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에 살았던 호족들 분포입니다. -_-; 나름 중요도 있는 사람들만 말해도 이정도네요.
http://blog.naver.com/gil092003
이번 편 역시 자세한 건 길공구님의 강주 호족 이야기로... 아무래도 이런 쪽으로 접근한 건 길공구님밖에 못 봐서 계속 참조하게 되네요.
1. 일리천 전투
1) 당시의 전투 방식
왕건은 건국 직후 6위를 창설하면서 중앙군 4만을 보유했다고 합니다. 936년까지는 4만 4천명까지 확대되었다고 하네요. 실제 일리천 전투에서 정규군과 호족군이 명확하게 구분되는데 그 수는 왕건 친위대 포함 4만 3천명입니다. 견훤도 그 정도의 병력이 있었다고 추측하죠. 중요한 부분마다 진을 만들거나 자기 세력에 흡수된 성에 중앙군 일부를 배치했을 겁니다. 청주가 불안해지자 유검필과 홍유를 보내 청주 근처에 만들었다는 진, 조물성 전투 전 유검필이 공격한 연산진, 고창 전투 당시 유검필이 구해야 된다고 한 고려군 삼천명, 왕건이 서라벌로 가면서 그 인근에 배치했고 유검필이 구원했다는 진들까지... (죄다 유검필 -_-;)
견훤이 합덕 방죽에 만이천을 주둔시켰다는 말이 있듯 각 전선 요충지마다 일만씩을 배치했다고 추정하면, 고려의 경우 웅주에 만 명, 상주 북부에 만에서 이만, 북부 국경에 만 정도 배치하지 않았나 싶네요. 견훤도 웅주, 상주, 강주, 그리고 나주 뒷치기를 막기 위해 그 정도로 배치했다고 보구요. 이렇게 되면 후삼국 전투가 어떻게 진행되었나 볼 수 있습니다.
공산전투를 생각해 봅시다. 견훤이 근암성을 공격한다고 하자 왕건은 공훤에게 일만명을 이끌고 급히 구원 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뒤따라 가면서 이끈 병력은 어째 오천입니다. 이게 바로 당시의 시스템인 거죠. 공훤은 기주, 현 경북 영주 지방의 호족으로 통일 후 기주 제군사에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이 제군사는 유사시 인근 호족군을 통솔하는 임무라고 하네요. 그를 따르는 장수는 대상 손행과 정조 연주였습니다. 여기서 대상은 4품, 후에 나올 원윤은 6품, 정조는 7품 하는 식으로 당시의 계급이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 잘 나오는 전투가 일리천입니다만... 잠시 미루구요. 이 둘은 고려 정규군 장수라고 봐야겠죠.
즉 이렇게 되는 거죠.
왕건 중앙군(5000) -> 해당 지역 통솔 장수(공훤 등) 인근의 진과 호족에게서 병력 징병 -> 공격!
다만 공산 전투의 경우 워낙 급한 일이라서 이렇게 확실히 나타나는 거고, 다른 전투들에서는 왕건이 직접 내려가면서 주변의 진과 호족군을 흡수하면서 천천히 내려갔을 겁니다. 따라서 각 전투에서 "왕건이 수천을 이끌고" "견훤이 오천을 이끌고" 이런 건 어디까지나 수도에서 출발한 병력이고 진군하면서 눈덩이 불어나듯 늘어난 거죠. 조물성, 고창, 운주성 전투는 이런 식으로 양국 다 만에서 이만 수준씩 동원한 전투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공산 전투의 경우 양 쪽 다 자기 지역이 아니었으니 더 이상의 병력 충원은 없었겠죠. 고창 전투의 경우 견훤이 여름부터 꾸준히 진격하는데, 여기서 병력을 계속 모으고 모아서 꽤나 대군이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그 병력이 패배하자 그렇게 무너져버린 거구요.
반면 유검필이 연산진을 공격한 것, 공산 전투 후 관흔군이 북진한 것, 신검군이 서라벌로 향하는 걸 유검필이 사탄에서 제지한 것 등 해당 지역에서의 국지전도 있습니다. 이 경우는 해당 진의 중앙군 + 근처 호족군 수준의 병력이었겠고, 넣어 둔 병력마다 다르겠지만 오천 수준에서의 전투였겠죠.
