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나이제나우 작전
- 프랑스-미군의 반격 지도-
독일군은 블뤄허 작전 이후 다시금 한차례 공세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이미 미하엘, 게오르게르 작전에서 승리는 물건너간 상황이 확정되었고 블뤄허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고 평해지지만
이미 4차례 독일군의 공세는 그냥 관성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미 전력 면에서 독일군은 블뤄허에서 최후의 동전 한닢까지 다 사용한 빈털털리었습니다. 이미 연합군은 독일군의 숫자를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독일군 최고 책임자 루덴도르프 참모차장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로 최후까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획된 공세가 그나이제나우. 블뤄허가 나폴레옹 전쟁 시기 지휘관이었다면 그와 콤비를 맞추어 참모장으로 날린
위인의 이름 딴 공세가 기획 중이었습니다.
이작전이 노리는 건 두가지 였습니다.
1. 미하엘 작전과 블뤄허 작전 덕에 얻은 프랑스 쪽을 향하는 두가지 구덩이 가운데 부분을 이 공세로 깎아서 좀더 방어지역을
줄인다.
2. 프랑스 군을 이번 공세로 좀더 끌어 들인다.
문제는 이미 한계치까지 진격한 상황에서 이미 확보한 돌출부를 지킬 충분한 병력이 없었던 독일군 상황에서
이 공세를 위해 다시 이 돌출부를 유지할 병력을 착출하여야 했다는 점입니다.
이 때문에 돌출부의 측면은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습니다.
아무튼 6월 9일 공세는 시작되어 후티어의 18군은 어느 정도 성과를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습니다.
더이상 공세를 지속시킬 수 있는 병력도 기력도 독일군에게 없었습니다.
[1918년 6월 10일 독일군은 드디어 한계에 달한 것입니다.]
(2) 메츠 전투
11일 샤를 '도살자' 망쟁이 이끄는 프랑스 10군이 독일 18군의 측면에 걷어 찹니다.
-도살자 망쟁 대장, 이 별명은 독일군이 붙인게 아니라 같은 편인 프랑스 장병들이 붙인 별명입니다. 공격적인 성향에
사지에 부하들이 마구 몰아 넣는다고 붙은 별명이죠. 인격적으로 성품면에서 절대 존경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지만
니벨 공세 시기 쫓겨났던 그는 다시 돌아와 1918년에 메츠와 2차 마른강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웁니다.-
망쟁은 4개 사단 150대의 전차를 투입하여 후티어는 더 이상 진격하기를 포기 합니다.
무자비한 망쟁 답게 전투는 아주 비효율 적이라서 메츠 전투에서 독일군은 3만명을 잃었고
프랑스군은 3만 5천을 잃습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앞으로 준비 중인 마른강에서 대 반격 작전을 준비 중일
충분한 시간을 벌어줌과 동시에 독일군은 더 이상 공세를 지속하지 못하게 만드는 전투로 평해 집니다.
한편 독일군의 공세 성애자 루덴도르프는 그나이제나우 작전이 3일만에 접게 됨에도 다시금 공세를
준비 중이었습니다. 블뤄허 작전 당시 공격 지점보다 다시 오른쪽에 있었던 랭스 오른쪽을 공격하는
작전이었는데 마르슈네츠-랭스 작전이라는 이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작전 보다 먼저 연합군의 반격이 우선 시작될 터였습니다.
(3) 서부전선 최고의 장군의 등장
독일군과 프랑스-미군이 5월 말에서 6월까지 혈투를 벌이고 있을 동안 영국군은 2달을 쉴 수 있었습니다.
특히 미하엘 작전 당시 붕괴될 뻔한 구 5군인 영국 4군의 전력을 크게 증가했습니다.
솜므에서 실책으로 해임 당했던 헨리 롤린스 장군이 지휘하는 이 부대는 아미엥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 시기
한가지 인사 이동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렐리아 군단의 지휘관인 버드우드 장군이 새로 재편성되는 영국 5군(미하엘 공세 당시 5군과 다르게 새로 편성되는
야전군) 지휘관으로 가고 육군 중장 존 모내쉬 경이 새로이 지휘관으로 임명 되게 됩니다.
-존 모내쉬, 호주 출신의 영연방 장군-
유대인이며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출신인 공돌이였던 그는 호주 민병대 생활을 거쳐 전쟁 동안 갈리폴리
아라스, 이프르를 거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사단장으로 활동중이었습니다.
그는 명석한 두뇌와 공학지식을 군사적으로 활용을 잘하고 있고 그 아이디어를 통해 자신의 부하들을 교육시키곤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롤린스는 정말 잘 활용했습니다.
존 모내쉬에 대한 평가는 그 자존심 높은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평가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다.
["I would name Sir John Monash as the best general on the western front in Europe".]
-나는 유럽 서부전선 최고의 장군으로 존 모내쉬 경을 언급하겠다.-
그는 재병 합동 작전과 팀워크 그리고 잘 짜인 화력 지원 계획을 활용하여 독일군을 상대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을 아미앵 근교 아멜의 소규모 공세에서 실현 시킬 생각이었습니다.
7월 4일을 공세일 잡고 모내쉬는 독일군을 향해 계속된 기만 작전을 행해 공세 지점을 파악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전차와 포의 이동은 다른 곳을 향한 포격이나 항공기 폭격으로 숨겼고 병력 움직임 역시 꾸준히 숨기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기존의 유선에 의존하던 통신에서 벗어나 비상시 사용할 수 있는 발광신호, 그리고 무선 기기들을 충분히
사용할 수 있게금 부하들을 교육시켰습니다.
-군용 발광신호에 사용되던 루카스 램프, 무선 통신의 미발달은 이런 방법까지 사용하게 만들었습니다.-
작전은 방식은 화력 집중의 소모전 방식이었는데 포와 전차, 항공기 폭격으로 상대방을 녹여버리는 전술이 사용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총 60대의 전차와 12대의 보급용 전차, 600문의 포가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세 한계점에서 물자 부족에 대비하여 낙하산을 통한 물자 보급까지 계획하고 실행하기까지 했습니다.
- 공격을 준비 중인 호주 병사들-
7월 4일 전투는 정말 경이적인 성과를 냅니다. 호주군과 미군 일부가 참여한 7500명의 병력은 독일군 5천6백명의
독일군을 겨우 90분만에 완전히 무력화 시켜 버립니다.
사상자 역시 호주군은 천명 내외. 반면 독일군은 1600명의 사상자에 2000명의 포로로 총 3600명을 잃었습니다.
이 소규모 작전은 영국군 전체에 사기를 크게 올리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전투를 통해 사실상
독일군의 춘계 대공세는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새로이 시작될 통칭 백일 대공세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독일의 춘계 대공세를 정리하자면 독일은 무려 최대 64킬로를 진격했고 전선 전부분에 상당히 연합군을
남쪽으로 몰아 냈습니다. 또한 영국군 40만, 프랑스군 43만의 손실을 내게 만들면서 스스로는 70만의 피해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독일의 국가적 능력은 완전히 바닥 났으며 앞으로 일어난 연합군의 대공세에 전혀 무방비 상태로
대응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임은 사실 일관성 없이 공세만 주장했던 루덴도르프 책임이 컸지만 독일인은
전후 상당부분을 그나 군부에 책임을 전가하기 보다는 엉뚱한 유대인이나 사회주의자들에게 책임을 넘깁니다.
아무튼 아멜에서 전투가 끝난지 일주일 후 1차 세계 대전은 마지막 터닝 포인트인 제 2차 마른강 전투가 프랑스-
미군의 반격에 의해서 일어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