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그리기 참 쉬워졌어요~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이 혼란한 세상에 젊은 피를 수혈해 봅시다." - 만화 태조 왕건. -_-; 유검필과의 대화에서
1. 제 3 세력
나주 점령 및 무진주 공성(서), 상주에서 백제군 격파(북) 남해 제해권 장악(남), 수군으로 양주 구원(동)
궁예는 동서남북으로 백제가 가는 길을 모두 차단하며 철저하게 고립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남으로 찍어눌렀죠. 저기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왕건이 중심에 있다는 거죠.
때문에 삼한 통일 직전까지 궁예를 올려 놓은 이 공이 궁예에게 있을지 왕건에게 있을지는 참 애매합니다. 후에 왕건이 강주 호족들을 포섭한 것이나 나주가 거의 왕건의 땅처럼 된 것, 신라를 멸도로 부르며 마구 치던 것에 비해 양주 구원 등 친신라적인 모습을 보인 건 왕건의 공이라 봐야 될지도요. 다만 이런 왕건을 적극 밀어주며 시중 등의 높은 벼슬에 올린 건 궁예의 안목으로밖엔 볼 수 없습니다. 세종대왕의 말을 빌려 보죠.
" 북방의 일은 (김)종서가 있더라도 내가 없었으면 안 됐을 것이고, 내가 있더라도 종서가 없었으면 안 됐을 것이다."
아마 궁예와 왕건은 이런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네요. 당대 최고의 투 톱. 왕건에게 유검필이 없었으면 안 됐던 것처럼 궁예에게도 왕건이 없었으면 이룰 수 없었을 일이었겠죠. 하지만, 이 때문에 왕건이 실세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일 겁니다. 이미 왕건은 아버지 왕륭이 자기 영지를 바침으로써 12주를 차지하며 대모달을 칭했던 패서의 실세 박지윤보다 더 인정 받았습니다. 실질적인 패서의 대표였죠. 거기에 가는 길마다 승승장구하니 궁예로서도 그 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구요. 나주에 있는 고려군이 상을 제대로 못 받고 밥도 제대로 못 먹어서 불만이 차자 왕건은 이렇게 말하죠.
"지금 왕이 포악하니까 의심 안 받게 우리는 여기서 몸을 보전하자."
대 놓고 궁예를 까고 있죠. -_-; 왕건이 나주에 심심할 때마다 내려간 건 이렇게 견제를 피하는 것과 동시에 자기 존재에 대한 어필도 있었을 겁니다. 나주 경영은 자기가 없으면 안 된다는 거죠. 이런 점에서 궁예가 미쳤다는 예로 나오는, 왕건을 관심법으로 몰아 죽이려고 한 건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궁예는 어떻게든 왕건을 죽이진 않더라도 기세를 꺾어 놓으려 했고, 왕건의 대답은 "그래. 나 반역했음. 그래서 나 죽일 거임?" 이라는 자신감의 표현으로요. 에 뭐 역사를 너무 벗어나진 맙시다 ^^; 아무튼 궁예가 왕건에게 오히려 포상한 것은 이 일 자체가 왕건의 기죽이기라는 것을 말 해 주죠.
궁예가 왕건 등의 패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주 세력을 끌어들였지만, 오히려 왕건이 아지태 사건을 해결해서 왕건의 목소리가 더 커지는 결과를 낳게 되고, 그건 왕비 강씨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왕건이 궁예의 왕비 강씨와 정혼자였다는 전설(태조 왕건에서 크게 쓰이죠), 별개로 구미호가 왕비 강씨를 잡아먹고 궁예를 충동질했다는 전설, 궁예가 관심법으로 강씨에게 다른 남자와 놀아나고 있다고 한 기록, 궁예가 두 아들을 죽인 점, 후에 나타나는 청광과 신광의 아들들에 대한 기록... 이 모든 걸 종합해서 패서는 왕건과 강씨 중심으로 궁예에게 도전했고, 그게 궁예를 폐하고 그 아들을 왕으로 만들려고 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가능하죠. 이렇게 본다면 이 시기에 패서 세력의 총공격이 시작되었고, 궁예는 이에 반해 그들을 숙청했으며, 이들의 대표인 왕건을 직접 치지는 못 하고 그 수족을 잘라내려고 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고려 말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죠.