이 두 방식의 공통점은 간단합니다. 호족의 역할이 엄청나게 중요한 거죠. 이들은 병력을 대고 군량을 보급했을 테니까요. 때문에 중립적인 호족 지역은 요충지가 아니면 건드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싸우면서 자기 쪽에 붙길 바랬을 거구요. 강주의 호족군은 조물성 전투 후 견훤이 회군할 때 공격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_-; 고창 전투에서 호족의 역할이 얼마나 컸을지는 더 말 할 필요 없을 거구요. 하지만 이런 역할과는 달리 호족군이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안 되면 다른 곳에 붙어야 되고 자기 세력을 아껴야 되니까요. 고창 전투에서 호족들이 적극적으로 돕자 왕건이 크게 상을 내린 것은 그것 때문이구요. 말 그대로 응원군이죠.
결국 이 시대의 전투는 호족들에게 자기 힘을 보여주기 위한 전투였고, 주인공은 호족이었습니다. 진군 명령이 떨어지면 각 지방의 장수들은 이랬겠죠. "그래? 빨리 호족들에게 인사하러 가야겠다." 사실 일본에서는 전국시대까지도 볼 수 있는 광경이구요.
이렇게 호족의 역할이 너무 크니 왕건이든 견훤이든 고민 많이 했을 겁니다. 견훤의 경우 왕족들을 여기저기 배치하고 합덕 방죽 등 둔전을 이용해서 호족의 도움을 최소화시키려고 한 듯 하네요. 또한 여러 차례 신라를 찌를 때는 거의 중앙군 위주로 단기간에 치고 빠지기를 자주 한 게 아닌가 합니다. 왕건의 경우는 워낙에 친한 호족들이 많아서 비교적 괜찮았을 겁니다만 그것도 한계가 있겠죠. 때문에 천안에 거대한 군사기지를 만들어서 십만 명을 먹여 살리고 훈련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일리천이 있는 선산에도 군창을 만들면서 최대한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죠. 이 노력 끝에 일리천 전투는 이제까지의 전투와는 크게 달라집니다.
2) 병력 배치
좌군 기병 1만
대상 견권 박술희 황보금산 + 원윤 강유영
좌군 보병 1만
원윤 능달 기언 한순명 흔악 정조 영직 광세
우군 기병 1만
대상 김철 홍유 박수경 원보 연주 원윤 훤량
우군 보병 1만
원윤 왕상순 준량 정조 영유 길강충 흔계
중군 친위대 3000
원윤 정순(부관 정조 애진) 1000 원윤 종희(부관 정조 견훤)1000 김극종+원보 조간 1000
중군 북방기병 9500
대상 유금필 원윤 관무 관헌
중군 호족연합 기병 2만
명주호족군 3000 대광 왕순식 왕렴 왕예 운주호족군 대상 긍준 원보 인일 등
원군 호족연합 보기병 15000
대상 공훤, 원윤 능필, 장군 왕함윤 기병 300+14700
특이하게 일리천 전투는 왕건군의 현황이 어땠는지 잘 보여줍니다. 자... 우선 길공구님 말씀을 옮겨서 살펴보면...
