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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30 11:09
다 애착이 있어서 까는 것이지요.
남들에게 제가 어떻게 비춰질까?라는 고민을 자문자답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일종의 외식이지만 거룩한 외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다니는 사람이 그래도 돼? 라는 질문받는 것도 지겹고 부끄럽기도 해서 변화하려고 노력중이지요.
13/10/30 11:11
저와 같은 교단이시네요. 중생 성결 신유 재림을 중시하고 그 중 성결이 최우선인 성결교인데, 실상은 점수 맞춰 신학대 온 친구들도 목회자가 되는 현실... 그러다보니 신학생인데도 세상과 구별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이상한 상황입니다..
이재철 목사님 책에서, 세상을 구원하겠다고 술집과 교회를 겸업하던 목사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결국 정상적인 술꾼도 정상적인 성도도 찾지 않아 망했지요. 지금 교회는 그런 모습인 것 같네요. 하지만 일반 성도들의 부족한 믿음운운은 우리가 평가할 대상이 아닙니다. 이 시대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 대부분에서 항상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일이지 지금 세대가 특별히 더 타락한 것 같진 않네요.
13/10/30 13:03
몇 안되는 성결교단 분이라니 더 반갑네요. 말씀하신대로 일반 성도들의 부족한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은 안되지만 마음이 답답해서 적어봤습니다.
13/10/30 11:12
흠 뜬금없지만 얼마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앙이 없는 무신론자도 양심에 따라 살면 구원이 가능하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개신교 신자의 반응이 궁금하네요.
13/10/30 11:17
신학의 관점에서야 맞다 틀리다 그 외 이런저런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사실 그걸 인간이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기독교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내일 주가가 오를까 내릴까, 여자친구가 왜 화가 났나와 같은 수준의 난이도죠..크크
13/10/30 11:21
일반적인 개신교 입장에선 '허튼소리하네' 정도로 생각 될 것 같네요.
정확한 내용을 보지 못하기는 했습니다만, 요약하신 내용이 핵심이라면 개신교 교리로는 절대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주장 인 것 같습니다.
13/10/30 11:40
이것은 확정되지 않은 내용입니다. 성경 해석에 따라 다른데 제 경우엔 어쩌면 가능하다고도 봅니다. 이유가 굉장히 방대한 내용이라 쪽지 주시면 대답해드리겠습니다.
13/10/30 11:56
개신교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죠.
그럼 개신교의 존재자체가 무의미하니깐요. 아무거나 믿으면 되는데 왜 개신교를 믿고 전도를 그렇게 열심히 해야되나요? 다 부질없게 만드는 소리죠.
13/10/30 11:58
1) '신학계'에서는 꽤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논점입니다.
2) '일반 신자들'은 동의하지 않는 쪽이 대부분일 겁니다.
13/10/30 11:14
좀 공격적인 글이긴 하네요.
제 생각엔 사람의 착한 마음이나 선의는 "밥" 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에는 따뜻하지만 금방 쉬어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인간의 선의가 변하지 않고 어떠한 단체를 이루어서 길게 이어지는 정말 힘든 일이고 상하지 않게 계속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인간의 선의를 바탕으로 운영되는 종교집단에 대한 믿음이 크지 않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뚜렷한 해결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종교와 자본주의의 만남이 이렇게 찰떡궁합일줄을 몰랐을 겁니다. 교회에 교황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비기독교인인 제가 보기에는 교회들이 각각의 독립국가 같은 형태를 이루고, 서로의 주권에 대한 불가침의 조약이 있는 듯 합니다. 제가 바라는 최소한은 기독교인들이 모여서 비기독교인들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여론" 이라도 형성해주었으면 하는 겁니다. 물론 이해관계나 추후 받을 피해에 대한 두려움으로 침묵할 경우의 수가 높겠지요. 사실 이제 기독교 비판도 질립니다. 해결방안은 없고 끝없이 확대재상산 되는 그냥 가십거리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13/10/30 11:36
언론사는 그 쪽이 대표적이고, 다른 형태로도 여럿 있습니다. 박원순 시장님이 언급하신 '평화누리'라는 곳도 있고, 예전부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온 '기독교윤리실천'이라는 곳도 있구요.
13/10/30 11:19
다 공감합니다. 하지만 한가지..
시골 교회에 전도사가 안 가는 건 정말 문제입니다. 그런데 페이가 작아서 안간다고 지적하신 건 잘못된 생각이라고 봅니다. 요즘 소위말해 열정페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의 열정을 악용하여 말도 안되는 페이를 주면서 인턴으로 부려먹는 걸 열정페이로 계산하더군요. (참고: http://mirror.enha.kr/wiki/%EC%97%B4%EC%A0%95%20%ED%8E%98%EC%9D%B4%20%EA%B3%84%EC%82%B0%EB%B2%95) 근데 오래전부터 신학생들은 소명과 신앙이라는 이름의 열정페이로 말도 안되는 처우를 받으면서 교회에 봉사 아닌 봉사를 해 왔습니다. 솔직히 전도사 월급으로 가정 못 꾸려요. 그리고 목회 훈련과 순종이라는 명목하에 일선 목사들이 전도사를 말도 안되게 부려먹습니다. 목사 집 개밥 챙겨주는 전도사의 일화도 들어 봤네요. 일부 소수의 개신교인들이 종교인 과세에 찬성하는 이유가 바로 종교인 과세가 이루어져야 파트타임 전도사들의 최저임금이 보장되고 4대보험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골에 전도사들이 안가는 이유는 당연합니다. 도시 지역에서는 맘만 먹으면 파트타임 전도사 자리 구하는 건 쉬운 일인데 시골에 내려가면 쥐꼬리만한 월급 받으면서 목사한테 엄청 시달리거든요. 이게 사명이나 신앙으로 포장되어 있을 뿐이지 노동착취입니다.
13/10/30 11:25
이 부분은 정말 공감되는 이야기네요. 종교인의 최저 생계에 대한 정부차원에서의 지원도 필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위해서는 세금체계 안에 그 직업이 들어와야 하는 것이네요. 그런데 종교인 과세 문제는 세금을 떼고 난 후 모인 기부금에 또 세금을 붙일 수 있느냐는 원론적인 문제를 해결할 없을 것 같습니다.
13/10/30 11:55
종교인의 생계에 정부 지원이요??? 최저 생계보장 같은거 말씀하시는거 라면 수긍이 가기는 하는데... 종교 내에서 해결이 되어야 할 것을 정부에서 해주게 되는 모양새가 될거 같군요..
13/10/30 12:14
종교인 과세 문제가 이중과세라는 건 개인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성직자를 근로자와 동일시할 수 없다는 시각은 위 최저생계나 열정페이라는 관점과 상충되구요. 개인적으로는 비과세 주장이 불합리하다고 판단합니다.
13/10/30 11:37
저와 생각이 다르신게 있는데 주의 종으로 살겠다는 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부르시는 곳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돈이 기준이 아니라 나를 부르시는 곳에 가는것이죠. 바울도 그랬고 많은 선교사님들이 그랬습니다.하지만 이것에 대해선 더 이야기할게 많고 성경에도 이것에 대해 나와있는 구절이 많지만 댓글로 달긴 그렇고 필요하시면 쪽지로 대화하고 싶네요.
13/10/30 11:39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들이 부르심 따라 각자의 삶에서 주의 길을 걸으며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구현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 교역자들만 주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교역자들에게만 그런 역할과 책임을 부여하는 것은 교역자들의 '사제화'이자 평신도들의 책임회피 구실이 됩니다. 물론 그런 뉘앙스로, 또 직접적으로 가르쳐온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기는 하지만 우리가 지양해야 할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개신교는 만인사제론의 기치를 들고 태동한 체계입니다. (애초에 평신도라는 표현부터 재점검해야 합니다.)
13/10/30 11:43
제 의도와 다르게 해석하신거 같은데 대강 의도는 이해합니다. 가령 전하는 자가 보수를 받는것에 대해 바울이 이야기한것 처럼요. 제가 말하고자하는 뜻은 교회가 설령 충분히 돈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곳에 소명이 있다면 가야합니다. 그것이 제가 믿는것입니다.
쓰고보니 댓글에 덫붙이신 내용이 있네요. 저 역시 목사나 전도사만 주의 종이라고 생각 안합니다. 저도 주의 종이고 그래서 제 인생 포기하고 전도사님 역할을 감당한것이죠. 제가 말하려는것은 스스로 주의종이 되서 어디던 가서 주의 일을 하리라 한 사람이 전도사님들입니다. 그분들이 돈이 적어 못간다는건 말이 안되는게 그들이 믿는것은 세상의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주를 위해 돈도 못벌고 일하는 사람을 하나님이 버릴것이라 믿지않고 만약 그들의 목사님이 말도 안되는 처우로 그들을 대한다면 그건 목사님 위에 계신 분이 처리하실 일입니다.