왕건 편은 많았습니다. 나주, 강주의 세력들과 연이 닿아 있었고 즉위 후 신라에서 지속적으로 러브 콜을 보낼 정도로 신라에서도 우호적이었죠. 충주의 유긍달도 왕건을 편들었고 군부의 사기장도 왕건 편이었습니다. 왕건의 역성혁명은 이걸 기반으로 했을 겁니다. 이후 청주, 명주 등이 배반했을 때도 이렇게 군부를 장악하고 내부를 숙청함으로써 혼란을 수습할 수 있었겠죠.
2. 호족의 힘
"고목의 새싹은 땅의 힘을 빌어 자라고..." - 이문열 삼국지 1권 중
궁예와 견훤, 이 두사람과 왕건의 차이는 쉽게 드러납니다.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전설에 가까운 기록이 삼국사기에 남았다는 것은 궁예가 스스로 그걸 말하고 다녔다는 거겠죠), 견훤은 신라 장수 출신이죠. 신라와 어떻게든 연이 닿아 있었습니다. 견훤은 백제 계승 명분으로, 궁예는 (그의 출생이 맞든, 단순히 몰락한 신라 왕족 출신이든) 개인적인 원한이나 세상을 완전히 바꾸겠다는 생각이었든 신라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왕건은? 고구려 유민이라고 하지만 신라는 그들을 잘 대접해 준 편이었고 서라벌과 멀어서 딱히 견제받거나 할 일도 없었습니다. 박지윤이 대모달을 칭할 정도로 반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죠. 덤으로 왕건은 호족 출신으로 호족의 성향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불교와도 친해서 그걸 이용해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죠. 궁예가 선종 출신이면서도 불교와 대립(혹은 불교조차도 자기 걸로 만들려 한 것)과 대비됩니다. 견훤도 불교 세력 신나게 이용하기는 했죠. 하지만 도선대사의 예언으로 시작되는, 불교 세력과의 친교는 왕건을 따라가기는 힘들 것 같네요. 그러면서도 최치원 등 유학자들을 신나게 끌어들였구요.
비뇌성 전투로 초적 출신 호족은 사실상 소멸됩니다. 다른 호족들은 애초에 그 지역에 기반을 둔 자들이었고 이들 역시 자기 지방의 패권 내지 자기 영지의 보전에만 급급했죠. 왕건에게는 최고의 무대였습니다. 궁예가 영토를 최대한 넓히면서도 호족들과 대립하게 된 것, 견훤이 자기 영지에서는 왕권 강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왕건에 밀린 것, 이 모두가 왕건의 친호족, 친신라적인 모습 때문이겠죠.
그럼... 이제 다시 공산 전투 직후로 가 보겠습니다.
3. 패배의 끝에서
이전 글 중 승승장구하던 견훤이 고창 전투 한 방에 크게 밀린 것에 의문을 품은 적이 있습니다. 결론을 내렸죠. 왕건이 이 때 딱히 크게 불리한 게 아니었다구요. -_-;
아자개는 견훤의 아버지라는 특성상 쉽게 못 건드렸을 것이고, (다만 아자개의 영지라 추측할 만한 가은현을 견훤이 공격했다가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상주 남서쪽 벽진군의 이총언이 공산 전투 후에 왕건에게 귀부하는데 이 역시 견훤이 깨뜨리지 못 하고 벼만 베어서 돌아왔다고 합니다. 견훤이 대야성을 다시 점령하면서 강주는 완전히 견훤의 손에 넘어갑니다만, 상주에서는 아직도 친고려적인 호족들이 남아 있었다는 거죠. 거기에 고창 전투 직전 김순식이 다시 아들을 보냅니다. 이건 계속 패배하던 왕건에게 큰 힘이 되었겠죠.
