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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롤러코스터(2013) - 병맛이라도 괜찮아!
한편의 재기발랄한 소동극
하정우 감독의 데뷔작,
[롤러코스터]는 재기발랄한 한편의 코믹 소동극이다. 이 작품은 영화 '육두문자맨'으로 일본에서 한국욕 배우기 열풍까지 일으킨 한류스타 마준규가 서울행 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향하던 도중 예상치 못한 태풍에 휘말리면서 비행기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상황들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며 한편의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비행기 안이라는 한정된 장소, 배우들의 속사포 같은 대사와 독특한 행동, 과장된 캐릭터 등이 그렇다. 그리고 이러한
[롤러코스터]의 연극적 요소들은 결국 이 영화만의 독특한 매력이자 한계점이기도 하다.
병맛이라도 괜찮아!
우선
[롤러코스터]는 재밌다. 하지만 이 재미는 일반적인 코미디, 이른바 빵빵 터지는 스타일의 영화 속 유머들과는 그 색깔이 다르다. 예를 들어,
[광해 왕이 된 남자]나
[내 아내의 모든 것] 등의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영화적 웃음 코드들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얘기다. 일단 이 영화는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와 같은 식의, 특유의 독특한 유머 코드를 지니고 있다. 이것을 두고 B급 정서라면 B급 정서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연극적 코드라면 연극적 코드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결국은 '하정우표 유머'라고 보는 것이 가장 적절하겠다.
어쨌든 핵심은 이 영화의 코드와 관객의 코드가 얼마나 일치하느냐이다. 그에 따라서 어떤 관객은 90여분 내내 시시함을 느끼며 이질감과 지루함에 몸서리치며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고, 어떤 관객은 쉴새없이 낄낄대며 깨알같은 재미에 푹 빠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개인적으로 난 후자에 속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롤러코스터] 속 배우들의 천연덕스러운 표정과 제스츄어만 봐도 웃음이 나왔다. 영화를 보며 이렇게 조용히 키득거리고 낄낄대며 작품을 즐긴 것도 개인적으로 오랜만이다. 영화는 다분히 병맛스러운(?) 요소들을 여러군데 내포하고 있지만, 하정우 감독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출과 배우들의 천연덕스러운 캐릭터 연기를 통해 이러한 병맛스러움을 깨알같은 재미와 유머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한다.
하정우 사단, 그들의 본격적인 등장
사실 90여분이라는 영화의 러닝타임의 대부분이 비행기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 속에서 진행됨에도 불구하고 관객의 지루함을 최소화시킬 수 있는 데에는 영화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향연이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우선 주인공인 한류스타 마준규. 작품 안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마준규 역의 정경호는 영화 속에서 꽤나 인상적인 호연을 펼쳐보였다. 수많은 캐릭터들의, 이른바 캐릭터쇼가 펼쳐지는 개인기의 향연 속에서도 배우 정경호가 연기한 마준규란 캐릭터는 상당히 안정적으로 느껴졌고 전체적으로 다소 붕 떠있는 작품 전체의 연극적인 과장된 공기를 영화적인 호흡으로 끌어내리는데 상당 부분 일조한다. 어쨌든 이러나 저러나 영화 속 마준규의 찰진 욕은 꽤나 인상적이었으며 배우 정경호는 마준규라는, 결벽증 심하고 이중적이며 까탈스러운 톱스타 캐릭터를 무난히 잘 소화해냈다. 이정도면 그 정신없는 영화 속 아비규환의 와중에서도 자기 몫을 충분히 해줬다는 생각이고, '그 많은 배우 중 왜 정경호를 캐스팅했나? 단지 대학교 후배라서?' 라는 의구심 어린 의문에도 충분한 답이 되었다.
그 밖에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선후배 출신들이자 이른바 '하정우사단'이라 불리는
[577 프로젝트] 출신 배우들의 열연 또한 눈에 띄었다. 대표적으로 단발머리 의사 역의 이지훈, 기장 역의 한성천, 사무장 역의 강신주, 신혼녀 역의 이수인, 급똥남 역의 김성균 등 많은 배우들이
[577 프로젝트]에서 눈에 익었던 배우들이라 개인적인 반가움이 더 컸다. 그리고 이 들 외에도 스님, 회장, 기자, 승무원 등 다양한 캐릭터들이 극 안에서 각자의 개성을 뽐내며 다양한 웃음과 재미를 만들어내는 데에 일조한다. 그리고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캐릭터 가운데 하나가 바로 단발머리 의사였는데, 첫 등장부터 범상치 않게 등장하더니 "임산부인가요?", "너무 꺾으면 죽어요.", "축구선수인가요?" 등의 깨알같은 드립을 쉴새없이 날려주며 관객들의 배꼽을 끊임없이 간지럽혔다. 이와 같이 영화
[롤러코스터]는 다양한 캐릭터들의 독특한 개성이 작품을 지탱하는 큰 축이자 유머의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파편화된 캐릭터들의 한계
하지만 문제는 캐릭터간의 캐미와 앙상블의 부재다.
