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털루, 아니 미래를 알 수 없는 당시의 나폴레옹으로서는 '곧 치루어질 전투'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 곧 치루어질 전투에서 프랑스가 승리를 거둔다면, 보나파르트 정권은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워털루 전투의 승패를 뒤바꾼 가정은 여러 사람들이 즐겨 하는 상상 중에 하나이며, 대체적인 답은 부정적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라는 사나이의 적은 영국이나 네덜란드, 프로이센 뿐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스웨덴, 포르투갈, 그리고 러시아 등 유럽의 모든 국가들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폴레옹으로서는 희망을 가질만한 요소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베네룩스 3국은 '비교적' 친프랑스에 가까웠으므로, 웰링턴의 군대를 물리치고 이 지역을 장악한다면 신속하게 징병을 실시하여 전력을 어느정도 보강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불연합군이 지난날 수차례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보나파르트에게 이빨을 들이댈 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영국의 힘이었다.
프랑스의 영향력이 통하지 않는 섬국가 영국은 세계최강의 함대를 이용하여 바다를 장악, 세계 경제 체제를 구축했다. 대륙봉쇄령의 효과를 비교적 덜 받는 영국은 잉글랜드 은행, 국채 제도, 전국 시장 등 각종 재정 & 금융 혁신으로 세수를 확보했고, 이러한 막대한 돈을 바탕으로 대륙의 국가들을 끊임없이 지원하여 일으켜세웠다. 간단한 예로 오스트리아가 있다. 아우스터리츠 패전 이후 오스트리아는 굴욕을 감내하며 전력보강에 서둘렀는데, 1809년 당시 오스트리아의 젊은 명장 카를 대공 등은 자신의 조국이 아직 프랑스에 견줄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돈은 오스트리아의 주화파들을 움직였고, 그들이 목소리를 높인 탓에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전면대결에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륙봉쇄령의 피해를 덜 받는다고 쳐도, 전혀 피해가 없던 것은 아니다. 계속된 전쟁은 영국의 입장으로서도 부담스러웠다. 그런 상황에서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도중 최대 규모의 영국군을 격파한다면, 그것도 무패의 명장이자 영국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카드 웰링턴을 격파한다면 영국의 주식시장은 대폭락하게 될것이고, 이는 내각의 붕괴로 이어지면서 '좀 더 유화적인' 새로운 내각이 영국 정계에 들어서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영국과 또다른 아미앵 조약(주 : 프랑스와 영국이 프랑스 혁명 전쟁 - 나폴레옹 전쟁 기간 맺은 유일한 휴전 협정)을 맺는다면 거의 절반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야 프로이센은 두번다시 덤벼들 엄두조차 못낼 것이고, 오스트리아나 러시아 - 특히 러시아를 한번만 무너뜨릴 수 있다면, 그 이후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이는 승리한 다음에나 생각해볼 일이다. 요컨데 한번의 승리가 중요했다. 중요한것은 시간이다. 동맹군은 나폴레옹을 무찌르기 위해 5개 군을 동원하는 중이지만, 5월 말까지 프랑스를 공격할 수 있는 지역에 배치된 것은 웰렝턴과 블뤼허의 군대 뿐이었으며 그들조차 넒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다. 나폴레옹은 이 기회를 마다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프랑스로 끌어들여 방위전을 치룬다는 개념도 있겠지만, 이 돌아온 황제로서는 아직 내부의 정치적 분위기가 안심이 되지 않았을 터이다.
1815년 6월 12일 월요일 새벽 3시 30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은 가족과 고별 성찬을 든 뒤 지체 없이 파리를 떠났다. 마차에 올라 신속히 북으로 향한 그는 단 사흘 만에 12만 4천 명의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의 국경을 넘었다. 엘바로부터 돌아온 후 그가 머물렀던 시간은 겨우 3개월 뿐이었다. 단 한명으로 시작한 이 3개월간의 제국군은 그 수준이 어떠하였을 것인가?
