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못 먹는 음식
지금도 굳이 찾아서 먹지 않는 음식이 있다면 [오이지]와 [미역줄기볶음]일 것이다.
둘 다 초등학교 때 먹고 넘기질 못해서 구토를 했었던 기억이 있는 음식들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트라우마를 심어줬던 것은 선생님의 체벌이었다. 음식을 못먹어서 남겼다고 그 선생님은 매를 때리고 반성문을 쓰게 했었다.
반성문을 쓰지 않으면 집에 못가고 집에 알리겠다며 겁을 줬었다. 어쩌겠는가, 초등학교 2학년이. 계속해서 남아있다가 결국은 마지막에 못참고 집으로 갔고, 그 다음날 30대 가량을 맞아야 했었다.
그게 뭐라고 그렇게 매를 때렸었는지.
나중에 3학년이 되자 학교에 돌던 소문이 애들한테 히스테리를 부려서 스트레스를 푼다는 소문이 돌았다. 하지만 그 이후로 음식을 남겨도 학교에 남는 일도, 매를 맞는 일도 없었다. 물론 선생님들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하지만 야채는 좀 먹으라는 말은 들었다.)
여전히 나는 두 음식을 먹지 못한다. 안먹는 것인지 못먹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젠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심지어 나 조차도.
2. 아픈 손가락
내 동갑내기 친척이 나를 평하길 나는 집안의 '아픈 손가락'이라 평했다.
내 아버지는 집안에서 제일 예쁨받던 막내였고, 학벌이 제일 괜찮았었고, 그래서 꽤나 기대를 받았었지만, 가장 일찍 세상을 뜨셨다.
내가 5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께선 나를 혼자 키우셔야 했다.
어머니도 일을 알아보셨지만 각자 막내였던 우리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있던 유산을 당겨받은 덕에 넘치지는 않아도 모자란 생활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이 나를 챙겨줄 때는 그 호의들이 만만치않게 부담스러웠다.
받는게 뭐가 부담스럽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자기 자식들을 제치고 나를 챙겨준다는 느낌이 강해지던 순간부터 그 부담이 너무 크게 다가왔다. 나는 그 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이걸 깨달았던 게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부터였다.
제일 나를 소위 '극진하게' 챙겨주셨던 분들은 셋 째 고모와 첫 째 큰아버지셨다. 그 중에서도 고모는 나를 엄청나게 챙겨주셨었는데, 초등학교 때 고모네에 갈 때마다 나는 친 자식에 장손인 것 마냥 대접을 받았다. 고모네에는 방학 때 마다 방문을 했었는데 한 번 갈 때마다 거의 한달 두달을 넘게 있었다. 방학을 꼬박 그 집에서 보낸 셈이다. 그리고 그 기간동안 그런 대접을 받았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 집에서도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다 커버린 성인이 되서야 내가 고모네에 갔던 것이 어머니가 가라고 해서 간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고모가 나를 부른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집에는 3남매가 있었다. 큰누나는 대입을 준비하고 있었고, 둘 째는 딸이었는데 나와 동갑이었으며 막내는 나보다 한 두어살이 어렸었다. 고모는 큰누나는 대입 준비를 하기 때문에 챙겨줬었고, 막내는 막내였기 때문에 오냐오냐 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동갑내기인 그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나중에 말하길 나를 정말 싫어했다고 했었다. 말은 오지게 안듣지, 눈치는 더럽게 없지, 말은 겁나 싸가지 없이 하지, 그렇다고 미움을 받느냐, 그것도 아니도 예쁨만 받지, 도대체 쟤는 뭘까 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싫어할 만 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이 되서 다시 되짚어보니 내가 뭔가 내가 받아야 할 것 이상으로 받은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그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어릴 적에도 그 친구가 좋았지만, 어찌보면 그 친구는 나를 싫어하지 않았을까, 내가 어릴 적에 걔한테 가야 할 것들을 뺏어간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이 들자 너무나 미안해졌다. 나중에는 죄책감으로까지 발전을 해서 그 친구를 보면 괜히 미안해지고 내가 기회가 된다면 뭔가 요청을 들어줘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친구와 나는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었고 둘 다 서울에서 자취를 하게 되었다.
