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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3/07 12:23
"실제 과정은 어떠했는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라는 말의 쓰임을 살펴봅시다.
여기서 "실제 과정"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것은 가령, 1808년 12월 22일에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이 처음으로 연주된 상황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초연'이라고 부릅니다. 물론 이 연주(실제 과정)가 어떠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를 교향곡 5번의 초연이라고 부릅니다. 자, 그 실제 과정이 어떠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에 근거해서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초연'이라는 말은 잘못된 것이며, 거짓이거나 최소한 참이 아니다라고 해야 할까요? 우리는 여기서 저 "실제 과정"이라는 말이 기능하는 바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뉴턴의 사과 일화(그것의 과장 여부는 일단 논외로 하고)를 잘 모르는 사람을 상식을 모른다며 혀를 찹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 중 뉴턴의 머리 위로 사과가 떨어지는 "실제 과정"을 본 사람이 존재할까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더 재밌는 것은 정말 그걸 본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가 '나는 뉴턴의 머리 위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 과정"만을 근거로 삼는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뉴턴의 머리 위로 사과가 떨어졌다는 일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화가 거짓이며, 최소한 참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해야 할까요?(말할 것도 없이 이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의 스승이다', '김경희씨는 1987년에 주민등록증을 받았다' 등 온갖 역사적 진술들 모두를 포괄합니다. 이 예들이 '옛날 옛적' 일이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언급하는 사건들은 모두 옛날 일이며, 설령 비디오로 그것을 본다해도 그것은 비디오로 재생된 것일 뿐, "실제 과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나아갈 길은 우리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의 길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안다', '무엇이 사실이다' 라고 말할 때의 문법을 살펴보는 것입니다. 가령, "일을 실행한 당사자의 머릿속엔 생생히 남아 있다 하더라도 이를 그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라는 말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머릿속을 뒤져볼 수 없다면 애초에 그 머릿속은 아무 기능을 하지 않습니다. 고통으로 그라운드를 뒹구는 나니를 보고 제라드가 나니의 두뇌 속을 확인해보지 않고서는 그가 아픈 것인지 알 수 없다고 하면 어떨까요? 아마도 수천, 수억개의 악플이 달릴 것입니다. 우리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을 평가해보려고 한다고 합시다. 이를 위해서 실제로 우리가 그에 상응하는 사람들을 '죽여야만' 할까요? 이건 결코 도덕적 질문이 아닙니다. 유태인 학살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 유태인 학살을 재현하는 것과 동일한가를 묻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내가 본 것을 보여주는 것이 이해를 돕습니다. 가령, 어제 본 영화에 대한 나의 감상을 이야기하기 위해 친구에게 그 영화를 한 번 보라고 말하는 것(재미나게도 영화의 "실제 과정"은 나의 '감동'과는 무관하다는 점)은 적절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재현이 모든 경우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는 "나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은 '나의 고통', 즉 '나의' 신경조직에 존재하는 '나의' 고통을 느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이는 신도 행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고통을 타인이 느낄 수 없다는 건 우리가 고통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문법이기 때문입니다.(더 나아가면 우리는 신이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그런 상황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이는 신이라는 존재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합니다) "증거가 충분하다는 것도 그 증거들을 얽어매었을 때 하나의 논리가 성립하여서 충분하다"는 말을 살펴봅시다.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한가?' 물론 "더 세밀하게 들어갔을 때 오류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가 객관적이라는 것에 부여하는 의미입니다. 달이 지구를 돈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지구가 달을 돌 수 있다는 사실의 가능성 또한 인정하는 것입니다. 객관적 사실이란 틀릴 수 있기 때문에 객관적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충분히 믿을만한 근거가 있는 경우 그것을 사실이라고 부르며, 거짓이라고 부를 만한 근거가 있다면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거짓으로 판명났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이 존재한다는 사실로부터 참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생각은 결국 '사실이란 그 어떤 무엇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생겨납니다.('절대적 사실' 같은 건 언어가 놀고 있을 때 생겨납니다) '정말로' 이러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일상적인 언어 생활을 영위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철학을 할 때에만 이러한 생각을 합니다. 가령, 이 댓글은 실은 카스트랄오스티로스어(Castral Ostiros 語)로 씌어진 것이며, 한글과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적으로 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댓글에 대한 댓글은 전적으로 이 글을 잘못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글이 카스트랄오스티로스어일 가능성이 원천 봉쇄되기 전까지는 이 글의 의미를 결코 알 수 없다고 해야 할까요? 문제는 그 가능성이 봉쇄된다 하더라도 글쓴이가 '사실은 코스티스아그랄어(Costhis Agral 語)로 썼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이 댓글은 불가해한 것으로 남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사실이란 개념을 정말 진지하게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이 댓글에 대해, 나아가 이 게시판에 존재하는 모든 댓글에 대해 동일한 판단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그 판단이 적합한 것인지는 그 공동체 내에 속한 사람들이 내리게 되겠죠.
11/03/07 12:47
조금 주제와 엇나가는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최근에 읽었던 소설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한 현자가 인간은 무엇으로 증명되는가?를 전능한 존재에게 물었습니다. 그 존재가 답하기를 인간의 의사수단은 불완전하기 짝이 없고 자신처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믿음밖에 없다고. 결론짓기를 인간은 믿음으로 증명된다고 했습니다. 저도 사실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긴 합니다. 객관은 다수의 주관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저는 그것보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절대적 사실은 굳이 필요한가?라고 말하면 아니다는 쪽이라 사실의 존재유무에 대한 관심이 크게 없습니다. 뇌과학을 주워듣기로 뇌는 자기가 상상하는 것과 겪는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다 쓸모없고 의미없다는 회의주의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절대적인 사실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런 사실에 가까운 사실만으로도 인간이 살아가는데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물론 주관이 들어가고 해석이 들어가겠죠. 그래서 소통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정치적인 의미는 전혀 없습니다) 한줄 요약은 소통을 잘하자 입니다!(응?)
11/03/07 12:53
철학에도 그러한 입장이 있지요.
물질적인 존재가 먼저 존재해서 인간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하는 만큼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라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세상이 존재하는게 아니고 생각이 있을 뿐인거죠. 앞선 입장을 따르자면 사람이 없어도 우주는 존재하겠지만 후자의 입장을 따르자면 우주도 없는 셈이 되는 거구요. 저도 잘은 몰라서.. 귀찮아서 자세히 찾아보고 쓰는건 생략할게요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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