기병을 이끄는 장수는 대상 - 원보 - 원윤으로, 보병을 이끄는 장수는 원윤 - 정조로 나타납니다. 각 계급의 높고 낮음은 대상(4품) - 원보(4품) - 원윤(6품) - 정조(7품) 순입니다. 이걸로 길공구님은 당시 대상은 3000이상을, 원보는 1000~3000, 원윤은 2000, 정조는 500~1000 정도를 이끌었다고 추측하시면서 다른 전투에서도 각 장수가 얼마나 이끌었는지를 예상하시더군요. 물론 다 맞는 건 아닙니다. 벼슬 외에 그 장수의 중요도 같은 게 다를 테니까요. 보시면 친위대의 경우 각기 천씩을 이끌고 있죠. 호족일 경우 해당 지역에 기반이 있을 경우 병력이 더 있었을 테구요. 유검필의 북방기병이 여기서 투입되었다는 것, 관무와 관헌이라는 부장이 있다는 것 역시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 이전에도 유검필은 북방 병력을 이끌고 있었고 저 둘 역시 같이 생사고락을 같이 한 부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호족군은 둘로 나뉩니다. 왕순식은 우리가 잘 아는 김순식이고, 왕렴 왕예는 그 아들들입니다. 긍준은 운주성 전투에서 항복한 그 긍준이구요. 인일은 기록이 없네요. 즉 이 호족군은 명주에서 웅주까지를 아우르는, 지금까지 왕건을 충실히 도왔거나 하는 이유로 왕건이 대우해주는 호족군일 겁니다. 반면 공훤은 기주, 현 경북 영주의 호족이고 능필은 현 대구 서쪽의 호족이었습니다. 왕함윤은 안 나오네요. 이들이 원군으로 빠진 것을 보면 이 병력은 상주나 잘 해야 양주 일대의 호족들, 즉 이제까지 격전의 중심지에서 중립을 지키거나 이리저리 주인을 바꿔 온, 왕건으로서는 믿을 수 없는 병력이었던 거죠. 원군이라는 이름답게 늘 그랬듯 이들은 응원군의 역할이었겠습니다만... 전투 중엔 약간 달랐죠.
3) 백제의 병력
그럼 그 때 신검의 병력은 어땠을까요? 심심하면 링크해 왔고 이번에도 링크한 저 글을 보시면 고려 210 vs 백제 154군현의 비율로 따져서 육만사~오천 정도로 비정하시더군요. 하지만 변수는 많습니다. 고려의 경우 북방기병 구천오백을 우선 빼야 되고 명주의 병력도 김순식이 이끄는 삼천밖에 안 온 것 등... 백제에도 이런 변수는 많겠죠. 결국 백제가 여전히 중앙군을 유지하고 있고 무주는 몰라도 강주에서의 징병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육만 오천 정도의 병력이 나올 수 있을 듯 하네요. 백제의 중앙군에 대한 추측 + 신검이 농성이 아닌 일리천까지 나서서 맞섰다는 점 + 백제군 역시 삼군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점 + 전투 결과에서 볼 수 있듯 한 번 밀리면 끝이었다는 점에서 신검 역시 비슷하진 않더라도 맞설 만한 병력을 모았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상한치는 육만오천입니다. 에 사실... 저로선 이 이상의 가설을 세울 수 없습니다. -_-;
4) 오 필승 코리아
대군의 동원에는 큰 위험이 있죠. 통솔이 어렵다는 것, 특히 그 시대에 호족들의 반발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한 번 무너지면 끝장이라는 것 등... 특히 군량 문제가 심각하구요. 그래서 왕건은 한강,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과 군창으로 이 결전을 준비했을 겁니다. 대군은 대군만의 장점이 있거든요.
일단 적들 및 중립적인 호족들에게 확실히 자신의 우위를 알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군을 위해 빈틈을 두더라도 이미 대군이 모인 시점에서 그 빈틈을 찌르기도 겁 나는 상황으로 만들 수 있죠.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일본이 10만 대군을 보내자 명이나 조선이나 대응도 못 했고 권율이나 곽재우도 포기해 버렸죠. 이게 대군의 힘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힘을 내외로 크게 알릴 수 있죠. 왕건이 진군한 곳은 웅주 -> 상주입니다. 그 이전까지 격전지였던 곳이죠.
응원을 하다 보면 그 많은 사람들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고 놀라고, 자신이 그 중 일원인 것에 자랑스러워 합니다. 이 때 고려군 전체에는 오 필승 코리아가 울리고 있었을 겁니다. 그건 격전지였던 웅주, 상주, 그리고 반독립 지역이던 명주, 양주에도 울려퍼졌겠죠. 북방의 야인들역시 이 때 감히 쳐들어올 생각이나 했을까요.
신검도 이 때문에 병력의 열세임에도 요격하러 나올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아니 오히려 왕건의 행동은 신검이 병력을 모으게 하려는 것 같았죠. 이미 천안에 일만의 병력이 집결된 상태에서 신검은 거기에 병력을 집중시켰을 겁니다. 하지만 왕건은 웅주 대신 상주로 갔죠. 신검 역시 이에 따라 병력을 집결시켰을 거구요. 그 기간이 삼개월, 왕건은 정말 힘대 힘의 정면 승부를 원한 겁니다. 신검도 결전 전까지 쑥 밀린 게 아니라 전진해서 대치를 했다는 것부터가 결전을 준비했다는 게 될 겁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죠. 상주에서 왕건의 진군을 놔뒀다가는 강주가 다시 등을 돌릴 수 있었거든요.