서울에서 자취를 할 때 나와 그 친구는 다시 만났다. 우연히는 아니고 친척 형의 결혼식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 이후로 명절마다, 혹은 친척 형의 주도로 다들 한 번씩은 모였었는데, 그 때 다시 번호를 교환하고 서로 연락을 다시 하게 되었다. 가끔씩 서로 만나서 이야기도 하고 세상살이 이야기도 하면서 술도 마시고 밥도 먹었었고 그렇게 서로 안부를 다시 묻다가 나는 군대로 갔다.
군대에서도, 제대를 하고 나서도, 그 이후에도 SNS로, 전화로, 가끔씩은 만나서 각자 인생살이에 대한 한탄들, 미래에 대한 불안들을 나눴다. 하지만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나는 자꾸만 그 친구가 나를 챙겨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게 못내 미안해서 챙겨주고 싶었지만 항상 한발짝 늦게 눈치채고 후회만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나와 그 친구 둘 다 졸업을 하고 그 친구는 대학원으로 나는 회사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작년, 내가 첫 월급을 받고 상담을 잘 들어주셨던 누님께 밥을 사고난 다음에 그 친구를 찾아갔다. 고기를 구워먹고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하다가 어릴 때 이야기가 나왔다. 이미 여러번 이야기 했었던, 고장난 인형처럼 어릴 적에 민폐끼치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니 그 친구가 하는 말,
"야, 아무리 우리 엄마가 너를 챙겨줬어도 친자식 이상으로 챙겨줬을 거 같냐. 나 안챙겨주신거 아냐. 단지 네가 챙겨받은 이유는 네가 네 아버지의 '아들'이어서가 아니라 '네 아버지'의 자식이기 때문이야. 네가 딸이었건 아들이었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을 거야. 중요한 건 집안에서 예쁨을 받았던 막내동생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났는데 그 막내의 유일하게 남은 자식인 너를 얼마나 가엽게 보았겠니. 그러니 더 이상 죄책감 가질 필요 없어."
그렇게 술을 먹고 돌아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좋은 친구다. 그리고 나는 항상 챙겨받기만 하는구나.'
내가 그 친구 처럼 언젠가는 챙겨줄 수 있을까.
3. 9시 15분 전
어릴 적 어머니와 나는 게임 때문에 싸운 적이 여러번 있었다.
어머니는 내가 게임하는 걸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었고, 나는 그걸 어떻게든 뚫어보려고 발악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밤에 잠깐 나가실 일이 있었다.
'OO야, 9시 15분 전까지만 해라.'
'네'
나는 굉장히 신이 났었다. 나가실 때가 8시 15분이었으니 '와! 1시간이나 게임을 할 수 있어!'
그렇게 게임을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돌아오셔서는
'너 왜 컴퓨터 안꺼? 왜 약속 안지켜?'
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는 억울했다. '9시 15분까지라면서요!'
당시의 시각은 밤 9시.
이것 때문에 서로 30분 가량을 말싸움을 했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그래, 9시 15분 '전'! 그러니까 8시 45분이지!'
어머니는 딱 30분만 하라고 나한테 말한 거였다. 나는 그걸 1시간으로 알아들었고.
서로 이 사실을 알고 큭큭대면서 사과 하나를 깎아먹고 자러 들어갔다.
4. 지갑
내가 아주 어릴 적에, 6살인가 5살 즈음에 어머니께서 내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고 한다.
'OO야, 만약에 엄마 죽으면 어떻게 할꺼야?'
그러자 내가 한 말,(이라고 하신다)
'지갑은 주고 가.'
아무리 어려도 돈있으면 적어도 먹고 살 수는 있다는 것을 알기는 알았던 모양이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5살짜리 애 입에서 나오기에는...
-마치며.
내가 저렇게 예쁜 기억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그만큼 나를 잘 보호해줬다는 반증일 겝니다.
좋은 기억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그래도 무던히 커서 사회에 나올 수 있었던 건 분명 어머니의 덕입니다.
요즘도 자주 의지를 하곤 합니다만 회사 생활 힘들다고 찡찡 거릴 때 마다 사업하시는 입장에서 팩트로 두들겨 패시는 건 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