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에서 형양을 탈출해 성고로 바람처럼 도주한 유방
형양성에 갇힌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진평의 책략과 기신의 희생으로 겨우겨우 탈출해 항우를 피해 서쪽으로 달아났던 유방은, 일단 형양 후방의 방어 기지인 성고에 입성했습니다. 성고의 근처에는 훗날 우리가 '삼국지' 로 잘 아는 호로관 등이 있고, 삼국지 관련 소설 및 게임으로 많은 분들이 잘 알듯 호로관 쪽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낙양' 이 나옵니다. 낙양에서 장안까지야 일도 아니구요. 즉, 성고야 말로 대 항우전에서 유방의 최후의 방어기지였습니다.
형양에서 여자들까지 사지로 내몰고, 측근 신하마저 항우에게 잡혀 불에 타서 죽게 되는 굴욕을 당한 유방은 당초에 성고에서 조금 더 서쪽으로 물러나 본거지인 관중에 들어간 이후, 모든 휘하 전력을 전부 소집해서 다시 동쪽으로 나와 항우와 사생결단을 내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초한전쟁 내내 유방은 항우에 대해 여러차례 호전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다만, 주위에서 여러차례 유방의 투쟁심에 브레이크를 걸었고, 유방이 이런 의견들을 받아들이면서 무모한 싸움을 펼치진 않은 것입니다.
이때 유방에게 브레이크를 건 사람은 원생(轅生)이라는 사람입니다. 성이 원씨요 이름이 생인것이 아니라, '원씨 성을 가진 선비' 정도로 이해하면 됩니다.
똑같이 옛날의 일, 군웅할거와 전쟁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사기' 와 '삼국지' 등이지만 정사 삼국지에서는 이런 조언 및 계책, 특히 군사전략 같은 큰 부분에 대한 조언 등은 대부분 어떤 사람이 말했고 누구 머리에서 나온 전략인지는 대부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것이 호족사회, 관료사회였던 후한 말 삼국시대와는 달리 육국이 무너지고, 이를 통합한 진나라 역시 또다시 무너지며 단기간에 모든 것이 흩어진 초한쟁패기에는 무언가를 기록해 문자로 남길 사람들이 극히 부족했고, 그나마 공적인 기록-이를테면 누가 어디를 공격해서 전과를 올렸다거나 하는 기록이라면 어느정도 명확하게 남지만 그 사이에 펼쳐진 여러 크고 이야기들을 따로 남길 사람은 극히 적었을 겁니다.
유방 휘하의 여러 이름난 장수들, 즉 주발이나 하후영, 번쾌, 조참, 부관, 역상, 관영, 근흡 등의 열전 및 세가를 보면 '전쟁 중' 의 '이야기'는 사실 별다른게 없습니다. 그저 끝없이 '어딜 가서 어디를 점령하고 누구를 치고 누구를 죽였다' 는 내용의 '공적인 서류나 혹은 죽고나서 비석에 공으로 써둘' 정도의 내용만 한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그 와중에 무슨 의도를 취했는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내용은 거의 없는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는 공신들, 특히 장군들의 여러 이야깃거리는 되려 전쟁이 끝나고 혼란이 어느정도 종식되고 문인들이 여러 크고 작은 일에 끼어들어갈 수 있었을 즈음에야 더 많이 남아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전쟁 중의 일화가 남아있는 것은 거의 대부분 유방의 빈객이었던 육가(陸賈)라는 인물이 초한춘추(楚漢春秋)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자신이 당대에 보고 듣고 한 일을 정리하여 남긴 것이 대부분인데, 육가로서도 그 모든 일을 자신이 경험하거나 확실하게 정보를 얻을 수는 없었을 테니 불분명한 부분이 없지 않습니다.
