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두 연설가
이탈리아의 대패와 멸망 위기, 하지만 이탈리아 인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외려 이탈리아 민족주의에 불을 붙이는 촉매가 되었습니다. 1400년 동안 한번도 통일국가를 형성한 적도 없고
지금도 이탈리아인이라는 동질성이 낮은 이탈리아 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일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습니다.
거의 30만의 병력을 며칠 만에 잃어버리고 겨우겨우 모아 두었던 중장비나 무기를 완전히 잃어 버린 지금 이탈리아군은
피아베 강에 의존하여 독일군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서 말이죠.
일단 국왕과 수상 오를란도는 결사 항전을 외쳤지만
- 당시 이탈리아 국왕 빅토르 엠마누엘 3세, 가장 큰 특징은 루저를 넘어선 난쟁이 급 키, 그리고 국왕으로써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모두 겪은 유럽 몇 안되는 군주-
- 당시 수상 빅토리오 오를란도, 법학 교수인데 마피아랑 연관된 참 특이한 인물-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 건 두 사람이 이었습니다.
귀족이자 비행기 조종사, 시인이자 정치가이자 자유주의자인 가브리엘레 다눈치오.
사회주의자인 대장장이 아들이자 학교 교사 출신인 사회주의자 저널리스트 베니토 무솔리니
이 공통점이라는 걸 찾아 볼 수 없는 두 사람의 공통점은 애국심이 심각할 정도로 강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특히 무솔리니는 32세에 군대에 들어가서 큰 부상을 입고 전역한 이후 계속해서 애국주의가 쩌는 선동을 계속하는
신문을 발간 중이었고
다눈치오 역시 군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 둘은 대중연설을 통해 젊은이들의 애국심을 자극하여 자원 입대시켰고 이 열기는 너무 강해서 단시간에 독일군에게 잃은
30만 대군을 능가하는 수의 인력을 보충시켜 버렸습니다.
여기에 영국 야전군 사령관 중 가장 우수한 장군이 허버트 플러머 장군이 이끄는 영프군 11개 사단까지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2) 작전 중지.
반면 독일은 더 이상 보급로를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성공을 거두었고 더 이상 보급로를 신장할 능력은 독일도
오스트리아도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밥을 굶기 시작했고 피로도는 점차 쌓여 진격은 이전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독일군 사령관 벨로브는 11월 12일 진격을 중단 시킵니다.
독일 입장에서는 이정도는 충분했습니다. 이탈리아군은 전치 1년 치 타격을 입었기에 전쟁이 결정날 1918년 봄까지
독일의 약한 지역인 오스트리아를 공격할 여력을 바닥나게 만들었으니 말이죠.
또한 동맹국 오스트리아를 지킨 것도 큰 성과였죠.
또한 손실도 적었습니다. 7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이탈리아군은 거의 30만을 잃었느니 말이죠.
참고로 정말 웃기는 점은 이탈리아군 30만 손실 중 사상은 겨우 4만... 독일군보다 적게 죽거나 다쳤습니다.
포로가 무려 26만이었을 뿐이죠.
또한 덤으로 영국군 2군 사령관 플러머 등 총 11개 사단을 서부 전선에서 이탈리아로 끌어 들였다는 것도
앞으로 있을 1918년 춘계 대공세에 독일군에게 큰 도움이 될 터 였습니다.
1917년은 독일군 입장에서 정말 영광스러운 한해 였습니다.
러시아는 사실상 붕괴되었고 이탈리아는 군대가 사실상 망했습니다. 또한 영프군의 맹공을 한해 동안 잘막았죠.
독일군 입장에서는 1918년 봄에 약간이라도 남은 승리를 위해 200개 사단으로 몰아쳐 영프미 3국 연합군을 이기기만
하는 입장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