13/10/30 11:45
그거야 목회자 개인이 부르심이 있으면 그렇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요구해서는 안됩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교역자들이 나쁜 처우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삶을 드려야 한다'가 아니고 '교회가 교역자들에 대한 나쁜 처우를 개선해야 한다'로 접근해야 합니다.
13/10/30 11:57
맞는 말씀입니다. 처우를 개선해야하는건 크게 동의합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많은 보수를 주고 싶어도 못주는곳을 이야기한것입니다. 저희 교회는 목사님도 검소하게 얼마되지 않는 월급을 받으시고 올해 올려드린다는것도 거절하셨습니다. 교회재정이 넉넉하지 못해서죠. 하지만 전도사님은 꼭 필요한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약간 대화의 주제가 엇갈린것 같은데 표현하기가 힘드네요. 잘 이해해주시리라 생각합니다.
13/10/30 12:01
그러니까 '전도사님은 꼭 필요한데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하는 태도를 교회가 고쳐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충분한 사례를 드릴 수 없다면, 그 교회는 아직 전도사님을 맞을 시점이 안된 겁니다. 어떻게든 전도사님이 필요하다는 성도들의 필요가 있다면, 그 필요를 느끼는 성도들이 더 헌금을 모으는 방향으로 해결해야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람을 예비하여 보내주실 수는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해결을 '사람'에게 그걸 요구하지는 말자는 말입니다.
13/10/30 12:05
그렇게 봐도 되겠군요. 그런데 작은교회는 전도사님들이 거의 가지 않고 큰 교회에선 보수가 적어도 일하는 전도사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합리적 보수와 처우를 제안해도 큰 교회만 가려는 분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13/10/30 12:29
jjohny=쿠마 님// 맞습니다. 그게 저와 쿠마님 사이에 약간 의견이 달랐던거 같은데 저는 합리적 보수와 처우를 제안하는 교회의 입장에서 이야기한거 같습니다. 또한 제가 케이스바이케이스로 봐야하는 문제를 한가지 경우에 대해서만 글에서 표현한거 같습니다.
13/10/30 12:15
반대입니다. 교회가 물질주의와 금전적 부패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사실상의 최우선 선결과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세한 설명을 하자면 좀 복잡한데, 지금은 폰이라 일단은 여기서 줄입니다. 혹시 추가 설명을 원하신다면 나중에 자리잡고 써보겠습니다.)
13/10/30 12:20
jjohny=쿠마 님// "돈이 없으면 교회가 아직 준비가 안된거다." 라고 하셔서 자본주의를 떠올렸는데... 댓글이 수정되었군요.
전도사에게 강요를 못한다면 신도들에게 돈 더 내라는것도 강요하면 안되겠죠. 결국은 악순환의 반복...
13/10/30 12:27
피나 님// 예 그렇습니다. 상호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입니다.
교역자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자각이 있더라도 그게 '교회의 종'이거나 '성도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목사들이 평신도들을 종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은 흔히 들을 수 있지만, 평신도들도 교역자들을 종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지적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데, 성찰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평신도들이 교역자들을 교회의 종처럼 생각하는 것과, 교역자들이 '교회를 위해 돈을 더욱 바치라'라고 성도들을 다그치거나 교회를 사유화 하는 류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얼핏 보면 정 반대인 것 같이 보이면서도 사실은 같이 가는 문제입니다.)
13/10/30 16:52
피나 님//
교회가 꼭 목회자가 있어야 하는건 아니니까요... 사정이 안되면 목사님이 없어도 되고, 전도사님도 없어도 됩니다. 교인들이 서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시골이라도 교인들이 목회자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면 목회자 한가정을 사례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례하는데 어려움이 있거나 빈약하다는 것은 어쩌면 교인들 내부에 목회자에 대한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지요 교회가 꼭 교회로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죠... 기도소로 존재해도 충분합니다. 예배의 필요조건에 목회자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13/10/30 12:07
뭔가 일반적인 기독교와는 다른 신앙관을 가지고 계신듯 합니다. 어디부터 지적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목조목 지적해 보겠습니다.
먼저 "스스로 주의종이 되서" 이부분은 잘못된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모두 다 주의 종이죠. 즉 porory님의 말은 스스로 구원받은 성도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은 스스로 받는 게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죽기까지 각오한다고 해서 죽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디든 가서 주의 일을 하리라"고 아무리 스스로에게 선언한다고 한들 인간의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중요한 거죠. 그리고 porory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가장 문제가 되는 말은 마지막에 "목사님 위에 계신 분이 처리"하신다는 내용입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권선징악의 신이 아닙니다. 평생 기다려도 내 원수는 벌을 받지 않고 잘 살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하나님이라는 전지전능한 신이 이토록 힘이 없을까 실망도 되겠지만 그건 기독교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창조주인 신과 피조물인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사랑이죠. 주변인들은 솔직히 부차적인 것입니다. porory님은 지나치게 주변인들을 의식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어떤 목사가 개판친다고 해서 그 목사의 신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 목사를 통해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인격적으로 맺고 있는 관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죠. 저도 예전에는 porory님처럼 회의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욕 많이 하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오정현, 전병욱 같은 인간들 보면 치가 떨리구요. 하지만 사실 그 사람들, 교회들을 보고 기독교에 대해 회의한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사람과 환경을 통해 하나님을 본다는 것이죠. 즉, 나와 하나님 사이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는 뒷편으로 밀려난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있고 난 후에는 더이상 예전처럼 냉소적인 생각은 하지 않게 됐습니다. 물론 작금의 한국 개신교가 제대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기독교인이라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거부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porory님께서 하신 말씀은 다 공감이 가고 개신교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봤을 고민입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교리에는 약간 어긋나 있습니다. 이건 일선 목사님들의 책임이 큽니다. 기복적인 신앙관, 권위주의적인 의식, 권선징악적인 설교 등등 너무나 잘못된 것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porory님이 조금만 더 알려고 노력해 보시면 그런 것들은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난 후 다시 이글을 보시면 참 우습게 여겨질 거에요. 지금의 고민들은 사실 신앙적인 고민이라기 보다는 사회적인 고민이거든요. 교회내의 정치, 전도사의 처우 개선등, 신앙보다는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되고 해결되어야 될 문제들입니다.
13/10/30 12:23
제가 글을 오해의 여지가 있게 쓴것 같은데 저도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몽키.D.루피님과 동일합니다. 구원받은 성도 모두 주의종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스스로에게 선언한다고 의지가 하나님의 뜻보다 위로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권선징악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바울이 말한 것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의종이라는 표현을 목사나 전도사님에게 제가 쓰는 경향이 있는 것은 바울서신에서 나온 표현이 주로 목사님들에게 주의 종이라는 표현을 써서 저도 그런 습관이 있을뿐 거의 모든 의견은 몽키.D.루피님과 같습니다.
13/10/30 13:02
제 생각에, IVF를 경험하신 porory님께서 저나 몽키.D.루피님의 견해와 판이하게 다른 생각을 갖고 계실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IVF야말로 이런 고찰과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편이니까요.)
언어 사용이나 특정 가치판단에서 습관이 남아 있는 게 문제일텐데, 이런 대화를 통해서 계속 갱신해야죠. 어헣어헣 (저도 늘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이미 배웠거나 뻔히 알 수도 있는 것들인데도... ㅠ_ㅠ)
13/10/30 13:04
쓰면서도 같은 마음을 담아 쓰고 있는데 뭔가 소통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게되더군요. 워낙 개인마다 믿음도 다르고 생각하는 바도 다르니 더 그런거 같습니다. ㅠㅜ
13/10/30 11:44
종교인에 대한 지나친 환상을 가지고 계신듯 합니다. 엄연히 따지면 기독교인 모두가 주의 종이지 목사나 전도사라고 해서 더 특별한 주의 종이 되는 건 아닙니다. 목사 직분을 더 신성시 여기는 건 교회에서 목사들이 자기 권위를 세우기 위해 잘못 가르친 결과죠. 엄연히 개신교는 루터의 만인제사장이라는 신학적 바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칼빈의 직업 소명설에 의하면 모든 직업은 동일하게 신성합니다. 목사라고 해서 더 신성한 일을 하는게 아니라는 말이죠. 아직 논란의 여지는 있지만 제 생각은 현대 기독교에서 목사나 전도사와 같은 종교인들은 하나의 직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으로서의 주의 종의 사명이 있는 것이고 회사원은 회사원으로서의 주의 종의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수많은 직업 중 하나로서 전문적인 교리 교육과 목양의 역할을 부여 받은 것이죠. 당연히 목사의 노동은 설교와 교육이고 거기에 따른 정당한 댓가를 받아야 됩니다.
