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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9/26 14:01
헉슬리의 전망이 맞았다기 보단, 조지오웰식의 디스토피아가 사회적으로 더 경계되고 지양됨으로 인해 방향이 틀어진 것이라 봐야겠지요.
13/09/26 14:09
동의합니다.
사람들이 더 두려워하는 것은 조지오웰식 디스토피아지요. 최선은 좋은 정보가 있고, 나쁜 정보는 없는 것. 최악은 좋은 정보가 없고, 나쁜 정보는 있는 것. 여기서 좋은 정보가 없는걸 두려워한 것이 오웰이고, 나쁜 정보가 있는걸 두려워한 것이 헉슬리입니다. 그리고 나쁜 정보가 있는 경우는, 좋은 정보를 찾음으로써 저항 할 수 있지만, 좋은 정보가 없는 경우는, 어떻게 해도 저항할 수 없기에, 무섭지요. 그래서 표현의 자유가 있는것이고, 검열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덕에 오웰의 두려운 미래로부터 도망가고 있는거라 보입니다. (다만 도망가고 있을뿐, 뿌리치진 못하고 있지요.
13/09/26 14:04
조지오웰의 미래예측과 가장 닮은 나라는 북한 같고, 헉슬리의 전망은 마치 자본주의 국가들 같네요. 제일먼저 떠오른 나라가 우리나라나 미국이네요
13/09/26 14:23
근데 오웰은 1949년에 1984를 예측한 거라 이미 냉전 스타트 찍고 나서 쓴 거죠. 헉슬리는 1932년에 쓴 책이니... 좀 후덜덜한 듯.
13/09/26 14:27
아마 멋진 신세계 보면서 '이게 정말 디스토피아인가'라고 생각한 사람들 꽤 있을꺼에요
마찬가지로 메트릭스에서 파란 약을 먹어도 괜찮을거 같다는 생각한 사람들도 꽤 있을거고
13/09/26 15:16
그러고보니 저는 어렸을 때는 지금보다 더한 꼴통보수였기때문에 그런 장면들이 디스토피아가 아닐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요즘 읽으면 좀 다르게 보일지도 모르겠네요. 어헣
13/09/26 14:38
1984는 단순히 국가의 행정, 감시, 권력, 통제의 문제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시스템과 보편으로부터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간다거나 <외부>로 나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지적하죠. 작품의 메시지를 지나치게 단순화시켜 편향적인 비교를 붙인 듯 합니다.
13/09/26 15:06
그리고 사실 <시민적 자유>같은 것의 증대에는 필연적으로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능력이 수반되어야 하며 실제로 그래왔다는 점을 고려해봐야죠. 상비군의 전문화, 통신과 교통의 발달, 전국적 치안력의 확보 등으로 인해 국가가 언제든지 불온성을 띤 소요나 저항을 짓밟을 수 있게 되자, 역설적으로 국가는 덜 억압적이고 더 포용적으로 변했습니다. 현대의 정치철학에서는 당연시 하는/혹은 말하기 싫어하는 측면이지만요. 전근대 중국의 정부가 특별히 사악해서 제노사이드를 반복해서 일으킨 게 아니고, 현재의 선진 정부들이 특별히 윤리적이라서 개인의 자유를 폭넓게 허용해주는 게 아니란 거죠. 미국 경찰의 공권력 행사방식이 한국보다 강압적인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컨대 국가가 시민들을 억압하기에 용이해질수록 시민들의 자유가 확대된다는 불편한 진실이 우리네 삶의 기저에 긴장을 형성하죠. 나무 그늘이 커져야 잔챙이들이 노니기 좋다는 이야기고요.
이런 점을 고려하더라도 1984에서 제시된 메시지를 마냥 사회주의권이나 부카니스탄에 한정된 시대착오적인 예측이라고 볼 수 없다고 봅니다. 현대국가는 애저녁에 빅브라더가 되었고,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바로 그 덕분에 더 자유로워졌죠.
13/09/26 15:31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된 건 영국의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견해를 쭉 접하면서였어요. 로크나 스미스나 밀 같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국가가 이렇게 튼튼한데 뭔 걱정? 언제든지 통제할 수 있는 거 아니까 좀 풀어주슈.'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더군요. 그게 어린 마음에는 좀 거슬렸어요. 칼자루 쥔 쪽에게 약자가 자신의 가녀림을 무기로 삼아 앙탈부리는 느낌이 들었달까...근데 생각해 보면 그게 홉스나 벤담 같이 국가 권력의 통제에 의한 공리의 획득을 논하는 입장들과 일맥상통 하더군요. 그런 것들이 지금의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하니까 섬뜩 반 씁쓸 반이랄까...그래서 7-80년대에 있었던 롤즈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사회 철학적인 논쟁을 봐도 좀 기만적이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물론 심도 깊고 의미 있다는 거야 불문가지지만)
해서 따로 레퍼런스는 없네요.^^;
13/09/26 15:44
전 출발은 같지만 결론은 반대입니다.
