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1/03/07 02:41:30
Name 이웃집남자
Subject [일반] 밤이 환한 세상
밤이 되려 환한 세상이다. 거리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벌써 한 잔씩 거나하게 마신 듯 비틀대는 정장 차림의 남자 무리들, 헐렁헐렁한 바지에 일부러 삐딱하게 모자를 쓰고 눈에 잔뜩 힘을 준 채 거들먹거리는 사내들, 요즈음 유행 한다는 화장을 하고 100년만에 닥친 한파라는 뉴스에도 불구하고 짧은 치마를 고수하는 앳된 얼굴의 소녀들, 긴 코트를 입고 연신 명함을 공중에 날려대며 빨개진 볼과 코를 손으로 감싸는 삐끼들, 분홍색 동전 바구니를 무심히 내미는 새까맣고 쪼글쪼글한 주름을 가진 허리가 굽은 노인들, 이국에 와서 알 수 없는 저네 말로 크게 떠들며 길 가 한 쪽에 서 있는 하얗고 까만 외국인들.

밤거리는 사람들로 가득찼고, 그만큼이나 많은 건물들과 간판의 불 빛들로 가득했다. 빨갛고, 파랗고, 하얗고, 노랗고 온갖 색깔들이 해와 달과 별 대신 그 자리를 고스란히 메우고 있었다. 딱 딱 딱 딱.

이 번화한 지하철 역 앞 한 켠에 마련된 흡연자들을 위한 조그만 장소에서 여자는 딱 딱, 라이터를 켰다 껐다 반복했다. 가늘고 긴 담배를 입에 물고 깊숙히 한 번 빨면 담배 끝은 붉고도 노란, 주황색 비슷한 그 색을 띄며 환하게 빛을 발했고 곧 한숨 쉬듯 내뱉어내면 폐를 가득 채웠던 연기는 희고도 탁한 색으로 입에서 나와 공기 중에서 흩어졌다. 엄지 손가락에 힘을 주고 딱. 힘을 풀었다가 다시 힘을 주고 딱.

몇 몇 사내들은 주위에서 흘깃흘깃 그녀를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이 곳에 있은지는 벌써 삼십 분이 넘었다. 여자 혼자서 삼십 분이 넘도록 한 곳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기 때문에, 혹은 그녀의 세련된 스타일 때문에 사내들은 호기심이 동했지만 섣불리 누구 하나 그녀에게 말을 걸지는 못 했다. 그녀는 뭐랄까, 비싸 보이는 가방과 비싸 보이는 시계, 비싸보이는 구두와 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그 것들은 사내들에게 상대적으로 자신의 초라함을 느끼게끔 해주었달까. 그녀가 앉은 자리 밑에는, 그녀가 지금 입에 물고 있는 담배와 같은 종류의 것들이 대여섯개 정도 그 역할을 다 한 채 뒹굴고 있었다. 아마도 여태껏 그녀가 피운 것들이라고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이따끔씩 긴 생머리에 담뱃불이 닿지 않도록 걷어내며 그녀는 바닥만 보고 삼십 분이 넘도록 같은 자리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담배를 필터까지 다 피우고나면 바닥에 떨어뜨렸고, 그러고는 힐의 뒷 굽으로 아주 차분하게- 살아있는 불씨를 꾹꾹 눌러 밟았다.

"저기요."

여자가 고개를 들자 그 곳에는 여자보다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여자는 자기보다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를 재빨리 위 아래로 한 번 훑어 보면서 잠시 생각했다. 피부가 제법이네? 코는 손 좀 댄 건가? 옷은 그냥 그렇네. 그냥 어린 애인가보지?

"죄송한데 불 좀 빌려주세요."