물론 1815년의 대육군이 아우스터리츠나 프리틀란트의 그들이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이는 강력한 근위대의 숫자에서도 나타나는데, 한때 10만이 넘었던 근위대 병력은 워털루 전투에서는 2만 5,000여명에 불과했다. 계속해서 들어온 신병들은 경험을 쌓아 고참병이 되어갔지만 1814년의 단절로 인해 시스템이 깨진 상태였다. 그러나 마냥 워털루의 병력들을 폄하할 수도 없다. 나폴레옹 집권 후반기가 되어갈수록 프랑스 군대는 다국적군이 되어갔으며, 프랑스를 위해 헌신할 의무를 느끼지 못한 네덜란드나 벨기에 출신의 병사들은 전력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보기 힘들었다.
하지만 1815년의 병사들 대부분은 황제에 대한 헌신으로 가득찬 프랑스 국민들이었고, 의지도 없고 신뢰하기도 힘든 외국의 병력들보다 분명히 믿음직했다. 훈련 시간도 부족하고, 장비도 빈약했지만 전체적인 질은 나쁘지 않았다. 다만 루이 18세 휘하 국왕군에 복무했던 일부 병사들은 같은 '전우' 들로부터 경멸을 당했는데, 이들은 그루시가 지휘하는 우익의 일부에 배치되었다.
역시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군대보다는 황제 본인이었을 것이다. 황제의 정확한 병세에 대해서 당대인들을 알 수 없었고, 따라서 당대인들은 이전의 압도적인 모습에 비해 병든 닭같은 모습을 한 나폴레옹을 보고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현상까지도 관망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주변 사람들도 그의 변한 모습에 놀라워 했다. 마치 타고난 결단력과 통치력을 다 잃어버린 듯 했다. 그는 옛날처럼 질문을 했지만 단호하게 자르지는 못했고, 대답들 가운데 엉뚱한 부분을 상대가 얼이 빠질 만큼 신랄하게 지적하던 모습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한때는 충직한 수하로, 이제는 적대자가 된 과거의 원수 마르몽은 당시의 나폴레옹을 이렇게 평가했다.
"소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상륙한 것도 그렇고, 과감한 진격도 그렇듯이 부대를 만나면 직접 나서는 솜씨도 그렇고, 그의 생애를 통해 볼 수 있었던 '지고' 한 번뜩임과 그의 특색인 천재성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파리에 도착하자 나폴레옹은 같은 사람이 아니었다. 젊었을 때는 어떠한 곤란이라도 극복했겠지만 그 당시에는 곤란이 그 보다 강했다. 과거에는 그의 천성이었던 강인한 의지력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분명하게 말하건데, '사자는 이빨이 빠진다 해서 고양이가 되지는 않는다.' 사자는 어떠한 상태에서든 사자일 뿐이다. 비록 나폴레옹이 병들고, 지치고, 고통스러워하고, 이전만 못하다 하더라도 그는 '나폴레옹' 이었다. 건강이 허락하는한, 당대 유럽의 어느 지휘관도 군사적 능력에서 그에 비할 수 없었다. 건강의 영향이 비교적 적은 전략적 시각에서 이는 확고하게 작용했다.