통제는 피드백입니다. 피드백의 척도를 두가지, 민감함과 강도 두가지로 나눠봅시다. 민감함은 얼마나 자주 반응하느냐, 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민감함이 통신,교통,교육,관료제의 발달로 크게 좋아졌지요. 그래서 과거에는 지방에서 소요가 일어난다 해도 몇년에 한번 토벌군을 보내는 정도지만, 지금은 소요가 일어나는 즉시 방송으로 대국민 입장을 밝힐 수 있습니다. 강도는 얼마나 아프게 피드백하느냐, 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뭐만하면 '사형'이라는 극단적인 처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재는 사형은 거의 없어져가며, 벌금부터 징역까지, 비교적 덜 강력한 처벌과 강력한 처벌이 세분화되어 있지요. 과거에는 민감한 피드백이 안됬습니다. 그래서 충분한 피드백을 주기 위해 강도를 키웠지요. 그래서 사형은 물론이오, 구족멸살 같은 엄청나게 강력한 피드백이 있었습니다. 특히 중국 같이 영토가 넓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기 힘든 나라는 더더욱 강도를 키울 수 밖에 없었구요. 하지만 현재는 민감한 피드백이 됩니다. 기술의 발달로 사람의 수고 없이 기계가 알아서 벌금 딱지 부여해줍니다. 민감한 피드백이 되기에, 피드백의 강도를 떨어트릴 수 있겠지요. 즉 기술의 발달로 피드백이 민감해진 대신 강도가 떨어진 것일뿐입니다. 피드백의 강도는 분명 떨어졌지만, 오히려 피드백의 민감성은 올라갔지요. 이러한 관점에서의 극도로 진행된 사회가, 바로 영화 메트릭스와 같은 사회입니다. 아예 모든 사람들이 메트릭스라는 가상세계에 있고, 이를 통해 정신까지도 지배되기 때문에 구성원의 모든 것에 대한 피드백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피드백의 강도가 매우 매우 매우 부드러워, '가상세계에서의 쾌락'을 사람들에게 주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이 메트릭스는 디스토피아로 분류됩니다. 피드백이 너무너무 민감하여 인간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09/26 16:31
저는 같은 궤의 이야기라고 봅니다. 요는 시민사회에 대한 정부의 통제 역량의 증대로 인해 이전보다 효율적인 통제가 이루어지게 되었죠. 말씀대로 더 민감해진 거죠. 유연한 대처가 가능해진 거고. 굳이 차이를 말하자면 저는 현실 세계의 국가가 매트릭스와 같은 절대적 통제력을 갖고 있지는 않/못하며, 상대적 통제력을 갖고 있다는 데에 주목하고 싶습니다. 매트릭스처럼 개개인의 관념과 감각에 대한 완전 통제는 불가능하지만, 국가의 권위와 주권을 유지하는 데에는 전혀 하자가 없을 정도의 유연성 있는 통제가 가능하며, 따라서 상당한 영역을 <방관>하고 때로 <보장>해주기도 합니다. 이 점은 매트릭스 모델과 차이가 있겠죠. 매트릭스는 개개인에게 지나치게 관심이 많으니까요.
따라서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주어지는 시민적 자유란 꽤나 기만적이고 모순적인 것이 됩니다. 국가로부터의 자유를 외치지만, 기실 그것은 국가권력 강화에 대한 묵인을 동반할 수밖에 없고, 말하자면 국가에 대한 복종과 항복의 대가물을 받겠다는 것에 불과하죠. 화대를 받으려면 먼저 몸을 내어주어야하는 것처럼. 말씀을 빌리자면 우리는 매트릭스에 동의함으로써 디스토피아적 쾌락을 얻었죠.
13/09/26 18:19
아, 제가 잘못 읽었습니다.
저는 민감도... 그러니까 사람의 자유는 확대되었더라고 해도 더더욱 세밀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만큼, 현재의 세상이 마냥 행복하게 좋은 방향으로 발전하는 듯 , 즉 북한같이 안되었더라도 통제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며, 따라서 1984의 고민은 시대착오적이지 않다, 라고 생각해서 적은건데 "한정된 시대착오적인 예측이라고 볼 수 없다고 봅니다"를 거꾸로 '한정된 시대착오적 예측이라고 본다'고 잘못 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13/09/26 16:19
억압이라고 하는 것이 법집행을 말하는 것 같은데
억압이라는 단어를 쓰니 혼돈이 많이 오네요 중국의 천안문 사태와 한국 정부의 언론점유 어느 것이 더 억압적인 행동인지 정치학에서 용어를 원래 그렇게 쓰는 것인지 헷갈리는 군요
13/09/26 17:54
억압할 <능력>이 늘어날수록 자유가 확대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억압의 행사가 늘어남을 의미하진 않지요.
밀의 <자유론>에 나온 구절이 좋은 예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아직 미성숙한 사회에서는 이런 힘들(개별성)이 사회가 통제하기에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실제로 자발성과 개별성이 지나쳐 사회적 규율을 유지하는 데 애를 먹는 때도 있었다. 그런 경우에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강한 충동을 가진 사람들을 통제하고 규칙에 복종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큰 문제였다....그러나 이제는 사회가 개별성을 훨씬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13/09/26 16:25
민주주의에 기반한 근대 시민국가의 기본 전제는 시민 스스로가 시민 스스로를 통치하는 것입니다.