여자는 자기보다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는 퍽 귀여운 미소를 짓고 옆에 턱 하니 앉았다. 그녀에게 여자의 비싸보이는 것들이 썩 크게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자는 이 당돌해보이거나, 혹은 속된 말로 싸가지가 없어보이는 자기보다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가 어쩐지 낯설었다. 여자는 핸드백에서 새 담배를 꺼내려 했지만 손에 쥐어지는 것은 빈 담배곽 뿐이었다. 아, 또 새로 사야하는구나 하면서 담배곽을 꾸깃꾸깃 구겨서 아무 데나 툭 던졌다. 담배곽은 아무 데나 툭 던져져서 이리저리 나뒹굴다가 한 차례 불어오는 겨울 바람에 저만치 데굴데굴 굴러갔다.

"저기, 이 거라도 피우실래요?"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가 불쑥 새 담배를 내밀었다. 여자는 아니, 괜찮…… 이라고 말 하려는데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는 갑자기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어디야? 뭐? 뭐라구? 안 들려, 좀 크게 말해봐아!"

전화를 받으면서 그녀는 나머지 한 손을 내밀어 여자에게 어서 담배를 받으라고 눈짓으로 재촉했다. 여자는 뭔가 말 하려다 그만두고 순순히 그녀의 담배를 받아들었다. 내가 피우는 거랑 다르네. 입에 담배를 물고 끝에 라이터를 대곤 엄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딱. 일순 훅 피어오르는 불꽃 앞에서 담배는 담배로서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몸이 타들어가고 연기와 재가 되어가면서 담배는 지친 누군가에게 위로로 변해갔다. 고작 삼사 분 남짓한 짧은 위로로.

"뭐야. 그럼 나보고 어쩌라구우. 그래서 안 나온다구? 나 지금 여기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린 거 몰라?"

한 시간 넘게. 나는 여기서 삼십 분이 넘도록 앉아 있었지만 당신은 일 분 전에 처음 봤는데요. 여자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혹시 모를 일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담배를 피우느라고 이 구석에서, 사람들 시선 피해 삼십 분이나 앉아있는 동안에 이 여자도 다른 곳에 있다가 그녀처럼 담배를 피우기 위해 이 구석으로 사람들 시선 피해 쫓겨왔는지도.

"야이씨… 아, 몰라. 됐어 끊어! 뭐? 아, 됐다구. 내가 너 남자친구를 왜 만나냐구. 어. 어. 어, 알았어 끊어. 너나 재밌게 놀아라."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는 토라진 얼굴로 전화를 끊고는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부츠 앞 굽으로 마구 짓이겼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새 담배를 또 꺼내고

"저기……."

여자는 힐끗 그녀를 쳐다보고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여주었다.

"감사합니다."

날은 무척이나 추웠다. 100년만에 닥친 한파에도 짧은 치마를 입은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는 바람이 한 번씩 불 때마다 오들오들 떨면서도 어미의 젖을 빠는 새끼마냥 담배 연기를 쭉쭉 맛있게도 빨아 먹었다. 딱 딱. 여자는 그녀를 보면서 라이터를 만지작 거리고, 그녀를 안 본 척 괜히 시선을 다른 데로 이리저리 돌리며 담배를 피웠다.

"쯧쯧쯧쯧."

그녀들을 힐끗힐끗 훔쳐보던 사내들도, 끝내 몇 개나 다 피운 담배를 아무 데나 툭 던져놓고도 말 한 번 걸지 못 한 채 사라질 때 즈음, 이 건물의 경비로 보이는 늙은 아저씨가 와서는 혀를 찼다. 한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한 손에는 쓰레받기를 들고 무심해 보이는 동작으로 바닥을 삭 삭 쓸었다. 여자와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는 자기들 밑으로 빗자루가 왔을 때 동시에 두 다리를 들었다. 빗자루는 그녀들의 높은 굽 아래를 지나갔고, 경비 아저씨의 말은 그녀들의 추위로 빨갛게 물든 귓가를 스쳤다.