웰링턴은 노년에 이를때까지 이를 부정했지만, 6월 15일 나폴레옹이 엄청나게 신속한 작전으로 샤를루아를 점령하고 재빨리 브뤼셀을 향해 전진하자 웰링턴은 깜짝 놀랐고 블뤼허도 크게 놀랐다. 나폴레옹이 어디에 있는지, 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영국군이 파악한 시점에 대해서는 불명확 하다. 그렇지만 웰링턴은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맹세컨대 나폴레옹은 나를 속였다! 나폴레옹은 24시간 동안 행군해서 내게 도달했다!" 이 말로 당시 영국군의 분위기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블뤼허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당시 연합군의 총공격 날짜는 7월 1일부터 중순 무렵이었기 때문에, 블뤼허는 아내에게 "우리는 아직도 1년을 더 여기에 있어야 할지 모른다." 는 태평한 내용의 편지를 보내었던 것이다. 전격(電擊)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나폴레옹의 공세는 그가 왜 나폴레옹이며, 전유럽이 그를 두려워하는지 여실히 느끼게 해주는 기동이었던 것이다. 실상을 좀 더 말하자면 나폴레옹은 6월 11일 네이를 불러들였으며, 그날 하원 의원들에게 "오늘 밤이라도 출진하기로 했다." 고 말한 즉시 움직인 것이었다. 프랑스의 정치가들조차 6월 11일에 이르러서 나폴레옹의 출격 소식을 알았으니 웰링턴이나 블뤼허가 짐작조차 못했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이렇게 적을 기만한 나폴레옹은, 믿음직스럽지 못한 수하에게 기만을 당했다. 왕당파 성향의 제4군 소속의 장군 루이 부르몽 백작이 참모 다섯명과 프로이센 1군단장 한스 폰 지텐 장군에게 직접 달려가 항복한 것이다. 이 당시의 시간은 15일의 오전 5시였기에 나폴레옹의 기습 작전은 적에게 완전히 노출될 위기에 처했다. 일개 병졸만도 못한 장교들의 충성심이 또다시 나폴레옹을 괴롭힌 것이다. 병사들은 "장교 놈들이 또 우리를 배신했다!" 며 화가 나서 어쩔 줄 몰라했고, 제4군 사령관이었던 제라르 장군은 폭발할것 같은 병사들은 간신히 달래 조금 늦게 목적 지점에 도착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블뤼허는 루이 부르몽이 가져온 나폴레옹의 작전 계획을 제대로 이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혹은 그가 이 정보를 웰링턴에게 제공이라도 했는지 조차 의문이다. 블뤼허가 이 정보를 나폴레옹의 술수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성격이 불 같아 화를 잘 내지만, 그만큼 대쪽같은 군인이었던 블뤼허는 "변변치 못한 놈은 언제나 변변치 못하다." 며 추잡한 배신 행위를 한 부르몽을 제대로 상대조차 하려고 들지 않았다.
따라서 정보의 누설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완전한 기습의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오전, 아니 차라리 새벽에 제공된 부르몽의 정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웰링턴의 영연합군과 프로이센의 4개 군단은 넒은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어느쪽을 먼저 요리할지 고민하던 나폴레옹의 앞에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네이가 보였다. 당시 프랑스 군의 1군단은 데를롱, 2군단은 레이유 장군이 지휘하고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이들의 경험 부족을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네이의 합류는 반가운 신호였다.
이제 나폴레옹은 과감하게 군대를 나눈다. 한번의 패배가 모든것을 결정지을 수 있는 상황에서, 충분하지 못한 병력을 나누는것은 누구나 두려워 할만 했지만 나폴레옹은 과감한 승부사였다. 좌익을 향해 진군하는것은 네이가 이끄는 1군단과 2군단, 그리고 제국근위대에서 파견된 기병대들이었다. 네이의 목표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교차로, '카트르 브라' 였다. 이 곳은 샤를루아 - 브뤼셀 도로와 니벨 - 나뮈르 도로가 교차하는 지점이었기 때문에 이곳을 점령하면 프랑스군은 마음대로 기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나폴레옹은 단호하게 말했다.
"귀관은 영국 - 네덜란드 연합군을 브뤼셀까지 쫒아버리게."
네이는 자신감 있게 대답했다. "염려 마십시오, 폐하. 두 시간 후에는 기필코 카트르 브라에 들어가겠습니다. 물론 적의 전군이 거기에 집결해 있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좌익의 네이가 영연합군을 상대한다면, 프로이센을 상대하는 우익은 그루시가 맡았다. 3군단과 기병군단으로 우익의 뒤에는 나폴레옹이 있었다. 그는 4군단과 제국근위대를 거느리며, 중앙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좌익이나 우익에 배치될 예정이었다.