13/10/30 11:51
제 뉘앙스가 목사나 전도사가 특별하다라고 느끼셨다면 제 실수입니다. 전 신성시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표현이 부족했나봅니다. 그리고 댓가에 대해선 위에댓글에 조금 적어보았으니 보시고 느낌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3/10/30 11:59
애초에 성직자를 직업으로 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인것 같아요.
성경에 나오는 바울처럼 자기 직업을 갖고 목회활동을 하면 안되는건가 싶어요.
13/10/30 13:11
가장 이상적이긴 한데 현실적으로 어렵죠. 교역자 말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무보수로 봉사하는데 이분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로 자기 직업을 가지고 주의 종으로 섬기는 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좀 더 겸손해야할 필요가 있어요.
13/10/30 19:37
그것이 바울은 자기는 그렇게 하지만 목회자가 전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도록 보수를 주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모습이 더 괜찮아보이긴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을 전하며 보수를 받는 것은 허락된 말씀인건 분명합니다.
13/10/30 13:00
묻어가는 질문인데.. pgr에서 보니까 개신교는 사제개념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가 많이 보이는군요. 지금 댓글 논쟁도 비슷한 선인 것 같은데, 말하자면 모두 평신도이고 목사나 전도사 등 교역자도 평신도와 다른 게 아니다 정도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목사와 사제의 차이가 뭐죠? 결국 사제 역할을 하는 게 목사 아닌가요? 역사적으로는 사제와 평신도의 차별을 인정하지 않아서 목사란 개념이 나온 것 같긴한데 현재는 오히려 사제보다 더 떠받듬을 받는 것 같은데.. 지금 개신교에서 목사 역할과 천주교에서 사제 역할의 차이점이 뭔가요?
13/10/30 13:06
원래 이해하신 바가 맞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말씀하신 그런 그런 경향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고, 그 문제가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들을 파생시키고 있습니다. (원칙적으로는 특별 사제성을 부정하는 체계인데 현실적으로 특별 사제성을 은연중에/대놓고 부여하고 있는 그 '괴리'가... 으으)
13/10/30 16:59
개신교에서는 성직의 개념이 없습니다.
목회자라는 것은 성직이 아니라 모든 교인들 중에 다른 직분을 받은 자일 뿐입니다. 전에도 제가 쓴 글중에 나온 말이지만... 교회내에서 성직이라는 개념은 목회자들의 자발적 권위의식과 교인들의 자발적 회피 의식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을 성직자로 높여 놓으면 일반 교인들은 목회자만큼의 윤리나 종교 의식이 없어도... 성경이 요구하는 만큼의 삶이 되지 않아도, 나는 평신도이니까.. 목사님과 같을 필요가 없다는 피난처가 됩니다. 하지만 성경이 요구하는 기독교인의 삶은 목회자나 일반 교인들이나 전혀 차별이 없죠..
13/10/30 19:50
목사를 생업과 겸직하는 게 아니라 전업으로 하는 데 성직의 개념이 없다는 말이
실질적으로 의미가 있느냐는 얘기입니다. 이건 목사가 썩었고 바르고 그런 얘기가 아니라, 전업으로 교역을 하고 신도들의 헌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데 성직이 아니란 말이 말장난 이상의 의미가 되는건가요?
13/10/30 23:47
개신교는 모든 직업이 성직입니다. 따라서 목사를 특별한 사람으로(특별한 직분으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예로 신자가 하는 택시운전 역시 성직 입니다.) 단지 한국 개신교의 목사란 전업 교역자로, 신자의 헌금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직분을 맡은(받은) 겁니다.(독일은 목사가 나라로부터 보수를 받는답니다) 가톨릭이야 하느님-신자 사이에 반드시 교황님이하 여러 사제님들이 있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분들을 성직으로 별도로 분류할수 있겠지만, 개신교에서는 신자가 사회에 조직화된 교회를 안다녀도 무방합니다. (가정교회라던지, 정식 목사안수를 받지 않은 분이 이끄시는 교회도 있고요.) 다르게 말하면 개신교에서 목사의 존재는 필수요소는 아니란 겁니다.
13/10/30 11:29
위에 달으신 몽키.D.루피님 말씀과 비슷한 맥락인데,
청어람 아카데미 양희송 대표님(일전에 썼던 글에서 소개한 책 '다시 프로테스탄트' 저자)은 이런 진단을 내리시더라구요. 교계에서 관찰되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대해 고찰해보면 일반 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대입해서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겁니다. 1. 수요에 비해 과도하게 많은 신학생 공급 문제 : 청년실업 문제 2. 부교역자(특히 전도사) 처우 문제 : 비정규직 문제 3. 넘쳐나는 교회 개척 문제 : 자영업자 문제 들으면서 상당히 훌륭한 통찰이라고 느꼈습니다.
13/10/30 11:51
글 잘 읽었습니다.
요즘 기독교에 대한 얘기가 나올때마다 LA다저스 투수 커쇼의 "나는 크리스천이지만 대놓고 신앙을 권할 순 없다. 그저 크리스천이 어떻게 사는지를 보여줄뿐." 이라는 말이 얼마나 훌륭한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한국에서도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평소 모범이 될만한 생활을 계속해나간다면 언젠간 따뜻하고 호감가는 종교로 인식될 수 있을거라 봅니다.
13/10/30 14:04
많은 크리스챤들이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크리스챤이요. 다만 그게 쉽지 않은 삶이며, 교회에 따라서는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지도 않죠.
13/10/30 14:07
그건 알고 있죠. 다만 그렇게 살지 않는 더 많은 크리스천이(크리스천이라고 부를수 있는 사람들인지 모르겠지만) 양산된게 문제라고 봅니다.
13/10/30 12:07
좋은 글이긴 한데 작성자분이 네비게이토 소속이라는게 조금 그렇네요. 네비게이토 전체가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본 네비게이토들은 문제가 많았거든요. 90년대 학번들이 아직까지 졸업도 안하고 학교를 배회하면서 거의 납치수준으로 학생들을 끌고가서 강제로 선교를 시키고 전화번호 따서 성경공부하자고 스토킹하는 등 여러가지로 문제가 되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사실인지 잘 모르겠지만 네이베이토 멤버들은 집을 떠나 단체생활을 하고 신도들을 착취한다는 이야기도 돌았었고요.
이와 관련해서 교내 신문사에서 관련 기사가 나자 신문사에 단체로 쳐들어가 협박을 해서 문제가 되기도 했었죠. 다른데는 몰라도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는 네비게이토에 대한 인상이 안좋긴 합니다.
13/10/30 12:26
네비게이토란 단체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또 내용이 굉장히 길어지지만 일단 말씀드릴수 있는 것은 네비게이토는 지구별로 완전히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령 서울대의 OA지구는 굉장히 엄격하게 말씀을 외우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하고 한양대 ST-A지구의 경우는 훨씬 자유롭고 강요적이지 않습니다. 아주대의 경우에는 크기도 작고 주로 소수의 외국인 분들과 몇몇 분들만 편하게 하시는 편이고, 경희대도 경희대 만의 색깔이 입습니다. 학교를 말씀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성향이 달라서 제가 확답을 드리긴 어렵고 그런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의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혹시 어느 대학인지 알려주시면 제가 한번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3/10/30 12:19
기독교인으로써 살아가기 힘든 세상입니다. 특히 저는 대구에 살고 있는데 불교가 다수인 지역에서의 기독교인은 많이 힘들긴 하더라구요.
집안이 기독교 집안 것도 있지만, 나름 바르게 살아가고 노력하는데 참 힘듭니다... 지금 상황에서 여러가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만들어준 글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13/10/30 12:27
그런 건 아닙니다만 장례식을 참가한다던가, 불교적인 문화에 대해서 제대로 참여 하지 못한다는 것에서 힘들다는 거지요.
팔공산을 가더라도 다른 분들은 불상에 한번씩 절하고 오는데 저는 하지못하고 어정쩡한 상태로 남게 되는게 굉장히 곤혹이더라구요.
13/10/30 19:33
저는 구미 살고 있고, 친가는 영주 유교 집안이며 그 중 저희 가족만 기독교입니다. 몇가지 이해가 안되는 게 있어서 댓글 남깁니다.