"어디 기집들이 길에서 함부로……"

아, 지겨운 말이었다.
어디 사내도 아닌 기집년이 길에서 담배를 함부로 피우느냐. 그 것은 이런 길에서뿐 아니라 회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흡연실이라고 쓰인 그 곳은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여직원이 담배를 피우면 회사 사람들 모두가 다들 수근댔다. 저 여자, 담배 피는 여자야. 여자는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운 적은 없었다. 그 것은 이 회사에서 꽤 높은 자리에 앉아 계시는 아버지 얼굴을 생각해서라도 차마 못 할 짓이었다. 요즘은 흡연의 여부가 승진에 영향을 미친다는데, 요새는 그래서 남자들도 담배를 끊는 추세라는데.

다만 언젠가 어느 여직원을 가리키며 저 여자, 담배 피는 여자야 라는 말을 회사 직원들끼리 수군대는 것을 듣고는 더 이상 여자 화장실에서도 그녀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출근 하기 전에 담배를 피우고 스프레이로 된 구취제거제를 뿌리고 몸에는 향수를 뿌리고 출근했다. 그리고 퇴근하고 나서야 회사 사람들이 없을 법한 곳 즈음에서나 비로소 담배를 피웠는데 그 때마다 길거리를 지나가며 그녀를 보는 행인들이 다들 그랬다. 어디 여자가…….

그녀는 점점 담배 필 공간을 찾아서 구석을 향해서 슬금슬금 들어갔고, 그리고 한동안은 담배를 아예 피우지도 못 했다.

요 며칠간 야근 때문에 집에 돌아오자마자 제대로 씻지도 못 하고 잠들고 변기에 앉아서는 꾸벅꾸벅 졸다가 새벽이 되면 또 허겁지겁 양치를 하고 클렌징을 하고 샤워를 하고 오늘은 어제와 다른 옷을 입고 드라이를 하고 화장을 하고 핸드백을 챙기고 옷에 맞는 구두를 골라 신고 주차장에 내려가 차를 몰고 회사로 갔기 때문이었다. 20대 후반에 사내 최연소 팀장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을 때부터 그녀는 일부러 일을 더 찾아서 했다. 쟤는 아버지 빽이 좋으니까 라는 말이 듣기 싫었으므로. 그러면서도 무슨 여자가 저렇게 독해? 라는 말을 피하기 위해서 일부러 더 사근사근하게 굴기도 했고 최근에는 큰 프로젝트로 팀원들이 모두 그 일에 매달려 있어 야식, 하다못해 커피도 직접 사다 바치곤 했다. 그러면 다들 좋아했다. 저 팀장은 어리고 여자인데도 제법 수완이 좋아. 여자는 그렇게 딱딱하고 단단한 콘크리트 정글 속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딱 딱 .

여자는 경비 아저씨의 말을 듣고도 모른 체 했다. 그 정도 여유 쯤이야 있었다. 요 몇 일동안 계속되었던 야근도 마침내 끝났고 못 피웠던 담배도 맘껏 피우고 오랜만에 친구도 만날 생각에, 조금은 숨통이 트여 있었기에.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도 모른 체 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었다. 혹시라도 어린 맘에 발끈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경비 아저씨는 마른 입김을 훅훅 뿜으며 구석구석 담배 꽁초들을 쓸어서 쓰레받기에 담고는 옆에 있는 회색 쓰레기통에 탈탈 털어 넣었다. 여자는 라이터를 만지작 거렸다.

딱 딱.

"아 거참. 그 라이터 좀 그만 만지쇼!"

경비 아저씨가 느닷없이 빽 소리를 질렀다. 신경쓰여 죽겠다며 뭐라뭐라고도 했다.

"죄송해요."