그렇다 하더라도 전황이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죠. 이 때 왕건은 밀릴 때까지 밀린 상황이었습니다. 그 동안 주 전장이었던 상주지역은 거의 장악당했고, 의성의 홍술이 전사하자 왕건은 "내가 양팔을 잃었구나!"라는, 왠지 사람 죽은 것보단 지역 잃은 것에 더 슬퍼하는 듯한 탄식을 하죠. 강주에 원군을 파견한 것도 중간에 차단되어 장수 김상이 전사합니다. 웅주 쪽으로 가 보면, 왕건은 925년에 천안에 대규모 군사기지를 설치합니다. 아마 한 타 싸움으로 치고 내려가려고 한 것 같습니다만... 웅주 전투에서 강력한 방어로 무산되죠. 왕건으로서는 이 때부터 결전을 준비한 걸로 보이지만 전혀 생각 못 한 공산에서의 패배로 결전은 개뿔 자기 자리 지키기에도 힘든 상황이었죠. 그래도 한 번 전세 역전해 보겠다고 백제의 최전선인 삼년산성을 쳤습니다만... 여기는 역사스페셜에서도 그 방어력을 분석할 정도로 강력한 군사기지였습니다.
http://blog.naver.com/love_stepano?Redirect=Log&logNo=40118371132
삼국시대에 삼국의 국경이 맞 닿아 있던 곳, 신라의 의지가 엿보이는 성이죠. 대야성과 마찬가지로 점령 시 사방으로 뻗을 수 있었고 자급자족이 가능했습니다. 링크한 포스팅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보죠.
깊은 계곡 위에 만들어진 서문(西門)이 정문이다. 진입로는 성벽 옆으로 난 작은 오솔길로 한꺼번에 많은 군사가 진입할 수 없는 구조다. 성문 밖은 옹성으로 방어력을 높였으며 바깥쪽으로 열리는 성문의 구조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 성문이 부서져도 안쪽은 연못으로 또 다른 방어책을 마련했다. 동문(東門)은 성벽 자체를 제트(Z)자 구조로 만들어 성안으로 들어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북문(北門)은 S자 형으로 성문 밖 이중 차단벽을 설치해 옹성을 만들었다. 남문(南門)은 지상에 만들어진 문이 아닌 성벽위에 창문처럼 매달린 문으로 5미터가 넘는 사다리가 아니고는 접근할 수 없는 구조다. 이처럼 네 개의 문이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서로 다르게 만들어졌다.
이런 곳을 왕건은 친 겁니다. -_-; 에 뭐 성공했으면 견훤이 대야성 친 것처럼, 자기가 나주 친 것처럼 큰 반향을 만들 수 있었겠죠. 근데 그게 어디 맘대로 되나요. 오히려 왕건은 크게 패배하고 청주까지 추격당하죠. 마침 유검필이 탕정군(온양)에 있어서 살았을 뿐. 그래도 천안부 군사기지 조성과 온양의 축성을 보면 왕건은 계속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야죠. 견훤은 계속 치고 빠지고 또 칩니다.나주가 함락되고, 오어곡성이 마침내 넘어가면서 왕건의 분노는 극에 달하죠. 이 때 항복한 6명의 장수들의 처자식을 처참하게 죽입니다. 이제까지 왕건이 보여준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가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제 남은 곳은 단 한 곳. 고창이었습니다.
4. 운명의 땅 고창
삼년산성에서의 패배로 웅주는 흔들리고, 김순식이 귀부했다 하지만 명주의 정세도 그리 순탄치 않았습니다. 거기에 주 전장이었던 상주는 거의 견훤에게로 넘어갔고, 고창만이 외로이 저항하고 있었죠. 신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었고, 견훤이 이 곳을 차지하면 낙동강을 온전히 차지하게 됩니다. 신라 9주 중 4개, 웅주까지 포함하면 5개에 양주를 완전히 백제의 밑으로 둘 수 있게 되죠. 아마 견훤은 이걸 위한 마무리로 생각했을 것이고, 두 아들을 도독으로 임명하면서 슬슬 다음 대를 준비하지 않았을까요? 이제 백제의 시대가 시작된다며 가벼운 마음으로 출진했겠습니다만... 세상 일이 그렇게 쉬워야죠.