즉 '치자=피치자'라는 원리를 지향합니다. 물론 대의제를 거쳐야 하는 현실에서 이 원리가 '레토릭'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어떤 근대시민사회는 이것을 지향점으로 삼고 정부 및 정부의 사회통제기구를 설계하고 운용할 때 참고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한 국가에서 사회통제력의 발달과 집행에 시민 스스로의 의사와 참여가 반영되어서 민중에 대해 덜 억압적이고 덜 포용적으로 변했다고 봐야할 겁니다. 만약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국가이면서 기술만 근대적이라면, 지도층의 성향과 의지에 따라 여전히 1984 빰치는 통제국가를 건설할 수 있고 실제로도 존재했고 존재하지요. 즉 국가의 사회통제력 그 자체와 시민 자유는 정비례하는 관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미국에선 총기를 경찰 뿐만이 아니라 일반시민들도 소지하고 자신을 위해 쓸 수 있는데 이는 미국 건국사에 흐르는 시민 저항권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문화입니다. 즉, 미국은 경찰의 공권력 행사 방식이 강대하기 때문에 시민사회가 총을 소지하고 쏠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각 시민이 무장할 수 있기 때문에 공권력의 행사가 강도높은 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요컨데 국가가 시민자치의 원리에 따라 잘 조직되면 될수록 시민이 그 자신을 통제하기 용이해 지고 이에 따라서 시민의 자유가 제한적으로 확대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 평범한 원리가 실현되기 위해서 필요했던 건 잘 정돈된 질서에 따라 진보하는 국가의 행정력 및 기술이 아니라 대혼란의 와중에 떨어져나간 국왕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였습니다.
13/09/26 16:52
먼저 미국의 예시의 경우, 제 말이 그 말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간단히 말해 (한국에 비해) 높은 범죄율, 행정/치안 영역의 방대함, 합법적인 총기 소지로 인해 시민에 대한 경찰의, 시민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부분적인 측면에서 용이하지 않기에, 미국의 공권력이 더 강압적이라는 의미였습니다. 미국의 공권력이 더 강압적이기에 시민의 자유가 더 잘 보장된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국도 미국과 같은 환경일 경우 공권력이 훨씬 강압적인 성격을 띨 것이라는 의미였습니다. 즉 이 부분은 제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근대 중국 사회의 제노사이드를 언급한 것도 같은 흐름입니다.
저 역시 국가의 통제력이 시민적 자유와 기계적으로 정비례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분명 시민사회에 대해 지극히 억압적이면서도 자유의 영역에 대한 허용은 낮은 국가들이 존재하니까요. 그러나 선후관계를 따져보자면 국가의 통제력이 먼저이고, 시민적 자유는 후행한다고 봅니다. 후자가 선행하려 할 경우 어떠한 정부도 이를 허용하지 않고, 그렇다면 혁명적 상황을 가정해야하는데, 혁명은 시작이 반이 절대 아니니까요. 잘 확립된 중앙정부가 구성되지 않을 경우의 혁명들의 비참함이야 뭐 말할 나위가 없으니까. 굳이 말하자면 민주주의가 도입되고 인민자치가 시행되려면, 먼저 그러한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정도로 중앙 집권화 되어야 한다는, 어찌보면 무미건조하고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 무미건조함 속에 흔히 간과되고 있는 현실적인 씁쓸함 따위가 있다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당장 상비군이 증발한다면? 당장 경찰력이 마비된다면? CCTV가 죄다 박살난다면? 같은 질문들이 담고 있는 불편한 함의에 대해서 말이죠.
13/09/26 17:34
제가 오독한 부분이 있었군요.
한가지 궁금한 것이, 구밀복검님의 의견은 국가의 통제-치안력이 발달하면 그 행사에서의 강압성도 줄고 시민자유의 허용도 늘어난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한국보다 미국의 경찰이 강압적인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하셨는데 이 경우에 그렇다면 한국은 미국보다 시민의 자유를 더 허용하는가? 란 물음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생각되진 않는데 구밀복검님의 의견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저는 미국이 행정과 기술의 측면에서 남한보다 발달되어 있고, 비록 국토가 넓긴 하지만 하고자 한다면 그 넓은 구소련이 했던 것처럼 남한 이상의 통제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미국 건국사부터 이어져 온 미국 시민사회의 조직원리 및 무기소유와 저항권 때문에 새롭게 세우지 않는 한 그것이 불가능하고 봅니다. 즉 어떤 국가에서 보이는 시민자유에 대한 태도 및 허용범위는 그 통제기술과 통제력의 발달이 아니라 그 국가의 조직원리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자치를 한적이 없는 구체제는 당연히 시민자유에 대해서도 허용치 않을 겁니다. 왜냐면 그런 개념 자체가 없을 테니까요. 그러므로 구통치체제에서 현 시민자치로 이행하기 위해선 혁명은 일어나야 합니다. 이 혁명기 상황에서도 물론 중앙정부가 구성되어야 하겠습니다만 이미 시민자유의 개념에 입각한 시민자치로 중앙정부를 구성하므로 선후행을 논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필요한 것은 근래의 중동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혁명이겠지요. 그외에 민주주의와 인민자치 도입을 위한 중앙 집권화를 이야기 하셨는데 저는 반대로 도입과 그 통제를 위해선 분권화된 조직화가 필수라고 봅니다. 스미스가 주장한 시장경제 같은 것도 그 배경 중 하나이겠지요. 다만 우리는 남이 시켜서 민주국가하고 위에서 시켜서 자치한 쪽이라 이런 경험이 없었을 뿐이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를 여기서 논하기엔 너무 길어질 것 같습니다.