일리천 전투가 다른 전투에 비해 크게 다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이거일 겁니다. 전투는 요식행위일 뿐이었습니다. 이건 왕건이 한반도의 모든 호족들에게 자기가 삼한의 주인임을 알리는 행사였습니다. 호족들은 그 압도적인 힘에 눌리고 그 힘의 일부가 되었죠. 그리고 신검은 이 모든 걸 예감하면서도 결전의 특징, 자신이 이기면 역시 한 방에 밀 수 있다는 것에 모든 희망을 걸고 일리천으로 나아갔을 겁니다.
그렇게 일리천 전투는 시작되었습니다.
5) 전투 양상
흥미로운 점은 견훤이 좌군에 배치되었다는 거겠죠. 고려군이 북쪽에서 내려오는 이상 선봉은 좌군이었을 겁니다. 그 선봉에 목숨이 얼마 안 남은 견훤을 세운 겁니다. 칠순 노구에도 당당함을 자랑하는 노장이자 전 백제왕의 모습이 떠오릅니다만... 목적은 얼굴마담이겠죠. -_-; 백제군 전체가 "전 백제왕 견훤"이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진군하는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그 효과는 바로 나왔죠.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의 장수가 우르르 견훤의 말 앞에 무릎을 끓었죠. 그게 거역할 수 없는 견훤의 카리스마 때문이든, 이제 게임 끝났으니 견훤 핑계 대고 항복하자는 거든 간에요. 그들은 왕건에게 신검이 중군에 있다고 알렸죠. 그리고 왕건은 공격을 명합니다.
... 원군에게요.
공훤이 이끄는 일만 오천의 상주 인근 호족 연합군. 지원군으로만 쓰려던 이 병력을 선봉으로 내몬 거죠. 이것의 의미는 간단합니다. 더 이상 전투의 주인은 니네가 아니라는 거죠. 계속 중립과 계산을 반복해 온 이 호족군은 이제 왕건의 마음에 들기 위해 죽어라 돌격했을 겁니다. 만약 일리천 전투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면 이들은 여전히 응원군 역할이었겠지만요. 후삼국 최후의 전투, 이들은 이렇게 피로써 충성 서약을 했습니다. 중군에 있는 김순식 등의 호족군은? 왕건이랑 술이라도 마시면서 구경하고 있었겠죠 뭐. 둘의 대접 차이가 꽤 큽니다. 아무튼 백제군이 무너지는 것을 본 왕건은 삼군에 총공격을 명하고, 그렇게 일리천 전투는 종결됩니다.
현재 구미의 해당 지역에 가 보면 신검을 격파했다는 발검들, 점검들 외에 백제 좌군을 깨뜨렸다는 어검들이 있다고 합니다. 좌군이 먼저 무너졌다는 것인데... 때문에 효봉 등 항복한 장수들이 좌군이라는 추측이 가능하죠.
다만 길공구님의 예상이신, 좌군에 강주호족군이 있어서 먼저 무너진 거다는 것에는 전 부정적인데요. 왕건이 두 부류의 호족군 중 하나는 중군에서 대우하고, 하나는 원군으로 뒤로 뺏듯이 신검도 그러지 않을까 하는 거죠. 특히 열세인 백제군은 한 번 무너지면 끝인데 배반할 위험이 큰 호족군을 전면으로 세웠을 거 같진 않네요. 때문에 고려군처럼 중군이나 후방에 최대한 호족군을 두고 좌우군에 중앙군을 두지 않았나 싶네요. 하지만 그 좌군의 장수들이 항복하면서 먼저 무너진 거구요. 다만 창을 거꾸로 들고 아군을 공격했다는 백제군은 이런 호족군이었겠죠. 박술희 휘하에 있었다는 강주 출신 소격달의 공작도 있었을 수 있구요. 어쨌든, 백제는 주력인 중앙군이 무너지면서 백제군은 자멸했고, 신검은 추풍령 -> 탄현 -> 황산 -> 마성(익산)으로 계속 도망가다가 농성을 포기하고 항복합니다.