장례식에선 뭐가 문제이신거죠? 기독교 집안이시니 집안 문제는 아니신 것 같고, 요새 남이 자기 가족 장례식 와서 절 안 한다고 뭐라 하진 않을텐데요.. 그리고 불교적인 문화에 참여를 안하면 안했지, 못한다고 힘드시다는 건 더더욱 이해가 안되네요. 팔공산 가셔서도 이런 불상도 있군...하고 구경만 하시면 되죠. 기독교인이 불상에 절 못해서 어정쩡해질 필요 있나요? 불교, 유교 문화를 무시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문화를 따르는 사람들과 다르게 행동한다고 그 사람들 눈치 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13/10/30 12:42
저 역시 기독교인이면서 기독교에 비판적인 사람이지만 본문 글과는 생각이 좀 다르네요.
한국기독교의 문제는 열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잘못된 열정이라고 보거든요. 지금처럼 잘못된 열정을 분출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식어버리는 게 더 낫다고 봅니다.
13/10/30 12:46
제 글에 한국교회가 열정이 없어서 문제라는 부분이 어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교회가 잘못된 열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분출하는것이 문제라는 것은 동의합니다.
13/10/30 12:51
신학생이라고 꼭 믿음이 좋다고 볼수 없다는 부분이나 기독교인이라 하면서 기독교인 답게 생활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거나 하는 본문이나 댓글에서 주의 종으로 살겠다는 사람은 죽기를 각오하고 부르시는 곳으로 가야한다는 이야기들을 저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내적인 동력이나 자세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고 봅니다만 저는 한국교회는 방향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13/10/30 12:56
동의합니다. 방향성도 크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신앙인으로써의 자세도 잘못된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적을 한것이구요. 가령 신학생들이 술,담배,욕을 입에 달고 다니는 것에 대해 지적한 것, 신학생이 사명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가짐 등이 뭔가 이상한 것인가요?
13/10/30 13:06
그건 좀 어려운 문제라서요. 술 담배 욕이 반드시 나쁜 것인가에 전 동의를 못하거든요.
욕잘하고 술잘마시면서 서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스님이 있다면 일반 대중들은 욕을 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눈으로 바라 볼 것인가 하는 점에서 전 오히려 후자라고 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라고 해서 반드시 술 담배(담배는 사실 안하는게 좋겠지만) 욕을 안하는 게 좋은가 하는 점에서 전 의문이 있네요. 물론 신학생이 사명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가짐을 갖는 건 좋은 것이고 그게 문제라고 지적한 건 아닙니다. 신학생이 사명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가짐이 부족한 게 문제라는 지적에 대해 살짝 토를 단 것이죠.
13/10/30 13:11
약간 저와 다른 믿음을 가지신것 같습니다. 술을 마실 수도 있습니다. 마시지 말라는 말씀도 없고 디모데에게 바울이 포도주를 권하기도 하죠. 그러나 술취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고 술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욕은 문제가 있는게 말씀에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했습니다. 욕을 달고 다니는 사람의 마음 속에 거룩함이 있는가? 라는 질문에 저는 회의적입니다.
13/10/30 13:30
저는 열정과 믿음의 차이는 확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서...
열정은 확신이 없이도 발현될 수 있지만(되든 안되든간에 한번 해 보자... 같은), 믿음은 확신 없이는 안된다는 입장이거든요. 그런데 올바른 믿음이 있으면 올바른 열정이 나오는건 맞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13/10/30 12:45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특별히 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기독교가 그런 종교도 아니구요. 기독교의 핵심 중에 하나는 구원이며 기독교는 선을 통해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종교입니다. 특별히 그런 것은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보는데... 그렇다고 제가 기독교가 괜찮다는건 아니고 기독교의 문제는 좀더 근본적인 곳에 있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타종교나 무교에 배타적이며 (그로 인해 때로는 공격성을 드러내며), 활발한 전도활동을 하는 것. 이게 가장 큰 문제라고 보는데 이건 뭐 어떻게 해결이 안될거 같습니다. 실제 성경이 그러하니깐요. 타 종교에 배타적이며 활발한 전도활동을 장려합니다. 교황같은 권위있는 사람이 나와서 2000년전 말씀을 예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적용해야 하는데 기독교의 태생자체가 그런 교황이 나올수 있는 구조와 반대방향이죠. 저는 기독교의 문제가 2000년전 말씀이라 현실정에 맞지 않은 것이 많다. 그것을 현실에 맞게 적용하려면 권위있는 조정자가 필요한데, 구조상 그런 존재가 나오기 힘들다. 그렇기에 충돌이 생기는 것은 필연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다 라고 봅니다. 금전문제나 이런부분은 일부가 맞고 내부정화로 해결을 할수도 있는데 이 부분은 어떻게 해결이 되기 힘들겁니다.
13/10/30 12:51
저는 기독교인은 선하지 않더라도 선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여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라.' 라는 말씀처럼요.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하더라도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노력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부분에서 지적하신 내용은 거의 동의하고 선구자적으로 현실정에 맞는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리더가 되는 목사님이 있었으면 하는 바램도 있습니다.
13/10/30 16:56
기독교인이 선할 필요는 없지만...
선해져야할 목적성은 있지요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품성이 하나님의 품성을 닮아 간다는 의미고 그것은 달리 말해 성령의 열매라고도 하지요 기독교인들은 반드시라고 할 만큼 인격의 변화를 가져와야 하고 그것은 비기독교인들이 보기에도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격의 변화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것이 열매인 것이니까요.. 그런데, 한국 교회에서 백안시 되는 것이 바로 인격의 변화라는 것이 문제이지요
13/10/30 17:59
공감합니다.사실 중세의 십자군들도 본인들 스스로는 성경말씀에 충실한거라고 생각하겠죠.
근데 교리자체가 바뀌려면 교황이 아니라 예수가 다시 나와야하겠죠;
13/10/30 22:02
기독교인은 선해야 합니다.
구원을 통해 선에 이르지 못한다고 할 때의 구원은 1차적인 죄에서의 구원만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죄를 대속했다는 것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칭함을 얻는 칭의(justification)가 1단계 구원입니다. 교리만 이성적으로 따지면 믿고난 뒤 죽을 때까지 뭔짓을 하든 상관없이 구원을 받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은 뒤에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으려는 성화(sanctification, 2단계)를 이루어가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죽은 뒤 하나님께 심판 받고 천국에 들어가는 영화(glorification, 3단계)까지 이루어야 구원이 완성됩니다. 자기가 믿었고, 예수님을 닮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고 생각해도 구원은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므로 결과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구원 받았다는 믿음을 갖고 사는 거죠. 기독교가 특별히 선을 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말씀에 괜히 혼자 발끈한 것 같은데, 의미가 잘 전달이 됐을지 아니면 분란만 더 만드는 건지 모르겠네요. 제 생각에 기독교는 선을 요구하지 않을 수 없는 종교입니다.
13/10/31 18:20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정리하는 내용이지요?
성화의 과정을 밟아가는게 무척이나 중요한데,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의 본질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 그 칭의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13/10/31 18:27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있는 내용인가보네요...
대학교 때 성경공부 하면서 사모님한테 배운 내용입니다. 성화가 참 중요한데 어렵죠. 끝도 없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성령님의 도움을 구하면서 살 수 있게 되는 거기도 하구요.
13/10/30 13:04
교회 내의 문제가 현시대에 들어서 많이 들어나보이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 들어서 많이 부패했다고 한다면...
저는 고린도전, 후서를 읽어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쓴 서신에는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을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지요. 교회 재정을 어떻게 쓰느냐의 문제점 또한 사도행전에 언급된 문제이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집사를 선출했었습니다. 뭐.. 지금은 교회 재정을 잘 써야 하는 집사들이 문제점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지만요. 교회의 문제점들은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있었던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완벽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도 완벽할 수 없습니다. 성직자들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인정하고 바꿔나가야 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잡음은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13/10/30 13:08
맞습니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곳이죠.
다만 '우린 괜찮고, 일부만 문제야.' 하는 말들을 포함해 쌓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어서 적게 되었습니다. 또한 교회 내에 많은 문제가 존재하고 많은 잘못이 있는데 아닌척 괜찮은척 하는 것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어 적게 되었습니다.
