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양성 엔딩 부분 대사 많습니다. 크게 스포일러는 안 되겠지만 그것도 피하고 싶으신 분은 안 보시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최근에 올린 두 글은 따지고 보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시기를 각 나라 별로 본 것이었죠. 대충 다시 정리해 보자면...
나제연합 한강 수복 으쌰으쌰 (아 고구려 한강을 잃었습니다! 한성 백제의 꿈이 다시 이뤄지나요!)
신라 배반 한강 점령 (아아 신라 엠신공! 일점사로 영웅킬! 아 백제 왜 이렇게 됐나요...)
어느 한 쪽이 우위 못 잡고 지들끼리 으쌰으쌰 (저러다가 중국 통일되면 다 먹힐 텐데요? - 스포일러 하지 맙시다)
수 고구려 침공 (고구려 망하느냐 망하느냐! 막아냅니다! 아니 어떻게 저걸 막습니까?)
의자왕 신라 침공 (아 백제 다시 살아나네요! 오히려 신라가 망했어요! 앗, 신라 당나라와 동맹 맺습니다! 이러면 쉽게 못 치죠!)
당태종 고구려 침공 (수나라 때보다 숫자는 적지만 업그레이드는 더 잘 됐죠. 앗, 고구려 주력부대 녹습니다! 컨트롤 미스! 아 하지만 결국 방어선을 못 뚫습니다! 아, 저기서 막히네요. 아 결국 이제 소모전으로 나오네요. 고구려 계속 피로가 누적되겠네요. 같은 피해를 입으면 결국 당이 유리하거든요.)
나당연합군 백제 침공 (앗 북상하던 신라 주력 남하합니다! 동시에 당나라의 폭탄 드랍이, 어디로, 어디로, 어디로 갑니까? 아 백제로 갑니다! 백제 제대로 대응 못 합니다! 아 사령부! 사령부 깨집니다! gg! - 아직 잔여 병력이 남긴 했지만 사실상 백제는 끝난 거죠.)
당고종 고구려 침공 (당나라 다시 갑니다! 아 이번에도 버텨내나요? 어 근데! 근데! 동시에 폭탄 드랍이 옵니다! - 당은 병력이 남아돌거든요. - 아 버텨내나요? 아아! 결국 막네요. - 이건 막아도 막은 게 아니죠.)
재침공 (다시 당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됩니다! 일단 방어선에서 한 번 막히고! 어라 당 위로 돌아가네요. 동시에 신라 남쪽에서 북상! 아아! 방어선들이 연달아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령부 포위! 과연 이번에도 막아낼 수 있을까요? 막나요? 막나요? 아아! gg가 나옵니다! 고구려... 그래도 잘 싸웠습니다만 물량에는 버틸 수가 없군요.)
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_-; 이거 신나서 마구 써 버렸네요.
시작해볼까요?
이렇게 백제가 무너지고 고구려가 무너지고 당과 신라만 남게 됩니다. 당은 숙적을 제거하고 요동을 확보하게 되며 더 나아가서 주변의 나머지 적들도 제거하며 대제국을 만들게 되죠. 신라 역시 위험한 적들을 제거한 후 한 숨 돌리게 되죠. 하지만 이 동맹은 고구려가 무너진 직후부터 삐걱거리깁니다.
자, 나당연합이 생길 때로 돌아가 봅시다.
1. 나당연합
"어이 김춘추! 너래 떼놈들에게 알랑방구 고만 뀌라우 썅" - 연개소문
"김춘추는 개랑도 붙어 먹느냐 이 x벌놈들아!" - 백제 보성 벌교 출신 군사
"우리가 이 전쟁에서 뭘 얼매나 먹는가는 다 대장군 니 하기에 달린기라." - 김춘추
"몬~ 되면 다 내 탓이고, 잘~ 되면 다 매제 니 꺼내?"