여자는 경비 아저씨의 말 허리를 자르면서 사과했다. 제가 감히 길바닥에서 담배도 피우고 라이터도 딱 딱 거리는 죽을 죄를 아저씨께 지었네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키면서. 콘크리트 정글은 그녀에게, 새파랗게 젊은 여자 주제에 팀장까지 달아서도 살아남는 법 몇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그 중에 하나는 상대의 늘어지는 말 허리를 단숨에 베어버리고 고개를 숙여서 속으로는 욕하고 겉으로는 단호하게 한 마디로 상대를 번개같이 내려치면, 지금처럼 한 판을 따내는 것이다.
경비 아저씨는 뭔가 할 말이 더 있는가 싶었지만 입 속으로 웅얼웅얼 대더니 이내 홱 몸을 돌려 건물로 들어갔다.

"참, 별 꼴이야 그쵸오……."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는 소근소근 거리며 나름대로 애써 여자를 위로 하려했다. 저도 여자인데 왜 날 위로하는 걸까. 여자는 그 것이 조금 불쾌했지만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의 말을 못 들은 체 했다. 하지만 그 조그마한 소리를 어쩜 그리도 잘 들었는지 건물로 들어가던 경비 아저씨가 몸을 휙 돌려 또 빽 소리를 지른다.

"뭐요?!"

"……."

"아가씨. 지금 뭐라고 했어? 어어! 뭐어어? 별 꼴이야아아아?"

"아저씨, 아까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여자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를 위해서, 아까보다는 한결 더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대신 사과를 했다. 콘크리트 정글은 여자에게 어른이라는 계급이 해야 할 일도 가르쳐줬다. 어른은, 자기보다 어린 누군가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많았다. 가끔씩 이렇게 정작 자신이 잘 못 하지 않았어도 대신 사과도 해야했다. 그 게 어른이 된 거라고 콘크리트 정글이 가르쳤으니까. 하지만 경비 아저씨는 막무가내였다. 죄송하면 다냐, 지금 당신들이 피우는 담배는 또 여기다 버릴 거 아니냐, 무슨 여자들이 담배를 그렇게 피워대냐,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냐, 당신이 언니같은데 언니가 되어먹어 갖곤 동생한테 담배나 가르쳤냐, 참 좋은 거 가르쳤다아아아!
여자는 순간 어질했다. 아뇨, 저는… 저는 이 여자 언니가 아닌데요… 우리는 모르는 사인데요. 기껏해야 우리는 만난지 오 분도 안 됐는데요. 그리고 제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나요? 저 요즘 야근하느라 피곤해서 그래요…….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가 다 피운 담배를 바닥에 탁 소리가 나게, 조금 신경질 느낌이 묻어나게끔 버렸다. 여자는 조금 안절부절했다. 저 행위가 경비 아저씨의 심기를 더 건드리기라도 하면 어쩌나. 정작 신경질 낼 사람은 나인데. 아니 신경질 낼 거면 경비 아저씨한테 말이나 좀 해보지. 여자는 라이터를 만지작 거렸지만 엄지손가락에 힘을 주지는 않았다.

담배를 피기 위해 두어명인가 구석을 찾아 새로 들어온 낯선 사내들이 오도카니 구석의 구석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그들의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는 딱히 저들에게 좋은 구경거리가 되어줄 마음이 없었기에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조금 전처럼 말 허리를 자르려고 해도, 경비 아저씨의 말은 너무나 많았고 또 목소리는 너무나 컸다. 어느 타이밍에 말을 잘라야 할까 라고 재고 있으려는데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가 저기요, 언니 하고 불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날 부를 수 있단 말인가요. 아니, 게다가 언니라니. 우리가 언제 봤다고 내가 당신 언닌가요. 하지만 그 말을 일일이 하기엔 경비 아저씨가 너무 시끄러웠다.

"네?"

"전화오는 것 같으신데."

핸드백 속에 손을 집어넣어 휘적거리니 핸드폰 진동소리가 느껴졌다. 마침 만나기로 한 친구였다. 다행이다, 여기서 날 좀 끄집어내다오.

"여보세요?"

