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전태일 열사 분신,산화 40주기네요.
며칠 전 다시금 '전태일 평전'을 꺼내 들고 오늘까지 바쁘게 읽어내리고 다시 덮었습니다.
읽을 때마다 새삼 느낌이 다르게 다가오네요.
특히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 대한 인상이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제가 학술모임에서 발제할 때 썼던 글 중 이소선 어머니에 대한 부분만 발췌했어요.
졸필이지만 함께 읽고 싶어서 올립니다.
□ 또 다른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
"실천하는 사람이 돼야 해요.
엄마가 나를 그렇게 키웠으니 내가 이런 생각을 한거야.
나는 자기보다 남을 더 사랑하고 도와줘야 한다는 엄마 말을 따라 자라서
그대로 실천했으니까 엄마도 내 부탁을 들어주세요.
엄마가 내 친구들하고 노력해서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노동자들에게 이익을 준다면 많은 아들 딸과 함께 살게 될거야."
- 전태일이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남긴 유언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 전태일의 분신 이후 현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여름 땡볕과 겨울 칼바람 속에서도
강고하게 옥고를 견디며 투쟁했다. 이소선은 40년 동안 늘 노동자들을 누구보다 따뜻한 품으로 안아
그들을 위로했고, 누구보다 차갑게 부당한 자들을 일갈했다. 세상이 외면한 그들을 기꺼이 떠안아 준
이소선은 어머니였다. 그래서 이소선과 연을 맺은 이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어머니, 엄마라고 부른다.
이 중 故 김대중⋅노무현 前 대통령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소선은 10평 남짓한 단독주택에서 살고 있다. 6000만원 전세의 단출한 살림이지만,
이곳에 사는 그녀의 삶은 결코 단출하지 않다.
여든을 넘긴 연세가 무색하게 그녀는 아직도 그 어떤 살아 숨 쉬는 것들보다 왕성하다.
"우리 아들이 대학생 친구 하나 갖는 기 한을 했는데, 배왔는 지식 갖고 모른 척 외면하는 건 옳은 일이 아이다."
스스로 무식하다 말하는 이소선은 그 어떤 지식인보다도 날카롭다.
인간다움을 갈구하는 그녀의 신념과 행동은 가방 끈 긴 먹물들보다 더욱 치열하다.
세월의 격랑 속에서 온전하게 그 자태를 지켜나간 이소선의 삶은 거칠지만 곱다.
과거가 불운했다고 지금 과거를 원망한다면
불우했던 과거는 영원히 너의 영역의 사생아가 되는 것이 아니냐?
- 전태일의 1969년 12월 31일 일기에서
초등학교 학력이 전부라던 전태일이 써내려간 일기들은 내로라하는 명망 있는 글쟁이의 글보다
현학적이면서 명료하고 예리하다. 이러한 전태일의 모습은 이소선을 빼다 박았다.
그 어머니의 그 아들이 맞다.
양심을 말하면 앙심으로 갚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 어느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내쉬던 숨을 거두는 죽음이 아직 유효한 시대다.
풍요롭지만 민중의 삶이 눅눅해진 지금 전태일은 우리 시대의 희망이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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