13/09/26 17:51
음 그것을 제 식대로 이야기하면 "행정력, 기술, 무력 등이 강대하기 때문에 시민 개인의 총기 소유*사용 허가를 해주는게 아닐 수는 있으나, 시민 개인의 총기 소유/사용 허가를 해주기 위해서는 잘 확립된 행정/치안/군사/기술적 측면들이 필요하고, 시민들이 그것을 묵인해야 한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아무래도 전근대 사회에서의 민주정부의 성립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일 수밖에 없단 거죠.
즉 국가권력의 확대는 일종의 필요조건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텐데, 제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이 필요조건이 시민들의 동의/혹은 백기투항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국가로부터 자유와 자치를 얻어내기 위해 국가의 리바이어던스러움에 승복하는...그런 이율배반적인 측면이 개인적으로는 좀 기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타 의문을 제기하신 부분을 이 답변으로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미 경찰에 대해 덧붙이자면, 바로 이때문에 <부분적인 측면에서 용이하지 않기에>란 표현을 썼습니다. 즉 해당 예시는 양국의 경찰들이 <공권력을 행사함에 있어서의 태도의 차이>가 어디에서 연원하는지를 지적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지, 양국의 시민적 자유를 계량화한다든가 비교하기 위해 언급한 것은 아닙니다.
13/09/26 18:40
사족같은 부분이라 생각해 지웠는데 답해주셨군요.
제 표현대로 고쳐서 (치안행정의 강압성이라기 보다는) "행정력, 기술, 무력 등이 강대하기 때문에 시민 개인의 총기 소유*사용 허가를 해주는게 아니"라는 말로 받아들여 달라고 했었지요. 미국의 발달된 행정력, 기술, 무력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시민 무장 및 저항의 자유를 깔고가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경찰이 강압적으로 제압해야 한다고요. 미대륙에서 시민 개인의 총기소유 허가는 미국정부가 수립되고 난 뒤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특별한 정부나 통제력이 없는 개척시대에 이미 총을 들고 각자 지키며 사는 상황에서 독립전쟁을 거치며 승인한 것에 가깝지 않을까 합니다. 즉 이러한 것들은 국가로부터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는 건국시기에 사회의 조직원리로 구성된 것이고 이에 대응해서 미국의 행정/치안 등의 요소들이 발전한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비록 시민자치라 해도 치자의 야망과 시민의 게으름으로 언제든 그것에서 멀어질 수 있는 이상향이라 생각하고 그래서 실제의 현실에선 정부와 시민은 긴장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자유를 누리는 시민사회 유지를 위한 행정력이란 필요조건의 경우에도 한쪽의 일방적 동의나 백기투항이라기 보다는 긴장관계의 결과물이라고 부르고 싶네요. 그렇지만 실상 근대민주주의시민국가가 탄생한 이후의 세대들은 실제로는 이미 주어진 국가에 승복해서 권리와 의무를 각인해야 하기 때문에 국가의 리바이던스러움을 떨치기 힘들지요. 특히나 국가VS개인에서 일개 개인이 그런 주어지고 또 묵인해야 하는 한계안의 자유에 대한 기만을 느끼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지 싶습니다.
13/09/26 15:23
현실은 누가 맞고 틀린게 아니라 둘다 맞는거 아닌가요?
생활에 일정 부분은 오웰식 통제가 또 일정 부분은 헉슬리식 통제가 따르잖아요?
13/09/26 15:31
음.. 죄송합니다. 제 맞아떨어진다는 표현이 오해를 불러왔네요.
헉슬리가 맞고 오웰이 틀린게 아니라 제가 느끼기엔 요즘 현실에서는 헉슬리식 통제가 따르는 영역의 비중이 더 큰 것 같다는 생각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13/09/26 16:44
이런 관점에 나름의 약점이 있는데 특히 헉슬리의 경우에는 더 큰 약점이 있습니다.
정보 과잉이 일반인에게도 악영향이지만 문제는 통제하는 입장에서도 이건 큰 문제입니다. 마치 이런 관점에서는 통제하는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거 같다는 뉘앙스를 보이지만 애초 통제하는 입장도 마찬가지로 인간으로 구성된 한계가 뻔한 집단이라서 많은 정보에는 취약하긴 마찬가지입니다. 정부 스스로도 너무 정보가 많아서 어떻게 해야 통제할 수 있을지 모르는 딜레마에 빠지니까요. 요즘 보면 정부가 뭘해야 하는지 모르는 공황 상태에 도달하게 된 거 같습니다. 관료제 붕괴 이야기 하는게 여기에서 비롯된 이야기구요. 사실 치자나 피치자 모두 정보 과잉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고 뭘해야 할지 모른다는 거는 요즘 정치 같습니다.
13/09/26 17:52
올바른 정치라면 그렇겠지만
임기응변, 짧은 시간의 안위만을 생각한다면 헉슬리의 관점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국정원 선거법위반을 무마하기 위해 NLL문서 공개, 이석기 내란음모죄를 터트린것은 효과를 보았으니까요. 그렇다고 항상 효과적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채총장 혼외아들 문제는 역효과라고 보니까요.
13/09/26 17:57
그래서 정치에서 장기적 관점은 완전히 사라 졌죠.
또한 치자 쪽에서 통제의 문제는 더 이상 인과적인 요소 보다는 단기에만 측정 가능한 확률의 문제로 변했습니다. 헉슬리 오웰 모두 통제의 테크롤러지가 가져올 무서움만 이야기 했지. 엄밀히 말해 저는 진정한 문제는 정보의 과다로 인한 통제의 불확실성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확률이 가져올 불확실성이 유권자의 선택에서 잘못된 선택을 불러올 테니 말이죠.
