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
학교 밖으로 나서는 발걸음이 이렇게 기쁘고 가벼울 수가 없었다.
고대하던 택배가 도착했을 때도 기분이 이 정도로 좋진 않았다.
벌써 해가 지고 조금씩 어둑해질 시간이었는데도,
저 멀리 정문에서 기다리는 수영이의 모습이 대낮마냥 환하게 눈에 비췄다.
너무 티가 날까 발걸음을 늦추려고 해봐도, 좀처럼 속도가 늦춰지지 않는다.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가 민망할 정도로 빠른 걸음걸이였다.
다행스러운 점이라면, 수영이는 폰을 만지작 거리느라 주위를 전혀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수영아."
"아, 왔어요?"
수영이가 환한 미소로 날 반겼다.
참 언제봐도 예쁜 미소다.
"늦게 끝날지도 모른다더니 먼저 기다리고 있었네?"
"음, 사장님한테 조금 일찍 끝내달라고 부탁했거든요."
응?
설마 이건 그린라이트?
"어쨌든! 일단 가요."
굳이 왜?라고 반문하기도 전에 수영이가 내 옷깃을 잡아 끌었다.
수영이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도 일찍 끝내달라고 부탁했다는 그녀의 말이 귓속을 맴돌았다.
설마? 정말?
나 떄문에 일부러 일찍 마치고 기다리고 있던건가? 그렇다면 정말 좋을텐데. 그랬으면 좋겠다.
"술은 어떤 걸로 마시고 싶어요?"
아직 정해지지 않은 목적지를 두고, 주변을 돌아보며 수영이가 물었다.
오늘 처럼 마음 편히 푹 취하고 싶은 날에는 사실 소주가 최고지만, 수영이의
취향이 어떨지 몰라 잠시 대답이 망설여진다.
"음, 넌 어떤 게 괜찮아? 혹시 못 마시는 거 있어?"
"이래봬도 술 꽤 잘 마시거든요? 헤헤.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오늘 시험도 끝나셨으니까
마시고 싶은 종목(?)으로 골라보세요."
이, 이럴 수가. 술의 신 디오니소스의 딸쯤이라도 되는 거냐.
어떻게 술에 대한 이런 관대함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거지?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없다.
"역시 오늘 같은 날은 소주이긴 한데..."
"그럼 잘 아시는 곳 있으면 거기로 가요. 근처에 살아도 사실 이 학교 학생이 아니다 보니까
이 근처에 괜찮은 술집은 하나도 모르거든요."
수영이의 배려(?)에 바로 떠오른 술집으로 앞장섰다.
대학로에서 조금 외딴 곳에 있는 술집이었는데, 그 후미진 위치에도 불구하고
저렴하고 맛있는 안주로 학생들 사이에서 호평이 자자한 곳이었다.
도착한 술집은 약간 이른 저녁시간인데도 테이블의 반 이상이 차 있었다.
구석 쪽으로 자리를 잡아 앉았는데, 수영이가 주변을 돌아보며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아 여기 위치도 구석지고, 시간도 이른데 벌써 사람이 많네요?"
"안주가 되게 맛있거든."
"정말요? 한 번 먹어보고 저도 친구들이랑 와바야 겠어요!
친구들 사이에서 제 별명이 안주 킬러거든요. 헤헤."
안주가 맛있다는 소리에 수영이가 눈을 반짝거렸다.
안주 킬러라.. 얼마든지 먹어도 좋으니 마음껏 먹어다오. 그깟 안주 내가 다 살게.
"먹고 싶은거 시켜. 나때문에 굳이 시간도 내줬으니까 내가 살게."
"정말요? 그럼 사양않고 시킬게요?"
"마음대로 시켜. 정말로. 어차피 밥도 안 먹고 온거니까."
수영이는 신난 표정으로 탕에, 전에, 볶음까지 다양하게 네 가지 안주를 시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내 기분이 좋아졌다.
보는 것 만으로도 사람을 기분 좋게 하는 사람. 수영이가 내게 그랬다.
주문한 지 얼마 안 되서 갖은 안주들과 소주가 차려졌다.
그녀는 먼저 나온 감자전을 슬쩍 맛보더니 감탄했다.
"우아 대박. 진짜 맛있어요. 술집 안주 같지가 않고, 무슨 요리같은데요?"
내가 만든 요리도 아닌데 수영이의 반응에 내 어깨가 다 으쓱해진다.
"그러니까 이렇게 손님이 많지. 저기 봐 또 오잖..."
딸랑.
타이밍 좋게 손님이 왔음을 알리는 종이 딸랑거렸다. 그런데 문제는
하필 지금 시기 좋게 등장한 손님이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어서오세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술집 알바는 큰 목소리로 손님을 반겼다.
혹시, 설마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 학교 주변, 많고 많은 술집을 두고
현중이 녀석이 여기로 올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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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중이는 양 옆으로 여자 후배 두 명을 끼고 가게로 들어섰다.
한 명은 나도 이미 알고 있는 얼굴이었는데, 수수한 매력을 가진 다민이었다.
예쁘장한 외모에 그 외모가 보이지도 않게 육감적인 몸매를 가진
또 다른 한 명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현중이가 말한대로라면 류하얀이라는 신입생일 거고.
참 팔자도 좋은 놈이다. 양 옆으로 미인인 새내기를 끼고 술을 마시러 오다니.
어쨌거나 그냥 모른 채 넘어가면 좋으련만,
"형!"
이 자식은 그 눈 좋다는 몽골인의 후예일지도 모르겠다. 가게를 훑어보는 그 짧은 순간에 매의 눈으로
구석에 있던 나를 캐치했다.
제발 저리가. 오지 마라.
내 바람이 무색하게도 현중이는 씩 웃어보이며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야 여기서 다 만나고 역시 저희는 천생연분인가 봐요?"
"천생연분은 개뿔, 여긴 또 어떻게 알고 따라왔어?"
"크크. 에이 제가 형이 여기 있을지 알고 왔겠어요? 근데 가게 들어서는데
그 기운이랄까 그런게 참 좋더라니.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