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은 한 사회가 조직되는 근본이요, 그 인민을 연락케 하고 동작케 하는 기관이다."
주시경, 1876년생으로 황해도 봉산 출신입니다. 작은 아버지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왔죠. 뭔가 달라져가는 세상이 보였나 봅니다. 서당에서 한문만 배우다가 신학문에 흥미를 느끼게 되죠. 배재학당에 들어가 만국지지(역사, 지리)를 배우니 이 해가 1894년입니다. 나중에는 아니라 수학, 항해술도 배웠죠. 엄청난 학구열입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건 바로 한글을 연구한 거겠죠. 그 이유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애들이 한문 배울 때 한글로 풀어서 말해줘야 알아듣는 거 보고 그랬다 하죠. 우리 게 있는데 저 어려운 한문을 써야 되나, 왜 한문은 배우면서 우리글은 배우지 않는가라는 생각에서 출발한 거였습니다.
1896년 독립신문이 창간하면서 교열을 맡게 됩니다. 이어 "국문동식회"를 만들죠. 맞춤법 통일을 위해 일찌감치 나선 거였습니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같이 망해서 -_-; 자료가 안 남아 있다 합니다. 언제 해산했는지도 설이 엇갈리구요.
그 역시 독립협회의 간부였기에 숨어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연구와 교육을 계속하죠. 1908년에는 '국어연구학회'를 만듭니다. 목표는 마찬가지였죠. 합병 후에는 더 이상 "국어"가 아니었기에 조선언문회로 이름을 바꿔야 했습니다만...
이 때 언어학을 배워야 어디서 배우겠습니까. 얻을 수 있는 거야 일본 쪽 약간, 일본을 통해 들어온 서양 쪽 약간이었죠. 그를 비롯한 이 때의 언어학자들은 정말 맨 땅에 헤딩해야 했습니다. 주시경은 이들 중 정말 최고의 성과와 노력을 보여주죠.
[국문문법](1905),
[대한국어문법](1906),
[국어문전음학](1908),
[말](1908?),
[국문연구](1909),
[고등국어문전](1909?),
[국어문법](1910),
[소리갈](1913?),
[말의 소리](1914)
거의 매년 책을 쓰는 수준이죠? -_-; 이 때 그가 정립한 이론들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졌고, 현대 한글의 토대가 됩니다.
그에게 우리말과 우리글은 곧 우리민족의 정체성, 얼 그 자체였습니다. 그걸 어떻게 가꾸느냐가 곧 우리 민족의 운명이었죠. 그걸 위해선 그저 연구만 하면 안 됐습니다. 최대한 많이 알리고 가르쳐야죠.
"눈물을 머금은 '
주보따리'는 언제나 동대문 연지동에서 서대문 정동으로, 정동에서 박동으로, 박동에서 동관으로 돌아다녔다. 스승은 교단에 서시매, 언제든지 용사가 전장에 다다른 것과 같은 태도로써 참되게, 정성스럽게, 뜨겁게, 두 눈을 부릅뜨고 학생을 응시하고, 거품을 날리면서 강설을 하셨다. 스승의 교수는 말 가운데 겨레의 혼이 들었고, 또 말 밖에도 나라의 생각이 넘치었다" - 최현배
주보따리, 유명하죠. 보따리에 책을 넣고 뛰어다니는 걸 보고 붙은 별명입니다.
상동교회에 국어강습소를 만들었고 중앙, 휘문, 배재, 경신, 보성, 오성 등의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강의합니다. 이 때 그의 수업을 들은 이들이 그의 뜻을 이어가죠. 북한의 김두봉부터 최현배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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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의 이론을 조금 소개해 보자면...
- 문자체계
훈민정음 창제 때 발음기호로서의 기능을 이야기한 적 있습니다. 우리말은 물론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 등도 표기하려 했었죠.
하지만 주시경은 달랐습니다. 언어는 구역, 민족에 따라 다르고 언어가 다르면 문자도 다르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 문자는 그 민족의 언어를 제대로 반영해야 한다는 거였습니다. 다시 말 하면 지금 조선에서 쓰지 않는 글자는 없애야 된다는 거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아래아가 있습니다. 아래아의 음가는 사라졌지만 글자만 남아있었죠. 주시경은 원래는 다른 발음이었을거라 가정하고 원래의 발음을 찾으려 했습니다. 이후 결론을 내리니 ㅣ와 ㅡ의 합음이라는 거였죠. 그리고 당시의 한국어에 이에 해당되는 말은 없다고 판단, 제외시킵니다.