나당 연합 얘기는 많이 했죠? 이 때 진덕여왕은 치당태평송을 지어 당 태종에게 바칩니다. 보시려면 아래 링크를 보세요.
http://mlkangho.egloos.com/10236264
엄청나죠? -_-;
이후 신라는 제도와 복식 등을 당나라 것을 따르는 등 딸랑이 짓을 많이 합니다. 김법민, 김인문 등 아들들을 당으로 보내기도 했으며 그 중 김인문은 당에 인정받고 관직을 받아 돌아옵니다. 그런 노력들이 결국 결실을 맺은 게 660년 백제 멸망이죠. 이듬해 661년에는 소정방이 위기에 처하자 김유신이 직접 고구려 영토를 가로질러 돕기도 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는 무려 20만 대군(백제 때의 나당연합군이 18만이었죠. 뭐 과장이야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을 보내서 한성을 점령하고 북진합니다. 평양성 성문이 열렸을 때도 신라의 특공대가 먼저 들어갔다는데 그건 잘 모르겠군요.
2. 웅진 도독부 창설
"하지만 김유신이 7월 10일에 도착하지 않으면 백제는 우리 당나라의 뜻대로 한다." - 소정방
"황제께서 백제 땅은 내게 준다 캤는데, 인제 와서 당나라가 직접 식민 통치 한다 카믄, 내는 뭐가 되는교?" - 김춘추
"우리의 최종 목표는 신라다." - 이적
"근데요. 백제 땅 언제 줄 건데요. 우리한테 준다 캤으면서 왜 이제까지 안 주는데예?" - 김법민
하지만 숙적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으로 기뻐할 때도 잠시였죠. 당은 백제를 웅진 등 5개의 도독부로 나누었고 평양성에 안동 도호부를 세웁니다. 여기에 신라를 계림 도독부라 칭하고 664년에는 웅진 도독 부여융(의자왕의 태자였다고 하는군요)과 맹약을 맺게 하죠. 이미 이 시점에서 신라는 당나라의 일부가 된 겁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도 고구려, 백제 부흥군 진압도 계속됩니다. 669년에는 활을 잘 만들었다는 장인 구진천을 데려갔다는군요. 뭐 끝까지 별의별 핑계를 다 대며 비법을 숨겼다고 합니다. 대단하네요. 이 때 핑계가 "신라 나무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습니더." 라고 해서 신라에서 나무를 베서 바쳤는데 그래도 안 되니까 하는 말이 "바다 건너 오니까 물 먹어가 그런 것 같은데예"라고 했다는군요.
670년 1월. 당은 사신으로 왔던 김흠순과 김양도 중 김흠순만 돌려보내고 김양도를 가두어 버립니다. 그 이유는 신라가 멋대로 백제 땅을 공격해서 먹고 있다는 거였습니다. 여기서 이미 분쟁은 극에 달해 있었나 보네요.
사실 그 때까지 신라가 했던 행동을 보면 당나라가 만만하게 볼 만 하죠. 거기에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입니다. 이제 신라 혼자 남았죠. 거대한 대제국이 완성되어 가는 당에게 신라는 그냥 한 줌이었을 뿐. 이 때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멸망에 대한 대가를 거의 받지 못 한 상황이었습니다. 길었던 전쟁으로 병력 피해도 상당했겠죠. 차라리 고구려와 백제였다면 병력 수라도 적었지, 이제 당나라의 압박을 받고 있는 신라. 어떻게 했을까요?
에 잠깐 다른 얘기 좀 하죠.
3. 김유신과 문무왕
"이 중에서 법민이는 자랑스런 대 신라국의 왕이 될기고, 우리는 끝까지 법민이를 따를 기다. 다들 알겠제? 우리는 당나라가 아니라 우리 신라를 위해 사우는 거다."
"느그들이 이딴 식으로 나오면 고구려보다 느그들을 먼저 칠기다! 느그 당나라 개x끼들 내 언젠간 이 땅에서 싸그리 쓸어버릴 끼다!" - 김유신
"아부지! 우리가 와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능교? 이랄라꼬 전쟁했는교?"