[롤러코스터]의 캐릭터들은 나름대로 각자에게 부여된 몫을 충분히 하고 있지만, 그것뿐이다. 따지고 들어가면 각각의 캐릭터간의 유기적인 결합이나 시너지 효과는 거의 생성되지 않고,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파편화된 자신만의 영역과 틀 안에서 순간순간 휘발되고 소모되어 버리기 일쑤이다. 예를 들어, 캐릭터들 가운데 가장 극의 흐름과 공기를 뜬금없이 해치는 기자 캐릭터의 경우, 유독 다른 캐릭터들과 조화롭게 녹아들지 못하고 위화감을 조성하며 극에서 따로 노는 느낌이 강하다. 이것은 결국 연기의 문제라기보다는 극의 흐름과 캐릭터의 개성을 자연스레 결합시켜야하는 몫을 짊어진 시나리오와 연출 상의 문제라고 봐야할 것이다.
또한 브래지어 드립으로 웃음코드를 만들어낸 신혼남녀 캐릭터라던가, 씨스타의 '나혼자'를 염불 외우듯 중얼거리는 스님, 심장이 안 좋은 회장님과 그를 진지하게 모시는 비서까지 이 모든 캐릭터들이 각자의 위치에선 나름의 웃음 코드와 유머 포인트를 만들어내지만 딱 거기까지라는 얘기다. 왜 굳이 이 캐릭터가 이 비행기 안에 있어야하는지, 그리고 이 순간에 왜 이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이유나 개연성이 없다. 그냥 그렇게 할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러한 캐릭터들이 단지, 가장 웃음을 뽑아내기 쉬운 독특하고 엉뚱한 스타일의 캐릭터들이기 때문에 감독에게 '간택'된 느낌이 강하다. 물론 '팍팍한 세상, 어디 한번 속 시원하고 가볍게 웃어보자'라는 주의로 만들어진
[롤러코스터]에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 자체가 오버일수도 있겠으나 어쨌든 이것은 영화적 색깔의 문제이기 이전에 작품의 완성도의 문제이다.
결국 영화의 웃음과 재미가 이렇게 파편화된 캐릭터 각각의 개성과 배우들의 개인기에 많은 부분 의존하다보니 그 웃음의 힘과 진폭이 뒤로 갈수록 줄어들고 약해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더불어 대사 전달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속사포와 같은 빠른 대사 처리는, 작품의 개성과 특유의 색깔을 드러내는 데에는 일조하였을지 모르나, 관객들이 유머 포인트를 마음 편하게 즐기지 못하고 뭔지 모를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플러스보다는 마이너스 영향이 더 커보인다.
롤러코스터, 감독 하정우의 영리한 선택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롤러코스터]는 충분히 무난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이다. 우선은 코믹영화 답게 웃음과 재미를 제대로 뽑아낼 줄 알고, 캐릭터의 앙상블에 대한 아쉬움은 있을지언정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과 편집이 엉성하거나 어설프게 느껴지진 않는다. 큰 욕심 부리지 않고 감독이 스스로 잘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 나름대로 즐기듯 공들여 만들어낸 흔적이 곳곳에서 느껴져서 꽤나 흥미로웠다. 하정우 감독은 첫 작품부터 무게 잡고 자신의 영화철학을 무거운 호흡으로 풀어낸 것이 아니라 가볍고 재밌는 소동극 한편으로 관객의 뭉친 어깨를 편안하게 풀어주며 신인 감독으로서의 연착륙에 성공한 모양새다.
이러한 면에서 감독 하정우의 영리함과 연출적 재능이 동시에 느껴진다. 결론적으로 영화를 통해 보여준 깨알 같은 웃음와 재미도 좋고 캐릭터들의 독특한 개성도 좋고 다 좋지만, 영화
[롤러코스터]의 가장 큰 미덕은 하감독의 차기작인
[허삼관 매혈기]를 더욱 기대하게 만들어주었다는 점, 이것이 가장 큰 성과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