+) 한편 이걸 주시경에게 들은 지석영은 아래아 대신에 =자를 만들었죠.
+) 아래아는 당시에도 참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현재에도 아래아를 없앤 것에 대한 비판을 간혹 볼 수 있구요. 주시경의 독단과 그걸 그대로 따른 제자들의 어쩌고 이런 식으로요 -_-a
두번째로 볼 건 이응과 옛이응 ㆁ입니다. 이응은 초종성에 다 쓰이지만 초성 때는 음가가 없고 종성 때만 음가를 가졌고, 옛이응은 초성에 쓰이는데 한국어 표기엔 안 쓰이고 한자음 표기에만 쓰였습니다. 헌데 훈민정음 창제 당시에는 이응이 초성에만 쓰이고 옛이응은 초종성에 다 쓰였죠 ㅡ.ㅡ;
머리 아픈 문제라서 그의 책마다 내용이 다릅니다. 마지막 결론은 옛이응을 쓰고 초성에 음가가 없을 경우는 자음을 쓰지 말자는 거였죠. 이는 그가 주장한 풀어쓰기 때 가능한 거였고 실제 모아쓰기로 썼을 경우 그도 끝까지 초성에 이응을 썼습니다.
그 외에 여린히읗 ㆆ은 한국어 표기에 쓰이지 않으니 삭제, 여린시옷 ㅿ은 처음엔 시옷과 이응의 합음이라 생각했다가 아무리 찾아도 그 음가를 찾기 어려우며 있을 필요도 없다고 판단해서 삭제, 기타 순경음들도 삭제합니다.
+) 쟤네들이 실제 어떤 발음이었을지는 지금도 뜨거운 감자죠
그느드르므브스으(옛이응)즈츠크트프흐
ㅏㅑㅓㅕㅗㅛㅜㅠㅢ
그가 재정립한 24자입니다. 여기서 옛이응만 이응으로 바뀌죠.
-음운
그의 음운론의 핵심은 '음의 분합'입니다. 자음이든 모음이든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음이 존재하고 이를 단음(홋소리), 이들이 모인 것을 합음(거듭소리)이라 한 겁니다.
[말의 소리]에서는 이 단음을 '고나'라고 이름짓습니다. 현대 음운론의 음소에 해당되죠. 서양 것보다 수십년 앞선 거라 하는데 제가 음운론 쪽은 공부 안 해 봐서 패스 = =;;
음운현상에 대해서는 현재 밝혀진 대부분의 현상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두음법칙(다이나믹 로동!->노동), 구개음화(밑이->미치), 유음탈락(울는->우는) 등 말이죠. 이를 습관음이라 불렀습니다. 다만 이는 필연성이 없다고 판단, 바로 잡아야 될 대상이라 생각했죠.
... 네 음운론 모르니까 여기까지.
- 형태론
시작은
[국문문법]의 7품사입니다. 명호(명사) 형용(형용사) 동작(동사) 간접(연결어미) 인접(조사) 조성(종결사) 경각(감탄사) 요렇게 나눴죠. 이게
[고본말]의 6품사,
[고등국어문전]의 9품사를 건너
[말의 소리]에서 6품사에 이릅니다.
몸씨 -> 임(명사), 엇(형용사), 움(동사)
토씨 -> 겻(조사), 잇(접속사), 긋(종결사)
+) 요렇게 그가 순우리말을 쓰려고 하자 그의 이름을 풀어 두루때글이라고 놀리기도 했다 합니다 ( - -)a
책 한권이 나올때마다 (거의 매년마다) 바뀌니 그에게 시간이 조금 더 있었으면 어떤 다른 이론이 나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얼마 없었죠.
- 표기법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크게 다가올 것은 바로 종성, 받침입니다.
창제 초반에는 다른 글자들도 받침으로 쓰였습니다. 용비어천가에도 프 츠 즈 등을 확인할 수 있죠.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종성에 쓰는 글자는 제한됐고, 1527년 훈몽자회에서는 종성에 쓰일 글자를 여덟 글자로 제한합니다. 발음이 그것밖에 안 나오니까요.
지석영부터 해서 근대 학자들도 그걸 따랐습니다. 헌데 주시경은 달랐죠. 그는 모든 자음을 받침으로 써야 된다고 주장했고, 끝까지 밀어붙입니다. 참 혁신적이었고, 다른 학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거였습니다.