"인제 고구려와 당나라는 대장군하고 내가 맡을꾜! 아버지는 빠지소!" - 김법민
황산벌과 평양성을 볼 때 또 하나의 포인트가 있습니다. 황산벌에서 김법민 역할을 맡은 안내상씨의 표정 변화에 주목합시다. 이 글을 쓰면서 황산벌 대본을 얻게 됐는데, 초반에 김법민이 김유신이 무섭다고 하는 등 어린애의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실제 영화에서도 아버지 위세만 빌리는 순진한 모습이 나오죠. 하지만 황산벌 전투가 처절하게 진행되면서 뭔가 성숙해지는 모습이 보이더니 마지막에는 저렇게 아버지 김춘추에게도 일갈을 하게 성장합니다. 원래 대본을 보면 고구려보다 당나라 먼저 친다는 말을 김법민이 하고 김유신이 그걸 훈훈하게 바라보는 걸로 끝나더군요. 그리고 평양성 초반에 황정민 씨가 까메오격으로 문무왕을 맡는데, 거기서는 왠지 김춘추처럼 당의 위세를 빌려 고구려를 협박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고 당 고종이 한 말을 철썩같이 믿는 모습이 나오면서 뭔가 기대 이하였는데... 그게 훼이크였죠. '평양성 황정민'이라는 검색어가 있을 정도로 짧지만 강렬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즉 황산벌-평양성은 문무왕 김법민의 성장 드라마였던 거죠. 매소성이 나온다면 이게 확실히 나올 듯 하지만요.
자, 김유신과 김법민에 대한 얘기를 해 봅시다. 김유신은 우리가 다 아는 먼치킨이었습니다. 망해 가는 신라의 떠오르는 희망, 전투하면 이기고 백제에게는 그야말로 자연재해였습니다. 가야 출신으로 왕으로 추존되었다면 말 다 했죠. 하지만 우리가 아는 꼿꼿한 장군의 모습 외에 정치가의 모습도 엄청납니다. 자기 동생을 죽이려고까지 하면서 김춘추와 유대했고, 결국 김춘추는 왕에 오릅니다. 거기에 자기 아들 원술이 도망쳤다고 끝까지 자기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 이것을 장군이 아닌 냉혹한 정치가의 모습으로 본다면 정말 무섭습니다. 전쟁에 패해서 대부분 죽었는데 자기 아들이라고 용서한다면 정치적으로 몰렸을지 모르니까요. =_=; 황산벌에서 화랑들을 보내는 모습이 여기에 비유할 만 하죠. 전장에서는 무조건 이기는 장군, 정치가로서는 가야 출신인데도 골품제의 신라에서 최고의 지위까지 오른 인물, 이만한 인물은 한국사에 보기가 정말 힘들죠. 그 이순신 장군도 정치 감각은 없다시피 했으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그는 당나라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맞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아래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죠.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또는 영(永)으로도 썼다.>을 군문(軍門)에서 목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軍門)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_-a 영화의 대사를 그냥 만든 게 아니라는 거죠. 당을 도와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는 모습, 전쟁마다 이기는 것, 반굴과 관창을 희생하고 자기 아들도 희생하는 모습, 거기서 명장과 냉혹한 정치가, 잔혹한 계략가로서의 여러 가지 모습을 모아 볼 수 있습니다. 사실상 통일의 일등공신이며 현대에도 길이 남을 위인입니다.
문무왕은 어떨까요? 나당전쟁에서 문무왕이 보여주는 모습은 놀랍습니다. 싸울 땐 싸우고, 고개 숙일 땐 숙이죠. 단순한 약소국 왕의 모습이 아닙니다. 뭐 찬찬히 살펴보죠. '-'
4. 나당전쟁 발발
"개소무이 죽은 이상 고구려는 이미 끝난 기고, 인자부터 신라와 당나라의 전쟁이 시작된 기라!" - 김유신
"느그들, 백제에서 사울 때처럼 약탈하면 안 된 데이. 고구려의 민심을 얻어야 된다 이 말이다." - 김유신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는 고구려 부흥군 고연무와 함께 압록강을 건넙니다. 이를 보면 고구려 부흥군과의 동맹은 이미 맺어져 있었던 듯 하네요. 이것을 시작으로 문무왕은 고구려 왕족 안승과 그 유민을 받아들여 금마저에 정착하게 하면서 양쪽의 관계는 더욱 깊어졌죠. 이 때 문무왕이 웅진도독부에 화친을 위해 사자를 보내는데 이걸 보면 백제 땅에서의 신경전과 고구려 유민과의 합동작전 등에서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나 보네요. 이에 당은 사마 예군을 보내 신라의 동태를 살피죠. 이 때 당은 화친을 거부하고 신라를 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문무왕은 그를 가둔 다음 한 발 먼저 움직이죠.
