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는 봄이다. 제작년까지만 해도 그렇게 좋았는데, 이제는 슬슬 압박이 온다. 피어있는 꽃보다 지고 있는 꽃잎이 더 들어온다. 애네들은 이제 안정적으로 착륙하겠지. 또각또각 꽃잎을 즈려밟으며 나는 내 나이를 계산한다. 24. 25살이면 꺾인다고 하는데 그럼 난 1년밖에 안 남은 셈이다. 피어야 꺾이기라도 할 텐데, 난 그냥 시드는 느낌. 얼마 전 막 복학한 까까머리 후배가 신입생한테 나를 무려 "왕고"라고 소개했고 놀란 건 나뿐이었다. 우리 학교에서 나는 그냥 선배가 아니었다. 이런 게 애들이 말하던 말년 병장의 느낌일까? 무성한 나의 존재가 흐려지고 휑해진다. 벚꽃나무 아래 있는 쓰레기통은 꽃잎을 받아먹고 있다.
이런 기분이 드는 건 종각역 근처에서 만났던 그 날 탓이다. 과내 소모임 동기 셋, 선배 둘, 같은 과 동기 하나, 어쩌다 이 멤버들과 다 친해진 체대의 후배 하나, 이렇게 곱창을 먹기로 했다. 망년회 겸 신년회 겸 서로의 안부 보고 행사라고 한다. 난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데. 날카로운 시간 관념의 나, 준희, 석주 이렇게 먼저 모였다. 6시였지만 배가 고팠고 우리끼리 0.5차를 먼저 달리기 시작했다. 누가 운동하는 얘 아니랄까봐 석주는 혼자서 소주를 불기 시작했다. 곱창 한점, 소주 한 코프, 곱창 한점, 소주 한 코프. 곱창 불판 위에서 경쟁 사회가 펼쳐지고 있다. 준희는 천천히 좀 처먹으라고 항의했고 석주는 어, 꺼져라고 응수했다. 준희는 다 올라가지도 않을 깻잎 한장에 곱창 네 점을 올렸고 석주는 반발했다. 아 너무한 거 아니냐꺼어억. 반칙이다. 고의는 아니겠지만, 언어와 냄새를 섞는 이 행위는 문명사회의 토론 룰을 벗어난 공격. 준희는 아랫잎술을 깨물고 눈을 부릎떴다. 준희의 복식호흡이 충전된 게 느껴진다. 아 밥맛 떨어진다고오오오오. 준희가 목소리 톤을 사정없이 올리자 석주가 막 웃으면서 사과했다. 아니아니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종업원이 출동했고 사과 덤탱이는 석주의 몫이었다. 나는 조용히 곱창을 씹으면서 소줏잔을 들어올렸다. 쨍, 하며 부딪히고 반짝,하며 찰랑인다. 상황이 수습되었다. 지글지글거리는 불판 위로 종소리가 땡그랑 떨어졌다. 선배가 왔다.
오 너도 이제 여자 다 됐네. 선배가 나한테 인사했다. 무슨 뜻일까. 오늘은 면바지에 뉴발란스가 아니긴 하지만. 준희가 얼굴을 찌푸렸다. 곧바로 다른 선배가 왔고 인삿말과 술병을 호출하는 소리들이 쏟아졌다. 그렇게 곱창을 먹고, 커피숍에서 이야기를 하고, 마무리는 치맥이라는 석주를 말리면서 다들 빠이빠이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아. 선배가 가고, 애들이 가고, 석주는 버텼다. 치킨 딱 한잔만 하고 갑시드아 우리. 아 닥쳐 좀 집에 좀 가. 준희가 석주를 택시에 쑤셔넣었다. 차는 시동을 걸었고 석주는 뒷좌석 유리창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차가 멀어지면서 석주는 뒷유리에 두 손바닥을 올리고 울상을 지었다. 그리고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서 뭔가를 쓰려고 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려서 택시 기사와 뭔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분명히 한소리 들었을 것이다. 내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와 기사님이 유리창에 글씨도 쓰지 말라네. 아 미친 놈아 얌전히 집에 가서 치킨 뜯고 자라고오오오. 준희가 옆에서 소리를 지르다가 내 폰을 낚아채더니 꺼버렸다. 하여간 또릴라 새끼. 웃고 있는 나를 향해 준희가 쏘아붙였다. 근데 아까 선배는 뭔 소리를 하는거냐? 준희는 늘 이런 식이다. 내가 애매하게 있을 동안 자기가 다 화를 내버린다. 오늘 집에 가면서 준희의 한 소리가 쏟아질 것이다. 카톡의 알람을 미리 해제해놓았다.