13/10/30 13:36
말씀하신 내용중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모습 역시 위선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교회는 나오지만 믿음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그저 형식적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런 분들은 실제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거나 기도를 하거나 성경을 꾸준히 보거나 하기보단 그저 예배를 나오고, 목사님의 좋은 훈화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즉 신앙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닌 훈화말씀 듣고 사교모임 정도로 교회를 이용합니다....그리고 정말 극소수의 사람들만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하고 제대로 믿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저는 이 사람들의 비율은 10%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 이부분은 동의 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재대로 경험"한 사람들이 본인들의 시선에서 바라볼때 "하나님을 재대로 경험 하지 못한 " 사람은 교회를 위선적으로 다닌다 라고 이분 하는것 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재대로 경험" 했다란 것은 명확한 기준도 없으며 내용처럼 "모든 기독교인의 10%도 안된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객관적 판단도 될수 없고, 주관적 판단에의해 위선적인 신도라고 판단했다 보입니다. 어떠한 기준에서건 의식적이든 무의식 적이든 '위선적인 신도'를 구분을 지었을땐 흑백 논리의 문재가 있다고 봅니다. 또한 이러한 문재는 신앙적 노력(하나님과의 신앙적 소통, 경험) 에서 소위 10%안에드는 신앙인들의 Fm적 방법(본문에 언급된 기도, 헌신, 봉사 등)을 제외한 그외적 인 개인적 노력을 폄하하고 배제 시키는 문제를 야기 시키는것 같습니다. 만인의 구원을 위해 노력하는 교회 또는 종교인이 스스로 신도들을 이분 하는것은 위험한 판단이고, 그것을 비판하고 지적하기보단 신앙의 열매를 맺을수 있도록 존중하고, 도와주고, 이끄는대 힘을 써야 한다 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재대로 경험 했다면 그것은 본인에게 영광스러운 일이지 다른 신도들의 신앙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는 권위를 획득한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신앙적 노력이 본인들 기준과 다르다고 위선적이다 비판하는것, 이러한 이분법으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은 교회 내부적으로 비판 및 문제가 발생되는 큰 원인중 하나라고 봅니다.
13/10/30 13:47
제주감귤님 댓글을 보니 제가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무시했던거 같네요. 그러나 이끄는 입장에서 보면 답답한것이 그저 나오기만 할뿐 변화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두명이 아니라 다수죠. 교회의 다수가 경험도 없을뿐더러 경험을 위해서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건 신앙의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폴워셔 목사님 말씀을 인용하자면 "제가 만약 예배에 늦게 오고선 이런 변명을 하면 어떨까요? '오는 길에 10톤 트럭에 치여서 늦게 됬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제 멀정한 몸을 보고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겠죠?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변화가 안됬다면 저는 여러분이 거짓말하고 있다고 말할겁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10톤 트럭보다 큰 분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덫붙이자면 10%는 어느정도 합리적 이야기라 생각하는게 위의 빌리그래함 목사님도 자신 교회에 다니는 사람,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중 5%만이라도 구원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셨고 폴워서 목사님, 존 파이퍼 목사님, 여러 선교사분들도 그러한 생각을 밝히셔서 쓴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생각이므로 아닐수도 있지만 전 위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13/10/30 14:18
porory 님의 의도는 이해 합니다.
한가지 의문인건 교회 또는 종교 지도자가 제시하는 신앙적 경험의 방법을 교인들이 따른다면 그 모든 교인이 신앙적 경험을 100% 다 하게 되는걸까요? 그리고 그 경험을 못했다고 노력이 부족하고 종교적 열정이 부족하다고 말할수 있을까요? 설령 실제 노력이 부족한 교인들이 많다 한들 답답하고 문제가 있는 교인이라고 치부 할수 있을까요? 교회 지도자로서 안타까움을 느낄수 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보기에 친목을 위해 나오는듯 해도 교회에 꾸준히 나옴은 그 교인들도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수동적이나마 본인을 본인들이 경험하지 못했고 들어서만 알고있는 신앙적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부터 그러한 행동이 시작된다고 봅니다. 길 잃은 어린양을 보면 바른 길로 인도 해 주는것이 교회의 모습이지 길잃은 양을보고 문제있다 말하고 답답하게만 느끼는것은 교회의 본 모습은 아니라 봅니다. 요즘 기독교 비판을 보고있자면 구원의 방법에 대한 교회 자체적,자의적 방법, 무조건적인 전도 등의 강제성으로 비판을 받는것 같습니다. 인용하신 말씀을 보자면 "왜 하나님을 만났다고 변명을 해야 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원인으로 교회안에서의 "신앙적 경험의 성공" 강제성이 있었는지 생각해 볼만한 일입니다.
13/10/30 14:51
맞습니다. 100%다 경험할 것이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다만 그런 노력이 없다면 신앙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적어도 그렇게 배워왔고 실제로 많은 체험을 해봤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알고 싶어 여러 방법으로 그것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고 실제로 실천했습니다. 그 가운데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지도자가 설령 신앙적 경험 방법을 제시하지 않더라도 스스로 이 종교가 믿을만한 것인가? 단순히 거짓말이나 뻥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본다면 그리고 자신의 신앙에 대해 고민한다면 기도하게 될 것이고 경험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경험이 없다고 해서 열정이 부족하다고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경험이 없으면서 열정적이고 신앙있는 사람이라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리고 좀더 구체적으로 답답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하면 수십년간 교회에 나오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긴 시간동안 목회 지도자가 노력하지 않았을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도 말하길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수십년동안 변화되지 않는 사람을 보고 간절한 마음으로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그것을 아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성경에 명백히 나온 사실과 말씀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지 비판하고 싶은 겁니다. 글을 적긴했는데 제가 글을 잘 이해했나 모르겠군요. 정확한 답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13/10/30 15:17
"성경에 명백히 나온 사실과 말씀들에 대한 생각" ..고찰이 나름의 신앙적 방법을 세우고 개인적 경험과 성취를 이룰수 있다.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은 구원, 신앙적 경험이 절대적인 목적이자 목표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 외 신앙 생활, 즉 친목을 위한 교회 생활이라도 교회 안에서 교류, 각종활동이 큰 의미인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 활동과 직책이 삶의 의미가 될수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유대감이 자신의 삶을 잡아주는 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신앙적 목표보다도 이런 의미로 교회를 다닌다 하더라도 이 자체로도 교회는, 종교는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런 분들에게 신앙적 경험의 노력을 '답정너' 식의 강제적 강요보다 자기 성찰의 개념으로 설득하고 이해 시켜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3/10/30 19:35
제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수년간 다방면으로 알려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느끼는 것은 다른 누구가 아닌 개개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인거 같습니다.
13/10/30 14:17
종교가 신과 개인의 1:1 관계일때는 현실과 관계가 없겠지만, 신과 개인들간의 관계가 되면 종교가 현실이 되버리는거죠.
어떤 종교인들은 종교가 단순한 신앙적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신앙이나 믿음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 종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는 각 개인과 집단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풀어나가지 않는것은 비현실적인것이죠.
13/10/30 16:40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이 글을 읽고 제가 기독교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던게 몇 가지 있었네요.
저는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기독교인인 친구들은 좀 있고, 그 중에는 총신대 나와서 신앙생활 열심히 하는 친구도 있었거든요. 기독교인이 술, 담배 하면 안되는거 처음 알았습니다. 기독교인이 마치 불교처럼 세속에서의 즐거움을 탐하는게 금기인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기독교인은 오직 하나님만을 좇고, 현재의 삶을 신께 바쳐야하는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제 친구들은 술, 담배 하는 친구들도 있고 그냥 현재의 삶도 열심히 살고(충분히 즐기면서) 본인은 기독교 진심으로 믿는다고, 기회만 되면 저를 어떻게 전도해보려고 어찌어찌 하는데, 그리고 기독교인인 친구들중에서 진짜 천사 같은 녀석도 있지만 저랑 별 다를바 없는 사람도 있거든요. 본문에 의하면 제 친구들은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니었네요.
13/10/30 16:48
술과 담배로 인해 행해질 죄를 금지 하는거지 술과 담배 자체를 금지 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여기서 인자는 예수입니다. 하지만 술로인해 행하여질 죄를 금하긴 합니다. 로마서 13장 13~14절 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술은 적당히 즐기는건 나쁘지 않을겁니다 아마 흐흐
13/10/31 18:24
담배는 성경이 씌어진 뒤 천년하고도 한참 지나 유럽에 전달되었으니 성경에 담배 이야기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모 목사님께서는 사람이 담배 피는게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이었다면, 담배 연기 나가는 구멍 하나쯤은 더 만들어 주시지 않으셨겠냐며 우회적으로 담배피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흡연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변하고 있지만 대부분 기독교인 인식에는 기독교와 술, 담배는 그다지 가까이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술, 담배를 이유로 들어 친구분들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하시지 마시고, 그 분들 삶에서 어떤 향기가 나는지, 어떤 열매가 있는지로 판단해주셨으면 합니다.......