7월부터 시작된 공세에 함락된 백제의 성은 82개. 뭐 큰 성이 아니라 작은 성들 다 합친 거라고 하더라도 정말 번개 같은 움직이죠.
이렇게 신라는 당나라의 폭력성을 증명하기 위해 선공을 쳐 보았습니다. 당 고종은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 하고 욕설과 함께 격한 병력을 보내죠. 떠오르는 스타 설인귀였습니다. 하지만 석성에서의 전투에서 신라는 무려 오천삼백의 전과를 올리며 승리합니다. 아마 이전처럼 백제 땅에서 벌어지는 작은 분쟁으로 생각하고 만만하게 본 탓이었겠죠. 설인귀는 "왜 어제의 신하가 오늘의 역적이 되었느냐"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죠. 대충 당이 신라에게 얼마나 잘 해 줬는데 이러냐는 내용입니다. 문무왕은 그에 답신을 보내는데 이것이 강수가 지었다는 '답설인귀서'입니다.
http://blog.naver.com/zuksoon25?Redirect=Log&logNo=70012616007
참 길어요. -_-; 대충 신라가 당나라에게 얼마나 충성을 바쳤는지 절절히 읊으면서 "백제 땅은 내게 준다캤는데" 왜 안 주고 충성을 바치는 신라를 배반하고 왜 백제 말만 듣냐는 거였죠. 백제를 신나게 욕 하는데, 여기서 백제는 웅진도독부겠죠? 당과 웅진도독부를 분리해서 얘기하면서 황제에게 반역할 뜻은 전혀 없고 그 쪽이 잘못해서 이런다는 거였구요. 어르고 달래면서 그래도 백제 땅은 우리가 먹어야 된다는 의지가 나오는 서신입니다.
672년. 당은 이근행을 보내 신라를 공격합니다. 이 전투에서도 고구려군과 같이 행동했다는 기록이 보이네요. 초전에서는 승리한 모양이지만 결국 패해서 많은 장수를 잃습니다. 이 전투가 석문 전투. 우리가 잘 아는 원술이 바로 여기서 패배했고, 도망갔다는 이유로 김유신에게 의절당합니다.
이게 보통 패배가 아니었던 모양이었는지, 혹은 당이 제대로 나섰다는 것 때문인지 문무왕은 황제에게 굴욕적인 서신을 보내죠. 여기도 내용이 비슷합니다. 백제가 당나라 군사를 끌어들여서 우리를 공격해서 반격했으니 제발 용서해 달라는 거였죠. 이 때 많은 공물을 보내서 사람들이 굶주렸다고 하네요. 한편 673년 7월에는 신라의 정신적 지주 김유신이 사망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이죠.
이렇게 문무왕 김법민은 당에 무릎 끓나 싶었죠. 역시 대제국에 조그만 소국이 맞서는 건 무리였을까요? 하지만... 전쟁은 아직 안 끝났죠.
4. 매소성, 화전양면전술
"내는 이제 신라 왕자 신분보다 당나라 관직이 우선이다. 내는 인제 신라 편 못 든다. 니 잘 알았제?" - 김인문
저런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서도 문무왕은 포기하지 않았죠. 당은 "고구려 배반자를 받아들이고(이 때 고구려에도 안동 도호부로 고구려 왕족 등을 임명했죠) 백제 땅을 차지한다"는 것을 들어 문무왕을 내리고 김인문을 신라왕으로 봉합니다. 황산벌에서야 호가호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김인문이지만 이 때 김인문은 그것을 거부하고, 이후 전쟁기간 동안 갇혀 있었다고 하는군요. 양 쪽 사이에서 고생하는 평양성에서의 모습이 아마 역사에 나오는 모습과 더 닮았을 겁니다.