9월 의성부 점령(홍술 전사. 왕건이 양 손을 잃었다며 슬퍼함) -> 10월 고사갈이성 침공 -> 12월 고창 포위
왕건도 이에 맞서 경북의 남은 지역에 성을 쌓고 진을 설치하는 등의 방비를 했습니다. 견훤이 포위한 고창은 이 진 중 하나일 겁니다. 여기서 나오는 김선행, 권행, 장길은 친신라 지역으로 아직 견훤에 항복하지 않았으며, 견훤은 고창을 점령하고 이들의 귀부를 바랬겠죠. 이 때 포위된 병력이 삼천. 유검필 등이 고려 병사라고 확실히 언급한 것으로 보아 중앙군으로서 이 지역에 파견되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는 거겠죠.
홍유는 도망갈 길을 먼저 닦아 놓자고 주장합니다. 당시 고려에 패배주의가 얼마나 깊게 흘렀는지 보여주죠. 출전을 주장한 이는 유검필 혼자. 왕건은 이 말만 믿고 출진합니다. 유검필은 배신을 하지 않죠. 12월부터 1월까지 벌어진 전투에서 왕건은 무려 8000이나 되는 적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둡니다. 이 전투에서 삼태사라 불리는 김선행 등 3인이 지형을 이용해 백제군의 뒤를 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역시 그 시대에는 드문 일이었죠. 왕건의 친호족, 친신라 정책이 마지막에 그를 살린 겁니다.
그 여파는 너무나도 컸습니다. 일단 이 지역의 백제군 주력이 완전히 소멸했고, 견훤은 그 분풀이로 순주를 약탈하고 돌아가죠. -_-; 뭔가 뒤끝이지만... 이것으로 영천, 하양, 청송 등지의 30여 군현이 항복하고, 다음달에는 명주부터 현재의 포항, 울산 지역까지 대거 항복합니다. 이 의미는 명확하죠. 상주 동쪽이 전투 하나로 완전히 평정된 겁니다. 그 때부터 고창은 동쪽을 평정했다 하여 안동으로 불리게 되죠.
만약 견훤이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해도 이런 도미노 현상이 벌어졌을까요? 거기에 대해선 부정적입니다. 신라부터가 공산 전투 이후에도 확실히 고려 편이 되었고, 양주의 호족들 역시 친신라적인 왕건을 더 선호했을 테니까요. 애초부터 그들은 고려에 몸을 맡기길 원했을 것이고 백제군이 무너지자 항복한 거니까요. 다만 견훤이 이겼다면 상주는 완전히 견훤 땅이 되고 신라를 확실히 발 아래 두고 천천히 요리할 순 있었을 겁니다. 왕건은 이후 신라를 방문하며 양주 곳곳에 진을 설치하며 신라에 대한 영향력을 확고히 합니다.
다시 신라 9주의 상황을 보면, 고창 전투 전까지 왕건은 한주, 삭주를 완전히 장악했고, 견훤은 전주, 무주, 강주를 완전히 장악했죠. 웅주, 상주에서도 견훤이 압도적인 우세를 보이고 있었고 명주는 반독립, 양주는 어느 쪽이 이기나 초조히 보고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전투로 명주와 양주가 왕건에게 넘어가고 상주에서도 최소 5:5의 전략이 되었죠. 전력이 완전히 뒤집힌 겁니다.
5. 백제의 몰락
견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습니다. 중앙군의 타격을 최대한 치유하면서 반격을 노렸죠. 왕건이 전혀 생각하지 못 한 곳, 예성강이었습니다. 두 차례의 공격을 가하면서 분풀이 및 나주를 먹힌 것에 대한 복수를 했죠. 933년에는 현재의 청도(밀양 근처더군요)인 혜산성과 경주 근처 아불진을 신검을 보내 공격합니다. 그런데... 왕건이 이에 맞서 의성에 파견한 장수가 하필 유검필이었죠. -_-; 단 80명에 처참히 깨진 신검... 이걸로 전세역전을 노리던 견훤이 얼마나 실망했을까요?