13/10/30 16:45
어제 그제 올라온 글들에서 더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는데 바빠서 넘어갔습니다만,
이렇게 또 기회가 올라왔으니 몇 마디 보태보고 싶습니다.. 1. 한국 기독교(혹은 개신교) 신앙의 위기는 양 측면에서 다가오고 있다고 봐요. 하나는 신앙 본원에서의 위기이고, 하나는 교회 시스템의 위기입니다. 2. 신앙 본원에서의 위기는 결국 고대의 유목민족 신화에 기반을 두고 약 2000여년전에 집대성된 (이렇게 표현하니 무신론의 향기가 너무 강합니다만 다른 표현을 찾기가 어려워서.. 불쾌하게는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경말씀이 현대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기본 가치들과 상호 충돌하게 된 상황에서 연유합니다. 지난 글에서 Orbef님의 댓글이나 이번 글에서 Love&Hate님의 댓글이 이런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저는 단순히 성경 말씀을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도 있는 지엽적인 부분들(예컨대 예수가 행한 오병이어의 기적과 같은 것들)은 사실 그렇게까지 크게 문제되지는 않는다고 봅니다. 더 큰, 그리고 본질적인 문제는 성경 말씀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들이 사실은 다원주의, 회의와 교차검증을 통한 진실 발견, 그리고 그 차원을 넘어서는 인간 정신의 본질에 대한 유물론적 발견들과 같은 과학과 근현대 철학에 의한 새로운 사고 및 발견들과 정면 충돌하는 관계에 있고, 좋든 싫든 후자의 요소들은 전 지구적으로 현대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큰 근간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이라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과 이러한 사고들과는 사실상 조화가 거의 불가능한데, 그것은 현대사회에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러한 요소들을 신앙의 범주 안으로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고 그에 따라 기독교 자체에서 이러한 사고 및 발견에 대해 통일된 해답을 주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인에게는 개개의 신도가 알아서 해결해야할 엄청난 내적인 과제를 떠맡겨두게 되고, 비기독교인들에 대해선 신앙에 관한 설득을 하는데 가장 주된 장애요소의 하나가 되게 마련이죠. 이 부분에 대한 기독교계의 대응은 다양해서 하나로 묶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한국 주류 기독교계의 움직임은 이러한 갈등의 핵심에 대해서는 정면으로 언급하는 것을 피하는 한편, 기존의 신앙의 핵심 요소들에 대하여 더더욱 강조를 하는 방향으로 보입니다(더욱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네게 응답할 것이라는 것이 대표적이죠). 이러한 반응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것이고 기독교 신앙의 구조상 틀렸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지만 이 상황이 이대로 오래 유지된다면 전통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신앙의 유효기간은 (수천년에 이르는 기독교의 역사를 고려하였을 때) 생각같이 길지는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3. 교회 시스템의 위기는 한국의 기독교 시스템이 개교회주의에 입각해서, 각 교회의 살림을 스스로 알아서 해야만 한다는 데서 발생합니다. 교회의 일에 관여하여 보셨다니 아시겠지만, 교회란 곳은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도 생각보다 그 유지와 운영에 많은 자원(돈을 포함하여 그에 한정되지 아니하는)이 필요합니다. 교회를 그럭저럭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말씀에 따라 이상적으로 운영하고자 하면 할 수록 더더욱 많은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자원이 결국은 (미자립교회 지원 같은 부분이 있기는 하나 사실상 언발에 오줌누기 수준이고 현실적으로 시스템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가 전혀 아님을 아시겠습니다) 그 교회 신도들의 헌금과 봉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죠. 이런 시스템은 결국 사회적으로 모든 교회를 결국 좋든 싫든(!!) 회사를 지향하는 자영업체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나 좋자고 교회를 세워 섬기는게 아니라 말씀을 올바르게 나누기 위해 교회를 세웠지만 결국 그 사명을 다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자본주의적으로 잘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죠. 더욱이 이런 시스템은 필연적으로 경쟁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에, 어영부영하면 옆의 다른 교회(라 쓰고 많은 경우 더 큰 교회라고 읽는)로 신도들이 이동해버리게 됩니다. 결국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이러한 하부구조가 망가지면 교회가 본래 목적한 섬김은 커녕 존립이 안되는 형편이고, 반대로 많은 신도를 이끌고 대형화에 가까워질수록 규모의 경제를 실현시켜 나가며 더 많은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헌금이니 결심이니 하는 요소에 대해 교회 안에 알게 모르게 강조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전도사님이나 적극적인 신도들의 많은 봉사가 실제 이상으로 높게 가치가 매겨질 수밖에 없으며 신도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에 민감해서 어떻게든 새 신도를 유입시키고 기존의 신도가 나가기 어려운 내부구조를 유도하게 됩니다. 교회에 계속 다니시던 분들은 이런 묘한 분위기에 어느정도 익숙(?)해진 상황이지만 외부에서 보기엔 이러한 공기는 위화감이 상당합니다. 비신도가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 느끼는 굉장한 위화감(엄마 뭐야 이 사람들 무서워)의 실체는 사실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봐야겠죠. 여기에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것은, 한국 교회가 이러한 자본주의적 자영업 시스템에 입각하고 있음에도, 이러한 부분을 교회가 직시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현실이 아무리 이렇다 하더라도 자영업체를 잘 운영하려고 교회를 설립한 것은 아니기에 이러한 부분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고 또 사실은 어느정도 그렇게 해야하는 일이긴 합니다만(어느 누구도 신앙을 위해 교회를 나오지 본업 이외의 제2의 회사를 다니기 위해 교회를 다니진 않을 것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분을 전혀 직시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많은 자원의 내부적 움직임이 사실은 굉장히 주먹구구적인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여러 단계로 이루어진 꽤나 복잡한 의사결정 기구들을 가지고 있고 겉보기엔 뭔가 합리적인 시스템에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만, 하나하나 뜯어보면 결국 운영하는 사람(그것이 목사이든, 부목사/전도사이든, 장로이든, 권사/집사이든, 평신도이든)의 선의에 기대고 있을 뿐 아니라 시스템이 오작동한 경우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마련되어 있지를 않습니다. 더 나쁜 것은 그러한 부분을 지적하는 것에 대해 환영하기는 커녕 매우 경원시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보니 좋은게 좋다는 식으로 진행되어 나가다가 문제가 생기면 우왕좌왕하는 일을 반복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현재 한국 교회의 시스템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도 유효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독일같은 경우 주민등록을 할 때 반드시 종교조사를 하는데,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에 대해서는 종교세(혹은 교회세)가 따로 부과됩니다(그 이외의 종교 및 무교에 대해서는 세 부과가 없습니다). 그런 다음 이와 같이 전국적으로 일률 징수된 종교세를 미리 정해진 원칙에 따라 개교회에 분배합니다. 따라서 교회의 목회자들은 한국과 달리 교회의 생존 및 그를 위한 경제적 운영에 신경쓰기보다 원래의 신앙에 보다 집중할 수 있고 헌금 문제에도 비교적 초월하는 입장이 될 수 있습니다. 일견 보기에 좋아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이러한 시스템은 개 교회에서 신도들의 결속력을 약화시키고 적극적인 전도의지도 약화시켜서 결국은 교회의 세 위축으로 이어진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정교분리 원칙 위배니 하는 이론적인 쟁점은 차치하고서라도). 마치 자본주의의 공산주의에 대한 승리의 과정을 보는 기분인데.. 여튼 여기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납니다. 결국 자본주의적 자영업 시스템인 현재의 한국 시스템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지만, 한국 기독교의 동적 활력의 한 근원이라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보니 이러한 시스템을 본문글에 언급된 바와 같은 각종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굳이 바꿔야 하나 하는 논점이 새로 발생하게 되고 (사실은 대놓고 말하지 않을 뿐 이 시스템에 의한 한국 교회의 성과에 대해 교계 내에선 자부심 역시 가득합니다) 문제의 해결은 더더욱 요원해집니다. 현재의 문제가 개 교인 개 교회의 오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스템의 근원적 한계에서 비롯한 것인데, 그 시스템을 유지한다면, 본문 글에 지적된 바와 같은 현상을 비롯해서 신앙 이외의 논점으로 한국 기독교가 지적받는 문제들은 사회의식의 전반적 성장에 발맞추어 완화될 수 있을지언정 교회 자체의 역량으로 근본적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운 것들이 되는 것이니까요.
13/10/30 16:51
저 여기 올라오는 글 그냥 흥미로 읽고 있었는데 이 댓글은 추천 있으면 추천하고 싶네요. 글 정말 잘 쓰시네요 덜덜덜...생각도 명료하시구요. 나는 언제 이렇게 써 보나 ㅡ.ㅠ
13/10/30 17:15
지적하신 교회의 시스템적인 면은 교회 내부에서도 많은 실험과 시도들이 있고, 사회적인 비판 앞에서 결국은 교회가 항복하리라 저는 생각을 합니다.