하지만 문무왕은 이에 굴복하기는커녕 고구려왕으로 삼았던 안승을 보덕왕으로 다시 봉하면서 고구려 끌어안기를 계속합니다. 또한 계속 전투를 벌여서 결국 백제의 옛 땅을 다 점령하고 고구려 땅까지 공격하죠. 이것이 절정에 이른 게 매소성 전투입니다.
여기서 재밌는 부분이 전쟁을 계속하면서 또 다시 당에 사죄를 했다는 거죠. 이 때 당이 사과를 받아들이고 문무왕의 관직을 되돌려 주었다는 걸 보면 여기서도 잘 기었나 봅니다. 그러면서 또 치고 또 치고... -_-; 아무래도 당의 대군이 오면 사죄하고 물러날 거 같으면 올라가고 이런 식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672년에서 673년 사이에 신라는 임진강을 중심으로 10개의 성을 쌓습니다. 한 쪽에서는 밀고, 한 쪽에선 사죄하고, 한 쪽에서는 방어선을 두텁게 쌓고 있었던 거죠.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일대 결전을 피할 순 없었겠죠. 그것이 바로 675년의 매소성 전투입니다. 현재의 연천 지역에 있으며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한탄강에 위치해 있었다는군요. 기록상 병력은 3만 대 20만. 이 전투에서 신라는 무려 말 3만 380필과 다수의 무기를 노획하는 엄청난 전과를 이룹니다.
이 전투에서 크게 돋보인 게 바로 신라의 장창당이라고 합니다. 창의 길이가 무려 4.5m였다고 하는군요. 당군의 주력인 기병에 맞서 앞에서는 창으로 저지하고 뒤에서는 신라의 자랑인 활과 쇠뇌를 쏘는 형태였다고 하네요. 애초에 고구려의 기마대 등을 상대하기 위해 양성했던 건지 당과 대립하면서 준비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반대로 다른 전투에선 다 보이는 적의 수급이 안 나온다는 것(오천삼백이니, 천 몇 백이니 하면서 화려하죠 - -a) 때문에 실제 매소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럴 경우 전면전이 아닌 지속적인 게릴라로 당군이 후퇴했고, 그 뒤를 또 집요하게 쫓으면서 말과 무기를 노획했다고 봐야 되겠죠. 실제 그 직전 문행이 설인귀와 맞서서 1400을 참하고 전선 40척과 말 1000필을 뺏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를 보면 당의 전략은 이번에도 수륙병진이었고, 문행이 수군을 막아내어서 이근행의 육군은 홀로 고립되었다고 봐야겠죠. 이 때의 기록을 보면 곳곳에서, 19차례의 전투를 모두 이겼다느니 하는데 이 역시 대군을 곳곳에서 소규모로 찌른 것이라면 이렇게 많은 전투 수가 나온 게 이해가 됩니다. 거기에 매소성 전투의 지휘관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큰 규모의 전투였다면 이상하지만 각기 다른 부대가 게릴라로 계속 찌른 거라면 이해가 되죠.
20만이나 되는 당군이 몰살이든 군량 부족으로 퇴각이든, 임진강도 못 넘고 돌아갔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겠죠. 여기서 확실하게 전세는 역전된 것입니다.
5. 기벌포, 신라의 승리
"황제가 약속해 준대로 대동강 이남은 우리 신라가 갖겠십니더~" - 김법민
"느그도 남의 나라에서 전쟁한다고 욕 봤다. 이제 돌아가그라. 근데 고구려에서 약탈한 거 다 놔두고, 무기랑 말이랑 마차랑 다 놔두고, 몸만 남겨서 걸어서 돌아가그라." - 김유신
675년이 저물고 최후의 676년이 밝았습니다. 당군은 이번에도 다시 장기인 수군을 이용합니다. 기벌포에 당의 대군이 상륙한 거죠. 딱 백제 멸망 때 상황이죠? 여기엔 사찬 시득이 100척이 채 안 되는 병력으로 맞섭니다. 첫 싸움에서는 패했다는군요. 하지만 신라가 누굽니까 -_-; 이 때 벌어진 전투가 22번. 역시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역시 이번에도 전면전이 아닌 여러 차례 찌르고 빠지고를 반복했다고 생각해야겠죠. 이 때 목 벤 숫자가 4000이라고 하고, 설인귀는 이번에도 쫓겨납니다. 나름 영웅인데 신라와의 전투에서는 계속 패하네요. 이것으로 한반도에서의 모든 전투 행위는 종식됩니다. 결국 당은 평양의 안동 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기구요.