- 응, 민경아 나야… 혹시 많이 기다렸어?

"조금. 지금 어디쯤이야?"

- 아니, 저기… 저어, 나 지금 집인데…….

경비 아저씨는 여전히 소리를 쳐댔고 친구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는 새 담배를 또 꺼내 물고는 얌전히 옆에서 불 좀 달라는 듯이 앉아있고 사내들은 보다 못 했는지, 아니면 보다가 슬슬 질려 재미가 없어졌는지 아저씨 이제 그만 하시죠 라고 다가왔다.

- 오늘 원래 애 친정에 맡기기로 했었잖아. 근데 이번엔 애 아빠가 갑자기 몸살이 걸려서……. 어쩌지? 나 정말 가고 싶은데 못 나갈 것 같아. 우리 다음에 보면 안 될까?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응? 근데 주변이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너 무슨 일 있니?

"아냐… 일은 무슨. 아무튼 어쩔 수 없지. 으응, 괜찮아. 옷 따뜻하게 입고 나와서 별로 안 춥다야."

"아저씨 이제 그만 하세요. 거 좀 말 한 번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너무 그러시네."

"실수? 실수우우우? 저 봐. 저거 지금 여자 하나는 어디 어른을 앞에 두고 전화를 받고 있고 하나는 어디 건방지게 어른 앞에서 엉? 길에서 감히 기집애가 담배를 물고 있어?"

- 어머, 저 소리 지금 너한테 하는 거 아냐? 너 지금 욕 먹는 거 아냐? 너 지금 어디야? 신고해야하는 거 아냐?

"아냐, 나한테 하는 거 아냐. 아무튼 이제 그만 끊자. 남편 간호 잘 해주구. 응, 그래. 내일 볼 수 있음 보자. 응, 끊어."

"아아, 거 아저씨 그만 좀 하시라구요."

전화를 서둘러 끊고 나서 민경은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앞에서 삿대질 하는 경비 아저씨와 흥분해서 그냥 두면 따귀라도 올려붙일 기세인 그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내들, 그리고 슬그머니 어디선가 기웃기웃 나타나 고개를 내민 구경꾼들을 보며 창피함보다도 두려움이 먼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저 중에 회사 사람이 있으면 어쩌지? 그러다 문득 오늘은 회식이 있는 날이었다는 걸 깨닫고서 안심했다. 아마 이 곳과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늘 하던 곳에서 회식 중일 거라며 민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경비 아저씨에게 다가갔다.

사실 이제사 말인데 그녀는 꽤 키가 큰 편이었다. 그런 데다 늘 높은 힐을 신고 있으니 앉았을 때는 몰라도 일어서고 보면 웬만한 성인 남자 키만한 것이다. 슬슬 괜히 남의 일에 끼어들어 자기들만 고생한다고 생각해 어영부영 말리는둥 마는둥 했던 사내들도 그녀가 일어서 다가오자 얼결에 물러섰고, 경비 아저씨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민경은 콘크리트 정글에서 배운 젊은 여자 주제에 팀장까지 달아서도 살아남는 법 몇 가지 중에서, 남자들이란 대개 본능적으로 여자에게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나 이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여자를 특히 무시하는 남자들에게 민경은 무의식 중에 위협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것은 그녀의 도회적인 미모 때문이기도, 큰 키 때문이기도, 비싸고 세련되어 보이는 차림새때문이기도,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건실한 대기업의 최연소 여자 팀장이라는 명함 때문이기도 했다. 이 세 박자가 맞아 떨어지면서 남자들은 그녀를 자기보다 우위에 자리를 놓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주 찰나의 순간이나마 어린 여자 정도를 자기보다 우위에 놓았다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해서 되려 더 큰 소리를 치는 남자들 때문에 민경은 그 때마다 먼저 웃어보였다. 마치 수줍은 고등학교 여학생같이.