변화에 대한 선한 요구는 하나님의 음성이고 경고라고 생각합니다. 그 요구에 응답하지 못한다면 한국 교회는 한줌의 먼지처럼 사라질 수 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그것이 당연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신앙본원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만약, 기독교라는 것이 참 하나님을 믿는 참된 종교라는 전제를 가지고 접근을 한다면 꼭 과학이나 철학등의 질문에 답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생명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본질적인 물음이기도 합니다. 기독교가 생명이 있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라도 그 생명의 끈을 놓지 않을 것이고 열매를 맺어 가리라고 봅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생명이 있지 않다면 아무리 좋은 환경속에서라도 결국 그 끝을 볼것이라고 봅니다. 제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전도를 할때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들을 설득시키려고 하지말라. 나 스스로 생각을 해도 합리적인 사람이라면 절대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 힘들기 때문이다. 기독교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던 초대교회 시대에야 강권하여 말씀을 전파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다. 전도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의 삶으로 하는 것이다. 지금은 교인들의 삶이 죽어 있기에 기독교의 생명력이 같으 죽어 있을 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교인들의 삶이 생명을 얻는 다면, 그 삶 자체가 모든 질문의 답이 될 수도 있으리라 믿습니다.
13/10/30 19:14
마지막 좀비님 처럼 전하는 것이 지금 시대에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데 그런 열매를 보여주는 사람, 교회가 그다지 많지 않고, 그나마 그런 역할을 하시던 분들이 여러 안 좋은 일로 엮이게 되어 마음이 아픕니다.
13/10/30 19:17
제 친구중에도 그런 분위기 때문에 마음을 닫은 친구가 있습니다. 또한 신앙의 굉장히 어려운 많은 부분들을 그저 개인에게 돌리는 것도 사실이죠. 아직까지 교회가 그저 이대로 하라면서 강압적으로 했던 것들에 대해서 결과를 보는 것 같기도 해서 답답합니다.
13/10/30 20:45
놀라운 통찰이 느껴지는 댓글이네요. 많이 배웠습니다.
개인적으로 첫째로 지적하신 신앙 본원의 위기는 교회의 보수화와 노쇠화를 가중시킬거라고 봅니다. 두번째 지적하신 교회의 자본화도 더욱 심화되겠지요. 나중에가서는 교회 전문 경영컨설턴트 같은 신종 직업도 생겨날 거 같습니다.
13/10/30 19:18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회에 가보면 목사님의 믿습니까라는 대답에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것 같더군요. porory님이 말씀하신 실제 하나님을 경험한, 구원을 받은 신자들이 10%가 안된다는 말은 믿음에도 분류가 있다는 것인지, 그런 분류가 있다면 왜 그런 사실들을 알려서 100%화 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그 100%화 된 사람들이 실제 나쁜 행동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교리적 장치가 있는지도 궁금하구요.
13/10/30 19:32
기독교에서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성경에 쓰여진 내용을 기반합니다.
성경에서 다른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그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데 이 내용의 바탕은 당시 시대에 있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은 군인에게 끌려가 사형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나온 말이 크리스천인데 '작은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처럼 죽을 각오를 하고 말하기 때문에 믿음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확실히 신앙이 있다고 볼 수 있죠. 반면 현재는 그것을 알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얼마전까지 믿는다고 해놓다가 자기 프로필에는 불교를 믿는다면서 바꾸는 친구들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하는 것으로만은 알기 어렵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교회에 다닌다고만 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목사님도 없습니다. 성경에 여러 믿음의 기준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절대적인것은 아니고 굉장히 다양하게 설명되어있지만 편의를 위해서 하나만 적겠습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믿는것이 증거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증명되죠. 그러나 요즘 대부분의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말씀에 적힌대로 살지도, 말씀을 보지도 않는 편입니다. 이들은 교회에선 말씀을 꾸준히 봐야한다, 예수를 닮아가야한다 등의 많은 설교를 들어왔지만 그저 듣기만 할뿐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존재했는데, 예수님이 기적을 많이 행하시고 인기가 많아지자 그저 구경을 위해서, 혹은 좋은 말씀을 듣기 위해서 모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이 구원받았다고 하신적이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교회에서도 이런 분들은 존재하고 그저 좋은 말씀 등으로 생각하지 실제 삶에서 그것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았다고 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에 대해서 매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들으면서 무시하는 것 역시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13/10/30 19:42
성경에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는 구절이 있다고 하더군요.
예를 들어 예수님의 말씀처럼 사는 비종교인이 있다고 했을때 제가 알기로 이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행위가 믿음과 직결되지 못하기 때문이죠. 믿음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행위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했을때, 그럼 교회를 다니는 사람중에서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갖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에 의한 신념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큰 행운이라고 여기는 구원에 대해서 믿음도 아닌 행위도 아닌 어떤 구체화 할 수 없는 것에 의존하여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13/10/30 19:50
깜짝 놀랐네요. 거의 카운터되는 말씀이라.. :) 위에서 이야기했지만 여러 판단기준이 있는데 후후하하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것은 맞습니다. 이 말씀의 바탕은 우리는 근본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하는 행동도 악하고(이사야서),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선한 행동도 사실 하나님의 기준으론 선하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죠.
구원에 대해선 정말 복잡한 내용이라 길거리 전도에서 듣듯 간단하게 믿고 땡이런건 아니지만 도리어 믿음이 가장 중요하기도 합니다. 후후하하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고, 행위도 구원을 확신하지 못한다고 했을때, 그럼 교회를 다니는 사람중에서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갖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엄밀히 말해선 그 누구도 단언할 수 없습니다. 다만 비유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예수님이 나를 알고 내가 예수님을 알고 있다면 구원받은 것입니다. 만약 구원 받았는지 궁금하다면 스스로가 스스로를 살피면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왔는가?' 그런 질문들이지요. 만약 교회를 수년간 다녔다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어느정도 내릴 것이라 생각됩니다. 구원에 대해 단언하긴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구원 받지 못했다고 볼수있는 많은 열매'들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굉장히 많다는 점입니다.
13/10/30 21:47
무슨 뜻으로 하신지는 감이 오네요. 그런데 그것에 대한 이유까지 적어주시면 제게 도움이 될 것 같네요.
저도 글을 쓰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굉장히 떨리면서 썼습니다. 그리고 글 내에서도 많은 모순이 있기도 하죠. 저도 압니다. 다만 예수님을 못 만난 사람같다는 말은 정말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네요. 왜냐면 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수년간 살아왔기 때문인거 같습니다. 물론 경험이나 그런걸 강조하는게 꼭 만났다는 것과 연관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도 자기 잘한걸로 자기 의를 세운것도 잘 압니다. 가볍게 한줄쓰신것에 죽자사자 댓글다는거 같기도 하지만 제게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기 때문에 길게 적어봅니다.
13/10/30 23:54
송파사랑님,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하시는 군요.
그말이 가장 오만하며 폭력적이란걸 아시나요? 다른사람의 구원을 판단할 정도로 그렇게 높으신가요? 본인의 구원은 어떻게 증명하실껀가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본인은 예수를 만난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이며 만나고나서 어떻게 되셨나요? 다른사람을 판단하는 권세를 받으셨나요?
13/10/31 01:19
헐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이 그렇게 가볍게 느껴지시나요?
그걸 어떻게 알수 있죠? 안다손 치더라도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드러낼수가 있죠? 굉장히 오만불손한 표현입니다.
13/10/30 21:59
종교에 대한 관심이 'ZERO' 치수이기 떄문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 라고 말할 입장은 아니지만 글쓴분 의견에 전체적으로 공감합니다. 저 역시 개인의 종교의 자유에 대해서 동의하고 대학내 학우들 그리고 어린시절 친구들의 가치관 역시 존중하지만 우리나라 기독교를 보면 정말 도를 넘어섰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습니다. 뭐랄까,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기독교인은 위에 댓글에서 미리 언급되었지만 정말 LA 다저스의 커쇼처럼 남에게 본인의 신앙 가치관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는 이렇다, 불교는 이렇다 라고 보여주는 태도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기독교를 보면 이러한 모습을 보여주는 분들은 제 경험상 전무하다고 생각됩니다. 목사로 대표되는 종교 지도층 (표현이 올바른지 모르겠네요)들은 그저 교회 머리수 키우기에 급급하고 예수천국 불신지옥만 강조하는 이런 배타적인 모습이 우리나라 기독교의 현주소를 대표한다고 생각합니다. 맨날 '구원', '꼭 보여야 믿느냐', '인류 창조설' 에 의존하여 기독교 전파하는 우리나라 기독교의 모습은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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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0/31 07:45
굉장히 진솔한 자기 반성이네요. 일단 추천 드립니다.