930년에 왕건이 그리도 기다리던 천안의 군사기지 고정이 완성됩니다. 왕자산성을 중심으로 수만 명의 병사가 주둔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거죠. 왕건은 마침내 결전을 향한 한 수, 웅주에서의 공격을 시작합니다. 시작은 공직의 배신이었습니다. 견훤이 공직 아들들의 힘줄을 끊었다는 것에서 견훤의 분노가 잘 나타나죠. 공직이 (견훤?) -> 궁예 -> 왕건 -> 견훤 -> 왕건으로 계속 주인을 갈았는데도 크게 대접받은 건 바로 그 곳이 얼마나 요충지였는지 말 해 주죠. 현재의 공주 땅, 거기에 근처의 삼년산성과 함께 백제의 주 방어벽이었을 테니까요. 보통 공직에 대해 견훤이 강경하게 나가서 항복했고, 이걸 견훤이 호족들을 강압적으로 압박했다는 근거로 쓰기도 합니다만 그것보다는 대세가 바뀐 것 같자 공직이 항복한 거라고 봐야 될 듯 합니다. 이후 왕건은 공직의 말을 따라 일모산성을 공격하죠.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죠. 운주성 전투입니다.
이 운주성 전투를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에 따라 말이 다르더군요. 왕건이 가서 견훤이 막았다, 견훤이 가자 왕건이 막았다... 하지만 견훤이 화친을 요청한 것을 보면 왕건이 먼저 시작했다고 봐야겠죠. 상주 싸움도 바쁜데 견훤이 웅주를 먼저 공격할 것 같진 않네요. 다만 웅주의 방어선이 붕괴될 조짐을 보이자 견훤이 선수를 쳤을 가능성은 있네요. 하지만... 양웅이 다시 만나자마자 곧바로 화친을 청한 것을 보면 왕건의 기세가 어땠는지 알 수 있죠. 왕건은 유검필의 말에 따라 공격했고, 견훤은 크게 패배하여 돌아갑니다.
이후 견훤의 행동은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신검, 양검, 용검을 불러 "병력은 우리가 많은데 맨날 지니 이거 안 되겠다. 그냥 백성들 생각해서 항복할까?' 는 말을 하죠. 당연히 아들들은 이제 자기들 시대가 되는데 찬성할 리가요. 만약 여기에 중심을 둔다면 금강에게 왕위를 준 것은 정말 항복 내지 현 영토 보전 정도의 목표일 겁니다. 즉 주전파 vs 주화파에서 견훤은 주화파를 선택한 거죠.
반면 수미강=금강 설이 맞다면 금강은 제법 여러 전장에서 활약한 것이고 정말 드라마에서의 모습처럼, 그리고 통설처럼 금강이 신검보다 더 능력이 있기에 보위를 물려줬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죠. 하지만 애매한 게, 양검, 용검은 각 주의 도독으로 실세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숙청 없이 금강을 앉히는 모험을 감행했을까요? 견훤의 의도가 뭔지는 정말 모르겠네요.
뭐 그 이성계도 장자도 아니고 실세 방원도 아닌 막내를 세자로 앉힌 걸 생각하면, 아무리 잘난 영웅도 아버지가 되면 어쩔 수 없는 걸지도요.
6. 일리천으로
정변 후 신검은 내부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데 힘 썼을 겁니다. 하지만 왕건은 이를 놓치지 않죠. 935년 4월, 유검필을 보내 나주를 탈환하고, 6월에는 이 길을 통해 견훤이 탈출합니다. 견훤의 사위이자 순천의 호족인 박영규도 따라서 귀부하죠. 이런 상황에서 백제가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게 오히려 용합니다. -_-; 견훤 편에서 얘기했던 왕권 강화가 성공한 걸로 봐야 될까요? 그에게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그에 대해 더 알아볼 수 있었을텐데 말이죠. 시간은 신검의 편이 아니었습니다.
935년 11월, 신검은 그제야 새 왕으로 즉위합니다.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유폐한 3월부터 8개월이 걸렸죠. 하지만 왕건은 그에게 더 이상의 시간을 주지 않았습니다. 12월에 신라가 항복하면서 왕건은 모든 신경을 백제에 귀울입니다.