6. 평가
"전쟁에서는 말이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게 아니라 살아 남는 자가 강한 기야!"
"정치에서는 이렇게 해 준다~ 카믄 해 줄 지도 모른다~는 것이고 해 줄지도 모른다~ 카믄 안 해준다는 깁니더. 안 해 준다~ 는 말은 정치에서는 절대 안 쓰입니더." - 김유신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기타 토번, 돌궐까지도 밀어붙이던 당에 홀로 맞선 신라. 하지만 이 말도 안 되는 전쟁에서 이긴 건 신라였죠. 지금이야 나당 연합이랑 결국 대동강 이북 잃은 것 때문에 까이지만 엄청난 사건입니다. -_-; 이 때 문무왕의 전략이 정말 돋보이죠. 이미 전면전이 벌어지기 전부터 백제 영토를 가지고 계속 싸운 모양인데, 이 때 절대 당에게 반역한 게 아니라 저 백제가 우리를 공격한 거다는 식의 말만 계속 하죠. 백제가 진짜 백제가 아니고 당의 명령을 듣는 웅진도독부일 뿐인데도요. 고도의 정치감각입니다. 실제 대군이 오거나 크게 패하면 다시 당에 기고, 그 뒤로는 계속 영토를 늘리고 성을 쌓는 등 이중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전투 때도 당의 정예병에 맞서 전면전보다는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주로 했죠. 물론 위에 언급한 장창당-궁,노병의 조합이 당의 기병과 상극이라서 당이 때리다 지고 때리다 지고 해서 지쳐서 빠진 걸 수도 있구요 ^^; 거기에 고구려 유민과의 연계도 훌륭했죠. 매소성 전투 전 편성한 9군에서 이미 고구려와 백제, 말갈군이 포함되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시 이게 9서당으로 이어진 거겠죠. 그래도 고구려만 언급되고 백제는 찬밥인 생각이 많이 드는군요. 고구려는 그래도 원수까지는 아니었으니까요. 후에 견훤이 신라에 대해 강경한 정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외적인 요인도 많죠. 당은 당시 토번과의 전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제대로 말렸죠. -_-; 동서 극단으로 전쟁을 치르는데다 고구려와의 전투로 피해도 많았을 것이고, 덤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은 날뛰죠 -_-; 전후 신라와 당의 관계가 급히 좋아진 것도 발해의 영향이 크겠죠. 이후 신라는 당의 1순위 조공국이 됩니다. 아무리 주변을 다 오랑캐였다 하더라도 그 작은 나라가 이런 대접을 받는다는 것 역시 신라의 국력이 어떤지를 말해 주겠죠. 생각해보면 고구려는 중국이 통일된 후 반드시 없애야 할 적국 1순위였고, 신라, 발해는 당의 조공국 1위를 다퉜으며, 고려는 몽골의 부마국이 되고 조선도 비슷했던 거 생각하면 한국은 동아시아의 콩라인일까요? = =;
7. 신라
여러 번 언급했지만 신라는 조선과 함께 신나게 까이는 나라입니다. 글쎄요.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어땠을까요? 솔직히 긍정적인 가설이 안 나옵니다. 만주, 요동을 차지한 나라는 모두 멸망했고, 그 민족은 아예 없어지다시피 했거든요. 불과 100년전까지 존재했던 만주족은 지금 만주어까지도 잃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신라의 통일 전에도 나라가 망할 위기가 최소 두 번이었고, 이후에도 수 없이 많았죠. -_-; 누가 가상으로 역사를 만들었을 경우 '뭐야 저 전투 종족은." 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역사가 우리 역사인 거죠. 이런 기준을 고구려의 통일에 적용할 경우, 과연 고구려는 얼마나 버틸 수 있었을까요? 아쉬운 건 아쉬운 거지만 고구려가 통일했다고 잘 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애초에 중국 바로 옆에 있었는데 지금까지 버틴 우리 역사가 대단한 것이지만요.