그가 근거로 든 것은
[훈민정음] 서문에 있는 "종성은 초성의 글자를 다시 사용한다 終聲復用初聲"는 거였습니다. 용비어천가의 예도 있구요. 그러면서 훈몽자회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 주장합니다.
이런 방식은 그 글자의 원래 형태에 따라서 적는 방법이죠. "표의주의"입니다. 반면 소리나는대로(8->7글자만) 적는 것은 "표음주의"죠. 그의 사후에도 이 논쟁은 계속됐죠. 결과야 뭐 우리가 어떻게 쓰는지 생각해보면 쉽죠.
+) 간단히 없으니 / 업쓰니 이렇게 생각하면 되요. 그리고 맞다, 맡다, 맛다(?) 이런 게 다 맛다로 통일되는 거죠. '-'a
하지만 반전이 하나 있습니다. 이 때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이죠. 발견되는 것은 1940년, 여기서 크나큰 반전이 있었으니... 서문에는 초성=종성이래놓고 종성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8종성만 허용된다고 한 겁니다. (...);;; 해례가 나온 게 창제 3년 후였으니 좀 엉켰나 봅니다. -_-; 발견됐을 때는 이미 주시경 학파가 주도권을 잡은 상태였죠.
글쎄요... 주시경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생각을 바꿨을까요? 그가 수많은 연구 끝에 표음주의를 밀어붙인 건 사실이지만 저걸 몰랐던 것도 그리 작진 않을 거거든요. 생각해보면 머리 아플 떡밥이죠.
그 외에 특기할 부분은 가로 풀어쓰기입니다. 일단 띄어쓰기와 가로쓰기는 서양에서 영향을 받은 거였고, 잘 정착됐죠. 주시경은 여기에 풀어쓰기까지 시도합니다. 이유는 세 가지였죠. "쓰기와 보기와 박기에 가장 좋다"는 겁니다.
박는 건 인쇄하는 겁니다. 이건 좀 컸죠. 풀어쓰기로 하면 활자가 훨씬 덜 들었습니다. 모아쓰는 거랑은 비교가 안 됐죠. 하지만 쓰기와 보기에서는 딱히 우위가 없었죠. 조선시대부터 쭉 그렇게 써 와서 그렇겠습니다만... 인쇄할 때 좋다는 장점을 덮어버릴 정도로 조선은 모아쓰기에 익숙해져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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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부터 30대 후반까지 20년도 안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동안 그는 한국어의 음운과 문법을 정리했고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나라가 망한 상황에서 그 자신도 가난해서 밥도 제대로 못 먹던 상황에서 말이죠.
나라가 망한 지 겨우 4년 후, 1914년에 그는 급체로 사망합니다. 사인에 대해서는 말이 많습니다만 (겨우 얻은 찬밥을 급히 먹다가 그렇게 됐다고 합니다만) 어느 쪽이든 정말 말도 안 되는 죽음이었죠. 때문에 일제의 음모라는 주장도 나오는 모양입니다만 알 수 없는 일이죠. 그에게 시간이 더 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죠.
"한글"이라는 말을 그가 만들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이 그의 후계인 조선어학회에서 나온 걸 보면 최소한 주시경 학파 내에서 나온 건 확실하겠죠. 이렇게 훈민정음은 근대적인 문자인 한글이 됩니다. 우리가 쓰는 문자죠. 그리고 그 체계를 세운 주시경을 우리는 "한글의 아버지"라 부릅니다.
이후 우리말과 우리글을 연구하는 건 그의 제자들에게로 넘어갑니다. 그들만이 아니었죠. 주시경의 이론에 맞서는 이들 역시 많았습니다. 3.1 운동으로 일제의 정책이 바뀌면서 연구도 쉬워졌죠. 이른바 "문화 통치" 혹은 "민족분열 통치"기가 온 것입니다. 맞춤법에 대해 갑론을박이 계속됩니다. 혼돈의 카오스였죠. 그런 가운데서 우리말의 어휘를 담은 사전 편찬 사업도 계속되고 있었구요.
+) 총독부에서도 이들의 연구를 지원하거나 주장을 받아들여 표준을 만들거나 합니다. 때문에 크게 다뤄지진 않아도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뺄 수 없이 나오는 부분이기도 하죠.
다음 편은 그 혼란스러운 20~30년대로 가 보겠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한글을 만들었고 어떻게 싸웠는지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