2. 호족시대의 끝
후삼국시대는 삼국시대에 대응해서 붙은 말로 하나의 시대라기보다는 그저 나말여초 중 하나로 보일 뿐입니다. 하긴 50년이라는 시간은 전체로 보면 짧긴 하죠. 그래도 이 시기는 참 재미있는 시기였습니다. 각 지역의 호족들이 이렇게 중앙 권력을 무시하고 자기들 멋대로, 말 그대로 막장으로 놀던 시대는 없거든요. -_-; 이런 혼란 속에서도 단단한 골품제가 붕괴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 가는 원동력이 되었구요. 궁예와 견훤의 노력은 이 호족들을 제압하던 것이었고 전투 전반에서 호족들의 역할이 강하게 나타납니다. 다른 시대와 대비되는 이 시대의 강력한 특징으로, 후삼국이라는 성의 없는 이름 대신 다른 걸 붙인다면, 호족시대라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릴 겁니다. 임팩트는 좀 적네요. -_-;
왕건은 다른 두 영웅들과 달리 호족들과 최대한 공존하는 길을 택했고, 그래서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일리천 전투는 이제 권력을 자기에게로 모으겠다는, 호족시대의 끝을 알리는 전투였구요. 다만 그 역시 한계가 있었고, 호족들을 정리하고 중앙집권을 하는 임무는 후대로 맡겨졌죠. 조선 초기가 중앙 권력을 넘보는 왕족, 공신들의 싸움이었다면 고려 초기는 이렇게 곳곳에 산재한 지방의 호족들과의 싸움이었죠. 광종부터 성종에 이르는 왕들이 없었다면 고려시대가 어떻게 진행됐을지 참 궁금하네요. 사실 이런 호족들이 완전히 정리된 건 조선시대에 와서야 가능했구요.
궁예가 오기 전의 명주와 한주, 격전지였던 상주와 강주에서는 군소 호족들끼리의 치열한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대호족들은 대호족들대로 세를 불렸고, 군소호족은 자기들대로 히키코모리 놀이를 하거나 가문을 키우기 위해 중앙 정계나 군부로 진출하기도 했죠. 만약 이 세 영웅이 없었다면 호족시대는 꽤나 오래 끌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상 이번 글을 마치겠습니다. 이제 남은 건 단 하나, 놈놈놈 편이네요. 견훤 궁예 왕건, 이 세 영웅과 함께 이 시대를 마지막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계속 예고했던 궁예 후손 얘기도 마지막 편에서 해야겠네요.
그리고... 일리천 전투가 안 미뤄졌다면 이 글의 주제가 되었겠습니다만 안타깝게 밀려난 이 시대 각 주 호족들의 모습을 간단히 정리해 봤습니다. 그럼, 잘 봐 주시구 마지막 글에서 뵙겠습니다 ^^
1) 양주
신라가 있는, 경기도나 다름 없는 양주는 크게 흔들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에이 그래도 코 앞이니까요. -_-; 도적들이 경주 근방까지도 오는 상황에서 이들은 최대한 신라를 섬기는 척 하며 수성에 힘 썼죠. 궁예의 남진 때 양주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대한 성을 지키는 데 급급했고, 신라 조정조차도 그런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만 견훤은 심심하면 이 곳으로 진출한 것으로 보이며, 기록에 나오는 것 역시 세 번입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고려가 막아섰죠. 갔더라도 제대로 점령은 하지 않고 기세만 보여준 채 돌아온 것 같지만요. 이를 보면 신라를 멸도라고 부른 궁예와는 달리 왕건과는 일찌감치 줄을 댄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신라 본국 역시 고려에 매달렸으니 이들을 막을 명분이 없었겠죠. 결국 고창 전투 이후 양주 대부분의 군현이 귀부한 것은 이런 결과였을 겁니다.
기록에 나타나는 호족은 양주성의 김인훈, 아마 견훤의 침공 때 궁예에게 원군을 요청, 왕건이 수군을 통해 구원합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여기서 거병한 호족은 소율희로 현 김해 지방의 호족으로 김씨로 성을 바꾸고 자기 영지 내에서 선종을 후원하는 등 (이걸로 당시 선종의 요람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하는군요) 나름 활약은 했지만... 견훤과 왕건이 낙동강까지 내려와서 싸우자 세력이 줄어서 경애왕 대에는 완전히 몰락했다고 하네요.