한 쪽에서는 치워지고, 한 쪽에서는 반겨지고. 그런데 왜 나는 나를 반기는 사람들이 반갑지 않을까. 이전에 인턴을 뛰고 있을 때도 같은 물음표 위에 서 있었다. 23살? 야 아직 파릇파릇할 때네 젊다 젊어. 어이 박대리, 23살이 뭔 파릇파릇이야 완전 어리지. 아니지, 23살이면 여자지 여자. 딱 한창 때 아냐? 직급순으로 올라가는 판정 속에서 나는 계속 웃으면서 예, 예, 예라고 했다. 별 상관없었다. 어차피 최고는 스무살이고, 서른 되면 완전 끝장이었다. 살구빛 조명 아래로 많은 조언이 이어졌다. 진지한 목소리로, 지금부터 연애 열심히 해야 한다고. 그래서 딱 두살 정도 위의 남자 만나는 게 최고 베스트라고. 금융업은 실해보여도 완전 개털이고, 차라리 화장품 쪽의 남자를 노리라고. 진지한 조언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결정적인 게 있는데, 아무리 돈 많고 그래도 중국 남자는 안돼. 혹시 중국 쪽 남자들이 접근하면 미리미리 선 그어야 좋아. 왜냐면, 그 쪽 사람들은 아직도 중화사상이 좀 있어서 한국 여자를 쉽게 막 가질라고 글거든. 우리 회사 여자들 중국 남자랑 연애 꿈꾸는 거 보면 딱해 죽겠어. 예 말고 할 말이 없었다. 여기서 다들 의견이 일치했다. 아무리 돈 많고 그래봐야 중국 남자보다는 말이 통하는 한국 남자가 더 좋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나이대로 갈라졌다. 아니 그런데, 박대리는 왜 두 살 차이 남자를 추천해? 나이 차가 좀 나야 그래도 커플이 원만하지. 여자들이 남자보다 정신연령은 훨씬 더 성숙하잖아? 그러니까 그걸 감안하면 한 네살 차이는 나야 그래도 커플이 딱 맞지. 내가 쪼금이라도 더 살아봤으니까 하는 이야기인데, 진짜 나이 차이가 좀 나야 연애도 잘 되고, 결혼도 별 탈 없이 굴러간다니까. 어쩌면 선배가 될 뻔한 그 분들은, 나를 많이 걱정해주었다. 특히 연애와 결혼에 대해서. 그렇다고 내가 중국 남자를 딱히 싫어하게 되진 않았지만.
결국 정직원은 못됐다. 미래의 남편감을 걱정해주는라 내 봉급까지 챙겨줄 형편은 아니었나 보다. 그렇게 아쉽지도 않았다. 아마 들어갔으면 이 분들은 내 결혼 생활과 육아 문제까지 엄청 신경써줬을 것이고, 나는 그게 별로 기대되지 않았다. 파릇파릇해서였을까, 아니면 완전 어려서였을까, 한창 때여서 그랬을까. 인턴이 끝나는 날 그 셋 중 하나냐고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 대신 격려는 잔뜩 들었다. 조용하고 참해서 같이 일하기 참 좋았어, 같이 일 할 동안은 사무실 분위기도 화사해지고. 어딜 가서도 그렇게만 해, 알았지? 내 성격이 바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동안 별 뜻 없는 말은 별 뜻 없이 흘러가고, 옆에는 오도방정을 떨 준희가 없으니까. 많지 않은 말 수가 많아질리는 없겠지. 화사한 건 잘 모르겠다. 그 뒤로도 가끔씩 저녁 먹자는 메시지는 온다. 부담스럽지만 고맙게만 받기로 했다. 물론 만나지는 않았다. 나도 모르는 내 여성스러움을 다시 챙기기가 어렵다. 나는 수수하게 있고 여자라는 소리를 별로 못듣고 지낸다. 이런 내 모습을 얼마나 반겨줄지는 잘 모르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도 여자다워보이고 싶은 걸까.
간만에 학교 온다고 여자 티를 좀 냈는데, 벚꽃한테 다 묻혀버렸다. 나는 저 만큼은 화사할 수가 없다. 이제 막 신입생인 애들이 깔깔대면서 옆을 지나쳐간다. 나보다 훨씬 더 벚꽃이랑 잘 어울린다. 꺾이기 한참 전의 아이들이구나. 그리고 충분히 여자 같다. 나는 아직 선배만큼 눈썰미가 좋지 못하다. 나한테 정말 이전에 없던 뭐가 생긴 걸까. 모르겠다. 답은 주변 사람들이 갑자기 던져줄 것이고, 그 때마다 그러려니 하겠지. 스물 다섯이 되면 나는 꺾이고, 그때는 이 벚꽃이 덜 즐거울지도 모르겠다. 준희는 이런 나를 볶아댈 것이다. 그렇게 방심하다 나이든 또릴라들한테 이래저래 엮인다고. 서른에도 이십대처럼, 마흔에도 이십대처럼, 쉰이 되면 삼십대처럼, 그렇게 팍팍 피부를 긴장시키고 살아야 한다고 준희는 정신교육을 실시할 것이다. 여자의 생명은 미모가 아니야, 동안이야 동안. 자동재생되는 준희의 목소리를 나는 모르는 척 흘린다. 난 준희 너만큼 부지런하지가 못한 거 알잖아. 신경쓰이는 만큼, 신경쓰며 살고 싶진 않은데. 누가 더 욕심인걸까. 남은 1년의 유통기한도 이렇게 걱정만 하다가 보낼 것 같다. 다시 벚꽃이 피면 그 때 봐야 알겠지. 봄이니까, 곱창이나 먹을까.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