13/09/28 13:27
똑같은 정보과잉이라해도 정부와 개인은 상황이다릅니다. 현재 새성장동력으로 보고있는 정부의 빅데이터 공개만 보더라도 정보처리저장에 있어서의 역량차이가 명백합니다
물론 엄청난 양의 정보를 두고 개인v정부가 아니라 시민사회v정부의 구도가 된다면 얘기는 달라질것이나 시민의 연대보다는 해체가 쉽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댓글에서 말씀하신 정도는아니라 봅니다 헉슬리는 근간에 정부가 정보의 양이나 성격을 조절할수 잇다는 뉘앙스가 있는것으로 보이는데 그 부분에서 다소 오류가 있다고 보입니다 근데 관료제의 위기가 동아시아 관료중심의 발전국가 모델실패나 시장의 정부에 대한 전문성의 우위 그 이상의 다른개념인가요??
13/09/26 17:10
화성에서의 유토피아보다는 지구에서의 디스토피아가 낫죠. 다시 말해 어떠한 사회 제도보다는 그 사회 제도를 뒷받침 해주는 자원과 기술의 영향이 훨씬 크다고 생각합니다.
13/09/26 18:11
1. 두경우 다 어떤 최상위 계층이 무너질리 없는 거의 완벽한 통제를 하고 있는데 저는 그런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사회를 이끌어가는 최상위 계층의 실질적인 물갈이가 어떤 이유로든 일어났고 앞으로도 그럴거라 생각합니다.
2. 헉슬리의 세계에서 나오는 태어날때부터의 유전자 조절을 하거나 혹은 수면암시같은것을통해 완벽한 통제를 하고있는데 이런걸 막을수 있는것은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 같은 일종의 사회적 Axiom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선험적인것인지 어떤지는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현시점의 인류가 이런 방식의 이성적 논리 이전의 "Axiomatic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인류사회가 가진 Axiom이 단지 합리성과 적자생존같은 자연법칙에만 기반할 경우 헉슬리의 세계를 막을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3. 성관념의 경우 인간본성, 특히 이중적인 면과 깊게 결부되어있는데 그때문에 헉슬리의 세계처럼 성에 대하여 아주 자유롭게 되는 상황은 결코 도래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근본적으로 쾌락은 금기에 대한 환상과 깊게 결부되어있기도 하며 금기가 없어지면 환상이 없어져 쾌락도 흩어집니다. 조금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키자면 맛을 위해서 허기가 필요한것처럼 쾌락을 위해서는 금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실제로 원시사회의 다부다처제였을거라는 가정또한 인류학의 발달에 따라 허상이라고 결론나고 있는편이고, 성행위에대한 터부를 없앤 공동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시도또한 역사적으로 특히 20세기 말에도 여럿 있어 왔지만 결국은 지속가능하지 않아 전부 실패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현대는 여권의 신장과 피임기술의 발달로 인한 성관념에 관한 혼돈기라고 보고있는 편이며 장차 성관념에 관한 어떤 Axiom이 생겨나지 않을까 생각하며 그것이 완벽한 자유를 허락하는 형태의 것은 아닐거라 예상합니다. 4. 마지막으로 조금 다른 관점이긴한데, 범람하는 정보와 즉시적인 쾌락속에서도 자기를 지키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사이에 점점 큰 격차(라고 해야할지 잘모르겠지만)가 생기고 있고 실제로 자기통제력이 그사람의 계급을 결정할것으로 봅니다. 자기개발서적의 범람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13/09/26 19:32
3에 대해서는 좀 의견이 다릅니다. 식욕은 허기라는 제약을 통해 발생하는 것이지만(따라서 허기가 사라지만 식욕도 사라지는 게 맞습니다), 맛이라는 쾌락은 식욕과 연계된 욕구일 뿐 허기의 반대급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욕또한 자유로운 섹스와 터부시가 사라진다 하여 사라질 형태의 욕망은 아닙니다. 환상은 성욕을 구성하는 부품이지만, 전부는 아니거니와(그렇지 않다면 동물들은 성욕이 없겠죠), 자유로운 섹스가 이루어진다 해서 금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보기도 힘듭니다. 결국 말씀대로 흩어질 뿐이고, 그래서 지금의 그것과 달라질 뿐, 그것이 성립 불가할 리는 없습니다.
더불어 성적 터부를 없애는 공동체에 대한 실험은 극히 미미한 편이라, 그렇게 단언하실 수 있을만큼의 데이터가 나왔다고 보기 힘듭니다. 그리고 다처다부제는 그렇다 쳐도, 반대로 일처 다부제나 일부 다처제는 자리잡은 사회가 다수 있었음을 돌이켜보면(물론 주로 상류층에 한정되긴 했지만), 오히려 현재의 강제적 일부일처제 성윤리는 도리어 그 뿌리가 깊지 않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죠. 결국 이런 관념은 사회 구조에 발맞춰 기인하는 것이며, 성윤리또한 그와 연동되는 요소라고 보아야 할 겁니다. 따라서 사회 구조가 크게 변동할 때 성윤리또한 변할 개연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현 시대의 변화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13/09/27 10:23
그래서 허기와 비교하기전에 "극단적으로 단순화 시킨 비유"라는 수식어를 달았습니다. 말씀해주신 지적들 상당히 공감합니다.