때문에 초한쟁패기의 싸움을 보면 수 많은 생(生)들이 등장합니다. 이 생들은 결코 자신들이 직접 역사를 움직이진 못했지만, 역사를 움직이는 사람들의 옆에서 끊임없이 조언하고 계책을 내놓았습니다. 관중을 장악하고 천하의 패자가 된 항우에게도 충고했던 한생(韓生) 같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물론 항우는 충고를 듣지 않고 되려 삶아서 죽였지만 말입니다. 유방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는 장량이나 진평 같은 소위 영웅호걸들의 조언이나 힘 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역사에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했던 사람들의 조언도 물리치지 않고 취하며 그 힘을 다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그 유방의 후예인 한나라의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옛날, 고조께선 훌륭한 말을 들으면 오직 그 말을 따라잡지 못할까만을 걱정하였으며, 간언을 좆아 이를 돌리듯 하였으니,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능력을 따지지 아니하고, 단지 공로만을 거론하면서 그가 처해있던 위치를 따지지 아니하였으니, 이로써 진평은 망명하는 중에 일으켜 세워서 책모(策謀)를 주관하게 하였고, 한신은 행군하는 진지 속에서 끄집어내어 상장(上將)으로 삼으셨으니, 그러므로 천하의 선비들은 구름같이 한나라로 모여 왔으며, 서로가 다투어 기이한 일을 올렸으며, 지혜가 있는 사람은 그 계책을 내는데 온 힘을 기울였고, 어리석은 사람조차도 그의 가진 생각을 다 꺼내놓았으며, 용사는 그의 힘을 극도로 발휘하였고, 겁먹은 지아비들조차 그들이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일하였습니다."
"천하의 지혜를 합치고 천하의 위업을 아울렀으며 이리하여서 진나라를 들어 올리는 것이 마치 새털 같이 하였고, 초나라를 빼앗는것을 마치 줍듯이 하였는데, 이것이 고조를 천하에서 대적할 자가 없도록 하게 만든 이유입니다."
- 초한전쟁 200년 뒤, 매복(梅福)이 성제 황제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 中
이때 원생은 유방에게 다음와 같은 충고를 올렸습니다.
"한나라와 초나라가 형양을 사이에 두고 싸운 것이 몇년 째에 이르렀는데, 늘 한나라가 곤란하였습니다. 신이 바라옵건대 왕께서는 무관을 나서십시오. 그러면 항우는 이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할 것이니, 항우를 끌어낸 우리는 참호를 깊게 파고 보루를 높이 쌓아 대치하면서 수비만 하면서 싸우지 마십시다. 그렇게 되면 형양과 성고의 병력들은 당분간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는 사이에 한신이 조나라 땅을 안정시킨 후, 연나라와 제나라를 병합하면 됩니다. 이후 다시 대왕이 형양으로 나아간다면 초나라는 막을 곳이 많고 힘이 분산되지만, 한나라는 충분히 휴식을 취했으니 능히 무찌를 수 있습니다."
원생의 제안을 들은 유방은 사생결단을 내겠다는 자신의 본래 계획이나, 굴욕을 당장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버렸습니다. 사실인즉 본래 계획을 버린 수준이 아니라, 이후 전쟁 동안 유방의 행동을 보면, 항우를 이곳 저곳으로 끌어내며 수비하며 지치게 하고, 자신의 병사를 휴식시키는 동시에 적의 힘을 분산시켜 공격한다는 원생의 전략에 모든 것을 입각해서 움직였습니다. 말하자면 이 이름없는 인물.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 인물이야말로 초한전쟁의 대전략을 종합했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고에서 서쪽 낙양 쪽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온 유방.
유방은 경포와 함께 원생의 말대로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당장 소하가 관중에서 보내주는 인력을 얻어 쉽게 싸우려고 한다면 서쪽으로 가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나 유방은 남하하며 지도에 보이는 핑딩산 시 남쪽에 위치한 섭(葉) 지역을 지나, 역시 삼국지로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완' 으로 이동하면서 흩어진 병사를 자력으로 수습했습니다.
한편 아직까지 형양성을 포위하고 있던(놀랍게도 이 시점까지 형양은 함락되지 않았습니다) 항우는 유방이 남쪽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을 듣자 주력군을 이끌고 유방을 잡기 위해 남하했습니다. 만약 유방이 관중으로 들어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오는 전략으로 갔다면, 항우는 차례대로 형양과 성고를 깨며 서진하는 것 밖에 선택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유방이 남쪽으로 내려갔기에 항우에게는 선택지가 생긴 셈입니다. 그리고 항우는 유방이라는 미끼에 그대로 걸려들었습니다.
항우의 군단은 순식간에 완성으로 몰려와 성을 포위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설사 유방이 대군을 이끌고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함락을 피하기 어려웠을 형양성은 항우의 주력군이 완으로 이동해 전력이 분산되면서 함락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전면전을 피한 것이 오히려 성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 셈입니다. 다만, 이제는 완성에 갇혀 있는 유방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유방 역시 항우가 올 것을 뻔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미리 수비를 굳혀놓고 저항하고 있으니, 항우로서도 별 도리 없이 형양에서처럼 지구전 양상으로 싸움을 전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시간만 지리하게 끌며 적의 진을 빼고 있을 무렵, 눈 앞의 유방만 보고 있던 항우에게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집니다. 충격적인 소식의 내용은 바로 팽월의 공격이었습니다.
