리고 나이트헤머님 말대로 현 사학계는 전쟁경과와 같은 지엽적인 것은 전혀 관심이 없죠.
아직 아날학파의 초기 역사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까요? 임진왜란 역시 사회구조적 관점으로 접근합니다. 왜냐하면, 기록이 없기때문이죠 -_- 더 정확히 말하면 신뢰되는 증거가 별로 없다고나 할까요? 역사에서 학설은 사료의 교차검증과 그 학설을 뒷받침해줘야할 정황, 유물등의 물적증거등이 뒷받침 되어야 하지만 미시적인것, 특히 전쟁과 같은것은 승자와 패자의 기록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교차검증도 힘들뿐더러, 파괴적 행위기 때문에 물적증거도 남기 힘듭니다. 남은것은 정황상 증거밖에 없는데, 이 정황상 증거는 모더니즘으로 대표되는 역사학에서는 우선순위에서 한참 밀려나 있는 증거이기도 하죠. '난중일기'를 예로 들면, 사료적 가치가 있긴 하지만 이 자체가 사실이라고는 말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순신이 아무리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해도 글쓴이의 관점은 그 글에 무조건적으로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신뢰하긴 하지만, 교차검증이 안되는 부분은 설득력이 떨어지죠. 그런데 교차검증을 할수도 없는게 당시에 남아있는 쇄미록, 난중잡록 등등의 수많은 기록은 서로 다른부분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다만 난중일기가 그 두자료보다 더 설득력있는건 당시 실제로 그자리에서 지휘했던 이순신의 서술이라는 점 떄문이기는 하지요. 하지만 진짜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서술했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카이사르나 투키디데스의 서술을 그대로 믿는 사람이 없듯이요.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역사학은 저 한계를 뛰어넘으려 하지만... 애초에 네러티브에 반해서 등장한것이 모더니즘인데 이 모더니즘을 극복하기 위해 다시 내러티브로 돌아간다? 안타깝지만 이 모순된점을 해결하지는 못하죠. 오죽하면 포스트모더니즘 역사가들은 주장만 할뿐 반론을 하지 못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겠습니까. 써보니 글과는 전혀 관계가 없군요; 어쨋든, 개인적으로는 눈시bb님이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저 사료들을 일일히 다 보고 정리하셔야할텐데 -_- 쉬운작업이 아니죠. 저만해도 여러 주제로 글을 써보려고 몇번이나 생각했는데 포기했는데 말이죠;
11/05/07 20:19
참... 선조가 신하들 견제하고 경쟁시키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거야 이해되지만(그걸로 선조 업적을 쳐 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솔직히 원균 옹호론보다 좀 더 낫다뿐이다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강화하고 싶었다는 왕권 물려줄 때는 왜 그리 개차반으로...), 믿을 만한 신하들조차 너무 견제했던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인드라면 왜 원균은 내치지 않은 건지... 물론 이순신을 키워 준 것도 선조였겠지만 죽인 것도 선조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11/05/07 20:24
문득 생각났는데, 김훈이 쓴 '칼의 노래'에서는 배설이 육지에 남겠다고 한 뒤, 무단으로 탈영해 목포 방면으로 도망간 것으로 서술해 놓았더군요. 그 전에는 적절히 이순신에게 소인배같은 변명을 했던 것으로 묘사... 이순신은 권율에게 배설을 죽여야 한다고 말을 했다고 서술해놓았는데 이건 추후 권율이 배설을 벤 것과 관련해서 추리한 것인지, 관련 서신이 실제로 있어서 그리 서술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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