나폴레옹의 번뜩이는 직감은 글로 남겨두기 힘들었고, 그는 부하들에게 친절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주는 스타일도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만은 확실한데, 이 당시 나폴레옹의 목표는 블뤼허와 웰링턴을 최대한 분리시키고 자신은 가운데를 차지한 뒤, 양 측의 간격을 넒여 각개격파 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프랑스군을 양군의 전장 사이에 밀어넣어 연합군의 연게를 차단하고, 나폴레옹 자신이 선택한 전장에 전력을 집중시켜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신속하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작전은 대단히 위험하게 보인다. 블뤼허와 웰링턴이 의도를 간파하고 한꺼번에 역습해 오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19세기 초반의 전투는 지금과 많이 달랐다. 무엇보다 전투 중의 통신이란 부분에서는 대단히 열악했는데, 당대의 전신 제도랑 매우 기본적이었으므로 실질적인 전령은 결국 말을 타고 전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령은 적에게 기습을 당하거나, 혹은 길을 잃어 아예 도착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도 빈번했다. 이렇게 고생 끝에 전령이 도착한다 해도, 이미 전장의 상황이 바뀌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따라서 전령을 신속히, 그리고 정확하게 파견하는것도 군대 참모의 중요한 일거리였다.
그러나 뒤에 살펴보게 되듯이, 이러한 단점은 연합군 뿐만 아니라 프랑스군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어찌되었건 그루시가 이끄는 프랑스군의 우익은 프로이센군의 치텐 군단의 전초부대에 압력을 가했고, 그들은 비교적 질서정연하게 북으로 후퇴했다.
여기서 이 전쟁의 신은 또다시 현란한 덫을 늘어놓는다. 이 시점에서 영연합군에 대한 프랑스군의 주 목적은 바로 네이가 공격하기로 되어있는 카트르 브라다. 또한 영연합군은 프랑스 군의 입장에서 북서쪽에 머물고 있고, 반대로 프로이센군은 동쪽에 머물고 있다. 카트르 브라는 양군의 한가운데라고 할만한 지점에 있다.
그런데 여기서 나폴레옹은 카트르 브라를 공격하는 네이의 군대 말고도, 따로 좌익의 병력을 내어 서쪽의 몽스를 타격한 것이다. 나폴레옹이 최종적으로 진군을 멈추려는 곳 - 즉 미래의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의 여신이 또다시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면 프랑스 군이 진입하게 될 곳은 바로 브뤼셀이다. 이 전쟁은 브뤼셀로 가려는 프랑스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연합군의 대결인데, 브뤼셀로 가는 길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네이가 진격한 샤를루아 - 브뤼셀 로를 따라 카트르 브라를 지나서 가는 길, 또 하나는 몽스를 지나 가는길이다.
지금 몽스를 공격하려는 프랑스군은 완전히 '미끼부대' 이며, 그들의 목적은 제대로 된 싸움이 아닌 기만이다. 웰링턴이 여기에 걸려든다면 그들은 '진짜' 목적인 카트르 브라를 내버려 둔채, '프로이센 군과의 거리가 더 멀어지는 서쪽의' 몽스를 지키기 위해 허겁지겁 이동할 것이며, 그 사이에 네이는 손쉽게 카트르 브라를 점령할 수 있을 터이다. 그 사이 나폴레옹은 블뤼허와 교전을 시작하고, 카트르 브라에 있는 네이가 재빨리 도우러 와 블뤼허의 뒤통수를 갈긴다면 프로이센 군은 완전히 전멸할 것이다. 그 후에 웰링턴을 요리하는것은 너무나 손쉬운 일이었다.
계획에 있어서는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제 문제는 속도와의 싸움이다. 네이는 카트르 브라를 손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인가? 웰링턴은 기만작전에 넘어갈 것인가? 넘어가지 않는다면, 제 시간 내에 진군하여 카트르 브라에 부대를 배치시킬 수 있을 것인가?
세계의 운명이 몇시간 내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