2) 명주
유명한 건 명주장군을 외친 명주성의 김순식. 궁예가 명주를 휩쓴 후 독립할 때 궁예를 적극 지지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 역시 명주의 확실한 실세로 떠오른 듯 하네요. 궁예의 기반이지만 태백산맥 너머에 있는데다 인구도 적어서 큰 도움은 되지 못 한 듯 합니다. 하지만 궁예 세력의 한 축으로 왕건은 그를 절대 무시 못 했고, 김순식이 오자 크게 기뻐하며 '왕'씨 성을 하사할 정도였습니다. 궁예의 남진에 명주군이 얼마나 동원됐는지는 알 수 없으나 왕건 집권 후에 명주는 거의 독립이나 다름 없는 상황이었고, 김순식을 제외한 명주는 고창 이후에나 확실히 귀부했습니다. 그 김순식도 일리천 전투 직전에야 왕건 앞에 나타나죠. 중군 호족연합군의 맨 첫머리에 그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왕건이 그를 얼마나 귀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외에 보이는 건 정선의 정씨. 전이갑, 전의갑은 정선의 두 영웅으로 불리며 곳곳의 전투에서 큰 활약을 했다고 하죠. 아마 명주보다 세력이 크게 적어서 인정받기 위해 중앙 군부 내지 정계로 진출한 듯 합니다. 이후 공산 전투 8공신 중 전이갑, 전의갑, 그 사촌 전락까지 세 명이 포함됩니다. 명주 전체가 등을 돌리는 가운데 유일하게 왕건을 크게 도왔다고 하면 되겠네요.
지금 태백산맥 동부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듯, 무시하긴 어려운데 공격하기도 어렵고, 정작 세를 불리는 데는 크게 도움 안 되는 곳이었던 것 같네요.
3) 삭주
여긴 정말 없네요. -_-; 현재 원주의 양길 정도일까요. 북족은 궁예의 진격으로 항복하거나 깨지고, 남쪽 양길이 지배하고 있던 곳은 비뇌성 전투 이후 양길이 몰락하면서 궁예에게 흡수된 것으로 보입니다. 원주 인근에 견훤이 둔전을 했다는 걸로 보아 견훤도 노리고 있긴 한 모양이었네요. 역성혁명 이후 원주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는데 원극유라는 이가 집안 및 이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건에게 귀부하면서 크게 인정 받은 모양입니다. 한편 중원경, 충주의 유긍달은 왕건에게 줄을 대고 딸을 시집보내면서 정종, 왕종이라는 두 왕을 낳게 되죠.
4) 한주
고려의 3경인 서경(평양), 개경(개성), 남경(서울)이 모두 포함된, 고려의 중심지였습니다. 특히 경기도 북부부터 황해도 서부에 이르는 패서인들의 입김이 컸죠. 당장 유명한 호족이 13개 주를 차지한 평주의 박지윤(그 아들 박수문 박수경, 부하 유검필이 모두 활약했죠)부터 북쪽 황주의 황보씨, 그 서쪽 신천의 강씨, 현 개풍군인 정주의 유천궁 등이 있습니다. 아마 궁예에게 귀부한 당시에는 박지윤이 제일 힘이 셌겠습니다만, 자신의 영토인 송악을 양보하는 왕륭의 도박과 왕건의 활약으로 대세가 넘어간 듯 하네요. 신천의 강씨는 딸까지 바치면서 실세가 되려 했겠지만 그 기록이 제대로 안 남은 걸로 보아 왕비 강씨가 죽을 때 첫 타겟이 되어 몰살당한 게 아닌가 싶네요. 정주의 유천궁은 왕건에게 딸을 주었지만 그 사이에 자식이 없으면서 별 활약이 없었던 것 같구요. 황보씨의 경우 황보제공이 천안부 초대 도독으로 임명된 걸 보면 큰 대접을 받았던 것 같구요. 소설 후삼국기에는 초반 패서끼리의 싸움이 나름 나옵니다만 ^^; 궁예가 오자 그냥 전멸... 다만 904년에 이르러서야 태평으로 유명한 염주의 유긍순 등이 항복한 것으로 봐서는 패서도 둘로 나눠서 싸웠고, 한 쪽은 궁예 편을 들고 다른 한 쪽은 계속 항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궁예도 함부로 못 건드렸겠죠. 왕건 이후에는 이 지역 모두가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겠습니다만.