식욕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허기라는 제약을 통해 발생하는 식욕은 아주 일부분입니다. 때문에 허기가 사라져도 식욕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식욕이든 성욕이든 1차적으로 육체적인 욕구에 발생하는것도 있지만 적어도 현대인에게는 그 이상으로 일종의 정신적 환상인 갈망(Craving)과 그것의 충족을 통해 욕구를 해소합니다. 그리고 갈망의 근본에는 결핍과 금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금기의 해방은 결국 다른 금기에 대한 갈망으로 전이될뿐이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근 현대들어 활발하게 일어나는 금기의 해체에는 어느선에서 멈추어지고, 저는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이며 인간의 본성에 가장 부합되며 지속가능한 공동체를 구성할수있는 금기가 성관념에 관한 Axiom으로 어떤 정해 지리라 예상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현대의 강제적 일부일처제 성윤리가 그대로 유지되리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음 다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최근들어서 인간의 본성이 일부일처제에 가장 부합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합니다. 10-20대처럼 자유로운 상상력과 왕성한 성욕이 범람하던 시기가 나이가 지나서 생긴 현상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성적터부를 없앤 공동체실험 또한 결코 쉬운 일이아니니 많이 테스트한건 아니라는데에는 동의합니다만 저는 적어도 집단혼 내지는 난교가 자유롭게 허용되는 사회( http://mirror.enha.kr/wiki/%EB%82%9C%ED%98%BC)가 사회변화의 요동속에 일시적으로 등장할수있을지언정 인간의 독점욕과 질투와 불화 그리고 또다른 금기에 대한 갈망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균열로 인해 그 형태가 지속 가능하지 않으리라 예상합니다.
13/09/27 10:29
지속가능한 형태로 수렴할 것이라는 논리는 분명히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지속가능한 공동체"란 것이, 사회 구조나 환경에 따라 가변적인 부분이란 것이 제 생각이고, 따라서 보다 다양한 가능성이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 제 생각인겁니다. 예컨대 소모적인 항시적 전쟁이 사회 유지에 필연적인 사회라면 여초현상이 발생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이 일부일처제 형태의 관념을 깨트릴 가능성이 있다던지.. 하는 식의 것이 그것입니다.
결국 금기란 것이 단순히 유전적인 본능에서 기인한 것 뿐 아니라, 사회의 유지를 위한 사회화된 후천적 학습도 포함된 것임을 감안한다면, 사회적 변화는 금기의 변화를 수반하고, 궁극적인 어떤 형태에 수렴하기보다는 계속 가변적으로 변화해 나가지 않겠느냐- 란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진화와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진화를 '발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진화는 단순한 '환경에 대한 적응'일 뿐이거든요. 그리고 수십억의 지구 역사가 증명하듯 환경은 변화합니다. 인간은 이미 '본능'이라고 설명하기 힘든 수준으로 변화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지 않을까요.
13/09/27 15:27
궁극적인 형태라는것이 정말 존재할런지 모르지만 제 사견으로는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지구의 생명도 유한한 마당에 진정한 의미의 "궁극"은 아니지요. 그렇기 때문에 이 논의에는 단서가 하나 있어야하는데 인간 자체는 지금 그대로인 상태라는 가정이 필요합니다. 진화를 통해 인류가 현재의 우리가 상상하는 인간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가 되었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어떤 상상의 이야기든 가능할겁니다. 또한 현재 이야기를 나누는 이리님과 저도 매우 짧은 생을 살기 때문에 너무 먼 이야기는 의미가 없죠. 인류가 바뀌어온 모습이 그저 아무런 방향성 없는 단지 환경의 변덕에 순응한 변화가 전부라고는 생각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인류가 유전등을 통해 선천적가지고 있는 성질과 역사를 통해 만들어온 사회적 특성들이 어떤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에 대해 아이디어만 있고 충분한 고찰을 하지는 못하여 자세히 말하기는 시간이 필요할것 같습니다만 한가지 예를들자면, 저는 흔히 말하는것처럼 "진화"자체가 "발전" 이 아닌 단순한 환경 적응이 전부라고 생각치 않습니다. 제가 거의 확신하는 진화의 방향성 중에 하나는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커지는 방향"으로 바뀐다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많은 동식물은 바뀐 기후를 적응하려면 수없이 오랜 기간 생물학 진화를 거치는 수밖에 없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생물학적 진화를 거치지 않고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이룩할수 있는 도구의 진화(?)를 통해 해결합니다. 저는 이렇게 된것은 큰그림에서 볼수있는 universal한 진화의 방향성이며 인간처럼 강력한 적응성을 가지는것은 일종의 진화적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진화라는 자연 현상무분별한 적응변화가 아니라 큰그림에서는 일시적 국소적 환경과 무관하게 적응력이 커지는 방향성을 가지며 그 이유는 진화과정중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환경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잘 대처하는 유전자조합들로 수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저런 여러가지 이유로 저는 인간은 어떤의미로 "최종생명체(?)"에 한결 가까워 졌다고 생각하며 여러가지 사회제도또한 아무런 방향성이 있는것이 아니라 변화와 요동을 통해 다가서는 어떤 수렴지점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역사의 방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13/09/27 15:38
일단 말씀하시는 내용이 진화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오해입니다. 인간을 포함해도, 생명체의 환경에 대한 적응력이 점차 커졌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간단한 예로, 가장 기초적인 생명체들이 인간보다 환경적응력이 더 떨어진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언급하시는 '도구를 사용한 적응'은 생명의 긴 사이클에서 보면 극히 미미한 것이거니와, 인간이란 종의 적응범위가 본래 그 정도였는데 여러 이유에서 확장이 안되던 부분들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는게 오히려 온당합니다. 그래서 환경변화를 통해 지속적으로 환경 적응력이 우수한 조합들이 수렴된다는 것도 허구에 가깝습니다. 백번 양보해 미시적으로는 그런 것이 존재한다 말할 수도 있습니다만, 거시적 변화가 발생하면 (대멸종류의 이벤트는 말할 것도 없고, 최하 빙하기 레벨의 변화만 발생해도) 거의 리셋 되죠.