그리고 결정적인 게 우리는 바로 신라의 후예입니다.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에 융합됐고, 그게 고려와 조선에 이어져 우리에게 오는 거죠. 민족의 배신자니 하지만 그 민족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게 바로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인 거죠. 애초에 삼국사기의 표현도 '일통삼한'입니다. 한민족의 형성이 북쪽의 고조선-부여로 이어지는 북방계와 진, 삼한으로 불린 남방계의 결합이라면 신라의 통일은 이 남방계+북방 일부의 통일인 거죠. 북방계의 정통성은 발해가 이어받았고, 후에 고려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발해의 유민들이 오면서 확실하게 한민족이라고 불릴만한 문화가 만들어지는 거죠. 뭐 단군신화도 그렇고 준왕이 마한으로 내려온 것도 그렇고 백제의 건국신화도 그렇고 이 북방, 남방의 결합에 할 얘기는 많지만 여기서 줄이구요. 확실한 건 '삼국통일'이라는 것부터가 민족을 너무 강조하다 보니 나온 말인 거죠. 물론 중국보다는 서로간에 더 동질성을 더 찾은 것 같고, 그래서 백제와 고구려의 유민이 신라에 합류한 거겠지만요. 이걸 물고 늘어지면 자기가 뭔 깽판을 쳤든 서유럽이 단결해서 러시아와 맞서야 된다는 히틀러의 말은 옳았을까요? 결국 서유럽은 히틀러의 말을 무시하고 러시아가 동유럽을 공산화 시키는 걸 허용해 버렸는데요. 그래도 한창 신라 까던 분위기가 조금 없어지기는 했는데 지금도 남은 거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결국 이 시기는 당이라는 거대 제국의 탄생에 의한 동아시아 질서 개편과 이 과정에서 신라의 살아남기입니다. 그리고 신라가 보여준 모습은 정말 대단했죠. 운도 좋았겠지만, 약소국이 살아남는 방법을 확실하게 보여 준 겁니다. 실력 차이가 어떻든 당당하게 맞서는 것도 훌륭하지만, 실력 차이를 인정하고 길 땐 기고 싸울 땐 싸우면서 자기 목소리를 확실히 내는 것 역시 훌륭합니다. 이후 신라는 그 힘을 내부로 쏟게 되면서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게 되죠. 에밀레종, 석굴암의 환기 시스템 등 지금도 당최 어떻게 만든 건지 알 수 없는 물건들이 많다는군요. 이런 나라를 자랑스러워 하지 않으면, 어떤 나라를 좋아해야 될까요?
다만 외부의 위협이 없어지고 그 힘이 내부로 쏟아지면서 신라도 슬슬 썩어 가게 되죠. 애초에 신라의 정체성이고 전쟁에서 큰 단결력을 만들어 준 골품제는 이미 한계였고, '한민족'이라는 민족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건 고려에게로 넘어갑니다.
후 그럼... 다음은 후삼국 한 번 다뤄보고 싶네요. 이왕이면 시리즈로요. ( - -)a
갈수록 글이 너무 길어지네요. 하던 말 또 하고 할 필요 없는 말도 하고... 글 쓰기 정말 힘듭니다. ㅠ_-; 고구려든 신라든 백제든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은데 글 하나로 줄여 버리니까요 ^^;
그러고보니 평양성 성적이 생각보다 저조하네요. ㅠ_-; 매소성 못 보는 걸까요. 에휴... 평양성 문 닫거나 관객 200만 넘으면 평양성 리뷰도 올릴려구요. 잘 됐으면 좋겠는데. 200만 넘기도 힘들 듯 하네요.
아 여담 하나만 더. 한국에서 설인귀는 꽤 유명하고 그에 관련된 설화도 많다고 합니다. 근데 정작 나당전쟁에서 설인귀를 이긴 문행, 시득은 거의 한국사에 이름이 없죠. 김유신의 그림자에 묻힌 걸까요? 아무튼 아쉬운 부분입니다.
이상 황산벌, 평양성을 통해 본 삼국시대 말기 삼부작은 끝냅니다. (__)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후삼국 삼부작 기대해 주세요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