936년 6월, 견훤은 왕건에게 백제 토벌을 청 합니다. 견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요. 군인 출신으로 안 되는 건 내 손으로 없앤다는 쿨함이었을까요. 왕건은 아들 왕무와 박술희에게 병력 1만을 주어 천안으로 보냅니다. 최후의 결전, 아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서였죠. 그리고 자신은 전국에서 병력을 끌어모읍니다.
3개월간의 준비 끝에 마련된 병력은 총 팔만칠천오백. 이 전투는 후삼국 전투 중 특이하게 각 군의 현황을 다 보여주고 있죠. 이를 통해 그 이전의 전투에서도 중앙군과 호족군의 비율이 어땠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구요. 중앙군에서 홍유, 박수경 등 고려의 명장들의 이름이 나오고 호족연합군에서 김순식, 강공훤 등 유력 호족의 모습 역시 볼 수 있습니다. 덤으로 유검필이 북방 기병을 보유했다는 것 역시 보이네요.
이상하게도 고려군은 천안에서 남진하는 게 아닌 상주를 따라 현재의 구미 근처인 일선으로 향합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아무리 대군이라지만 그대로 뚫기엔 백제의 성들이 강했던 걸까요?
고창 전투 후 왕건은 일리천 근처에 일곱 개의 군창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낙동강을 따라 대군의 보급이 가능하게 했다는 거죠. 이걸 보면 마치 공산의 견훤처럼 미리 결전 장소를 준비하고 신검에게 그것을 강요한 거라고 봐야 됩니다. 결국 이 결전 한 번으로 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7. 최후의 승자
일리천 전투 얘기하려니 너무 길어지네요. -_-; 그냥 다음 편으로 넘기는 게 낫겠어요. 어차피 호족 얘기하면서 일리천 전투 언급도 해야 되니...
전체적으로 전투에서는 왕건이 견훤에 밀리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궁예 집권 당시 나주에서의 승전이 해전이라는 걸 생각하면 육전에서 이긴 건 사화진에서 붙은 것밖에 없죠. 이 정도면 유검필 없었으면 정말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네요. 대신 그렇게 전술적인 면에서는 크게 밀리지만 전략적으로는 이기는 모습을 보여 줬죠. 왕건이 결전을 준비한 이유 역시 국지전으로 계속 밀리니 자신의 장점을 이용해 한 방에 모든 걸 끝내기 위해서였겠구요.
결국 그의 가장 큰 힘은 호족 출신이라는 거겠죠. 공산 전투 이후에도 끝까지 왕건 편을 든 호족들이나 고창에서 보여 준 호족의 활약이 크게 보이는 이유입니다. 견훤이 중앙군을 둔전시킨 데에 반해 왕건은 이런 호족들의 힘을 잘 이용한 것 같구요. 이는 신라 왕족 출신이고 불교 출신이며 도적 -_-; 출신인 궁예나 신라 장수 출신인 견훤에 비해 왕건이 유리할 수밖에 없는 부분입니다. 또한 신라에 딱히 관련되지도 적대적일 필요도 없었기에 고려의 계승을 명분으로 삼고도 딱히 신라를 적대할 필요도 없었죠.
궁예가 미륵 사상과 함께 왕권 강화를 꾀한 것, 견훤 역시 왕권 강화를 꾀한 것에 비해 왕건은 혼인정책으로 최대한 호족들을 묶어두는 것에 급급했습니다. 시대를 바꾸고 싶었던 두 사람에 비해 현실적이었을까요. 이후의 왕들이 심하게 고생합니다만 이건 왕건에게 있어서, 그 시대에 있어서 최고의 방법이었을 겁니다. 조각조각 나눠진 땅, 일단 본드로라도 붙여 놓고 명목상이나마 같은 깃발 아래 놔 둔 다음에야 뭘 할 수 있었겠죠. 결국 시대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게 최선이었을 겁니다. 결과론이지만요 ^^;
그럼, 대체 이 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궁예, 견훤, 왕건 이 세 사람을 그렇게 머리 아프게 만든 호족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일리천 전투도 마무리 지으면서요. 다음 편은 "호족시대"입니다. 명주의 김순식부터 "궁예의 후손인" 백제의 김총까지... 한 번 다뤄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