한주 남부, 현재의 서울과 경기도에서는 큰 세력 없이 군소 호족들이 난립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기훤, 청길 등의 호족들은 양길과 연합했다가 몰락하고 이외 호족들은 궁예의 남진으로 그냥 흡수된 듯 하네요. 이 중 유명한 호족이 왕규입니다. 아무튼 뭔 일이 일어나기엔 워낙에 고려의 앞마당이라서... 비뇌성 전투 이전의 기록이 더 있으면 모르겠는데 그냥 궁예에게 항복 왕건에게 항복 이런 식이네요.
5) 웅주
웅주에서 대표적으로 보이는 호족은 궁예에게 항복한 공주의 홍기, 운주성의 긍준, 왕건에게 항복한 현재 홍성에 있는 홍규, 주인을 계속 바꾼 공직 등이 보입니다. 산맥을 보면 차령산맥을 경계로 남쪽으로 평야, 북쪽으로도 평야인데 이 때문에 이 주변을 가지고 호족들을 최대한 꾀려고 한 것 같네요. 제 글 전체로 나오지만 여기는 한 방에 밀 수 있는 경계선으로 백제는 그저 방어벽으로 여겼고, 궁예는 이 쪽으로 밀고 나가려던 것 같지만 왕건의 역성 혁명이 있었고, 왕건은 밀려고 시도했지만 친백제+친궁예(어라 -_-;) 성향으로 강력히 방어한 것으로 보입니다. 긍준이 김순식과 같은 취급 받은 게 바로 이것 때문이겠죠. 청주는 불안불안하지만 계속 고려에 있었던 것 같네요.
결국 양 쪽 다 먹으면 좋은데 쉽게 건들기는 힘들었기 때문에 의외로 큰 전투는 운주성 이전까지는 벌어지지 않았고, 이 과정에서 보여 준 청주, 공주 지방의 호족들의 모습과 통일 후 이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때문에 훈요 10조에서 "쓰지 마라"고 한 지역은 이 때 배반하고 반란 일으킨 지역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여기서 양국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무너진 건 934년 운주성 전투에 가야 됐고, 완전히 무너진 건 일리천 전투 이후였습니다. 말하자면 적의 심장을 바로 찌를 수 있는, 그래서 오히려 바로 찌르기가 어려워서 야금야금 싸우기만 했던 지역이 아닌가 합니다.
6) 전주
견훤 앞마당. 뭐 다른 할 말 있나요? ( ..) 견훤의 꾸준한 중앙집권에 대한 노력 끝에 이 지역 호족들은 거의 중앙귀족화 되었을 것 같네요. 능환이 이 지역 호족이라면 그 힘으로 정변을 일으켰겠죠.
7) 무주
견훤의 근거지이자 지훤, 박영규 등 사위들을 보내 다스린 곳이죠. 나주 점령으로 큰 타격을 입었겠지만 크게 흔들린 것 같진 않네요. 나주-목포 지역의 호족 오다련/오희(왕건의 장인), 나주의 나총례 등이 왕건과 협력한 것으로 보이네요. 이외에 수달 등이 있죠. 아무튼 전주고 무주고 기록에 잘 나오는 호족들은 모조리 왕건에게 항복한 호족들이라서... 특히 승주(순천)의 박영규의 경우 왕건이 죽은 이후에도 어느 정도 대접받은 것 같네요.