단 이것은 생물학적 진화를 지칭하는 것이고, 인류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진보가 없으며 단지 변화했을 뿐이라고 제가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요소도 일부 있음을 설명하는 차원에서 언급된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어떤 수렴지점이란 것도, 우리가 상정하고 있는 현재의 환경을 가정할 때 유의미하다는 얘기인거지요.
13/09/27 16:42
먼저, 수렴지점이 현재의 환경을 가정했을때에만 유의미하다는 이야기에는 동의합니다. 그 환경의 범위에 대한 생각이 좀 다른듯 하기도 한데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듯합니다.
환경적응력이란 단어에 대한 생각은 시작부터 좀 다른듯 싶습니다. 그리고 이리님은 그것이 진화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런 오해가 아주 잘 알려져 있다는 뜻이고 레퍼런스도 당연히 많이 있을것으로 생각되니 부탁드립니다. 일단 저는 그 현상이 미시적이 아닌 "아주 거시적"으로 그리된다는 뜻으로 말한것이며, 또한 진화를 통해 환경적응력이 우수한 조합으로 진행된다는것은 지속적이고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뜻 또한 결코 아닙니다. 대멸종 이벤트가 지구레벨에서는 한순간일지라도 인간의 입장에서는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발생하는것입니다. 이를테면 만약 지구의 대멸종 이벤트가 발생한다고 했을때 그것이 정말 인간입장에서 한순간에 일어나는것이 아니라면, 다른 종류의 고등 생명체들보다 인간이 그 종을 유지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미 말씀드린대로 지성과 도구의 발달때문입니다. 또한 도구를 사용한 적응이 생명의 긴사이클에서 보면 극히 미미한 것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인간의경우는 생물학적 진화에 비해 결코 그 적응도가 미미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지구의 고등생물중에 진화를통해 우주로 갈수있는 경우를 예상하기는 극히 힘듭니다만 인간은 이미 도구를 통해 이루어냈습니다. 인간이란 종의 적응범위가 원래그정도였다고 생각하는게 온당하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한계를 미리 알수없기에 원래 그정도라는 건 무의미한 이야기입니다. 제 요점은 "도구에 의한 진화" 는 엄청나게 오랜시간과 노력이필요한 "생물학적 진화"보다 환경변화에 훨씬 효율적으로 대응할수 있는 체제라는 뜻입니다. PC로 비유하자면 프로그램 바꿀때마다 매번 CPU를 새로굽는것과 CPU를 software를 탑재할수 있는 형태로 설계하여 소프트웨어를 통해 적은 비용으로 효율적으로 변화시킬수 있는 상태에 해당합니다. 음.. 미생물의 경우는 좀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따로 생각해봐야할것 같습니다. 어떤 의미로는 미생물이, 그 어떤 고등생명체보다도 환경적응도가 높다고 볼 여지가 있다는데에는 동의합니다. 저는 미생물과 인류가 처음부터 진화의 방향성 자체가 달랐기에 비교하기 힘들고 각자의 방향에서 각각 어느 정도 적응도가 높은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하는 환경적응력이 높다는 뜻이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현재 인류를 리셋시킬수 있는 대멸종 이벤트는 어떤 원시인류나 지구의 다른 고등생명체보다 훨씬 특별하거나 강력한 형태의 것이어야만 하고, 미래에 훨씬 발전된 기술과 사회체제를 가지게 된 인류를 리셋시키려면 지금의 인류를 멸망시키는것보다 더 힘들어 질 것이라는뜻입니다. 기본적으로 제가 사용하는 진화라는 용어의 의미는 순수한 의미의 생물학적 진화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3/09/27 17:01
일단 생물학 레벨에서 '인간'을 살펴보면.. 인간이 '도구'를 사용하는 것에 특화된 측면이 있으나, 엄밀히 말해 대부분의 생물은 환경을 유기적으로 이용하고 변화시킵니다. 단순하게 적응만 하고 땡이지 않다는 것이죠. 그로 말미암아 기존 생명체가 돌파하지 못한 어떤 한계점을 돌파하기도 하는데, 물에서 육상으로 올라갔다던지, 대륙을 넘어간다던지 하는 식의 것이 대표적인 예가 되겠죠. 이 또한 당대의 기준에서는 엄청난 혁신이겠으나, 우리 기준에서 보면 그냥 그 생명체의 특징일 뿐입니다.