그러고나면 그런 것들도 꼴에 남자라고 순식간에 큼큼 헛기침 몇 번 하고는 다음부턴 조심해, 라고 하고는 더 이상 트집을 잡지 못 했다. 이 경비 아저씨도 그런 축에 드나보다. 그 역시 민경이 웃으면서 조근조근하게 죄송해요 아저씨 라고 말하자 큼큼 헛기침 몇 번 하고는 다음부턴 조심해 라더니 건물로 황망히 들어가버렸다. 그를 말리던 사내들도 멋쩍게 서서 머리를 긁적이며 슬그머니 사라졌다.

민경은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곳에는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가 여전히 담배를 문 채로 민경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그늘에 가리어져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마 그녀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리라. 라고 생각하며 민경은 그녀에게 다가가 딱, 하고 불을 붙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가 새 담배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민경은 그녀의 옆에 앉아서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바람이 안 부니 한결 덜 추워진 것 같았다. 딱 딱. 민경은 무심코 라이터를 켰다 껐다 했다. 딱 딱.

"저기요, 언니."

"네?"

"라이터… 왜 그렇게 자꾸 만지시는 거에요?"

민경은 힐끗 조금 더 어려보이는 여자를 쳐다 봤다. 그녀의 얼굴은 자세히 보니 생각보다 더 앳되어 보였다. 생각보다 더 앳되어 보이는 아가씨도 민경을 빤히 쳐다봤다. 민경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당황해 조금 서두르다가, 무심코 아무 말이나, 자꾸만 아까부터 입 안에서 맴돌며 갈 곳을 잃어 헤매던 말들 중 하나를 서둘러 꺼내버렸다.

"그 코… 코는 어디서 받은 거예요?"

생각보다 더 앳되어 여자는, 조금 당황한 듯 민경의 눈을 피하곤 코를 두어 번 찡긋했다.
딱 딱, 딱.
민경과, 생각보다 더 앳되어 보이는 여자는 담배를 다 피우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환한 길 가로 나갔다.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문득 저 밑에서 부끄러움이 훅 하고 밀려들어와 괜히 얼굴이 달아올랐다. 난처함과 수치심 등 여러가지가 동시에 고개를 한껏 빳빳하게 세운 채 그녀들을 내리 깔아보았다. 민경은 잠시 주저하다가 먼저 뻣뻣하게 인사를 하고는 후다닥 길 위를 일렁이는 인파를 헤치며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여러가지 감정들도, 인파 속에서 이리저리 부닥치며 점점 희미해져갔다. 아마도, 그 것은 밤이 되려 환한 세상이기 때문이리라.
지금은 밤이 환한 세상이다.


***
안녕하세요 두 번째 글로 뵙습니다.
여기까지가 이전에 올렸던 세 글 중에 두 글이네요. 세 글 중의 세 번째 글은 좀 더 차후에 다시 올리거나 해야겠어요.
그 전에 미리 써 둔 다른 글을 올려볼까 합니다.
휴일도 축구도 재미있게 잘 즐기셨나요? 저는 이제 바야흐로 전투에 임해야만 할 첫 번째 월요일이 다가왔습니다.
무장을 단단히 하고 약간의 설레임과 불안함이 두근두근 하게 만드네요. 조금 신나기도 합니다. (이런 저를 보고 주위에선 뭘 믿고 그러냐는 둥 회의적인 반응들이 많더군요!)
어서 잠을 자긴 자야 할텐데, 초저녁에 잠을 잠시 자는 바람에 정신이 비교적 멀뚱멀뚱합니다.
이 글은 첫 번째 글을 좋게 봐주신 분들이 많아서 용기내어 올려봅니다.
그냥 편하게 재미있게 슥 훑어보듯 읽어주세요.
모든 분들이 오늘도 좋은 새벽과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1/03/07 05:33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글의 흡입력이 있네요.