저는 저글링아빠님과 의견을 거의 같이 하는 입장이고 기독교를 비롯한 monotheism 은 현재 방식으로는 미래가 없다고 보는 편입니다. porory 님이나 마지막좀비님 (아니 신학원 나오셔서 개척교회에 인생 바치신 분이 아이디는 마지막 좀비 크크크) 처럼 초기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분들을 만나면 개인적으로 존경심은 듭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새로운 교인을 모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유라면: 1. 초기 교회의 강한 공동체적 성격은 상당 부분 이 사람들이 종말론자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 본인도 그럴 가능성이 높지만 그 부분은 일단 빼고, 성경의 텍스트를 정말 정말 창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이상, 성경 저자들 중 상당수는 한 세대 이내에 로마가 망할 것으로 예언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20세기말 휴거 해프닝에서도 잘 보았듯이, 곧 종말이 올 것으로 믿는 사람들이 가진 것을 빨리 빨리 내놓지 않을 이유가 없었겠지요. 하지만 평생 잘 살고 자식 잘되는 것도 보고 싶은 사람들이 현대 사회에서 초기 교회처럼 산다는 것은 미국의 아미슈처럼 자기들끼리 마을 만들어서 살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얘기입니다. 2. 지난 200년간 교회는 여호수아가 태양을 멈춘 건 상징입니다 + a, 아담과 이브는 상징입니다 + a, 지구 창조 이야기는 상징입니다 + a, 예수님 사망시에 예루살렘의 온 무덤이 열려서 죽은 자들이 되살아났다는 것은 상징입니다 + a, 진화론은 아마 사실인 것 같습니다 + a [여기서 a = 이런 교리 변화는 사실 지엽적인 것인지라 기독교의 핵심 교리가 변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라는 식으로 무수히 교리를 수정해 왔습니다. 앞으로도 이 추세는 계속될 겁니다. 굳이 예를 막 들면 필요 이상 공격적이 될 것 같아서 관두겠습니다만, 아마 어떤 부분들이 상징의 위치로 격하될 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3. 과학은 무수히 내용이 바뀌어도 상관 없습니다. 애초에 불변의 진리를 (그 비슷한 것을 추구는 합니다만) 장담하는 분야가 아니기에 '예전에는 이렇게 생각했는데, 새로이 검증해보니 그건 틀렸더라구요. 새로이 얻은 데이타와 기술을 기반으로 이론을 이렇게 수정하였더니 기존의 예측에 비해서 정확도가 상승했습니다' 라고 말하면 끝이거든요. 그런데 교리는 그렇지가 않지요. '예전에는 삼위일체를 믿었는데, 잘 생각해보니 아니더라구요' 이렇게 이야기할 수가 없습니다. (초기 교회에서 저 정도 일이 빈번히 일어났다는 것은 함정) 그렇기 때문에 과학 발전에 억지로 눈을 감지요. 아니다 아니다 얘기하다가 일정 시점이 되면 '성경에 잘 보면 그 얘기가 원래 써있슴' 이라고 얼굴을 확 바꿉니다. 즉, 실제로는 교리가 바뀌는 것인데 마치 그렇지 않은 양 이야기하지요. 근데 그렇게 해서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회 지도자들 생각이고 바깥에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즉 저런 일이 한 번 일어날 때마다 기존의 교인은 떨어져나가고 새 교인을 얻을 가능성은 쭉쭉 줄어듭니다. 그렇기에 유럽에서 기독교는 그리스 신화의 위치로 내려가고 있고 교회는 지역 주민 타운홀로 변해가고 있는 겁니다. 결론: 해서 지금의 신실한 기독교인들에게 표하는 존경심과는 별도로, 우리가 노년층이 될 무렵의 기독교는 이신론과 뉴에이지를 섞어놓은 듯한 모습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고 보는 편입니다. 아시겠지만 이신론이나 뉴에이지 운동은 과학의 공격에 대해 거의 면역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재림급의 기적이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 한, 저것 말고는 길이 없어보여요. 문제는, 이신론의 신은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신이기 때문에 기복 신앙과 본질적으로 양립 불가능한 것이고, 기독교가 이신론의 방향으로 움직이면 기도해서 복받으려는 신도수가 아주 극적으로 다운되는 결과로 이어질 겁니다. 하지만 기독교가 현재 모습을 유지하면 모태 신앙 (이것은 사실 아이에 대한 폭력이지만, 그건 일단 넘어가고) 이 아닌 이상 성인층에서 신규 신도를 구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거의 불가능하겠죠. 어느쪽이던 기독교가 현재 규모로 지속 가능한 상황이 아닐 것으로 봅니다. 덧: 노파심에서 말씀드리지만, porory님이나 마지막좀비님이 이신론자로 변하실 거라는 뜻은 아닙니다. 두 분은 신과의 개인적 만남을 하신 것으로 추정되는데, 저야 일인칭 경험에 큰 가치를 두지 않긴 합니다만, 그런 경험을 직접 하신 분이라면 위에 말씀드린 종교의 문제점들은 그야말로 지엽적인 것으로 보이겠지요. 하지만 그런 만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어디까지나 소수라는 것도 잘 아실 겁니다. 때문에 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기독교 주류 교리의 전망' 과 '기독교인 인구수의 전망' 정도로 보아주시길 바랍니다.
13/10/31 14:42
좋은 댓글입니다!
3번의 경우, 유럽에서는 카톨릭/개신교의 본산임에도, 그 역사가 길어서 온갖 것을 다 봐서 그런지, 또 그에 못지 않게 철학(?)도 같이 발전해서 그런지, 그리고 '국교'로 내세우지 않아서 그런지, 무신론자들이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인 듯 합니다. 그쪽에선 더더욱 Orbef님께서 말씀하신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생각합니다. 다만 이런 서양/유럽 태생의 종교들이, 제3세계 국가(좋은 표현은 아닙니다만, 대안이 없어 우선 사용합니다)들로 무대가 옮겨갔다는 점이 참 흥미롭다고 생각합니다. 인구수로 승부하는 라틴 아메리카가 세계 최대 카톨릭 신자수를 자랑하고 (새 교황님도 아르헨티나 출신이죠),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이슬람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국교처럼 생각되는 종교는 기독교죠. 이곳에서는 한국처럼 기복신앙적인 성격과 결합되어, 유럽에서의 기독교와는 또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역사를 만약 한 방향으로 진화(?) 한다고 볼 경우, 유럽이 그러했듯, 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 대륙도 지금에서야 불타오르는 거지, 점점 식어간다고 봐야 할까요? 아니라면 이 두 대륙에서의 기독교의 모습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댓글을 써놓고 보니, 딱히 Orbef님께 드리는 질문은 아닌 것 같긴 합니다;;;;)
13/10/31 14:56
우리가 앞으로 대충 50 ~ 80년 정도 살겠죠...?? 그 동안에 아프리카나 남미에 무신론의 바람이 일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실제로 종교별 인구 예상치를 추정해보면 2050년까지는 전지구 스케일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 가 늘어날 것으로 보는 의견이 우세입니다. 이게 전부 아프리카와 남미빨이죠. 하지만 아프리카와 남미는 역사 발달 과정이 한국보다 한참 뒤인 곳이고, 유럽인의 재수없음을 꾹 참고 보면 결국 유럽이 현재 지구상에서 문화 발달 면에서 가장 앞서있는 곳이죠. 따라서 길게 보면 결국 유럽화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에 인구 폭발로 식량 전쟁이 벌어져서 문명 리셋이 되지 않으면요....)
남미는 솔직히 제가 잘 모르겠고, 현재의 아프리카에서 부는 기독교의 바람은 자원봉사와 결합된 선교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내가 당장 죽게 생겼는데 손 내밀어 주는 사람이 같이 교회 가자면 웬만하면 교회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세속주의자들이야 자원봉사만 하고 돌아가버리니까 (저는 그게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지만) 영향이 없고요. 근데 뭐 우리가 정말로 궁금한 것은 아프리카나 벨기에의 미래가 아니라 대한민국 (저는 미국 거주중이니까 미국) 의 미래죠. 여기서 제 의견을 너무 노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원글자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고, 다만 한국이나 미국같이 지금 기독교의 위세가 강한, 그러나 사실은 문명국인, 곳은 우리가 영감 소리 들을 때 즈음에는 지금의 유럽과 비슷한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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