8) 강주
우린 우리 맘대로 논다~는 게 잘 나오는 곳이죠. 괜히 길공구님 글이 강주 호족들 이야기인 게 아니니까요. 신라에 대한 충성도 딱히 없을 것이고 후백제, 후고구려? 우린 가야 출신인데? -_-; 이런 생각이었겠죠. 특히 양국이 싸우고 대야성이 어떻게든 버티면서 강주 남부는 정말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게 강주도독 차윤웅, 의령태수 왕봉규, 하동태수 소격달입니다. 한창 신라가 혼란해 질 때 차윤웅과 왕봉규는 짜고 새로 강주도독으로 온 소송을 죽이고, 거짓 보고를 올리고 차윤웅이 도독이 됩니다. 한편 왕봉규는 소송의 아내를 취하는데... 이 때 임신 중이었고 태어난 아이가 왕격달. 하지만 왕봉규는 그를 자기 자식처럼 키우고 다 크자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성을 쌓고 하동태수로 임명해 달라고 하죠. 하지만... 왕격달은 어미에게서 사실을 알게 되고 자기 이름을 소씨로 다시 바꾸고 복수를 결의합니다. 919년, 왕건이 왕이 된 지 다음 해에 소격달은 주변의 호족을 모아서 왕봉규와 차윤웅을 포위합니다. 이에 맞서서 그 둘은 고려에 귀부를 결심하죠. 하지만... 조물성 전투로 고려는 회군하고 백제군은 돌아가면서 그 둘이 있던 거창성을 공격하고 돌아가죠. 이 때 소격달의 호족연합군이 백제군도 공격했다고 하는데 참 자기들만의 리그인 걸 보여주네요. 아무튼 이들은 백제군이 돌아간 후 거창을 공격, 차윤웅을 죽이고 왕봉규는 급히 탈출하죠.
도망간 왕봉규는 천주(의령), 강주(진주) 등지에서 다시 세력을 쌓으며 친백제로 돌아섭니다. 이 때 신라의 사신을 뱃길로 보내면서 자신도 사신을 끼워 보내 천주절도사의 지위를 얻죠. 이러면서 다시 백제와 함께 소격달을 포위하고 -_-; 이번엔 소격달이 위기를 맞죠. 하지만 하필 이 때 고려 육군 + 수군의 강주, 대야성 공격이 벌어지고 소격달은 고려에 귀부, 왕봉규를 마침내 몰락합니다. 이렇게 친고려적인 성향으로 돌아간 강주를 왕건은 위험부담을 각오하고 순행하죠. 하지만 공산 전투에서 왕건이 패하고, 견훤은 해도 해도 안 되자 그냥 강주를 힘으로 밀어버립니다. 이러면서 소격달은 고려로 도망갔고, 박술희 밑에서 일하게 되죠. 일리천 전투에서 참전했다고 하는군요.
... 정말 이거 하나만으로도 소설 한두권은 쓸 수 있겠죠? 자세한 건 길공구님 글로~~~
9) 상주
양국 최고의 격전지였던 상주. 그냥 이름만 늘어놓죠 뭐. 견훤의 아버지이자 견훤보다 먼저 일어난 아자개(대주도금이라든가 용.개.의 아버지죠). 후삼국시대의 시작이라 할 만한 원종, 애노. 기주(경북 영주)의 호족 공훤은 상주의 친고려 호족군을 이끈 것으로 보이며 현 성주의 호족 능필 역시 공훤과 함께 움직인 듯 하네요.
지금의 성주지방 이총언은 독립하다가 왕건이 건국한 이후 귀부, 공산 전투 이후 고려가 크게 불리한 가운데서도 끝까지 성을 지켰습니다. 이렇게 귀부한 호족들이 많은데 대표적인 게 김선궁이랑 흥달, 홍술 등이죠. 특히 홍술은 전사하자 왕건이 "내가 양손을 잃었다"며 통곡했고, 그 지방을 의로운 성이라 해서 의성으로 지명을 바꿨다고 합니다.
이런가 하면 신라 왕족 박언창은 상주에 식읍을 받고 와서는 918년 사벌국을 세우고 왕이 됩니다. =_=; 그 이전에도 계속 압박 받아서 신라 조정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자 삐진 모양이예요. 그는 929년 낙동강을 건너 온 백제군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는데... 정말 당시 상주 상황이 어땠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죠. 이 정도로 상주는 혼돈의 카오스, 격전의 중심지, 매일마다 국경이 바뀌는 곳이었던 겁니다. 929년까지 살아남은 것도 참 대단하네요. -_-; 당시 대야성에 있던 세력이 경순왕의 아버지 김억렴이라고 하니, 이들이 뭉쳐서 견훤의 동진을 막은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