많은 글 자주 올려주셨으면 좋겠어요.
11/03/07 08:44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어요!!
11/03/08 01:56
수정 아이콘
장면이 선하게 느껴는데요.
길가로 나가기전까지는 이야기가 한 장소에서 이루어지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질문하셨던 윤여광님의 글 '약속'
https://pgr21.co.kr/zboard4/zboard.php?id=recommend&page=1&sn1=&divpage=1&sn=on&ss=off&sc=on&keyword=윤여광&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400
추천게시판과 에이스(ACE)게시판에서 윤여광님으로 이름 검색해 보시면 여러편을 보실 수 있어요.

양정현님의 글 '제목없음'
https://pgr21.co.kr/zboard4/zboard.php?id=ace&page=1&sn1=&divpage=1&sn=on&ss=off&sc=on&keyword=양정현&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96
역시 에이스(ACE)게시판에서 양정현님 이름으로 검색해 보시면 제가 링크한 글 외에 한편 더 보실 수 있어요.

고수끼리는 통한다죠?
링크한 두 글들 읽어보시면 내공을 느낄수 있으실 겁니다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7653 [일반] 미친 장거리연애 2주째입니다. [17] 삭제됨8657 11/03/07 8657 0
27652 [일반] "나는 가수다" 공연 영상 모음 [36] 전설28784 11/03/07 8784 1
27651 [일반] 오디션의 두 얼굴 - '나는 가수다', '신입사원' [23] 그 해 철쭉6916 11/03/07 6916 5
27650 [일반] [앨범추천]2011 月刊 尹鍾信 March - 윤종신 [9] 헤븐리4067 11/03/07 4067 0
27649 [일반] 사실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4] 그래요4617 11/03/07 4617 0
27648 [일반] KBS 방영 '닥터 후 시즌 4' 성우진 [5] 물의 정령 운디5076 11/03/07 5076 0
27647 [일반] "나는 가수다"에 출연했으면 하는 가수들 [155] juckmania9567 11/03/07 9567 0
27646 [일반] 지루한 월요일을 위해 (1) - 동방사악(東方四樂) [11] Cand4185 11/03/07 4185 0
27644 [일반] 밤이 환한 세상 [6] 이웃집남자3638 11/03/07 3638 2
27643 [일반] 축구를 보고 즐기는 건 좋지만 적당히 합시다. [212] Daydew7600 11/03/07 7600 0
27642 [일반] 치질 수술 후기 [18] 캐프35437 11/03/07 35437 8
27641 [일반] [EPL]완승이지만 찜찜한 승리 [75] 아우구스투스6175 11/03/07 6175 0
27640 [일반] 편집..... [29] 루미큐브5117 11/03/07 5117 0
27638 [일반] 노래 하나 추천해봅니다-> 정엽-loving you & nothing better [27] 안정엽4725 11/03/07 4725 0
27636 [일반] 레즈더비 맨유 vs 리버풀 후반불판~~ [457] 난다천사4478 11/03/06 4478 0
27635 [일반] 레즈 더비 같이 봅시다.. 맨유vs리버풀 [331] 난다천사3849 11/03/06 3849 0
27634 [일반] 이소라씨의 "바람이 분다" 듣고 난뒤... [45] awnim7719 11/03/06 7719 0
27633 [일반] 나는 가수다 첫 방송 후기 [96] 뜨거운눈물8100 11/03/06 8100 0
27632 [일반] 나는 가수다 영상. [96] 잔혹한여사11078 11/03/06 11078 1
27631 [일반] 토끼가 어제 죽었네요. [8] YoonChungMan4970 11/03/06 4970 0
27630 [일반] 포트리스2 블루가 포트리스2 레드로 재 탄생 한다네요. [15] 으랏차차6106 11/03/06 6106 0
27628 [일반]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 [중계 방송] [195] 종종종그그미7555 11/03/06 7555 0
27627 [일반] 교류에도 극성이 있다? [67] 빈 터10104 11/03/06 10104 1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