그리고 생각하시는 것과는 달리, 인간이 대멸종류의 변화에서 종을 유지할 확률은 오히려 저차원 생물보다 매우 낮습니다. 인간은 현 시대 기준으로 최상위 포식자에 해당하는 생명체고, 그를 바탕으로한 특징들- 예컨대 긴 보육기간과 많지 않은 개체수, 느린 번식속도 같은- 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생명체는 큰 변화에 매우 취약합니다. 인간이 쌓아올린 기술이 커버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요. 뭐 몇백년 몇천년 후에는 또 모르겠습니다만, 현재로써는 빙하기나 운석충돌 따위의 이벤트에선 오히려 바퀴벌레나 쥐 따위가 종을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는 더 유리합니다. 결국 진화는 목적성이나 발전성이란 개념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빙하기 이후 바퀴벌레나 쥐만 살아남는다 해서 "더 우수한 유전자/종이 살아남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거지요. 어쨌거나 생물학적으로만 보면 그렇구요. 이걸 사회 발전등에 적용하여 언급하신 내용은, 대개 사회진화론에 가까운 주장으로 보여집니다. 방계로 우생학등으로 이어졌죠. 이에 대한 논파는 이미 충분히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레퍼런스까지 찾아드리긴 좀 애매하군요.
13/09/27 19:33
위에서 제가 레퍼런스를 원하는부분은 진화론에대한 대표적인 오해라 하신말에 대한것 즉 환경적응력이 강하다고 볼수없다 라는 부분에 대한것입니다 이에대한 제생각은 순간적인 변화에 대한 저항은 약할지언정 적어도 수백년 이상단위에서 일어나는 급격한 변화에는 훨씬강하다는생각입니다 이정도 기간은 개체단위에서는 긴시간이지만 생물학적 진화의 관점에는 찰나에 가까운 짧은 시간이며 큰변화를 일으키기어려운 찰나의 시간이며 지구역사에서등장하는 대멸종사건이 대부분 순간적으로 일어난것이 아니라 인간의입장에서는 수십세대를 거친것이상의 긴시간대에 걸쳐서 일어났습니다
따라서 다시한번 그러한 대멸종사건이 발생한다면 원시인류는 종의 보존이 좀 힘들지도 모르지만 현인류는 어떤 고등생명체보다는 할만하며 미래의 인류는 좀더 수월할것이라는 뜻입니다. 제가 사회과학에는 지식이 얕아 그런 예전의 이론들과 얼마나 비슷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사회에 관해 이야기하는건 체제나 역사발전의 어떤 방향성이 있을것이다 정도의 이야기뿐이었는데 이런 생각자체가 이미 충분히 논파되었다니 좀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입니다.
13/09/26 18:31
개인적으로 공자가 말한 '중용'에 세상 모든 진리가 들어 있는거 같습니다.
사회적 공권력과 개인의 자유...이 상충하는 가치가 얼마나 균형을 이룰 수 있는지가 중요한거 같습니다.
13/09/26 18:42
제게 1984는 디스토피아적 소설이라기보다는 이중사고라는 개념으로 더 기억에 남습니다.
단지 생각하고 내밀히 간직할 따름인 개인의 사상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성역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식적인 이야기죠. 하지만 자기도 모르는 새 자동인형으로 개조되어 가는 인간상들을 제시하면서 당신의 생각은 완전히 자유로운가? 라는, 상식을 뒤트는 단 한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물음을 스스로에게 묻게 만들었습니다. 고교 시절 책장에 꽂혀 있던 만지면 바스라질 것 같은 책이 알고보니 추천도서였길래 신기해서 읽어 봤던 것 같습니다. 굉장히 충격적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13/09/26 18:52
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사적 언어가 불가능한 것처럼 개인의 사상은 그 사람이 살아가는 문화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죠. 그래서 저는 오히려 사회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인간상을 전제로 두는 것에 대해 부정적입니다.
13/09/26 19:14
물론 말씀하신 바와 다르게 생각했던 건 아니고, 부연하면 '개인의 사상은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성역'이라는 부분이 꼭 상식적인 내용은 아니지 않나 싶어서 적었습니다.
13/09/27 08:57
양심의 자유 등의 기본권의 측면에서 말한거죠. 가령 주체사상을 신봉한다쳐도 그게 마음속에 있고 외부로 표출되지 않으면 기본권이 제한되지 않는다는 의미로 얘기하신거고 사상의 형성의 측면에선 사회에서 유리될 순 없겠죠.
13/09/26 18:57
아 이거 공감합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어 위에 코멘트 달 때는 어휘를 떠올리질 못했는데, <이중사고>와 관련된 메시지야말로 1984의 핵심이죠. 개인이 체제 밖에서 사유한다는 것이 가능한지를 묻고 있으니까요. 부카니스탄만 세뇌된 사회가 아니라고 돌이켜 볼 수도 있고요. 이 점에서 본문 만화가 작품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있다고 보네요.
13/09/26 19:07
사실 뭐 멋진 신세계도 저렇게만 표현하면 원작의 핵심 핀트에서 좀 벗어난 거죠. 흐흐
원래 이런 단순/직관화된 비교는 그냥 재미로 읽는 걸로.크_크
13/09/26 19:23
뭐 멋진 신세계는 심모원려의 승자로 묘사되니까요. 크 똑같이 포장이 왜곡을 낳더라도 우승자보다는 준우승자의 억울함을 조명해줘야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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