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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7/05/12 09:12:11 |
Name |
깐딩 |
Subject |
[일반] 동물의 고백(13) |
처음 모임장을 보고 든 생각이 딱 이거다.
'아니? 이 사람 사진을 정말 못 찍는다.'
카톡 프로필엔 누구 애인지 모를 아기 사진과
어디 전망대에서 찍은 본인 사진이 있었는데
구도도 엉망이고 찍은 포즈나 표정도 되게 어색하게 나와있어서
실제 생긴 거도 예쁘거나 귀여운 스타일은 아닐 줄 알았는데
직접 보니 사진과 아예 다르다.
굉장히 미인은 아니지만 단정하고 단아하고 기품이 있어 보였다.
'배운 여자'
라는 생각이 드는 모습이었다.
나이가 같다고 말이나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고 조심스러웠다.
오히려 내가 "나이도 같은데 서로 말 놓고 편하게 지내자"라고 하려 했던걸
되려 못하게 되었다.
원래 불편함을 못 참는 성격이라 아랫사람과는 금방 친해져서 말을 쉽게 놓고
윗사람들과도 금세 붙어 다니며 형, 누나 하며 지내는데
이 사람 앞에서는 왠지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에게서 나오는 아우라가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뭐 어쨌든 소개팅 자리는 아니니까 편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예쁘시네요. 한 4.5배 정도 "
여자가 웃으며 대답한다.
"제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는 말도 많이 들어요. 25~6살?"
"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까지는..."
능청스레 농담을 하니 여자가 민망해하며 웃는다.
"아직 모임장님 이름도 모르네요. 실례지만 성함이?"
모임장의 이름을 듣고 바로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말하지 않았다.
아이돌과 같은 이름이었는데 내가 아니더라도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연예인과 많은 비교를 했을 것이다.
그것이 굉장히 스트레스고 싫어하는 말인 것을 나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냥
"이름 되게 예쁘시네요. 근데 생긴 게 너무 예쁘셔서 이름이 받쳐주질 못하는 게 아깝네요."
라고 말을 던져버렸다.
여자가 당황 + 쑥스러움 + 기분 좋음이 합쳐진 표정으로 웃는다.
이놈의 주둥아리는 편한 자리에서는 방정맞게 이빨이 너무 잘 털린다.
회사에서도 모임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도 장난기가 너무 많아서
긴장을 안 하면 말이 뇌를 거치지 않고 튀어나가는 것 같다.
그렇게 소소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점심시간이 끝나가도록 수다를 떨었다.
"두 명 계산해주세요."
하고 종업원에게 카드를 건네는데 여자가 기어코 더치를 해야 한다며 현금을 내민다.
"아니 제가 약속도 일방적으로 깨고 급하게 잡은 것도 있고 죄송해서 오늘은 살게요."
라고 말해도 소용없다.
돈 받을 때까지 손을 내리질 않길래 콧등을 긁적이며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를 뭐라 그랬는데.
'너랑은 돈으로도 엮이고 싶지 않으니 줄때 받아라' 라는 뜻 이랬나?
사실 나도 별생각 없었고 돈을 주겠다는데 뭐 굳이 마다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다음에 또 볼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받고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로 들어오니 카톡이 날라왔다.
"XX씨 오늘 점심 즐거웠어요! 다음에 또 괜찮으시면 점심 같이 드실 수 있을까요?"
"네, 그래요. 회사도 가까운데 시간괜찮으실때 연락 주세요."
아무생각 없이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삼일 후 드디어 모임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모임장이 반가워하며 채팅을 한다.
-어서 오세요! 반가워요!
그렇게 받은 신입은 82년생의 살집이 있는 남자였다.
몇 마디 주고받는가 싶더니 곧 채팅이 끊기고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앱은 조용해졌다.
어떤 사람이 들어왔나 궁금해 신입의 프로필을 보기 위해 앱에 접속했는데
모임장이 모임을 탈퇴하고 사라져있었다.
왜 탈퇴했을까?
정말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전에 같이 밥 먹을 때 물어봤다.
이 모임을 만든 이유가 점심 친구를 만들고 싶어서라고 했다.
회사에는 4~50대 분들 밖에 안 계셔서 또래가 없어 외롭다고 했었다.
근데 점심 친구가 늘어났는데 탈퇴를 했네?
그때 문득 드는 생각이 '아, 그럼 내 카톡도 차단했나?'였다.
그래서 모임장에게 오랜만에 카톡을 해봤다.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네^^ XX씨는요? 요즘 어때요?
엥? 답장 아주 잘 온다.
그냥 내가 차단되었나 확인차 연락해본건데... 뭐라고 해야하나...
-또 닭가슴살 먹는거 질리기시작해서요. 내일이나 모레쯤 같이 점심드실래요?
-음, 내일이 괜찮을듯요.
-근처에 쌀국수 잘하는 집 있는데 어떠세요?
-쌀국수도 괜찮긴 한데 순대는 어때요?
-여기 근처에 순댓국 진짜 유명한 곳 있어요 거기 가실래요?
-와! 좋아요. 내일 어디서 볼까요?
-사거리 파리바게뜨 앞에서 보는 걸로 해요.
그렇게 얼떨결에 또 점심 약속을 잡아버렸다.
-후배야 나 약속 있어서 나갔다 올게 밥 챙겨 먹어.
-또 나가세요?
-응응.
-선배, 여자 만나러 가는 거죠?
-헐 어떻게 암;;;
-왠지 그럴 거라고 생각이 들어서요. 소개팅?
-아니 소개팅은 아닌데. 어쨌든 갔다 올게.
그렇게 모임장을 만나러 약속 장소로 나갔다.
저 앞에 두리번 거리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길을 안내했다.
"춥죠? 얼른 먹으러 가요. 이쪽에 있어요."
그렇게 모임장과 두 번째 점심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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