삼국지 11의 팽월
팽월은 본래 거야택(巨野澤)의 수적 무리 대장으로, 반 진나라 전쟁이 일어나자 개별적으로 군사를 일으켜 만 명에 가까운 무리를 거느렸습니다. 나름대로 진나라와 싸우는 공적이 없지는 않았으나, 항우가 18 제후왕 분봉을 할때는 철저하게 소외 되어 무리를 이끌고도 갈 곳이 없었던 차였는데, 마침 제나라의 왕 전영이 항우에게 대항하자 그 부추김을 받고 항우를 공격하는 유격대 대장으로 활동했습니다. 이후 유방이 팽성에 입성할 무렵에는 그에게 항복하여 한나라에 붙었고, 팽성에서 유방이 대패하자 일단 초나라 북방으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던 중이었습니다.
고우영 초한지 中
고우영 초한지 등의 여러 초한지 소설이나 만화에서는 흡사 팽월이 항우의 부하였다가 배신한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있는데, 팽월은 항우의 부하였던 적이 없습니다. 애당초 항우가 팽월에게 뭐라도 떡고물 하나 던져줬으면 그렇게까지 항우를 괴롭히진 않았을 겁니다. 다만 사기 전담에서,
'팽월은 당시에 양 땅을 거점으로 중립을 지키면서 한을 편들기도 하고 초를 편들기도 했다.' (彭越是時居梁地, 中立, 且為漢, 且為楚.)
라는 구절이 있기는 한데, 아마도 이것은 실제로 초나라의 군사세력으로 활동했다기보다는 상황에 따라 유방에게 협조하지 않고 간을 보면서 떡고물을 얻어내려는 행위에 가까웠을 겁니다. 팽월 자체는 전쟁 내내 항우를 괴롭히는 최악의 상대였습니다.
여하간 그 팽월이, 바로 이 시점에 초나라의 후방 지역인 하비를 공격했습니다. 역시 '삼국지' 로 유명한 그 하비 말입니다. 이 지역은 초나라의 수도인 팽성의 후방 지역으로, 항우의 입장에서는 앞만 보고 있다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군단이 오함마로 자신의 뒤통수를 후려 갈기는 셈이나 다를 바 없는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이에 당시 후방에 남아있던 초나라의 장수인 항성(項聲), 설공(薛公) 등이 팽월을 막기 위해 나섰지만, 노련한 팽월에게 처참하게 대패하고 장군 설공은 아예 전사하기까지 했습니다. 이제 초나라는 전방에는 유방, 후방에는 팽월을 두고 샌드위치처럼 끼워버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런 전략적 관점을 떠나서도 지금의 상황은 당장 팽성이 또다시 함락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형국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아무러한 항우도 당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초한전쟁 당시 지리적인 면에서 초나라의 가장 큰 문제 중에 하나는, 초나라 본국이 너무나도 쉽게 적에게 노출된다는 점입니다. 한나라의 관중 지역이 그 자체로 천혜의 요새이고, 장한이 격파된 이후엔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적이 전무한 것에 비해 초나라의 팽성 근처 지역은 수도 없이 팽월에게 털렸고, 멀리 북쪽을 통해 유방이 보낸 군단이 백도어로 후방으로 투입되는 경우도 있었으며, 한신이 북방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그 압력에 바로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초나라의 지리적 약점은 여기에 더해 막상 항우 본인이 없는 지역에선 별다른 승전 한번 제대로 거두지 못한 초나라군의 특성과 더불어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항우를 괴롭혔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항우가 일일히 이 모든 불을 끄러 가야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결국 항우는 완성에 유방을 몰아넣고도 어이없이 군사를 되돌여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완성 뿐만이 아니라 형양의 포위 역시 풀리게 되었는데, 다만 성고 근처에 종공(終公 한나라의 장수 종공과는 별개의 인물)이라는 장수를 남겨놓고 돌아가긴 했지만 항우 본인이 없는 초나라 군단 따위는 대수로울 게 못되었습니다. 유방은 항우가 돌아가자마자 그대로 완에서 북진, 종공을 격파하고 형양 - 성고의 방위라인을 다시 한번 확보했습니다.
팽성의 대전 이후 1년이 지난 시점, 항우는 아직 단 한조각의 땅도 얻어내지 못했습니다. 전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